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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십자가 와그너와 화잇의 신학적 차이.docx
(Journal of the Adventist Theological Society (14:2), Autumn 2003, pp. 131-140)에 게재된 소논문)
그리스도의 십자가: 조셉 H. 와그너(Joseph H. Waggoner)와 엘렌 화잇(Ellen G. White) 간의 신학적 차이
데니스 포틴(Denis Fortin)
이미선 박두일 옮김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내에서 엘렌 G. 화잇의 사역이 시작된 이래로, 사람들은 그녀의 저술과 교리적 권위에 관해 다양한 의견들을 피력해 왔다. 재림 교회의 공식적 입장은 엘렌 화잇의 저술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경건하게 살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원천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믿음과 실천의 무오한 권위와 표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긴 하지만, 엘렌 화잇의 저술도 역시 교리적 진리에 대한 제2의 권위 있는 원천으로 여겨졌으며, 교회를 안내하고 가르치고 바른 길로 인도해 왔다.[1] 대부분의 재림 교인들은 엘렌 화잇의 저술을 매일의 삶에서 그들을 영적으로 인도하고 영감을 주는 원천으로 간주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반면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엘렌 화잇의 교리적 권위를 일축해 왔다. 그러한 이유 중 하나는 엘렌 화잇이 그녀의 친구들과 초기 재림교회의 선도적인 지도자들에게 강력하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엘렌 화잇의 저술들은 단순히 (또는 종종) 주변 다른 저술가들의 생각들을 반영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엘렌 화잇은 중요한 신학 사상가로 고려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으며 엘렌 화잇은 그녀의 예언적 사역에 있어서 성령에 의해 인도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사고한 자유롭고 독립적인 신학 사상가였다고 믿어지는 이유들이 있다. 엘렌 화잇은 교리상의 어려움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그녀가 가장 믿었던 친구들 중 일부 친구들과 일치하지 않았던 신학적 문제에 대해 논문 및 기고문들을 저술하기 위해 특별한 사상 체계(예를 들어, 대쟁투 주제 및 잃어버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내에서 교리를 분명하게 표현하고 정의할 수 있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본 논문에서는 1860년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엘렌 화잇의 신학적 이해를 연구하고, 이를 동일한 주제에 대한 조셉 H. 와그너의 저술과 비교해 볼 것이다. 이 비교 연구는 속죄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엘렌 화잇의 초기 관점, 즉 초기 재림교회 신학에 중재적 효과를 주었던 관점을 밝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초기 재림교회 내에서의 신학적 다양성도 보여 줄 것이라 믿는다.
속죄에 대한 조셉 H. 와그너(Joseph H. Waggoner)의 이해
침례교인으로 교육 받은 조셉 H. 와그너(1820-1889)는 집중적인 개인 연구 기간을 가진 이후 1852년에 안식일 준수 재림 신도가 되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재림교회 교리를 설교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왕성한 사역과 삶 동안 재림 교회 정기 간행물에 기고하거나 여러 교리책을 저술하였다. 왕성하면서도 영향력이 있는 저술 덕분에 그는 재림교회 내에서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제리 데이비스(Jerry Davis)는 “와그너의 관점은 수년 동안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고 마침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주장을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 교회의 공식 입장처럼 보게 되었다”고 결론을 내렸다.[2]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할 것은 1863년에서 1864년에 걸쳐 리뷰 앤 헤럴드(Review and Herald)지에 게재된 속죄 주제에 관한 일련의 논문이다. “속죄: 자연과 계시를 통한 구제 체계 연구” (The Atonement: An Examination of the Remedial System in the Light of Nature and Revelation)는 1863년 6월 2일에서 1864년 9월13일까지 재림교회 공식 출판물에 17회 게재되었다. 이 시리즈는 이후 1868년에 동일한 제목의 서책으로 재출판 되었으며 1872년에 재판되었다(168쪽). 이 시리즈의 제4판은 1876년에 시조(Signs of the Times)에 게재 되었다. 1884년에 와그너는 이 시리즈의 원본을 368쪽 책으로 증판 하였다.[3]
