"루돌프 슈타이너는 세계 최초로 정신계를 학문적으로 제시한 인물이다(발도르프 육아예술, 2019, 뒤표지 앞장)."
생각하건대 인류의 역사 또는 문화는 결국 보이지 않아서 볼 수없는 인간 정신의 표현이다. 종교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그 비추는 면, 방향이 약간 서로 다를 뿐이다. 결론은 모두 인간의 정신이 무엇인가인가에 초점이 마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정신에 대해서 궁금해 했고 알고 싶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를 통상은 어느 일부분만 예컨대 종교로 또는 예술 등등으로 제시하였다. 하지만 슈타이너는 학문적으로, 그것도 인간의 어느 부분이 아니라 전면을 입체적으로 표현하였다. 비유하면 동서남북 사방, 위에서, 아래에서 모든 면을 설명한 것이다. 요즘같이 인간의 정신이 사라진 지금 어디가서 이런 궁금증을 해소할 수가 있는지 생각해 보면 이해가 간다. 그 이유는 필자가 슈타이너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왔을 뿐인데, 어느새 정신의 거의 끝부분에 도달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데는 필자가 알기에는 거의 없다. 찾기도 어렵고 또 그곳의 법칙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그 법칙을 따르다가 어떤 문제점이 발생해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볼 수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책을 보고도 갈 수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축복받은 것이다. 더불어 이런 관점에서 봐도 슈타이너 박사의 책은 참으로 귀한 인류의 보물이다.
슈타이너 박사는 인지학을 창시, 인간의 정신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벌전시키는 방법까지도 서술하였다. 그 중에서도 발도르프 교육이 가장 많이 알려졌지만, 사실 슈타이너 박사가 제안한 것은 인간 정신의 발달 나아가 진화이다. 물론 발도르프 교육에서 말하듯이 인간 정신의 성장 단계에 따른 교육은 중요하다. 인간 정신이 성장 단계에서 올바르게 성장해야 인간 정신의 발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아는 모호해서 마치 잡을 수없는 신기루같다. 인간의 자아가 신기루 같은 것은 인간의 자아가 인간의 의식 상태에 따라 다른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은 세가지 상태로 존재한다. 깨어있는 의식, 꿈꾸는 의식, 잠자는 의식이다. 깨어있는 의식 상태에서 자아는 상속에 들어 있다. 꿈꾸는 의식 상태에서 자아는 감정 속에 자아는 마치 꿈을 꾸듯 들어있다. 잠자는 의식상태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인간이 알지 못하는 무의식 상태에 존재한다. 이러한 세 상태의 자아가 마치 수수께끼와 같기 때문에 인간이 이를 파악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이런 자아를 찾고자 노력한 것이 그동안의 인류 역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신기루 같은 자아가 정신이다.
이를 알기 위해서는 정신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의 정신과학적 요소를 파악해야 한다. 여담으로 돌아보면 슈타이너 박사가 필자의 정신을 안내했다는 생각이 든다. 먼저 필자는 슈타이너의 책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이해했고, 그리고 인간의 정신과학적 요소를 따라갔다. 그렇게 가다보니 어느 새 필자의 자아가 드러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필자의 자아가 고차자아로까지 나아간 것은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슈타이너의 책을 읽고 생각을 같이 한 것인데 참 신기하게도 자아의 본 모습까지 이해하게 된 것이다. 책을 읽고 그 생각을 따라가고, 내 생각을 들여다 보고 그런 과정의 반복이었다. 이것이 정신의 발달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정신과학적 요소는 슈타이너가 발견, 정립했다. 물론 옛날부터 비기로서 전해왔지만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슈타이너가 체계화한 정신과학적 요소를 -책을 통하여- 읽고 나에게 접목해서 발달시키면 된다. 그러면 나의 자아가 상을 벗고, 또 꿈을 깨기도, 나아가 무의식 상태에서도 만날 수가 있다. 원래 인간의 자아, 현재 생의 자아는 다음 생에 가서야 드러난다고 한다. 만약 현재 생에서 본다면, '어린 아이같은 모습의 자아를 자신의 팔로 안는 형상이다'고 하였다(슈타이너의 주장).
