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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강 밀레토스 학파
밀레토스 학파는 오늘날 튀르키예가 위치하고 있는 밀레토스, 또는 이오니아 지역에서 기원전 6세기경 활동하던 철학자들로 구성된다. 주요한 철학자로는 탈레스,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시메네스가 있다. 그리스 철학의 원조답게 그들은 만물의 실체에 대해 탐구했다. 탈레스는 물, 아낙시만드로스는 한정되지 않은 무엇(無-限定者)이 세상의 근본이자 실체라고 보았고 아낙시메네스는 동양에서의 기(氣)로 해석될 수 있는 바람이나 숨 같은 신(神)적인 공기를 세상의 근원이자 참된 실체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생각하는 세상의 근본은 물, 공기, 無한정자 같은 질료라는 공통점이 있다. 게다가 그 질료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았다—예컨대, 아낙시메네스는 진흙과 돌, 구름, 물 등은 궁극적 질료인 신적인 공기(氣)가 응축된 형태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도 밀레토스 학파의 생각은 공통된다.
(서양)철학은 밀레토스 학파의 생각대로 물이나 공기, 한정되지 않은 무엇 등등을 세상의 ‘실체’라고 생각하면서 발전해 오지 않았다. 하지만, 실체는 과연 존재하는가?(존재론), 실체가 존재한다면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인식론) 등 여전히 ‘실체’를 탐구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야말로 진짜 실체라고 주장하는 니체, 데리다 등의 허무주의(일본식 번역), 실체가 존재하는지 의심스럽다고 주장하는 회의주의, 실체가 존재하는지 인간은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 역시 여전히 ‘실체’의 존재 여부나 파악 가능성에 대해 탐구하는 (서양)철학이다. 실체가 하나라는 일원론적 플라톤적 사고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 종교에도 영향을 주었고, 마르크스주의와 같은 (정치적) 사상에도 영향을 주었다.
인간은 자신이 전혀 모르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있는 그대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기가 알던 것 중에 가장 비슷한 것과 동일한 취급을 하면서 받아들인다. 자신이 발명한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시킬 수 있지만, 다른 사람으로부터 수입한 것은 함부로 변형시키지 못한다.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끔 “헌법 위에 국민 정서법이 있다”고 말하는데 헌법은 서양에서 수입한 것이고, 국민 정서법은 국민들에게 각인된 문화적 코드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즉,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헌법 조항과 국민 정서라는 코드가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때 그 헌법은 온전히 받아들여지기 힘들고 갈등이 생길 수 있다.
동양적 사고에는 ‘실체’ 또는 진짜와 가짜라는 개념이 없었다. 따라서 오늘날 서양철학의 코드로 주자학, 이기일원론, 이기이원론 등의 전통사상을 쉽게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실체’의 주요 구성성분이 무엇인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주자와 이황의 주리론(主理論) 사상은 플라톤의 관념론과 비슷하고, 이이와 서경덕의 주기론(主氣論) 사상은 데모크리토스, 스피노자 등의 유물론 내지 실재론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나머지는 책과 PPT 참조)
제3강 피타고라스 (일부)
그리스 고대 철학자 중 플라톤과 소크라테스를 제외하고 후대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 철학자를 고르라면 사모스의 피타고라스와 엘레야 학파를 대표하는 파르메니데스가 있다. 현 튀르키예 지역에서 활동했던 밀레토스 학파가 세상의 ‘실체’를 물, 불, 공기 등과 같은 질료라고 보았다면, 지금의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서 활동했던 엘레야 학파는 질료가 아닌 형상(form) 내지 원리(principle)를 ‘실체’라고 생각했다. 엘레야 학파가 활동하던 시기 이전에 아테네와 튀르키예 사이의 사모스 섬에서 살았고, 오랜 유학생활 후에 그리스 전역을 돌아다니며 활동했던 피타고라스는 세계를 움직이는 근본원리를 ‘수(number)‘라고 보았다.