와그너는 서문에서 “죄를 씻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효력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속죄는 복음의 가장 위대한 중심 교리가 된다"고 단언했다.[4] 그러나 속죄에 대한 그의 기본적인 관점은 속죄가 희생제사 이상이고 인류의 구원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상에 집중되어 있다. 속죄란 “위반한 율법에 대하여 제물을 바침으로써 공의를 옹호하는 것이다."[5] 와그너는 대속적이고 대리적인 그리스도의 죽음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한 것에 대한 죄값이라고 주장하면서도 희생제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속죄와 다르기 때문에 “대속적인 속죄”가 아니라고 조심스럽게 지적했다.[6]
속죄에 대한 와그너의 성경적 그리고 신학적 이해는 레위기서에서 제시된 바와 같이, 구약의 희생 의식 체계에 강력하게 토대로 하고 그것에 제한된다. 와그너는 레위기 4:22-26과 같은 성경본문을 엄격하게 읽은 후에, 성소 내에서 있었던 제사장의 봉사 끝에 속죄가 일어났으므로 성서적 속죄의 개념은 제사장의 성소 봉사를 포함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와그너는 구약을 분석한 후에 완전한 속죄에 이르는 세 단계가 있다고 보았다. 그 세 단계는 다음과 같다. (1) 죄인이 제물에 안수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2) 죄인이 제물을 죽인다. (3) 그런 다음 제사장이 성소에서 속죄를 행한다. 와그너는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과 하나님께 속죄하는 것은 완전하게 구별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주장했다.[7]
와그너는 이 관점을 그리스도의 죽음에 적용하며, 예수께서 죄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은 오직 속죄를 위한 예비적 희생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구약에서 속죄는 성소에서 제사장에 의해서만 수행된 활동이었기 때문에 갈보리는 그 자체로 속죄가 될 수 없다 본 것이다. 또한 와그너는 예수께서는 이 땅에 계시는 동안 아론의 후손이 아니라 다윗의 후손이었고, 따라서 예수께서는 분명히 선지자와 왕의 직분을 이행하실 수는 있었지만 제사장의 직분을 이행하실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히브리서 7장에 따라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제사장의 직분을 겸하신 것은 오로지 하늘로 승천하신 이후였다 하였다. 속죄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희생의 공로를 회개하는 죄인의 삶에 적용함으로써 자신이 흘린 보혈의 공로에 의해 지금 현재 하늘에서 하시고 계신 일이라 보았다.[8]
와그너의 논리는 인상적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십자가에서) 속죄가 완성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승천 후에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셨을 때 중보 사역이 완료되었다면... 지금 현재 그리스도는 중보자일 수 없으며 성경이 하늘에서 아버지의 보좌에 앉으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이해할 수 없거나 잘못된 것이다."[9] 그러나 아마도 와그너가 성경적 속죄에 대한 자신의 연구에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구약에서 희생제물이 바쳐진 사례와 성소에서 제사장의 피 사역 없이 수행된 속죄였다(예: 레위기 6:8-13; 7:1-6). 이는 확실히 희생제물은 성소에서 어떤 사역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자체적로 속죄할 수 있는 공로를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와그너가 속죄를 성소 내 제사장의 사역에 제한하는 것의 이면에 있는 신학적 이유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와그너와 그 밖의 유라이아 스미스(Uriah Smith) 등과 같은 동시대의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 신학자들은 갈보리에서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완료된 속죄를 혼돈하게 되면 율법폐기주의, 부도덕, 보편주의에 도달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들은 속죄가 십자가에서 완성되었다면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으며 사람들의 죄는 속죄를 받았으므로 결과적으로 모두가 구원받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율법 경시 및 부도덕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딜레마를 피하기 위해 유라이아 스미스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사람을 위해 속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신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서만 속죄하였다"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다른 어떤 신학자들은 부득이 그의 이 신학적 관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정론도 마찬가지로 율법폐기주의와 부도덕을 유발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와그너와 스미스는 속죄는 성소에서 제사장에 의해서 이루어지므로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후 에야만 수행될 수 있으며 그리스도 희생의 공로는 회개한 죄인들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을 강조했다.[10]