물론 이를 '깨달음'이라고 할 수있는데 다른 단체(종교 포함)와 다른 점은 필자의 자아가 드러나서 현실 삶에서 하는 일을 필자의 자아가 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그 단체에서 요구하는대로 자아가 활동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랜 시간 그렇게 했기 때문에 자아가 하는 것이다. 슈타이너의 방법은 현실에서 내가 하는 일을 자아가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단체의 방법 내지 이론이 아니다. 어떤 것(?)도 나의 자아가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한 차이이다. 누구라도 현실에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잘하고 싶을 것이니까 그렇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필자가 한 방법, 슈타이너의 방법을 안내한다. 먼저 슈타이너의 책을 여러 번 읽었다. 어떤 책은 20번도 더 읽은 듯하다. 그리고 정신과학적인 요소를 읽고 나 자신에 대입해 보는 것이다. 처음 읽을 때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이므로 터무니 없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계속 읽다보면 어느 새 정신과학적 요소가 조금씩 드러났다. 이 부분은 앞에서도 말한 바, 필자도 매우 신기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정신과학적인 요소는 물질 육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자아이다. 이 중에서 자아가 제일 중요하다. 자아를 파악해야 현실 삶에서 내가 하는 일을 자아가 하도록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현실 삶, 깨어있는 의식에서 상 속의 자아가 상을 벗는다고 할수도 있다. 이것이 깨달음이지만, 물론 그 수준은 매우 서로 다를 것이다. 요컨대 상을 벗은 자아가 현실에서 내가 하는 일을 한다. 이것은 우주에 연결되어있는 자아가 우주의 진동, 우주의 에너지를 받아서 그대로 표현한다는 의미이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상속의 자아가 상을 벗고 현실에서 내가 하는 일을 할까가 질문이 된다. 먼저 자신의 자아가 우주에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둘째, 자신의 에테르체를 감지해야 한다. 인간의 에테르체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진동, 우주 진동과 같은 진동을 한다. 조용한 곳에서 반가부좌를 하고, 눈을 감고, 가만히 내부에 집중을 하면 저절로 몸이 움직인다. 좌우로 또는 시계바늘 방향으로 그러면 그 움직임을 타면 된다. 그러면 자신의 자아가 우주에 연결되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수가 있지만,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또 연결되어 움직이지만 파악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 눈을 뜬 상태에서도 몸이 그 회로를 탈 수가 있다.
셋째, 에테르체를 감지하면 아스트랄체 감지로 넘어간다. 두 요소를 같이 감지하는 단계이다. 아스트랄체는 영혼의 바탕체이고 감정체이다. 감정을 통해서 영혼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감정을 느껴본다. 슬픈지, 기쁜지, 또는 우울한지 느낀 다음에 이 감정을 바꾸어 보는 것이다. 슬픈 감정에서 기쁜 감정으로 또는 분노하는 감정에서 평온한 감정으로 처음에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계속 하다보면 자신의 현재 감정을 파악하는 상태가 온다. 예를 들어 현재 나의 감정이 슬프면 '슬픈 감정이다'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면 '슬프면 영혼이 힘들므로 편안한 감정으로 바꾸어 줘야 영혼이 편안하겠다'라는 생각까지 이어진다. 그러면 편안한 감정으로 바꾸어 줘야 하는데 처음에는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서서히 편안한 감정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영혼을 감지한 것이다. 영혼의 감정, 영혼이 편안하다는 그 감정, 그것이 영혼이다. 그러면 영혼을 나의 이상을 위하여 활용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책을 보아야 하는데 책이 보기 싫다거나, 다른 신나는 일이 없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경우, '내가 진정 원하는 일이 무엇일까'란 생각을 하고 거기에 영혼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때 움직이는 존재가 '나', 자아이다. 영혼을 활용하는데 영혼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한다는 것은 자아가 개입하지 않고는 어렵기 때문이다. 드디어 자아가 등장하는 것이다. 상속이 아닌 상을 벗은 자아의 등장이다.
