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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고려인, 그 슬픈궤적(軌跡)을 쫓아
-연해주 기행-
筆 花
아무르 강변의 우수(憂愁)
연해주(沿海州)는 러시아어로 프리모프스키 주(연안+바다), 오호츠크 해와 태평양에 면한 러시아의 원동지역(遠東地域)이다.
인천공항에서, 콧날이 날카로워 유난히 개성적으로 보이는 오로라 항공 여사원들의 안내를 받아 항공기에 탑승했다. 슬라브족 여성들의 체취를 짙게 느끼는 듯 했다. 한국은 흐리고 때때로 부슬비가 내렸으나, 햇솜을 뜯어 흩어놓은 듯한 구름위에는 맑은 햇살이 눈부시다.
옆자리에 앉은 러시아 아가시는 대학생이었다.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더니 시베리아라고 한다. 다시 “Cold area?" 하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한다. 한국 여행을 갔다 오는 길이며, 하바롭스크에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집으로 간다는 것이다.
항공기가 착륙하기위해 고도를 낮출 때 가장 먼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한강보다 훨씬 폭넓은 강과, 그 강안(江岸)의 황무지들이다. 시베리아 아가시는 아무르 강(헤이룽강/黑龍江)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혼자 이국 여행을 마치고 시베리아 벌판을 달려 집으로 가는 이 아가시의 自由와 浪漫과 꿈을 상상해 보면서 처음으로 러시아 땅을 밟았다.
오후 1시에 이륙한지 2시간 40분, 하바롭스크 공항에 착륙 한 것이다. 이곳 시간으로 4시 40분, 時差가 1시간이므로 큰 불편은 없다.
이튿날,
하바롭스크의 아무르 강변공원, 아무르와 우수리 강이 합류하는 지점 언덕위에 섰다. 잡목이 욱어진 하중도(河中島)를 사이에 두고 그 건너편은 중국 령 이라고 한다. 대륙문화의 쌍벽인 중러 국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두 강대국은 모두 역사상 우리를 협위(脅威)하고 압박해온 제국주의 국가들이었다.
왕조가 아무리 바뀌어도, 대륙은 중화(中華)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를 마치 속국처럼 다루어 오다가, 청일전쟁(淸日戰爭)에 패하고 시모노세키(下關) 조약에서 비로소 ‘조선을 독립국가로 인정’했다.
제정 러시아는 19세기 말 이래, 부동항(不凍港)을 찾는다는 명분으로 만주와 한반도에 야심을 품었다가 러일 전쟁에 지고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월권을 인정 한다’고 명기하고 항복했다
역사에 假定(가정)이 있을 수 없지만, 만일 청일전쟁에서 청국이 이겼다면 한반도는 중국의 동북4성이 되지 않았을까?
러 일 전쟁에서 만에 하나라도 러시아가 이겼더라면, 당초 청국 령이었던 연해주가 1860년 북경조약에 의해 러시아 령이 되었듯이, 한반도도 러시아 극동지역의 한 개 州(주)가 되지 않았을까?
결코, 일본에 먹힌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에 강점당했기 때문에 그 장장(長長)한 질곡(桎梏)을 겪은 것을 어찌 잊으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어느 나라도 우리에게 협위(脅威)와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던 나라가 없었던 비통(悲痛)과 분노의 역사를 돌이켜 보는 것이다. 그리고 나쁜 이웃들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우리의 슬픈 역사를 되돌아보려는 것이다.
아무르 강가 언덕에 서서 바다 같이 넓은 강폭을 바라보면서, 역사를 類推(유추)해 보는 것은 오늘과 그리고 내일에 걸쳐 우리의 자립(自立)과 자존(自存)과 자주(自主)를 지켜 나가기 위해, 격변하는 극동정세에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될 것인가를 가늠해 보기 위한 것이다.
무심한 강물은 유유히 흐른다.
청바지를 입은 러시아의 젊은 연인들은 다정스레 손을 잡고 강변을 산책한다.
막 결혼식을 마친 신랑 신부가 웨딩드레스 차림 그대로 강변으로 나왔다. 한낮의 한가를 즐기는 유한객(遊閑客)들이 뜨거운 박수로 축하를 보내준다.
연인들과 신랑신부에게는 붕정만리(鵬程萬里)와 청운의 꿈이 있을 뿐, 구곡양장(九曲羊腸)의 역사를 겪어온 작은 나라 한국의, 만년(晩年) 역사학도가 느끼는 우수를 어찌 헤아리기나 하리....
목단강 편지
아무르 강은 국제 하천이다. 하류로 따라가면 오호츠크 해에 이르는 수로가 트여있다. 러시아와 중국의 물동량(物動量)이 이 아무르 강을 통해 작지 아니 흐른다고 한다. 역방향인 상류로 남행하여 거슬러 올라가면, 송화강(松花江)을 흡수하고, 송화강은 우리 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 천지(天池)에서 발원한다. 백두산 천지 물은 이곳 하바롭스크의 아무르 강에도 흐르고 있는 것이다.
송화강의 가장 큰 지류에 목단강(牧丹江/무단강)이 있다. 중국 길림성 목단령(牧丹嶺)에서 발원하여 흑룡강성을 적시면서 흐르다가 하얼빈 보다 훨씬 하류인 의란현(依蘭縣) 부근에서 송화강에 주입되는 강이다.