우주라는 뜻을 가진 영어 단어에는 cosmos, universe, space가 있다. 이 중에서 cosmos는 피타고라스가 최초로 우주라는 의미로 사용했던 단어인데, 본래 cosmos는 order(질서, 주문, 명령)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피타고라스는 우주를 하나의 거대한 질서라고 생각했다. 수적인 비례와 조화는 완전한 상태와 균형을 의미하며, 자연적 질서인 정의(dike)에 부합한다고 피타고라스는 생각했다. 이런 피타고라스의 생각은 서양음악(和聲學)과 미술, 문학, 의학(醫學) 등 거의 분야에서 오랫동안 이어져왔다. 예컨대,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건강은 조화와 균형의 결과이고 질병은 부조화와 불균형의 결과다.
하지만 조화에 대한 피타고라스의 생각은 최근에 뒤집히고 있다. 20세기 들어 현대 의학철학 분야에서는 병원균과 항체가 팽팽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아픈 상태가 유발되고, 죽음은 모든 세포가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 균형상태라고 본다. 반면, 건강한 상태는 박멸될 수 없는 병원균이 건강한 세포를 틈틈이 위협하면서도 팽팽하거나 우세한 상태를 점할 수 없는 부조화 상태라고 본다. 현대미술은 이제 조화와 균형을 별로 다루지 않으며, 아름다움만으로 가득 찬 현대소설은 별로 읽히지도 않는다. 우리는 똑같은 생각이 아니라 이질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으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혜택을 받으면서 잘 살 수 있다.
또한, 피타고라스가 생각한 고대 천문학이나 자연의 이치는 자연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정치학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고대 천문학의 궁극적인 관심은 하늘의 질서가 아니라 하늘의 질서를 빙자한 인간의 질서라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질서가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존 스튜어드 밀은 자연스러운 것에서 윤리적 정당성을 찾는 자연주의적인 사고의 연장선에서 ”인간이 바랄만한 모든 것들은... 바람직하다(All desirable things... are desirable).”고 말했다.
하지만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시기심과 질투심은 그것이 자연스럽다는 이유로 합리화될 수는 없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 또한 누군가를 복종하게 하고 싶은 인간의 의지일 수는 있어도 벼라는 존재와 그의 행동은 인간의 그것과 아무런 논리적 관계가 없다. 즉, 오늘날 인간의 바람직한 행동을 자연에서 찾는 것은 자연주의적 오류로 생각된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적 조화로 이루어진 화성학(和聲學)을 우주의 이치를 탐구하는 천문학(天文學)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으로 보았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을 지혜로운 자로 부르던 제자들에게 자신은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겸손하게 말한 최초의 사람이었지만, 제자들의 발언권은 엄격하게 제한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윤회설을 믿는 종교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었으며, 제자들에게 그는 “나 홀로 얘기하는(ipse dixit)" 사람이었다. 그는 학파 내에 이단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용납하지 않았다. 자연수(natural number)만 존재한다고 믿는 자신의 생각과 다르게 무리수(irrational number)의 존재를 믿었던 제자를 바다에 빠뜨려 죽였다. 피타고라스가 발견한 수의 법칙과 화성학, 조화와 질서 등은 우주의 진리보다는 정치적 수단에 더 가까웠다.
제4강 파르메니데스 (일부)
푸코에 의하면, 피타고라스는 합리성을 발명한 사람이다. 피타고라스는 우주를 질서(cosmos)라고 부른 최초의 사람으로서 우주는 합리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피타고라스에 의하면, 우주를 구성하는 (합리적인) 수의 세계에서 1,3,5,7의 다음에 오는 수는 9이고, 1,2,4,8의 다음에 오는 수는 16이라고 할 수 있지만, 1,3,7,8의 다음에 오는 수는 우주에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앞의 두 사례는 (등차수열이나 등비수열과 같은) 수학적인 질서 체계로 설명할 수 있지만, 마지막 세 번째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엘레아 학파의 파르메니데스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로 대표되는 아테네 철학자들과 그 이전의 피타고라스 사상을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철학자로서 나(허경)는 그를 서양철학사 2,500년의 제1대 사건을 만든 중요한 철학자라고 생각한다. 제1대 사건이란 존재와 비존재(결여), 본질과 비본질,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구분하게 된 사건이다. 예컨대 파르메니데스에 의하면 빛은 존재하는 것이고, 어둠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빛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 또는 빛의 결여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있는 것은 있고, 있지 않은 것은 있지 않다.”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항진(恒眞)명제, 즉 논리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항상 옳은 명제(A=A)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물이 수증기로 바뀌는 것처럼 존재는 불변이라 하더라도 상태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파르메니데스는 현실에서의 이런 상태의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오직 존재와 비존재,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하는 자신의 논리를 고수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부터 이어지는 아테네 정통 철학자들은 참됨(眞, 이데아)을 상위에 놓고 도덕성(善)과 아름다움(美)을 하위 덕목으로 놓았는데, 그 이유는 후자는 감정이나 감각에 의해 인식되고 전자(眞)만이 이성(합리성)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아테네 철학자들은 피타고라스처럼 우주의 질서, 불변의 이치, 그리고 이를 인식할 수 있는 합리성은 신뢰했던 반면, 현실의 사물을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감각은 불신했는데 이를 논리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비존재 이분법이었던 것이다. 논리적으로 존재와 비존재는 불변이지만, 인간의 감각으로 파악되는 현상계에서 존재와 비존재는 가변적이다.