속죄에 대한 엘렌 G. 화잇의 이해
와그너가 속죄에 대한 일련의 논문 연작을 발표할 때쯤인 1869년에 엘렌 화잇(1827-1915)은 "그리스도의 고난”(The Sufferings of Christ)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를 발표했으며 같은 해에 『교회증언』(Testimonies for the Church) 제17권에 두 번째로 이 글이 게재되었다.[11](교회증언 2권 p.200에 이 내용이 실렸다.) 이 글은 몇 번 더 재발행 되었는데 1879년에 『시조』 (Signs of the Times)에 기고문 시리즈로 게재되었고 1885-1886년에는 『현대진리』 (Present Truth)에, 그리고 1892년에는 바이블 에코(Bible Echo_에 게재되었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이 소책자와 엘렌 화잇의 다른 저작물 중 일부분을 살펴보자면 속죄에 대한 엘렌 화잇의 관점은 와그너의 관점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러한 차이는 단순히 의미론 그 이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의 고난”(The Sufferings of Christ)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전 생애 동안 경험하신 고난, 사역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관련된 사건을 설명한다. 이 문맥에서 속죄 용어를 세 번 사용했다.[12] 그러나 와그너와는 달리, 엘렌 화잇은 이 소책자에서 그리스도의 하늘 제사장 직분을 결코 언급하지 않았다. 성육신으로부터 겟세마네와 갈보리까지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만을 논했다. 와그너가 속죄를 그리스도의 하늘 사역에 제한한 것과 다르게 엘렌 화잇은 예수의 생애, 고난 및 죽음과 관련하여서만 속죄를 언급했다. 엘렌 화잇은 첫 번째 단락에서 속죄를 처음으로 언급했는데, 이러한 첫 번째 언급에서는 와그너에 의해 주장된 것보다 이 주제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강조되었다. “구원의 가치를 온전히 깨닫기 위해서는 그것의 대가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제한된 생각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속죄의(교회증언 2권 한글판에서는 속죄대신 중보로 번역하였다. 역자주) 위대한 사업을 과소평가한다. 인간의 구원이라는 영광스런 계획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다. 이 거룩한 계획 속에 타락한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놀랍게 나타나 있다."[13]
엘렌 화잇은 이 소책자의 말미에서 속죄를 두 번 더 언급했는데,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죄인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을 경시하게 만드는 사람들의 제한된 속죄에 대한 이해를 특별히 다룬다. 엘렌 화잇이 이 소책자를 쓸 때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잘못된 관점 또는 불완전한 관점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수정하기 위해서 얼마만큼 시도했는지 궁금증을 가질 수 있다.
수백 년 동안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과 의미를 설명하려고 시도해 왔다. 소치니파 교도의 주관적인 예시 모델(examplarist model)로부터 안셀무스주의자의 객관적인 만족설에 이르기까지 여러 이론들이 제안되었으며 이러한 이론들의 다양한 측면을 뒷받침하거나 반대하는 다수의 주장들이 논의되어 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복음주의적 학자들은 레온 모리스(Leon Morris)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죽음을 당하신 이유는 다면적이며 단 하나의 이론이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계획하신 것의 총체성을 포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14]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엘렌 화잇이 17쪽의 이 소책자 안에 속죄에 대한 모든 주요 이론을 포괄하였으며 갈보리의 이유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뒷받침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엘렌 화잇이 설명한 이들 관점 중 많은 부분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에 대한 와그너의 이해 범위 내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엘렌 화잇 신학의 가장 기본적인 측면은 잃어버린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 있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여기 나타난 사랑을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으랴! 이 모든 것이 죄의 결과가 아닌가!