다른 방법이다. 아스트랄체의 감정이 감지되면 에테르체가 만든 상을 내가 볼 수가 있다. 감정을 통하여 상이 떠오르는 것이다. 우리가 노래를 부르면, 그 노래의 정서가 표현된다. 이것이 아스트랄체인데 노래의 정서가 표현되기 위해서는 에테르체가 상을 만들어야 하고, 그 상을 아스트랄체가 리듬 등을 통하여 정서로 표현해야 한다. 이때 표현된 정서가 상을 벗어난 자아가 표현한 정서이다. 자아가 상을 벗지 않으면 노래의 정서를 표현 하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요컨대 상을 벗은 정도가 음악의 정서를 표현하는 정도이다. 이 정서를 통해서 자아를 만날 수도 있지만, 슈타이너의 방법으로 하면, 조금 더 가까이 갈 수가 있다.
먼저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에테르체의 상을 보아야 한다. 옛날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면 어떤 기억, -이것이 상이다- 이 떠오를 것이다. 이것은 물질 육체를 통해서 본 기억이다. 이 기억에서 물질육체를 배제한 영혼 작업만을 보아야 한다. 물론 이때 아스트랄체 가운데 있어야 한다. 아스트랄체 감정 안에서 물질 육체를 배제하면, 이를 슈타이너는 '열망을 가지고 더 깊은 영혼의 작업으로 들어가야 한다'로 표현하였다. 그 방법이 아스트랄체의 감정을 의지로 전환하는 것이다. 의지를 일으켜서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자아가 드러난다. 의지는 인간의 무의식에서 이루어져 인간의 의식에는 드러나지 않는데, 이때 자아가 드러나지 않으면 의지가 행동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때 드러난 자아가 상속에 있지 않은 자아이다. 이를 '고차자아'라고도 할 수가 있다.
이 자아는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에 쌓여있으면서 우주에 연결되어 우주 에너지를 받으면서 존재한다. 자신의 고자차아가 우주에 연결되어 우주 진동을 에테르체가 하고, 아스트랄체는 에테르체의 진동을 정서로 번역하는 것이다. '이때 고차자아가 드러나므로 어떤 일도 잘할 수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음악, 악기는 리코더로, 노래는 가곡교실에 참여하면서 실제로 실험을 해 보았다. 물론 음악의 물질적인 부분, 악곡은 익혀야 하지만 고자차아가 함으로써 우주 정서를 표현할 수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한 것이다. 그런데 글은 -아직까지- 고차자아가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글의 물질적인 부분이 아직 부족한 것이다.
여기에서 필자가 항상 염두에 둔것은 영혼이 외부의식에 매몰되지 않게 하였고, 늘 내부의식에 집중한 것이다. 즉 영혼이 어떤 상태인가를 늘 체크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 영혼을 내가 원하는 방향에 놓이도록 영혼을 다독였다. 그 영혼을 따라서 가다보니 에테르체가 감지되었고, 아스트랄체에 이어서 고차자아도 감지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봉사활동으로 쓰레기, 재활용품을 줍는 단계에 이르러서 고차자아가 드러난 듯하다. 그래서 정신세계로 가는 길에서는 일종의 봉사활동이 반드시 필요하다 는 사실도 깨우치게 된 것이다. 여담으로 그래서 이런 단체에서 봉사를 강조하는 듯하다. 그렇게 나의 자아가 이끄는 대로 따라온 것이다.
이것이 -크게 보아- 인간 진화라는 생각이 든다. 이 자아가 현실 삶에서 어떤 일을 하든 드러나는 것이 앞으로의 인간 진화의 목표인 것이다. 이제는 그렇게 고차자아가 드러나면 어떻게 그 모습이 드러나는 지를 공부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