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는- 자아를 어떻게 만날 수가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물어보지 않았지만, 필자는 자아가 굉장히 궁금했다. 당시는 이것이 자아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듯싶다. 생각하기에 뭔가가 있는데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서 물어볼 수도 없었던 자아, 몹시 궁금했지만, 이제와 생각하니 자아를 만나고 싶었던 듯하다. 어떻게 하면 자아를 만날까가 질문이다.
정신은 물질의 원형으로 우리가 모든 순간에 만나는 물질에 정신이 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정신을 만날 수가 있다. 문제는 정신이 전혀 드러나지도 않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탐구에 지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만나야 하는 이유는 뭔가가 있는 데 알 수없는 강력한 호기심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정신을 파악해야 내가 원하는 궁극적인 모든 질문에 답을 들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질문도 완전한 답을 알기 어렵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질문읗 하고 답을 찾고 있기는 하다.
여담으로 찾은 답의 예를 들면, 첫째, 과거에 만난 어려움에서 벗어나야 했는데 만약 정신을 탐구하지 않았다면 벗어나지 못함은 물론이고, 거기 그 어려움에서 헤맸을 것이다. 처음에는 정신이 보이지 않아서 과거의 어려움에 매몰되어 있다는 사실도 알기 여려웠다. 하지만 어찌어찌(명상)해서 과거의 어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은 파악했다. '이것은 아니다'란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과거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유는 영혼이 그 어려움에 매몰되어 있기 떄문이다. 가만히 있어도 그 생각이 떠오르고 감정까지 더해져서 괴로워지는 것이다. 물론 세월이 지나면 잊혀야 지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리면 정신의 탐구는 사실상 나아가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벗어날까'고민하던 차 법상스님의 법문을 듣게 되었다. 순간 아! 하고 깨달았다. 법상스님이 하신 말씀은 '우주가 이렇게 있는 상태에서 내가 나온 것이 아니고, 내가 이 우주를 창조했다. 따라서 내가 죽으면 이 우주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우주 역시 사라진다'. 생각하건대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 역시 내가 창조했으므로 내가 그것을 소멸시킬 수가 있다. 그 사람들이 영원히 있어서 나를 괴롭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순간 내가 이제껏 창조한 우주의 문을 '쾅'하고 닫아버렸다. 그러니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미지의 세상, 새로이 나아가야 할 세상, 내가 창조해야 할 세상이 열린 것이다. 생각해 보니 과거의 어려움은 필자가 살던 과거의 물질계이고, 필자가 창조해야하는 새로운 세계는 정신계였다. 정신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과거를 계속 붙잡고 있으면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자아를 찾는 여정, 정신을 탐구하는 여정에서 필자가 얻은 답이다.
이 예를 다른 경우에 적용하면, 요즈음 언론에서 학교폭력이 자주 등장한다. 학교폭력이 문제인 이유는 성인(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은 자아가 완전히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괴롭힘을 당하면, 자아가 이러한 어려움을 헤쳐나오지 못하기 떄문이다. 즉 어린 싹이 자라지도 못하고 꺽이고 마는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대부분의 지식은 외부의 삶을 살기 위하여 배우는데, 우선 그 전에 인간의 정신이 온전하게 성장하도록 해야 아이들이 스스로 이겨 낼 수가 있다.
학교폭력에서 한 아이는 고등학교 자퇴를 했고, 한 아이는 서울 대학교에 진학했다고 한다. 만약 학교폭력을 당한 아이가 이 우주가 내가 창조한 우주라는 생각을 했다면, 내가 창조하였으므로 내가 소멸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는 이런 현실이 영원한 줄 착각했고 거기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이다. 이는 언어 폭력을 당한 아이의 영혼이 그 아이의 언어 폭력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당시 아이에게 이런 말읗 해줘도 정신은 체험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간접 경험, 책을 통해서 이러한 경험, 선과 악에 관한 충분한 토론을 하는 교육이 14- 21세 사이에 필요하다. 이것이 사고 교육이다. 그렇게 되면 실 생활에서 오는 어려움을 이겨내기가 훨씬 쉬울 것이다. 이것이 교육이 반드시 해야 할 일이고, 또 교육의 중요함이다.