구속하시는 영원한 사랑이 없었더라면 그리스도께서 어찌 존귀와 위엄을 버리시고 세상에 오셔서, 바로 그분이 구원하시려 오신 그 사람들에 의해 소홀히 여김을 받으시고, 멸시 받으시고, 거절을 당하시고 급기야는 십자가 위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었을까! 그 사랑은 영원히 신비로 남게 될 것이다. "[15] 더욱이 엘렌 화잇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남으로 인류가 옳은 일을 하도록 도덕적 영향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영원한 관심이 이 속에 있다. 이 주제에 대하여 잠잠하고, 열성이 없는 것은 죄다. 갈바리의 장면은 가장 깊은 감동을 요구한다. 이 주제에 대하여 열심을 보이는 것은 무방하다. . . . 우리의 마음은 구주의 무한한 사랑의 깊이를 명상하는 것으로 채워져야 하며, 영혼은 감동되어 마음이 녹고 애정은 세련되고 고상하게 되며 모든 품성은 완전히 변화되어야 한다.”[16] 엘렌 화잇은 또한 갈보리 사건을 회상하면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서 거룩한 감정이 일깨워지고 자만심과 자긍심이 없어질 것이라고 저술했다.[17] 십자가에서 보인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은 아버지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해시키는 수단이었다.[18] 여기에서 우리는 엘렌 화잇이 아벨라드(Abelard)에 의해 신봉된 속죄론의 주관적 측면에 동의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글에서 엘렌 화잇은 많은 (속죄에 관한) 객관적 이론들의 측면들을 지지했다. 엘렌 화잇이 갈보리는 하나님의 성품, 율법, 그리고 공의로운 통치를 입증한 것이었다고 주장한 것은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에 의해 창안된 통치 이론(governmental theory)을 연상시킨다. “그분의 죽음은 율법을 무효화 시키지 않았으며, 율법을 파괴하지도 않았고, 그 거룩한 요구를 약하게 하지도 않았으며, 그 신성한 가치를 손상시키지도 않았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율법의 정당성을 선포하였다. 그런 맥락에서 그분은 타락한 인간을 그 저주에서 구원하시려고 그 자신이 율법의 형벌을 당할 것에 동의하셨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은 하나님의 법의 불변성을 나타낸다. . . . 그리스도의 죽음은 율법의 요구를 정당화시켰다. "[19]
초대 교회 시대 이후로 고전적인 속죄론은 갈보리가 악과 사탄의 세력에 대한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의 표징이었음을 분명히 한다. 또한 이러한 관점은 엘렌 화잇에 의해서도 주장되었다. "그분은 당신의 피로 그분의 백성을 거의 속량하시게 되었다. . . . 이것을 통해서 죄와 사단의 운명을 끝내며, 그의 군대가 사라지게 할 것이었다."[20] 십자가에서 “사단은 패배하였다. 그는 자기의 세상이 끝난 줄을 알았다."[21] 엘렌 화잇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또한 대속적인 죽음이었다.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죽음을 당했고 우리의 죄를 감당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 대신 죽기를 동의하셨으며, 사람은 순종의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의 형벌을 벗어나게 되었다."[22] 갈보리에서 “상실된 세상의 영광스런 구속자가 아버지의 율법을 범한 형벌을 당하고 있었다."[23] “세상의 죄가 그분의 위에 있었다. 그분은 아버지의 율법의 범죄자로서 인간 대신 고통을 당하고 계셨다."[24]
구속의 최종적인 측면이기는 하나 아마도 우리의 현대 세계에서 거절되어왔던 첫 번째 측면들 중 하나는 죄 그리고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시키거나 달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구속에 대한 이와 같은 안셀무스적(그리고 바울적) 측면은 엘렌 화잇에 의해 분명하게 주장되었다. “고요한 슬픔 가운데 아버지께서 그 품속의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빛과 사랑과 영광을 거두어 가시는 모습을 천군들이 지켜보며 놀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이 비애를 금치 못한 것을 보았더라면 죄가 얼마나 그분께 거슬리는 것임을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의의 검이 그분의 사랑받는 아들을 대적하여 깨었다."[25]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고뇌 속에서는 신체적 고통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세상의 죄가 그분 위에 있었다. 그분이 위반된 법의 형벌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함을 느끼셨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영혼을 압도한 것이었다."[26]