여기까지 기억이 미치자, 필자가 어릴 때 이모(姨母)들이 일제하에서 은밀히 부르던 유행가 가사가 떠오른다. 80년을 넘는 창가다.
목단강 편지
한 번 읽고 단념하고 두 번 읽고 맹세 했소
목단강 건너가며 보내주신 이 사연을
낸들 어이 모르오리 성공 하소서
오빠라고 부릅니다 선생님이 되옵소서
사나이 가는 길에 가시넝쿨 넘고 넘어
난초 피는 만주 땅에 흙이 되소서
어느 망명객이 목단강을 건너면서 남겨두고 온 연인에게 사연을 보낸 것이다.
목단강 편지를 받은 아가시는 밤을 새워 읽다가, 울면서 사연을 가슴에 품는 슬픈 내용이다. 곡조도 무척 애절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만주와 연해주를 수없이 누볐을 망명객들의 애환을 그려본다. 피 끓는 젊음을 풍찬노숙(風餐露宿)의 고난과 투쟁으로 조국에 바친 항일투사들의 애수(哀愁)를 아련히 상상해 본다.
신한촌(新韓村) 기념비
블라디보스토크 변두리에 있는 신한촌(新韓村) 기념비에 들렀다.
이슬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대한제국의 왕실(王室)과 지배계급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민(棄民)들과 망명자들이 두만강 어름 판을 건너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루었던 한인촌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1870년대부터 한인들이 점차 집중하기 시작해 19세기 말경에는 한인 인구가 근 1.000명에 이르렀다. 시 당국에서는 1893년 한인들만 집단으로 거주하도록 따로 구역을 설정해 주었다.
‘카레이 스카야슬라보드카’ 혹은 ‘개척리’라 부르던 이 지역은 신한촌 성립 이전 한인 집단거주지로, 비교적 시내 중심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다가 1911년 페스트 창궐을 기화로 러시아당국은 개척리를 강제로 철거시켜 그 일대를 기병대 병영으로 만들었다.
한편, 시 서북부 외곽에 새로 설정된 구역으로 이주하도록 강제조치를 취하였다. 구 개척리로 부터 북쪽으로 2km 정도 떨어진 산비탈로, 높고 건조한 곳이었다. 한인들은 새 터전에서 다시 피땀 흘려 신개척리를 건설, 새로운 한국을 부흥시킨다는 의미로 ‘신한촌’이라 명명하였다.
신한촌은 항일 민족 지사들의 집결지였고, 나아가 해외독립운동의 중추기지로 민족의 의기가 충천하였다. 간도관리사 이범윤(李範允), 조선조 말 유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유인석(柳麟錫), 봉오동전투의 영웅 홍범도(洪範圖), 등이 이곳으로 모여 들었다. 13도 의군을 일으켜 무장한 의병들이 두만강을 월강하여 일본 관헌을 습격, 타격을 가한 크고 작은 규모의 작전이 1.700여회, 이에 참여한 연인원이 무려 10만 명에 달한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국내에서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활동하던 안창호(安昌浩)를 비롯해 이갑(李甲)· 조성환(曺成煥)· 유동열(柳東說) 등도 이곳으로 왔다. 헤이그 특사인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을 비롯, 북간도 용정촌(龍井村)과 서간도 삼원포(三源浦)에서 민족주의교육을 주도하던 이동녕(李東寧)· 정순만(鄭淳萬) 등이 이곳으로 모였고, 미주에서 공립협회(共立協會)와 국민회 활동을 하던 정재관(鄭在寬)· 이강(李剛)· 김성무(金成茂) 등이 이곳에 집결하였다. 그 밖에도 민족주의사학자 박은식(朴殷植)· 신채호(申采浩)도 합세했으며, 기독교계의 이동휘(李東輝)와 대종교의 백순(白純) 등을 비롯한 애국계몽운동 동지들도 잇따라 모여 들었다.
이곳에 모인 항일민족 운동가들은 일찍부터 연해주 지역 한인사회의 지도급 인물들인 최재형(崔在亨)·최봉준(崔鳳俊)·문창범(文昌範)·김학만(金學萬) 등과 협력해 1910년대 국내외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1911년, 권업회(勸業會)가 조직되고, 1914년 대한광복군 정부도 창설하였다. 한민학교를 중심으로 민족교육이 활발하게 전개되었고, 신한촌 외각에 조선사범대학과 원동종합대학이 있어 민족장래를 위한 고급인재 양성의 산실이 되기도 하였다. 일본은 신한촌에서 약 1km 떨어진 곳에 영사관을 두고 신한촌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 하였고 러시아와 일본은 동맹관계에 들어갔다. 일본의 압력과 러시아 당국의 전시체제 확립으로 강력한 제제를 받아 독립운동은 한계에 부딪쳤다. 이후 독립운동의 기지는 점차 북간도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러나 신한촌 에서는 1937년, 스탈린의 폭거인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이전까지 민족운동이 맥을 이어 나갔다.
