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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의 길 마태복음 5장 3-12절
팔복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옥에 갇힌 이진구 목사님의 이야깁니다. 감옥에 들어갔는데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에 갇힌 스님이 “거 목사 양반 팔복 좀 한번 외워보시구려” 하시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알기는 알지만 다 외우지는 못해서 마음이 가난한자는 애통하는 자는 온유한자는 하다가 머뭇거리니까 스님이 “에이 이 정도는 하셔야지요” 하시면서 구구절절이 읊으시더라는 겁니다. 종교를 초월해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말씀이 팔복의 말씀입니다.
시인 윤동주씨는 이 팔복을 자기화했습니다. 그분이 고친 팔복은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8개의 복이 다 같아요. 그리고 제일 마지막에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윤동주 시인이 좋아했던 철학자가 키에르케고르라는 철학자였다고 합니다. 그가 한 유명한 말이 죽음에 이르는 병 - 곧 절망인데 절망 중의 절망이 절망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는 절망이라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다양한 절망, 슬픔, 애통한 삶의 현실들이 있는데 이것에 대한 진정한 자각이 있다면 자기 절망의 이유, 슬픔의 원인, 애통한 삶의 현실에 대한 통열한 자각이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구원의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절망스러운 건, 그 절망, 고통, 슬픔에 대한 자각없는 현실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윤동주 시인은 인간이 영원한 슬픔을 자각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영원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고 본 것입니다. 나라잃은 백성의 절망과 슬픔에 대한 진정한 자각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던 윤동주 시인의 신앙과 민족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 팔복을 오늘은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려고 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맥락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시는 게 맞습니까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시는 게 맞습니까 지금 아버지가 대문으로 들어와 마루를 거쳐 가셨다면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시는 게 되지만 지금 아버지가 여행을 가시기 위해서 큰 가방을 사셨는데 그 가방이 얼마나 큰지 실험해 보기 위해서 그 가방에 들어가 보실려고 하는 상황이라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가 되는 겁니다. 모든 글과 이야기는 문맥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이 쓰여진 시기는 대략 1세기가 가까운 시점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쓰여진 시기와 마태복음이 쓰여진 시기는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마가복음은 가장 초기에 쓰여진 복음서로 대략 70년대 예루살렘 성전이 로마에 의해 초토화 된 직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곧 오리라 하셨기 때문에 이당시의 크리스천들은 이 불의한 로마권력을 심판하실 재림 주가 곧 도래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임박한 종말론 사상이 마가복음에는 나오고 곧 세상이 뒤집힐 것이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열망속에서 씌여진 복음서입니다. 그런데 70년에서 한세대가 지나가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로마는 더 승승장구했고 네로의 박해에 이어 도미티아누스, 트라야누스 등 주로 로마의 신을 섬기지 않고 인간을 섬기는 식민지의 작은 이교도들, 황제에게 받치는 세금문제나 로마의 통치 질서에 순종하지 않는 이교도들에 대한 간헐적 탄압들이 이루어졌습니다.
신앙의 구심점이 사라지고 삶의 터전을 잃고 지중해 연안으로 흩어져 디아스포라가 된 이들이 이런 시대가 곧 종식되리라 여겨졌지만 정치경제적(황제이데올로기에 충성하지 않고, 세금을 받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압으로 계속되고 이들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환경에서 이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코로나가 1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3년을 넘어서고 있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여전히 끝날것이라 예상하고 있지만 사실은 어느 누구도 그렇다 함부로 예단하고 없고 그러면서 우리는 뉴노멀을 고스란히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여기에 따라서 몸을 바꾸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새로운 환경이 뒤집어 질 것 같았지만 뒤집어지지 않고 그런 낯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밖에 없는 시대적 현실에서 이 마태복음의 팔복이 씌여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전까지의 모든 생활습관, 사고패턴 익숙했던 몸의 질서는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에 가도 제사드릴 성전은 없습니다. 