엘렌 화잇이 속죄를 주제로 쓴 글이 이 소책자가 유일한 것은 아니다. 1870년에 『예언의 신』(The Spirit of Prophecy)이라는 4권짜리 저작 중 제1권에 포함된 “구원의 계획”(The Plan of Salvation)이라는 제목의 장에서 엘렌 화잇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정해진 수단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과 관련하여 속죄란 단어를 유사하게 사용했다. 또한 1890년에 출간된 『부조와 선지자』(Patriarchs and Prophets)라는 서책에 포함된 “구속의 경륜”("The Plan of Redemption”)이라는 제목의 장에서 속죄 용어가 유사하게 사용되었다.[28] 분명하고도 일관되게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구원 계획의 핵심적인 사건으로 보았으며 잃어버린 죄인들의 편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 속죄 용어를 사용했다. 엘렌 화잇에 의해 저술된 다른 저작물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그녀의 신학에서 갈보리의 중요성과 중심성에 대한 그 밖의 중요한 단언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들 내용은 와그너의 신학과 불일치하는 내용이다. 엘렌 화잇은 명백하게 속죄는(atonement) 갈보리에서 이루어졌다고 저술하였다. 아벨의 제사에 대하여 논평하면서 엘렌 화잇은 “그[아벨]는 흘려진 피를 통하여 미래의 희생 즉 그리스도께서 갈바리의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루어질 속죄를 의지함으로 그가 의로워졌으며 그의 제물이 받으신 바 되었다는 증거를 얻었다.”[29]고 기록했다.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은 속절없이 고통을 당하셨을 때 스스로 희생 제사를 완성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의 죄에 대한 완벽한 속죄가 이루어졌다."[30] 아마도 이와 같은 주장이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 있는 것은 1901년의 다음과 같은 진술이다. “그분[아버지]께서 하늘과 이 땅 사이에 십자가를 계획하셨으며 아버지께서 희생제물인 자기 아들을 바라보았을 때 완벽하다는 것을 인정하여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셨다. “속죄가 완료되었으니 충분하다”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31] 와그너는 결코 그러한 진술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와그너와 달리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제물이자 제사장이었으며 따라서 갈보리에서 속죄의 제사를 담당하실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대제사장이 화려한 사제복을 벗어두고 흰색의 일반 제사장들이 입던 옷을 입고서 직분을 수행한 것처럼 그리스도도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형태를 취하셨으며 자기 자신이 제사장으로서, 자기 자신이 희생제물로서 제사를 수행하셨다."[32]
엘렌 화잇은 속죄에 대한 부족한 관점이 율법폐기주의와 부도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와그너의 두려움에 분명하게 동의했다. 그러나 와그너와 달리 엘렌 화잇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성육신으로부터 골고다까지의 그리스도의 고난이 한 사람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했다. 십자가와 하나님의 성품을 진실로 이해한다면 하나님의 율법이 십자가에서 폐지되거나 파기될 수 없으며 사실 하나님의 율법은 변경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엘렌 화잇은 죄인을 대신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정확한 묘사는 또한 죄인을 회개하며 하나님을 향하게 하고 회개하는 죄인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구속에 대한 엘렌 화잇의 사상과 와그너의 사상을 비교할 때 엘렌 화잇의 관점이 와그너의 관점과 완전하게 반대된다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속죄에 대한 엘렌 화잇의 이해는 분명히 와그너의 이해와 달랐지만 하늘에서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대한 와그너의 성경적 이해와 완전하게 불일치되는 것은 아니었다. 몇 가지 예들이 엘렌 화잇의 생각을 보여준다. 1911년에 엘렌 화잇은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위의 성소에서 인간을 대신한 그리스도의 중보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랬던 것처럼 구원의 계획에서 필수적이다. 자신의 죽음으로 그리스도는 부활하신 후 승천하시어 하늘에서 완료하기로 되어 있는 사역을 시작하셨다."[33] 이와 동일한 생각으로 엘렌 화잇은 1893년에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우리의 위대한 대제사장이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중보하시고 속죄하시고 계신다."[34] 이와 같은 진술들을 통하여 엘렌 화잇이 생각한 속죄(atonement)는 하늘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도 포함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그리스도의 고난”(The Sufferings of Christ)이라는 소책자에서 엘렌 화잇은 이미 속죄 개념의 일부로써 그리스도의 고난의 전 생애를 언급했다.