피땀 흘려 가꾸어놓은 삶의 터전과, 활발했던 독립운동기지는, 강제이주 이후 폐허가 되었다가 지금은 아파트촌이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우리의 독립운동 투쟁사가 응축된 신한촌의 옛 터전을 찾아볼 길이 없다. 1999년 8월, 3.1운동 80주년을 기념하여 한민족 연구소가 신한촌의 역사를 기리면서 블라디보스토크 시 변방에 세운 비가 「신한촌 기념비」다.
비는 3개의 큰 돌 기둥과 8개의 작은 돌로 이루어져 있다. 기념비에 새겨진 “민족의 최고가치는 자주(自主)와 독립(獨立)이며,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족적 정신....”이라는 명문(銘文)이 선명하다. 기념비에 참배하고 자그마한 관리실에 들어서니 고려인 관리인은 풍으로 실어증(失語症)에 걸려 있다. 60代의 그 초로(初老)를 부둥켜안았다. 울컥하는 심경에서 “고려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통분과 연민을 참을 수가 없어요,” 하고 격한 감정이 절로 쏟아져 나왔다. 초로는 표정도 말도 없이 멀건 얼굴 그대로다. 아마도 그는 감정마저 화석이 된듯하다. 슬픔과 안타까움이 가슴에 차오른다. 내리는 이슬비가 부슬비로 바뀌고 있다.
「슬픈 강」변의 외로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2시간 고속도로를 달려 우수리스크시가 있다.
1917년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가 이곳에서 조직될 만큼 ‘한인의 메카’로 통하는 곳이다. 지금도 우수리스크 시역(市域)에 2만 여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고 한다. 이곳도 독립운동의 거점으로서, 수많은 투사들이 피로써 물들인 곳이다.
이상설(李相卨/1870-1917)선생은 1910년대 연해주의 대표적인 독립운동 지도자이다. 선생은 충청북도 진천출신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1906년 봄, 간도의 룽정(龍井)으로 망명하여 간도지역 민족교육의 효시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창립하였다. 1907년 광무황제(고종)의 밀지를 받아 이준(李儁), 이위종(李瑋鍾)을 대동하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수석특사로 사행(使行)하였다. 헤이그에서 강대국들의 외면과 반대로 회의장에 들어가지도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구미 각국을 순방하면서 일제의 침략만행을 고발하고 우리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다가 1909년 연해주로 돌아와 항일독립운동의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다.
1910년 6월 13도의군 편성을 주도하였고, 외교통신원으로서 연해주와 간도지역을 조율하는 역할과 함께 전체사무와 조직관리의 실질적인 책임을 맡았다.
같은 해 8월,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고, 한일합병무효선언을 발표하면서 8.624명의 서명록를 첨부함으로써 연해주 한인의 총의를 천명했다.
1911년 5월 연해주 한인의 자치적 대표기관인 권업회(勸業會)를 장립하고 의사부장을 맡았다. 권업회는 한인사회의 정치 경제적 지위향상을 비롯하여 ‘독립전쟁론’을 구현하는 핵심조직이었다. 권업회가 시행한 광복군 양성 활동으로 동북만주 나자구(羅子溝)에서 설립 운영한 대전학교(大甸學校)를 들 수 있겠다. 일본의 ‘각처군용정세상세’에 의하면 블라디보스토크 사범대학 공지에서 집총훈련을 받은 광복군이 29.365명이었고, 총기 13.000정과 탄약 50만발 등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은 이상설이 주관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914년 최초의 해외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를 결성하여 선생은 정통령(正統領)으로 추대되었다. 연해주 대한광복군정부는 그 후,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중요한 동기와 자극이 되었다.
1915년 3월에는 상해에서 중국에 체재하고 있던 상해의 신규식, 박은식, 북경지역의 유동열, 성낙형, 등과 합세하여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조직하였고 그 본부장에 추대되었다. 선생의 활동은 구미에서 일찍이 국제외교계의 관심을 모았고, 연해주와 만주 중국을 넘나들면서 종횡무진(縱橫無盡)하였다. 이렇듯 젊음을 불태우면서 오직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한 선생은 차차 과로가 누적되어 건강에 이상이 왔다. 1916년 하바롭스크에서 병석에 눕게 되었고, 기후가 온난한 우수리스크로 옮겨 왔으나 차도가 없다가 1917년 3월 2일, 불꽃같은 생애를 끝마치니 향년 48세였다.
우수리스크시 교외의 우쪼스노예 마을 어귀 라즈돌리노예(수이푼)강변에 헤이그 밀사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遺墟碑)가 외로이 서 있다. 화강암 비석에는 선생의 생애를 형상화하여 불꽃모양이 새겨져 있다. 선생은 오로지 독립운동에 짧은 일생을 바치느라 결혼도 하지 않았다. 유언에 따라 지니고 있던 모든 자료와 함께 몸마저도 장작더미에 얹혀 하늘까지 닿는 긴 연기로 산화(散華)하셨다. 불타버린 한줌 재는 수이푼강 흐르는 물에 뿌려졌다. 후인들이 이 강을 “슬픈 강”이라 한다던가.
