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a~22a 강독 내용, 토론 내용 모두 생략)
1.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저술한 플라톤은 ‘연설가’를 줄곧 나쁜 의미로 사용했다. 민중은 사탕을 좋아하는 어리석은 집단인데, 달콤한 말로 민중을 꼬드기는 자가 바로 연설가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민중은 어리석다는 대전제 속에는 자신은 어리석지 않고 현명하다는 플라톤의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독선이 플라톤의 전유물은 아니다. 모든 사람은 플라톤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틀리다고 생각(의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신뢰하는 현대 철학에서 이런 자기 중심적인 사고는 더 이상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2. 서양 철학은 말(言)에 대해 자유롭게 말(言)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예컨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모든 크레타인은 거짓말쟁이다, 라고 어느 크레타인이 말했다.”는 말을 토론의 대상으로 삼았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들(무지)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무지에 대해 말했다. 이 책에서도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으며 그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지만, 그렇더라도 사람들의 말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그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사고는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물론 잘못은 내가 했다. 하지만, 당신의 이런 말은 문제가 있다”는 말을 쉽게 주고받을 수 있는 그들의 문화와 관련이 있다. 즉, 서양에서는 피해자나 제3자도 가해자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수용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가해자는 발언권이 박탈된다. 설령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피해자 앞에서 가해자의 발언권은 용납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문화의 문제)
(추신) 앞으로 강독과 토론 내용은 생략하고, ggul-tip에 해당되는 내용의 일부만 선별해서 여기에 계속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22b~24b 강독 내용, 토론 내용 생략)
1. 소크라테스가 사람들의 반발을 유발하면서 소위 ‘진실’이라는 것을 구태여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욕을 먹어야만 그가 생각하는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이는 소크라테스가 “보편성(진실)은 있다. 보편성과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다”라는 입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보편성은 없다. 보편성이란 없(고 권력만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라는 소피스테스의 입장과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사실 대화법이 아니다. 일방적인 주장이다. 만일 보편성이란 게 있다면, 보편성을 부정하는 사람과의 대화는 필요 없다. 보편성이나 진실을 의심하는 민주주의도 필요가 없다. (진실, 보편성이 있다면) 진실을 회의하는 사람의 의견이나 반발심도 중요하지 않다. 보편성은 독선과 통한다.
2. 보편성이 없다면 사회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보편성을 불신하는 서구 사회는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 서구에서는 보편성이 아니라 계약에 의해 움직인다.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재판정에서 판사가 주관하는 3심제를 통해 옳고 그름을 판별한다. 패자가 승복하는 것은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해서가 아니다. 3심제라는 계약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보편성 대신 일반성(generality)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라캉은 이런 일반성을 ‘고정점’으로 정의한다.
(24b~28b 강독 내용, 토론 내용 생략)
1. ‘괴물’은 괴물을 자신의 바깥에 두고 자신 속 괴물은 부정하는 사람(존재)다. 맹자는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못하더라도, 부끄러워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할 줄 안다면 그 사람은 점점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더라도 부끄러움을 자신의 내부에 두고 그에 대해 ‘생각’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2. 호기심(생각) 때문에 무리를 벗어난 철새가 목숨을 잃게 되듯 집단주의 하에서는 구성원이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집단의 통념에 어긋나는 말이나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씌워지는 굴레는 ‘부도덕’이다. 니체에 의하면, 집단의 이익이 바로 ‘도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9세기말 무렵부터 집단과 다른 개인의 ‘생각’이 집단에게도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겼고, 오늘날에는 집단의 이익과 상충하는 ‘생각’들에 대해 비교적 관대해졌다. 그 원조는 ‘소크라테스’다.
(28b~31d 강독 내용, 토론 내용 생략)
1. 소크라테스 이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헬레니즘 시대를 이끌었는데, 헬레니즘 시대에는 철학과 정치가 분리되지 않았다. 사회 규모가 직접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을 만큼 그리 크지 않았던 때문이다. 하지만, 로마제국의 시대에 들어서는 하나의 제국과 서로 다른 수많은 식민지들이 소수의 정치가와 중앙으로부터 파견된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로 인해 철학은 정치에 관심을 둘 필요성이 크게 줄어들었다. 로마시대의 주요 철학자들은 에피쿠로스 학파, 스토아 학파, 신플라톤주의, 회의주의 중 하나에 속했는데 이들 집단은 모두 정치에 무관심하고 개인적 행복을 추구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마치 오늘날 신자유주의라는 강력한 사상(또는 자본의 논리)에 대항할 수 있는 현실적 무기가 없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포기하고 소확행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하다.
2. 소크라테스는 “~란 무엇이다.”라는 본질의 개념을 최초로 발명한 철학자다. 소크라테스 이후 사람들은 각각의 사람 내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본질에 맞는 이름을 붙여주고, 그 이름에 맞는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사회가 안정적인 질서를 잡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마치 크고 혈통 좋지만 큰 덩치 때문에 꽤 굼뜨고, 어떤 등에(=벌)가 있어서 일깨워 줄 필요가 있는 말(馬)과도 같은 국가에 신(神)이 붙여놓은” 사람이고, 따라서 자신이 목숨을 잃더라도 국가와 진실을 위해 할 말은 거침없이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신의 뜻(또는, 진실)을 자신만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문제다. 소크라테스가 주장한 “신의 뜻”은 실제 신의 뜻이 아니라 “소크라테스 자신의 뜻”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진실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 진실은 그들 자신의 생각일 뿐이다. 인간이 신의 뜻을 알 수 없고, 모두가 동의하는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소크라테스가 발명한 ‘본질’은 위험할 수 있다.
(31e~42a 강독 내용, 토론 내용 생략)
1. 소크라테스는 본인이 진실을 말했는가, 그것이 제대로 전달되었는가는 중요시한 반면, 상대방이 설득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설득은 정치학자, 수사학자의 영역으로 보았다. 이런 사고는 플라톤 식의 교육관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플라톤은, 진리가 있고 교사가 진리에 대해 말했을 때 학생이 그것을 못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교사가 아닌 학생의 책임이라는 권위주의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2.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인간은 알고는 악을 행할 수 없는 ‘자기배려’의 존재다. 자기배려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현명한 사람이 되기 위해 자신을 돌보는 일이다. 사람들이 악을 행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자기배려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지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서 물러서지 않은 이유 역시 소크라테스 자신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말대로 인간이 과연 ‘자기배려’의 존재인지는 토론해 볼 필요가 있다.
3. 소크라테스는 “검토 없는 삶은 가치가 없는 삶”이라고 주장했다. 소크라테스가 도덕주의자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말이다. 하지만, 그의 기준은 지나치게 엄격한 측면이 있다. 조선시대 양반이 노비의 인권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해서, 오늘날 동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육식을 좋아한다고 해서, 즉 노비의 인권이나 육식에 대해 검토하지 않는 삶을 산다고 해서 그 삶은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말은 오늘날 “검토하지 않는 삶은 도덕적인 가치와 무관한 삶”으로 순화시켜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나아가 (도덕이 훌륭한 덕목이기는 하지만) 도덕적 가치가 ‘자기배려’에 꼭 필요한 덕목인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많은 경우 도덕은 집단의 이익, 또는 강자의 이익인 경우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