평범한 독자에게는 엘렌 화잇의 속죄 용어 사용이 혼란스러워 보일 수 있지만 엘렌 화잇의 저술들을 조사해 보면 엘렌 화잇은 속죄라는 용어를 구체적이고도 집중된 의미로부터 넓은 의미까지 세 가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우리가 상당수의 예에서 보아왔듯이 이 단어는 갈보리를 완전한 속죄로서 설명할 때 사용되었다.[35] 이들 사례에서 속죄의 의미는 구체적이며 단 하나의 사건 즉 십자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다른 곳에서는, 속죄는 더 넓은 의미를 가지며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도 포함한다. 이와 같은 예에 있어서 엘렌 화잇은 회개하는 죄인을 대신하여 속죄하기 위한 완전한 화목 제물의 공로를 베푸시는 그리스도를 언급하거나[36] 또한 몇몇 예에서는 그리스도의 공로를 속죄로서 언급한다.[37] 따라서 그리스도의 하늘 사역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보인다. 엘렌 화잇이 세 번째 속죄 용어 사용의 경우는 그 의미가 훨씬 넓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소책자에서 본 것처럼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전 생애를 언급할 때 구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38] 상기 예와 다른 예에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엘렌 화잇의 이해는 그리스도의 전체 구속 사역과 거의 같은 의미였다. 따라서 구속 사역에는 십자가가 중심적인 속죄 사건으로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구원 계획이 고안된 순간부터 이 세상이 끝나는 날 죄가 최종적으로 근절될 때까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수행하고 계신 모든 것이 포함된다.[39] 여기에서 구속은 시간 속에서의 한 과정이며 이 과정의 부분들은 분리될 수 없다.
초기 재림교인들이 속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파악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초기 재림교인들은 움직임이 없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하나님이 무시간 속에서 존재한다는 어거스틴주의자 및 칼빈주의자 체계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제 내에서 자신들의 신학적 체계를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구속 계획의 중대한 사건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선포하신 규례의 결과 때문이며, 따라서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에 의해 수행될 수 있고 전체 구속 계획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지 안에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 재림운동은 하나님께서 구원 역사의 다양한 사건 동안 시간과 공간 내에서 인류와 실재로 상호 작용하신다는 전혀 다른 사상 체계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체계 안에서는 미래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는 인간의 반응을 설명한 것 일뿐 인간의 반응을 규제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 전제와 신학적 전제에 있어서 이렇게 엄청나게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와그너와 엘렌 화잇은 속죄를 포함한 구속의 경륜의 모든 사건을 단지 영원한 과거 속에서 하나님께서 생각해 내신 예정된 특정 시점에 발생하는 사건들로 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관여하고 계신 일련의 과정으로써 볼 수 있었다.
결론
본 연구에서는 1860년대의 거의 같은 시기에 속죄론에 대하여 저술했던 두 명의 선도적인 재림교회 학자, 조셉 H. 와그너와 엘렌 화잇 간의 속죄론에 대한 신학적 차이를 설명하고자 했다. 와그너가 속죄를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사역으로 제한한데 반해 엘렌 화잇은 속죄의 개념을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의 가운데에 놓았다. 엘렌 화잇에게 있어서 갈보리는 인류의 속죄를 위한 필수적, 중심적 사건이다.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은 잃어버린 인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며 화해의 수단이며 남녀 모두가 더 높은 도덕 기준을 따르도록 영향을 미치며 하나님의 성품, 율법, 공의로운 통치를 입증해 주며 죄의 결과로써 우리가 격어야 하는 고난과 영원한 사망에 대한 대속물이며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진정시킨다. 엘렌 화잇은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면서도 또한 십자가 사건을 완전한 속죄라고 분명하게 언급했다. 이와는 반대로 와그너는 그리스도의 희생이 갖는 의미에 대한 이와 같은 주관적이고 객관전인 측면들 중 많은 부분에 대하여 쉽게 동의했지만 이들 측면들을 속죄 자체에 연결시키는 것에 대하여는 거절했으며 십자가를 그리스도가 승천한 후에 하늘 성소에서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위한 예비 수단으로써만 간주하였다.
속죄에 대한 엘렌 화잇의 생각에는 폭넓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의미는 당대의 일부 재림교 신학자 및 친구들의 생각보다 훨씬 복합적이었다. 엘렌 화잇은 속죄에 대한 이들 신학자 및 동료들의 개념 중 일부분에 대하여는 동의하긴 했지만 그의 속죄 개념은 신학적으로 뚜렷한 차이를 지녔다. 또한 본 비교 연구의 결과 초기 재림교회는 속죄와 같이 중대한 교리에서 조차 교리상의 다양성이 존재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1901년에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학적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진술을 기록했는데, 그 진술에는 엘렌 화잇의 기독론적 깊이가 반영되어 있다. “죄의 속죄물로서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희생이야말로 위대한 진리이며, 이 진리 주위에 모든 다른 진리들이 매달려 있다. 창세기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모든 진리들을 바르게 이해하고 충분히 인식하기 위해서는 갈바리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오는 빛을 통해서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대들에게 자비와 재생과 구원과 구속의 위대한 큰 기념물을 소개하노니 곧 십자가 위에 들리우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한다."[40]
각주
[1] See Fundamental Belief 17 and its exposition in Seventh-day Adventists Believe. . . (Washington: Ministerial Association, General Conference of Seventh-day Adventists, 1988), 216-229.
