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東明聖王(재위 BC 37∼BC 19.9) : 解慕漱의 아들 朱蒙 (혹은 鄒牟)
※ 高朱蒙 (父:解慕漱, 母:유화, 재위 BC 37∼BC 19.9, 생몰 BC58 ∼ BC19.9) - 國號를 姓氏로 삼음
제2대 琉璃明王(재위 BC 19.9∼AD 18.10) : 朱蒙의 아들, 혹은 儒留
※ 解琉璃 (父:高朱蒙, 母:예씨, 재위 BC 19.9 ∼ AD 18.10, 생몰 BC39 ∼ BC18.10) - 송양의 비류국이 소노부가 됨.
【누락된 왕】 溫祚(父:우태, 母:소서노), 재위기간 : AD 18.10 ∼ AD28.2
※ 高溫祚(생몰 BC44.3∼BC28.2) - 주몽의 양자이자 사위, 國號를 姓氏로 삼음. 계루를 다스림(남당유고에 자료가 있음)
≪근거≫
① 古記에 온조를 주몽의 아들이라 주장하고, 백제는 우대(혹은 우태)의 아들이라 주장하므로 어느 한쪽이 기록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 이는 始祖의 祭祀와 연관되는 문제로 어느 한쪽도 양보하거나 물러설 수 없는 문제였다.
백제가 고구려를 조상의 나라로 섬겼다는 사실은 고구려와 백제의 사서의 공통된 기록이고, 다만 조상이 되었던 분이 누구이냐가 다를 뿐이다.
② 후한서의 기록에 의하여 고구려의 왕계가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뀌었다는 기록과, 태조왕의 성씨가 高씨인 것은 이분 때문에 비롯하였음
③ 신라의 건국(AD25, 삼국유사 건무3년) - 신라의 왕은 본디 백제인이다.
제3대 大武神王(재위 AD18 ∼ AD44) : 유리왕의 아들, 解朱留
※ 大武神王(재위 AD 28.2 ∼ AD 64.10, 생몰, AD4.2 ∼ AD64.10) : 解朱留(혹은 무휼), 生年의 기록은 삼국사기와 동일하다.
≪근거≫ 대무신왕의 주요기사 모음(고구려본기→고구려사초)
10세 동부여를 학반령에서 물리침 → 20세 학반령에서 크게 물리침(무휼의 공적은 보이지 않음)
11세 태자로 임명됨 → 이 기사는 동일함
15세 왕 즉위 → 25세 왕 즉위
29세 왕자 호동을 치정으로 죽임 → 57세
제4대 閔中王(재위 AD44 ∼ AD48) : 대무신왕의 弟, 혹은 막내, 解色朱
※ 閔中王(재위 AD 64.10 ∼ AD 68.5, 생몰 AD7.4∼AD68.5) : 유리왕의 막내아들
≪문제점≫ 민중왕을 막내라고 하였을 경우 再思의 출생이 문제가 됨.
제5대 慕本王(재위 AD48 ∼ AD53) 대무신왕의 아들, 解憂(혹은 解愛蔞)
※ 慕本王(재위 AD68.5 ∼ AD73.11) : 대무신왕의 아들
【누락된 왕】 신선명선제 (재위 AD 73.11 ∼ AD 112.5, 생몰 AD22추정 ∼ AD121.2) : 대무신왕의 別子(혹은 유리왕의 아들), 再思
※ 후한서에 121년 고구려왕 宮이 죽었다. 고구려사초에 121년8월 후한이 조문을 왔다고 하므로 이는 절대기년이다. 해동고기에는 고구려왕 宮은 즉위당시 7세였으며, 재위기간은 94년이라 하였다.
再思는 7세에 父王을 잃은 것으로 추정되며 대무신왕과 어머니와 私通한 바가 있어 쫓겨나지 않은 듯 하다.
백제와 고구려사이에 온조의 출생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이분의 親父가 누구이냐로 다투다가 발생한 문제였던 것 같다.