욱어진 잡초 속에 쓸쓸이 서있는 유허비가 뇌리에 새겨지고, 무심히 흐르는 수이푼강 황토물이 가슴에 흘러 적막감이 더해진다. 유허비 주변에 조선기와를 얹어 둘레 담이라도 쳐주면 독립투사의 쓸쓸한 영혼이 조금이라도 위로를 받지 않을까. 수이푼 강은 불라디보스토크 만을 통해 동해로 흘러든다니 선생의 혼이라도 조국에 돌아와 편히 쉬시기를 빌어본다. 「슬픈 강」변의 외로움이 너무나도 절절하여 여정을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사뭇 마음에 떠나지를 않는다.
최재형(崔在亨)선생 생가
우수리스크시 보로다르스코38번지, 최재형(崔在亨/러시아명:최 표트르 세묘노비치/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선생의생가 앞에 섰다.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 헌병대에 학살당할 때 까지 2년간 거주했던 곳이다.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가장 부호였던 선생의 소박한 벽돌집은 조금도 부티가 없다. 단아한 성품(性稟)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지금은 개인재산이 되어 있어 내부에 들어가 볼 수는 없으나, 담 벽에 붙은 표찰에 눈길을 줄 뿐이다.
선생은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9살에 아버지 손을 잡고 두만강을 건너와 지신허(地新墟/최초의 한인 정착촌)에 정착하여 러시아에 귀화하였고 이곳에서 자라났다. 어릴 때 워낙 집이 어려워 하산에 있는 한인학교에 다닐 처지도 못되어 러시아학교에 다니면서 일찍부터 러시아어와 문화를 익히게 되었다.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 해군소위로 임관하여 참전하였다. 선생은 러시아군의 통역과 함께 러시아가 고용한 한인 노동자를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으면서 어려움에 처한 한인들을 도왔다.
전쟁이 끝나고 군에서 쌓은 신망과 뛰어난 사업수완으로, 군납사업을 영위하는 등 사업을 통해 큰 부(富)를 축적하였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을 계기로 해산 군인 다수가 노우키에프스크(煙秋)로 모여 들었고, 이들에게 군량과 무기 및 군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이범윤(李範允)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조국진군을 시도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 600명으로 의진(義陣)을 정비하고, 그해 7월 대장이 되었다. 정예병 200여 명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원의 신아산(新阿山)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킨 바 있다. 선생은 의병활동 활성화를 위해 거금을 내놓기도 하였다.
우에키에프스크 도헌(都憲/기초행정기관의 장)이 되어 한인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많은 업적을 쌓았다. 30여개의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후세 교육활동에 진력하였다.
1911년에 창설된 근업회(勤業會)는 그 이름이 풍기는 경체단체와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단체였고, 후일 한로중앙총회로 이어진다. 근업회의 초대 지도부에 총재 최재형 선생이, 부 총제에 홍범도 장군이 맡았다.
생면부지의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찾아왔을 때 우지(遇知)와 따뜻한 배려를 베풀어 자리를 잡게 하고 의병활동에도 같이 참여하였다. 침략의 원흉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계획과 정보에 서로 깊이 교류하였으며 안 의사로 하여금 결단을 가다듬는 동기와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안 의사 순국 후 그 가족을 돌본 것도 최재형 선생이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1회 임시의정원에서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임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계속 연해주에서 활약 하였다.
1920년 4월 일본은 니항사건을 빌미로연해주 일대에간섭군으로 출병하여 러시아 혁명군과 한인의병을 대대적으로 공략하였다. 최재형 선생은 우수리스크에서 한인의병들을 모아 일제와 치열한 시가전을 벌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선생은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어 학살당했다.
헌병대 검거정보를 미리 알고 그 자녀들이 피신할 것을 제의하였으나 선생은 당당하게 맞서다가 잡혀 학살을 당해 순국한 것이다. 1920년4월 초, 꽃 피는 계절의 사건이다. 최재형 선생은 교육가, 사업가, 의병대장, 독립운동가로 치열한 생애를 마쳤다. 독립운동에 아낌없이 재산과 목숨을 바친 애국의 열정을 다시 되새겨 본다.
아! 安重根 義士
「인류의 평화와 미래 / 민족의 영웅 안중근 의사」
간결한 비문에, 기대보다는 소박한(?) 자연석 비석이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 앞뜰에 야트막하게 서 있다.
당초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격살하기 직전까지 체재하였던 블라디보스토크 일처(一處)에 2002년 세워졌던 비를 블라디보스토크 시가 2012년 임의로 철거하여 시청 창고에 방치하였다니 러시아 당국의 무례를 힐책해야 할 것이다.
고려인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여 이곳에 옮겨 세웠다니 가상(嘉尙)한 일이다.
자연석 비석이 별로 크지 않은데다, 자작나무 그늘 밑에 보도블록으로 터전을 잡고, 그 위에 기단도 없이 세워졌으니, 기대보다 훨씬 소박(?)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고려인 단체의 빈약한 예산과 재정이 얼른 연상된다.
국내에서 옹색하지 않게 쓰이고 있는 인프라스트럭처나 복지 예산이 떠오른다.
의사(義士)의 비에 기단이라도 설치하고, 보다 존엄성(尊嚴性)이 돋보이도록 정비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고 시급한 일이다. 정부 관계기관이 보다 넓은 눈으로 살펴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안중근 의사의 비 앞에서 십자성호(十字聖號)를 긋고 깊이 고개를 숙여 묵도(黙禱)하였다. 의사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세례명은 토마스(多黙)였고, 후인들의 신앙선인(信仰先人)이시다.