[2] Jerry Morten Davis, "A Study of Major Declarations on the Doctrine of the Atonement in Seventh-day Adventist Literature" (MA Thesis, Andrews University, 1962), 7. 본 비교 연구를 수행하기 위한 필자의 첫 번째 아이디어는 몇 년 전에 Davis의 논문을 읽은 후에 생겨났다. 또한 LeRoy E. Froom도 그의 저작 Movement of Destiny(Washington: Review and Herald, 1972), 167-187)에서 초기 재림교 신학에 대한 와그너의 공헌을 다루었다.
[3] 이 판본의 경우, 1863년 발표문 원본의 1884년 개정판에서는 신학적 결론은 수정되지 않았다. 즉 신학은 똑같다. 이 판본을 구하기가 더 쉽기 때문에 와그너의 견해에 대한 모든 추후 언급은 이 판본에서 발췌했다.
[4] Waggoner, The Atonement: An Examination of a Remedial System in the Light of Nature and Revelation (Oakland: Pacific Press, 1884), iii.
[5] Ibid., 180.
[6] Ibid., 181.
[7] Ibid., 182-183.
[8] Ibid., 188-189.
[9] Ibid., 190-191.
[10] Ibid., iv; [Uriah Smith], "The Atonement: Not Made On the Cross--In Process Now," Review and Herald, January 30, 1894, 70.
[11] 현재는 Testimonies for the Church (Mountain View: Pacific Press, 1948, 2:200-215)에 게재되어 있다. 이 소책자에 대한 차후의 모든 언급은 이 판본에서 인용할 것이다.
[12] Ibid., 200, 213, 215.
[13] Ibid., 200.
[14] Leon Morris, Glory in the Cross: A Study in Atonement (Grand Rapids: Baker, 1966), 80.
[15] Testimonies for the Church, 2:207.
[16] Ibid., 213.
[17] Ibid., 212.
[18] Ibid., 211-212.
[19] Ibid., 201.
[20] Ibid., 209.
[21] Ibid., 211.
[22] Ibid., 200-201.
[23] Ibid., 209.
[24] Ibid., 203. 엘렌 화잇은 또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은 죄인들이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될 수 있는 수단이라고도 주장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당신의 받으실 만한 대접을 받게 하기 위하여 우리가 받아야 할 대우를 받으셨다. 그리스도께서 당신과 아무 상관이 없는 우리의 죄를 인하여 정죄함을 받으신 것은, 우리로 우리가 아무런 공헌한 바 없는 당신의 의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것인 생명을 우리가 받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의 것인 죽음을 당하셨다.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Desire of Ages [Mountain View: Pacific Press, 1898, 1940], 25).
[25] Testimonies for the Church, 2:207.
[26] Ibid., 214.
[27] The Spirit of Prophecy (Battle Creek: Review and Herald, 1870), 1:44-54.
[28] Patriarchs and Prophets (Mountain View: Pacific Press, 1890), 63-70.
[29] Patriarchs and Prophets, 72.
[30] Manuscript 128, 1897.
[31] Review and Herald, September 24, 1901.
[32] Southern Watchman, August 6, 1903.
[33] The Great Controversy Between Christ and Satan (Mountain View: Pacific Press, 1911, 1950), 489. See also Ibid., 421, 428, 623.
[34] Review and Herald, August 22, 1893.
[35] See, for example, Patriarchs and Prophets, 72; Signs of the Times, August 25, 1887; December 30, 1889; June 28, 1899; Review and Herald, September 24, 1901.
[36] See, for example, Manuscript 29, 1906; Early Writings, 260.