그들은 지역에서 공동체를 일구며 제사중심의 신앙에서 생활, 성찰중심의 신앙생활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제사장 중심이 교회가 랍비 중심의 교육과 성찰의 공동체로 전환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중의 하나는 이전까지는 주로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순례적인 신앙생활을 했다라면 이제는 지역의 회당을 중심으로 소규모 책임적이고 자율적인 공동체를 만들어가야했다는 것입니다. 새시대가 원하는 새로운 몸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익숙했던 모든 삶의 패턴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나오는 모든 복들은 다 관계적인 복들입니다. 여전한 탄압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는 만만치 않은 현실, 전혀 낯선 땅 낯선 환경, 그리고 낯선 삶의 방식, 그리고 새로운 몸으로 변화해야하는 현실속에서도 여전히 우리가 복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놓치지 말아야하는 신앙의 윤리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애통하는 자(누군가 아파하면 함께 공감해줄 줄 알고), 온유한 자(부드럽고 따듯하지만), 의로운 자(영혼을 팔지 않고), 자비한 자(자애롭고 자비로우면서도), 마음이 순수한 자, 평화를 이루는 자(평화와 순수를 사랑하는자)>
자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이게 삶의 본질적인 것들이고 귀한 가치라는 건 다 알지만 낯선 환경에서 살아남기에도 바쁘고 적응하기에도 바쁘고 만만치 않은 불의한 제국의 압력들에 의해서 감당해야할 짐들도 많은 상황에서 그것들 감당하기도 정신없는데 예수님 참 현실도 모른다 너무 삶을 나이브하게 보시는 거 아닌가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고민의 중심이 헤아려집니다. 대학교 1학년때 신학교에 입학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선배들에게 이끌려 지하 써클실에서 영화를 보았습니다. 빨갱이들의 내란이라고 알고 있던 광주 학살의 현장을 고스란히 담은 영화를 보면서 우리가 알고 있던 지식에 대한 뿌리가 흔들렸던 기억이 납니다. 빨갱이를 소탕한 권력이 아니라 권력욕이 눈이 먼 정치 군인들의 야만의 역사 위에 세워진 권력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하루가 멀다하고 가두시위에 나갔었는데 저녁이 되면 그 가두시위에서 민주화를 외치고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던 선배들이 갑자기 소방훈련을 한다고 집합을 하고 훈계를 하고 신입생이었던 1학년은 아무것도 모른채 겁에 질려서 그냥 소방훈련에 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2학년 선배 한사람이 소방훈련 도중 손을 번쩍 듭니다. 독재타도를 외치면서 새로운 시대를 열망하는 선배들이 낮에는 민주화를 외치면서 밤에는 군사문화의 잔재인 이런 소방훈련을 하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당시 주먹하나가 머리만했고 밤마다 술을 먹고 기숙사에 들어와서는 주먹으로 문을 부수던 선배하나 갑자기 이런 하면서 이단 옆차기로 그 정의감에 불타 바른 말을 하던 2학년 선배를 가격하는 겁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선배들이 달려들면서 그만 하자면서 모든 상황을 종료시켰던 기억이 있습니다.
살면서 그 2학년 선배가 생각이 날때가 많습니다. 비폭력대화의 마셜이 예기하는 것처럼 우리가 비폭력적인 세상을 원한다면 그 비폭력적인 세상을 원하는 방식 또한 비폭력적이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콩을 원한다면 아무리 박해상황이고 낯선 이방땅에서의 삶이고 지나치게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현실일지라도 콩을 심어야합니다. 아무리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현실일지라도 팥을 심어가면서 콩을 기대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폭력적이어도 상대가 아무리 내 욕을 하고 다닌다해도 그 어떤 이유에서도 우리가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가 정말로 원하는 자비로운 세상을 얻기 위해서는 자비로운 삶을 심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억울하잖아요. 이게 말이 됩니까 여자를 사람으로 대했다고 종을 친구로 대했다고 사자밥이 되고 화형에 처형당하고 전차에 끌려가서 놀이감이 되는 세상에서 새시대의 윤리라니요. 코로나로 갇히고 백신패스검사하면서 식당도 찻집도 못가게 하고 자영업자는 죽으라고 열심히 일해도 자신의 인건비는 고사하고 월세도 안나오는데 그냥 아파트 한두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5억 10억씩 버는 세상에서 새시대의 윤리라니요.
마태가 이 팔복을 고백하면서(실제는 9복입니다) 마지막의 이야기를 두 번이나 반복한 이유가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박해를 받고 오해를 받고 터무니 없는 말로 비난을 받아도 즐겁게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자라는 겁니다.
박노해 시인은 “출렁이는 물에다 얼굴을 비춰볼 수는 없다. 흘러가는 물에다 옛노래를 부를 수는 없다.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내 걸음이 좌우될 수 없다. 지금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해와 달은 자신의 길을 간다” 노래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일상 한가운데서 길러내는 삶이 곧 오늘의 나와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갑니다. 변화의 시대, 질병의 시대, 고난의 시대 아픔의 시대, 때대로 터무니 없는 말로 비난을 받는 상황속에서도 비움과 자비심, 따뜻한 마음과 공감의 마음을 잃지 않고 온유하고도 평화로운 삶의 기운으로 우리의 일상을 살려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