의사는 교육가였다. 진남포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일으키고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영위하면서 인재를 키웠다.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장으로 활약하였고, 망명 전 집안의 부녀자 패물들을 거두어 나라의 빚을 갚는데 쾌척(快擲)하였다.
의사는 군인이었다. 1908년 연해주에서 의군참모중장으로 임명 되었으며, 6월에 특파독립대장 겸 아령지구 군사령관이 되어 함경북도 홍의동의 일본군을, 경흥의 일본군 정찰대를 공격, 격파하였다.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 엄인섭· 황병길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단지동맹(斷指同盟)을 조직하고 이를 결행함으로써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 바칠 것을 맹서하였다.
하얼빈에서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를 격살한 후, 일본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6번의 제판 끝에 1910.2.14. 사형선고를 받고 같은 해 3.26. 순국하니 약관 31세였다. 그 제판은 판검사는 물론 변호사도, 방청인도 모두 일본인이었으며 외국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의사는 “조국이 광복되기 전에 반장(返葬)하지 말 것이며, 광복을 이룬 후, 조국의 햇볕 다사로운 언덕위에 묻어 달라” 고 유언을 남겼으나, 의사 순국한지 10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그 유해를 찾지 못한 안타까움에 가슴 아프다.
안중근 의사의 생애는 애국으로 시작하여 애국으로 매듭 지웠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살신항거였다.
의사는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 중에 있었다. 미완성인체 사형이 언도되어, 「동양평화론」을 완성할 수 있도록 사형집행을 연기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일제는 이를 묵살하였다. 「동양평화론」 구상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1.동양의 중심지인 여순(旅順)을 영세중립지대로 정하고, 상설위원회를 만들어 분쟁을 미연에 방지할 것.
2.한⦁중⦁일 3개국이 일정한 재정을 출자하여 공동은행을 설립하고 공동화패를 발행하여 어려운 나라를 서로 도울 것.
3.동북아공동 안보체제구축과 국제 평화군을 창설할 것.
4.로마교황청도 이곳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적 승인과 영향력을 갖게 할 것.
일찍이, 오늘의 EU와 같은 국제체제와 지금의‘Euro화’와 같은 국제통화를 구상 하였다. 100년 전에 벌서 집단안보체제와 국제공인까지 복안(腹案)한 것이다. 의사 는 1세기의 미래를 내다본 선각자였다. 「인류의 평화와 미래, 민족의 영웅」이다. 연해주는 안중근 의사가 「동양평화론」을 구상한 곳이다.
하늘에서도, 명암이 묘연(杳然)한 조국의 진운에 광명을 비추어 주시기를 깊이 기원하였다.
아! 안중근 의사! 단지(斷指)하여 흐르는 피로 「大韓獨立」이라 쓴 태극기와 약지(藥指) 한마디를 자른 그 손, 그리고 옥중에서 수염을 길러 수척해진 그 모습이 흉금에 새겨진다.
연해주 아리랑
안중근 의사 기념비에 참배하고 바로 그 본 건물 고려인문화센터에 들어섰다.
고려인문화센터는 한인이주 1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정부와 후원자들의 성금으로 이곳 우수리스크에 2009년 10월 개관했다고 한다(우수리스크 아무르스카야63번지). 이곳에는 발해시대와 한인들의 연해주 이주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전시관을 비롯해 다목적 공연장, 한글교실을 운영하는 교육문화센터, 도서관, 아리랑가무단, 고려신문, 고려인단체 사무실 등이 운영되고 있다니 연해주 고려인들의 정보와 활동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사랑방으로서의 역할이 돋보인다. 관심을 끄는 주요기능 중 하나가 아리랑을 비롯한 공연예술단 운영이었다. 공연기획과 연출은 고려신문 편집장을 겸임하고 있는 고려인 4세 김발레리아씨가 맡아 있다고 한다.
연해주 고려인사회는 구소련이 붕괴되기 시작한 1990년대 초 이전까지는 남한 보다 북한과의 교류가 더욱 활발히 이뤄졌었다. 문화예술계 역시 노래, 무용 등을 북한 출신 강사들에게 배워 전체적으로 북한식 색채가 두드러졌다는 것. 고려인사회가 대한민국 사회와 예술 활동을 교류하기 시작한 시기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본격적인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었다. 이어 1990년대 소련의 붕괴와 함께 고려인이 많이 살고 있는 중앙아시아 위성국들이 분리 독립 되면서 급진전 되었다고 한다.그 후 정부나 자치단체 차원의 교류와 민간예술단체의 교류도 다양하게 펼쳐졌다. 문화예술 활동은 대부분 ‘고려인문화센터’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다.필자는 가무와 예술분야에 조예가 깊지는 못하나, 아마도 북한식 색체란 대륙적이고 활동적이며 무용적(武勇的)인 것이 아닐까. 그리고 대한민국적인 풍조는 보다 섬세하고 정서적이고 인간성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경향이 아닐까 싶다. 로비에서 러시아인 여직원의 안내를 받아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첫 번째 방에서 다른 무엇보다 한 벽면 가득히 한복차림 중년여성 여럿이 노래 부르는 장면의 사진이 눈을 끈다. 사진 위에 「고려인의 노래 아리랑」이라는 제목이 가로닫이로 쓰여 있어 혹시 연해주 아리랑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해서 주의 깊게 살폈으나 일상의 경기아리랑 가사가 적혀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의 정서와 슬픔과 기쁨과 그리움, 모두를 담아 노래 부르는 한국인의 恨이다. 이곳 아리랑 가무단도 이런 것을 담아 노래하고 또 전파할 것이다.