[37] See, for example, Fundamentals of Christian Education (Nashville: Southern Publishing Association, 1926), 370; Manuscript 69, 1912. 그러나 일부는 엘렌 화잇의 구속 사역에 대한 진술에 논쟁할 것이다. 엘렌 화잇이 세 번째로 속죄라는 용어를 사용했을 때에는 그 의미가 훨씬 넓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소책자에서 본 것처럼 엘렌 화잇은 그리스도의 고난의 전 생애를 언급할 때 속죄 용어를 사용했다.38 상기 예와 다른 예에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대한 엘렌 화잇의 이해는 그리스도의 전체 구속 사역과 거의 같은 의미가 되었으며 따라서 속죄 사역에는 십자가가 중심적인 속죄 사건으로써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구원 계획이 고안된 순간부터 이 세상이 끝나는 날 죄가 최종적으로 근절될 때까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수행하고 계신 모든 것이 포함된다. 여기에서 속죄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이 과정의 부분들은 분리될 수 없다. 초기 재림교인들이 속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파악하는 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는 초기 재림 교인들은 움직임이 없고 고통을 느끼지 않는 하나님이 무시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어거스틴주의자 및 칼빈주의자 체계의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제 내에서 자신들의 신학적 체계를 이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한다. 구속 계획의 중대한 사건은 하나님께서 영원히 선포하신 규례의 결과 때문이다. 따라서 전체 구속 계획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지 안에서 예정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전혀 없다. 재림교회는 하나님께서 구원 역사의 다양한 사건 동안 시간과 공간 내에서 인류와 실재로 상호 작용하신다는 전혀 다른 사상 체계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체계 안에서는 미래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예지는 인간의 반응을 설명한 것 일뿐 인간의 반응을 규제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적 전제와 신학적 전제에 있어서 이렇게 엄청나게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와그너와 엘렌 화잇은 구속을 포함한 구원 계획의 모든 사건을 단지 영원한 과거 속에서 하나님께서 생각해 내신 예정된 특정 시점에 발생하는 사건들로 보기 보다는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관여하고 계신 일련의 과정으로써 볼 수 있었다. 자신의 화목 제사의 공로를 신자들에게 적용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가리키는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사역 중 이 단계에 대한 엘렌 화잇의 두드러진 이해로써 보아야 하며 하늘에서 수행되고 있는 속죄 자체에 대하여 언급되어 있는 그녀의 다른 진술들의 사례를 들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두 단계 대한 1901년의 엘렌 화잇의 진술은 이러한 이해를 뒷받침한다. “그분(그리스도)은 타락한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자신의 제사장 직분 중 한 단계를 이행하셨다. 그분은 이제 자기 백성의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회개하며 믿는 죄인들의 사건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함으로써 또 다른 단계를 이행하고 계신다.” (Manuscript 42, 1901). 이들 두 단계는 상호 보완적인 반면 십자가에서의 완전한 구속은 그리스도 사역의 지배적인 사건으로 보았다.
[40] Gospel Workers (Washington: Review and Herald, 1915), 315.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삶과 십자가 모두가 속죄를 위한 과정이었다는데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하늘에는 그리스도만 계신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니 그리스도께서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심으로서 사람들이 아버지 하나님께 속죄를 얻고 축복을 받고 성령충만을 받을수 있다고 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지상생애와 십자가와 중보사업이 다 필요한 것이었다라는 말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끝났다고 주장하는 청신호나 이상구박사나 김균 같은 자들은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세상이 창조가 되었으니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인류의 죄를 감수하시면 그만일수도 있겠으나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시며 성부께서 결정권과 명령권을 가지고 계시니 이런 하늘의 질서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중보사업으로 인류가 아버지 하나님께 용서를 받고 축복을 받고 성령을 받는 일이 반드시 있어야하고 그것이 순리라 봅니다.
속죄에 대하여 좁은 개념으로는 그리스도의 속죄를 생각해볼수 있고 넓게는 아버지 하나님께 대한 속죄를 생각해 볼수 있다 봅니다. 따라서 중보사업이 끝나기 전까지는 속죄가 다 끝난것은 아니라 봅니다.
제가 아래 제 글에서도 이야기 했습니다마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생애와 십자가의 죽으심은 인류의 죄에 대한 그분 스스로의 감수하심으로 보며 이것을 가지고 중보사업을 하심으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속죄를 얻고 축복을 얻고 성령의 충만을 받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그리스도 앞에까지만 와서는 속죄와 구원이 완성될수 없고 그리스도와 함께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중보사업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법에 순종함으로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