두 번째 질문이 일상 삶 속에서 자아를 만나는 일이다. 이제까지 공부한 결과 자아가 상속에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아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히 간절하다. 그래야 내가 하는 일을 자아가 하므로 그 일을 잘할 수도 있고 또 즐거울 듯도 하기 떄문이다. 상 속의 자아가 하니 얼마만큼 해야 잘하게 되는지 등등도 가늠하기가 어렵다. 물론 자아가 상을 벗으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할수도 있다. 깨달은 분들의 말씀에 따르면 깨달음을 얻어도 일상 삶은 똑같다. 똑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는 등 겉으로 보이는 부분은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자가 원하는 답은 아니다.
간절하게 답을 구하는데, 어느 날 불현듯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깨어있는 의식은 자아가 상속에, 꿈꾸는 의식은 자아가 꿈을 꾸는 의식 속에, 잠자는 의식에서 자아는 무의식이다. 그러므로 현실 삶 속에서 자아를 만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지만 정신과학적 요소를 통해서 자아를 만날 수가 있다. 아스트랄체가 의지를 내면 자아가 아스트랄체 속에서 드러나기 떄문이다. 아스트랄체 속에서 어떤 일을 하면 자아가 등장한다. 자아가 등장하지 않으면 그 일을 할 수없기 때문에 반드시 등장한다. 예를 들어 밥을 먹을 때도 아스트랄체 속에서 있을 수만 있다면, 자아가 등장하여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므로 알게 된 사실이다. 이를 거꾸로 생각해 보면, 어떤 일을 내가 한다면 자아를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이 하기 싫다는 등 그렇게 생각하면, 그런 감정은 아스트랄체인데 자아가 그 일을 흔쾌히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므로 그냥 하면 자아가 등장해서 그 일을 잘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스트랄체 속에서 해야 하는 이유는 에테르체를 아스트랄체가 자극, 에테르체의 사고내용(우주 사고)을 가지고오기 때문이다. 또 아스트랄체의 감정이 물질로 환원하여 드러나므로 우주 사고가 표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거기에 자아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아가 함께 한 경우, 그것이 자아에게 저장되어서 자아의 능력이 된다.
요컨대 깨어있는 의식상태인 현실 삶 속에서 자아가 어떤 일을 하도록 할려면, 아스트랄체 속에서 의지를 내면 된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 일을 하면 자아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어떤 일을 의지를 내어서 꾸준히 하면, 자아가 함께 한다는 것이다. 물론 자아가 상을 벗은 상태가 될려면 굉장히 오랫동안 꾸준히 해야할 것이다. 인간의 정신과학적인 요소인 에테르체와 아스트랄체를 파악하면 더욱 쉽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짜증을 내는 일 등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을 듯하다.
정말 중요한 점은 이런 사실을 알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는 것이다. 자아가 함께 하니 재미도 있고, 또 우주 사고내용을 표현하므로 더욱 감동적이다. 우주 사고내용이란 한마디로 정신이다. 내가 물질의 원형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감동을 준다. 요컨대 자신의 근원인 정신이 표현되므로 굉장히 즐겁다. 자아가 드러나는 경우와 우주 사고가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표현되는 경우가 같다. 이 순간 굉장히 행복하다는 사실을 누구라도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진정한 모습, 그 모습이 우주의 정신의 모습이기도 하므로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다고 할 수도 있다.
불가에서 깨달은 분들을 보면, 통상 힘든 일을 하시는데도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다. 얼굴이 행복감에 젖어있는 모습을 뵐 수가 있다. 추측하건대 자아가 그 일을 하기 때문인 듯하다. 자아가 함께 하면 힘든 일도 힘들지 않고 행복하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즐거운 마음으로 그 일을 그냥 하면 자아가 함께 한다. 그리고 꾸준히 하면 자아가 어느 순간 함께 한다. 습관이 되어서 에테르체가 그렇게 정렬할 때까지 한다면, 그 순간부터 능률도 오르고 자아의 능력이 되는 것이다. 아니면 정신과학적 요소를 파악해서 아스트랄체 안에서 의지를 내면 된다. 여러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분명한 건 언제나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