벽면 액자 속에서 부르는 중년 여성들의 아리랑은, 고려인들이 겪어가고 있는 150여년의 恨을 마치 아리랑처럼 길고 애잔하게 풀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나를 버리고는 결코 떠날 수 없다’는 것.
고려인들은 아리랑의 정서 속에서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일체감과 단결력을 굳혀온 것이 아닐까. 이렇듯 고려인들은 청천 하늘 잔별처럼 많은 수심을 가슴에 안고 살면서도 곳마다 때마다 아리랑을 불러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였고, 이로써 민족동질성을 이어온 것이다.
아리랑은 시대와 이념을 초월한 한민족(韓民族)의 상징적인 노래로서, 그 종류는 약 3.000수 이상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지역과 유래와 감정에 따라 수많은 아리랑이 있다.
국내에 경기, 정선, 밀양, 완도 아리랑 등 다채롭고, 재미교포들에게 미주아리랑, 간도에 장백아리랑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연해주에 슬픈 한을 지니고 살아가는 고려인들에게 따로 아리랑이 없을까 싶어 귀국 후 찾아봤다. 일찍이 1910년대에 고려인이, 연해주가 아닌 유럽에서 부른 슬프고 암울한 유래를 담은 아리랑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경이롭게 생각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어라 노다가자 아리랑 고개에 집을 짓고 오는이 가는이 정들어주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띄어라 노다가자이 아리랑은 1916년 가을과 1917년 봄, 독일 프로이센 포로수용소에서 김 그리고리(Kim Grigori, 한국이름 김홍준·당시 27세) 등 조선인 다섯 명이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들은 1860년대 조선을 떠나 연해주에 살다가 1차 대전 당시 러시아 군인으로 참전해 독일군 포로가 된 고려인들이다. 김 그리고리는 연해주 우수리스크 농부 출신으로, 자신의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암울한 상황을 아리랑 선율에 맞춰 노래 불렀다고 한다.
조국에 살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 가서 살던 중, 남의 나라 군대로 우리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세계대전에 참여했다가, 적군에 포로 된 고려인 청년들이었다. 고려인은 곳마다 때마다 일마다 슬픈 유래와 사연을 담고 있다.
그래도 그 총중에 “아리랑 띄어라 노다 가자”라고 노래 불었으니 이 얼마나 긍정적이던가. 그런 긍정성이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용기와 투지를 부여했을 것이다.
그 투지와 용기가, 빈곤과 기아와 절망의 아리랑 고개를 넘어, 억압과 소외와 박해를 극복하면서 단절되지 않고 맥맥히 이어가는, 고려인 역사와 활력의 단초(端初)가 되었을 것이다.
빛나는 별이 되어...
고려인문화센터 역사관의 마지막 방 제목은 「평화와 공존의 땅 연해주」다. 안중근 의사가 꿈꾼 ‘동양평화의 이상’이 떠오른다.
조국광복을 위해 북퐁한설의 대륙을 표표히 떠돌면서 풍찬노숙을 마다하지 않고 싸운 독립운동가 쉰아홉분의 초상사진이 벽면 가득히 걸려있다. 의 열사(義 烈士)들은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앞당긴 선구자들이다.
어둑한 전시장 벽면을 환하게 밝히면서 오는 이들을 맞는다. 우리들의 기억과 의식에 회자(膾炙)되어 있는 몇 분을, 전시된 순서에 따라 들어본다.
강우규(姜宇奎):노인동맹 단원, 서울역에서 제3대 일본총독 사이토 마코토(薺藤 實)에 폭탄 투척,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순국
김 알렉산드라: 한인사회당 창건에 참여, 극동인민위원회(정부) 외무위원장
박은식(朴殷植): 대동보국단 단장, 학자, 언론인, 제2대 상해임정 대통령.
신채호(申采浩): 대한독립청년단장, 학자, 언론인, 무오독립선언 민족대표, 임정 임시 의정원 의원
안중근(安重根): 교육가, 군인,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격살,
유인석(柳麟錫): 한말 유학자, 제천의병 주도, 충주성 공략 석권, 13도의병 도총제
이동휘(李東輝): 고려공산당 창당, 임정국무총리
이범진(李範晋): 초대 주러공사, 의병군자금 거액투척, 경술국치 후 분사순국
이상설(李相卨): 법무협판, 헤이그 수석특사, 대한광복군정부 정통령
이동녕(李東寧): 신흥학교 초대소장, 임시의정원 초대의장, 임정주석,
최재형(崔在亨): 권업회 총제, 교육가, 사업가, 연해주독립운동의 상징적인 인물
홍범도(洪範圖): 대한독립군단 총사령, 봉오동 전투 및 청산리대첩의 맹장
한 분 한 분, 별이 되어 찬연히 빛난다.
