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정복규의 성씨 칼럼
진주정씨 충장공파
진주정씨 충장공파의 파조인 정분 은 조선 단종 때 우의정을 지냈다. 그는 1394년 경상남도 진주 비봉산 아래 대안리에서 태어났다. 20세 때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좌랑·승문원교리 등을 지냈으며 1422년(세종4년) 사간원 우헌납이 되었다. 이어 좌헌납·병조정랑·의정부사인에 올랐다.
1428년에는 함길도경차관으로 파견되어 수재상황을 살폈다. 1443년 주문사(奏聞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0년 (문종 즉위년)에는 우찬성에 오르면서 전라·경상도 도체찰사가 되었다. 1452년 단종 즉위년에 우의정에 올랐다. 당시 영의정은 황보인 좌의정은 김종서였다. 이들은 어린 단종을 잘 보필하라는 문종의 유명을 받들고 있었다.
정분 은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에게 맞서 대항하다 낙안으로 귀양을 간다. 다시 광양으로 옮겨지면서 관의 노비로 전락했다. 당시 정인지는 충장공의 처남이다. 세조는 정인지를 통해 정분 을 회유했다. 그러나 충장공의 지조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1년 후 죽음을 맞는다. 이보다 앞서 부인은 대호군 임자번의 종으로 보내졌다.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그가 죽은 지 200년이 지난 1746년(영조22년) 김종서·황보인과 함께 관직이 복구되었다. 1786년(정조10년)에는 장흥의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1804년(순조4년)에 충신을 표창하기 위하여 그 집 앞에 정문을 세웠다. 충장(忠莊)은 그의 시호이며 호는 애일당(愛日堂)이다. 진주 사람들은 도동서원을 세워 충장공을 비롯 황보인, 김종서, 김문기 등을 배향했다. 지금은 유허비만 남아있다. 묘소는 경남 진주시 상대동에 있다. 그 옆에는 허름한 영모재가 있다.
( 성씨 전문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