아마도 온조가 고구려왕의 임시로 재위하였을 때 後宮으로 있었던 여인과 태자인 무휼(당시 19세)이 私通했던 것 같은데, 당시 온조의 나이도 66세였다.
아마도 대무신왕이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여 키웠지만, 정체성의 혼란으로 왕위계승순위에서 밀렸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 문제는 신대왕이 신선명선제의 아들이냐 태조왕의 아들이냐와 같은 문제이나,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온조와 유리의 혈통이 다름으로 인한 제사밥(血食)의 논쟁이다.
조선시대를 살펴보면 당파논쟁의 주된 대상이 祭祀를 지낸 문제였다. 역시 古代에도 똑같은 논쟁이 있었으며, 논쟁을 피하기 위해 두 분 모두 삭제하지 않았나 판단되고, 재위기간들이 틀어져 버린 것입니다.
고구려의 사서라 볼 수 있는 고구려사초, 고구려사략, 추모경, 본기신편열전 모두 온조를 주몽의 아들이라 하고, 백제의 사서라 할 수 있는 백제왕기에만 온조를 우태의 아들이라 하였다. 본기신편열전에는 재사열전에서 유리왕의 아들이라 했다가, 한줄 긋고 대무신왕의 아들이라고 적어 두었다.
제6대 太祖王(재위 AD53 ∼ AD146.12, 생몰 AD47년 ∼AD165.3), 원문에는 大祖大王이라 쓰여 있고, 혹은 國祖王이라 한다. 휘 宮, 壽 119, 고추가 再思의 아들
※ 太祖王 (재위 AD112.5 ∼ AD146.12, 생몰 AD68년 ∼AD165.3) : 宮, 이 분도 특이한 점이 아버지가 즉위하였을 때 당시가 7세이며, 춘추 98세로 돌아가셨다. 삼국사기와 사망시기가 같다.
제7대 次大王(재위 AD146.12 ∼ AD165.10) 遂成, 태조왕의 同母弟
※ 次大王(재위 AD146.12 ∼ AD165.10), 遂成, 태조왕의 同母弟, 고구려본기와 재위기간 일치
제8대 新大王(재위 AD165.10 ∼ AD178.12) 伯固(혹은 伯句), 태조왕의 막내동생
※ 新大王(재위 AD165.10 ∼ AD178.12, 생몰년, AD121.1∼AD179.12) 伯固, 태조왕의 別子 혹은 태조왕의 막내동생, 태조왕이 아버지에게 婢妾을 올려 낳은 아들이다. 생물학적으로는 태조왕의 아들인 듯 하나, 신선명선제가 죽기 전에 백고를 씻음으로 하여 아들로 認知하였다. 누구의 아들이던 간에 논란은 되지 않는다.
첫댓글 신대왕 백고가 시조 동명성왕에 대한 제사를 지냈었습니다. 그 이전 백여년간 제사 기록이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누구의 아들인지 중요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대무신왕이 시조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시조묘를 세운 이상 제사도 지냈다고 보는 편이 좀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지금처럼 유전자 검사가 있던 시대도 아니고, 누구를 닮았느냐로 친자를 감별하던 시대입니다. 유전적으로 누구의 아들인가도 중요하지만 누구의 제사를 지냈느냐, 사회적으로 누구의 아들로 인정받으며 살았는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당유고를 기준으로 삼는 것은 여전하시군요..
그런데 남당유고이등 소설이든 삼국사기 내용으로는 전혀 오리무중인 부분을 상당히 메꾸어 주는군요..주필산 전투는 유공권의 소설에서 당태종의 패배를 인용하였고 안시성주 양만춘, 당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았다는 것도 역시 야사나 시집에서 나온내용으로도 역사성을 인정하고 있듯이 남당유고 역시 보다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물론 아직 검증도 안된 사료를 가지고 기존 정사의 기년을 마구 대치시키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