이 독립운동의 영웅들을 일관(一觀)하면서, 반도, 연해주, 간도, 중국은 독립운동을 위한 한 무대였음을 확인하였다.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준비를 갖추어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를 세우거나 요인이 된 분들이 있다.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에서 계획하고 연해주의 지원을 받아 만주 하얼빈에서 원흉 이토히로비미(伊藤博文)를 처단하고 여순감옥에서 순국하였다.
간도 땅 깊은 산악지대 장백산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연해주로 건너와 흑하사변이라는 배신을 당하고 콜호스 집단농장에서 농업노동에 종사한 홍범도 장군 같은 분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
이동휘(李東輝)의사는 연해주와 시베리아에서 활동하다가 상해로 가서 임정 국무총리로 활약하였고 다시 연해주로 돌아와 시베리아에서 생을 마쳤다.
유인석 13도 의군총제는 연해주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만주로 건너가 그곳에서 유명을 달리 하셨다.
간도와 연해주가 옛날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고토였다는 사실이 오버랩 된다.
중국의 동북3성과 러시아의 연해주는 우리민족의 얼과 꿈과 역동성이 지표 하에서 숨 쉬는 우리의 요람(搖籃)이다. 역사의 미래 어느 날, 우리는 메카(Macca)를 수복하기 위해 그 땅에 다시 피와 땀과 눈물을 쏟을 날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역사적인 상상에 젖어보았다. 비록 상상에 그칠지 모르지만 민족의 웅비와 중흥을 위해 해봄직한 상상이 아닐까.
연해주 독립운동가들 가운데 한때 소련 볼셰비키에 관여한 사례가 있었다. 김 알렉산드라와 이동휘의사 같은 예가 이에 속할 것이다. 최재형 선생도 한때 공산당에 관계했다. 그러나 이들의 공산주의 활동은 조국독립을 위한 방략이었다.
이동휘 의사는 고려공산당을 조직한 주역이었으나, 근본적인 사상에는 무엇보다 반일민족독립이 최우선에 놓여 있었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인물, 그가 바로 나다.”라고 스스로 고백적인 자평을 한 것으로 미루어, 그는 오로지 독립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소련 정부와 제휴한 민족주의적 혁명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2차 대전 후 남북분단의 와중에서 볼셰비키 활동으로 붉게 채색되어 외면당하거나 뒤늦게 조명된 분들에 대해서는 민족주의 운동의 지평에서, 그분들의 명예를 다시 확인해 마땅하다고 믿는다.
연해주 독립운동을 연구하는 국내 어느 교수는, 이름이 알려진 독립운동 선구자들은 전체 독립운동가의 20%에 불과하다고 한다. 기억되지 않았고, 잊히고, 버려진 항일독립투사들을 발굴, 복원, 조명하여 역사에 길이 전해야 할 과업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후인들의 몫이라 할 것이다.
남한과 북한이 공동으로 일제 평결문을 조사하고, 중국과 러시아에 흩어져 묻혀 있는 독립운동 사료를 발굴하는 일은 시급할 뿐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통일에 기여하는 하나의 길이 되지 않을까 싶다.
항일시인 이육사(李陸史)의 시구(詩句)를 를 되뇌어 본다.
한 개의 별을 노래하자.
다만 한 개의 별일망정
한 개 또 한 개
십이성좌(十二星座)모든 별을
노래하자
지금 각기 항성(恒星)으로 빛나는 별들은, 님들이 산화(散華)하신지 1세기를 격(隔)하면서 조국의 진운(進運)과 민족의 앞날을 걱정스럽게 응시하고 있지나 않을지....
‘고려인 문화센터’를 떠나면서 몇 가지 바람을 마음속에 치부(置簿)해 본다.
①안중근 의사 기념비에 기단을 설치했으면...
②앞마당에 「무명 독립운동가 기념비」를 세웠으면...
③문화센터 입구 로비에 한러 양국어를 구사하는 고려인 봉사자가 앉아 있었으면...
인류사 개조의 대 로망(Roman)
아무르 강변 양안은 광대한 황무지다. 하바롭스크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11시간 반, 시베리아 횡단철도 아케안호 편으로, 밤을 새워 달려가는 철도 연변에는 산이 보이지 않는 평원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까지 고속도로로 달려가는 112km, 그 벌판도 광야다. 이상설(李相卨)의사의 유허비에서 바라보는 벌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땅은 기름져 보이고, 군데군데 물이 고여 늪이 되어있거나 정리되지 않은 하천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天時不如地利/ 地利不如人和라고 했는데 다 갖춰지고 人和만 없다.
열차에서나 버스에서 황야의 수풀 속에 작은 마을들이 보였고, 마을 언저리에 듬성듬성 농경지가 보일 때마다 틀림없이 우리 동포, 고려인이 개척한 땅이라는 확신이 솟아난다.
그렇다. 19세기 중후반, 기근과 기아에 쫓겨함경도와 평안도 농민들이 이 땅을 찾아왔다. 20세기에 들어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고,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熱血 亡命客들이 찾아온 이 황야다. 바라보이는 들판의 나무뿌리 풀뿌리를 캐내고 농경지를 일구었고, 피땀 흘려 옥토로 가꾸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조치 이전에 이 연해주 땅은 우리 동포 고려인이 개척한 고려인의 땅이었다.