후에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와 상태를 혼동했음을 발견했다.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 심지어 산스크리트어 등과 같은 서양 계통의 언어에는 오늘날 영어의 be 동사와 마찬가지로 ‘있다’(존재)와 ‘이다’(상태)를 모두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가 존재하는데,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가 하나의 단어로서 두 가지를 혼용하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예컨대 be 동사가 존재와 상태를 모두 의미할 수 있다면, “있는 것(존재)은 없을 수 있고(상태), 있지 않은 것(상태)도 있을 수 있다(존재).” 하지만, 플라톤은 자신의 발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데아의 ‘존재’는 신뢰하는 반면, 현재의 ‘상태’를 인식할 수 있는 인간의 감각은 불신했고, 그의 생각이 서양철학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오랫동안 서양철학자들은 사과, 북한산 등 각각의 모든 사물을 대표하는 불변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믿어왔다.
한편, 파르메니데스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밀레토스 학파인 헤라클레이토스는 “만물은 유전(流轉)한다“, ”따라서 인간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파르메니데스와는 상반되는 ‘흐름과 변화의 철학’을 주장했는데, 그에게는 주목할 만한 제자가 없었다. 따라서 헤라클레이토스는 파르메니데스와 같이 서양철학의 전통을 수립하는데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후에 헤겔과 니체가 헤라클레이토스를 재발견하면서 오늘날 플라톤 철학의 대안, 또는 현대철학이 형성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제5강 소크라테스 (일부)
소크라테스는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했다. 이 말은 세상이 신(神)들의 의지에 의해 움직인다고 했던 당대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는데 기여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신들의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 같던 세계가 수의 원리, 일관성 있는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피타고라스가 발견(발명)하면서 신 중심의 세계를 극복하려 했던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주어진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검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은, 소크라테스의 의지와 사고체계가 표현된 말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 이후에는 ‘검토’와 ‘살만한 가치’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인지 되묻는 게 당연시되었고, 소크라테스는 죽음으로써 스스로 검토한 삶의 가치를 지켜냈다.
하지만, 인간이 진정으로 검토된 삶을 살 수 있는 지는 불확실하다. 인간은 스스로 검토한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자신도 모르게 사회적인 대전제를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극히 제한적으로만 검토하는 삶을 사는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검토할 수 없는 삶, 사실상 검토 없는 삶, 혹은 불완전한 검토 속에) 살아가는 삶이 “가치와 무관”할 수는 있어도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어려울 것 같다.
혹시라도 소크라테스가 그렇게(“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만한 가치가 없다”) 말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플라톤이 작성한 그리스어 원전을 찾아봤는데, 소크라테스는 정말로 그렇게 말한 것으로 나온다. 다만,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와 또 다른 제자였던 크세노폰이 묘사한 소크라테스가 많이 다르고, 문헌 비평(text critique)에 의하면 플라톤이 묘사한 소크라테스의 말에 일관성과 신뢰성이 부족한 것으로 보아 소크라테스가 정말로 그렇게 말했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오늘날 소크라테스 주장의 상당수는 사실상 플라톤에 의해 창작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