넓은 땅이 부럽다. 방치되어 노는 땅이 아깝다. 8.15와 6.25 직후, 농촌에서 한 뼘 땅이라도 얻기 위해 괭이와 삽으로 산전을 개간하고 매밀 갈이를 했던 기억이 새롭다. 한국의 가난한 농민들에게 땅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었다.
국내에는 날마다 매시간, TV를 통해 구걸이 계속되고 있다. 아프리카의 기근지역에서 어린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는 모습을 비춰주고 있다. 중동지역 전쟁난민들의 참상도 비추면서 동정심을 자극하고 있다. 국제아동기금(UNICEF)과 국제난민기구(UNRWA)의 이름을 빌어 자선을 명분 삼은구걸의 대행이 아니고 무엇인가?
강대국 지도자들이 왜 침묵하고 있는가? 연해주보다 더 넓은 황무지가 시베리아에도, 중국에도 미국과 캐나다에도 질펀하다. 거기에 아프리카 사람들과 전쟁난민들을 불러들이면 왜 안 되는가?
올림픽을 할 때 마다 아프리카 사람들이 마라톤에서 우승한다. 그만큼 인내심과 뚝심이 강하다는 하나의 사례다. 우리도 올림픽과 세계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하는 뚝심의 DNA가 민족혼을 타고 흐르고 있다. 그 뚝심으로 만주 땅과 연해주를 개척하였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이라 믿는다. 아프리카나 중동 사람들도 헝그리 정신과 뚝심으로 고려인들처럼 열심히 사력을 다해 황무지를 개척하고 먹을 것과 살 터전을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그때보다는 훨씬 손쉬울 것이다. 농기구가 기계화 되었고 미국과 러시아에서 발견된 무한정의 석유로 필요한 만큼의 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투자가 있어야 할 것이다. 선진 강대국들의 전쟁준비를 위한 군비예산의 일부분이라도 이 휴머니티(Humanity)한, 대 사업에 투자하면 되는 것이다. 전쟁을 위한 투자는 학살과 파괴와 약탈을 위한 투자가 아닌가. 그러나 평원의 개척을 위한 투자는 생명과 건설과 복지와 평화를 위한 투자가 되는 것이다.
버려둔 황무지를 개척하는데 난민의 노동력을 투입하고 그 임금으로 난민의 생계비를 충당해 준다. 개척이 끝난 다음, 적정 임차료로 경작케 하고 적절한 시기가 지난 다음 농경지를 분양, 열심히 일하여 얻는 농업수익으로 지대를 상환토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기근과 전쟁난민의 문제는 동정과 구휼이 아니라 개척과 자립으로 유도할 수 있지 않을까를 생각해 본다. 국경을 그어놓고 그걸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이기심이다. 이기심은 인간의 가장 저급한 감정이다.
지구는 전 지구인의 것이다. 지구인으로 하여금 지구의 황야를 개척하여 기아의 고통과 빈곤의 질곡(桎梏)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을 위해,강대국답게평원의 대지(大志)를 펼쳐 준다면, 그것이야말로 세계평화와 인류의 복지를 실현하는 첩경이 아닐까?
이번 여정에서 H중공업그룹이 영위하는, 2.000만평 크기의 H미하일로프 농장과, 미하일로크카 지역에 조성한 여의도의 23배나 되는 농장을 일정으로 잡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이 2개 농장에서 콩, 밀, 옥수수, 귀리 등 식량을 연간 1.700톤 생산하여 국내로 반입할 계획이라니 이는 국토확장에 다름 아니다.
강대국 국민과 지도자들의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지구인들이 기아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집단안보를 실현하는 것만이 강대국의 책무가 아니다.
노벨상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인류사의 위대한 개조자(改造者)가되는 것이다.
작은 나라의 연로한 평화주의자는 연해주 대 평원에 서서 인류의 현재와 돌파구를 생각하고 미래의 희망을 꿈꿔본다.
평원의 대 역사(役事)를...., 그리고 황야의 그레이트 휴머니즘을...
강대국 국민과 지도자들에게 호소한다. 세계평화와 인류복지를 위해인류사 개조의 대 로망(Roman)을펼쳐 주기를...
첫댓글 이런 글을 읽다보면
속에서 울화통이 터져
혼자서 내마음을 다스리는데에도 많은 생각에 잠깁니다.
어차피
동물의 세계라는게
약육강식 이라지만
언제나 우리도 일본이나 중국에 그 복수를 하는날이 올련지...
요즘 교육의 현상을 보고 젊은이들의 행태를 보면서
그 슬픈 역사도 잊고
(아니 어쩌면 모르고)
그렇다고 인성교육마져도
땅에 떨어진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그 역사가 되풀이 될까봐 좁은 속이 답답하다못해 터질 지경입니다.
가르치지않으면
역사란 거짓이 없는것을...
좋은글
감사합니다.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사를 망각하는 민족은 그 역사를 다시 살도록 보복 받는다"(조지 싼타야나)라는 말은 교훈적입니다.
나름대로는 지난 역사의 편린이라도 다시 천착해 보고싶은 심경으로 그 땅 여행을 했으며,
지적하신대로 그 슬픈 역사를 모르거나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깨우침을 불러 일으키기 위하여
이 글을 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