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남아 ! 네래 정말로 갈거가 " 내 오마니의 한 마디이다. 70대 후반을 향하고 있는 아들의 가슴속에 " 정~말~로 ~ 갈~거~가 ~아~ " 아직도 잔잔한 메아리로 돌아오곤 한다. 미국 이민을 가겠노라고 미리 말씀드렸건만 모든 계획을 포기해야만 한다. 바하마를 인도로 착각한 콜럼버스처럼 향료와 금은보화의 꿈을 갖고 신대륙을 향한 막연한 도전이었는지도 모른다. 일천구백 6,70년대는 박정희 군사독재로 민주 자유 평등은 삭제되고 인권마저 짓밟힌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에 대한 혐오감이 강했으리라. 조그마한 집 한 채도 동생에게 물려주고 회사에도 사직을 통보한 상태이다. 월급은 3만 몇 천원이며 집이라고 고작 500만원 정도의 것이다. 1970년 중반으로 대학동기들뿐 아니라 그 당시에는 약사 이민이 한창일 때이다. 세 살 아들과 한 살인 딸을 품에 안고 찍은 아내의 여권 흑백사진도 무효가 된 것이다. 똘망똘망한 어리디 어린 자식들의 눈망울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니 벌써 지금은 사십대 중반인 중년들이 아닌가. 어머니는 자식들 곁을 떠나신지도 40년하고도 몇년이 흘렀다. 이북산천 고향 땅에 두고온 어머니를 그리며 그토록 목놓아 우시던 내 아버지는 십년 더 먼저 저 세상으로 가신 것이다. " 내가 없으면 너희들은 어떻게 밥을 먹으며 살 수 있겠느냐 " 항상 자녀 네명을 걱정하시던 아버지이다. 하루 세끼 배를 굶지 않고 사는 것만이 일상이었을 때이다. 집도 절도 없이 이제는 방법이 없다. 서울 청계천에 네평 반의 자그마한 약국으로 다시 뛸 수밖에 도리가 없다. 동생집에 어머니와 어린 두 자녀를 맡겨둔 채이다. 약국 다락방에서 아내와 새우잠으로 버티는 생활이다. 밤이면 밤마다 밤잠을 설치게 하는 빈대들의 괴롭힘이 몇몇일이던가. 아침 여섯시면 약국 샷다를 올린다. 밤 12시가 되도록 약국의 노예가 된 셈이다. 약사 까운을 걸치고 카운터를 뛰어넘은 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삼십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약사가 아닌 약장사가 아닌가 하는 자괴감의 돌출 행동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너와 나뿐 아니라 모든 약사들이 거쳐야 하는 세태였을 터이다. " 야 ~ 이게 얼마만인가. 1968년도에 졸업을 했으니 51년만이 아닌가. 너무 반갑고 그립구나 " 지난 달에 올려 놓은 성균관대학교 약학대학 12회 동기들의 스마트폰 채팅방에서 터져나오는 소리들이다. 태평양 너머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동기들과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20대 캠퍼스 시절로 회귀하는 느낌이다. 한국을 떠난지도 40년이 훌쩍 넘은 동기들이다. 아마도 자식들은 겉 모습은 KOREAN이지만 언어는 물론이며 생활습관이나 풍습은 AMERICAN이 아니겠는가.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내 오마니의 그 한 말씀이 그 당시의 우리 가족은 물론이며 오늘 날 네명인 손주들의 운명도 송두리째 바꿔놓은 셈이다. 그 누가 말을 했던가.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말이다. 한국에 지금의 정남이가 미국으로의 국적을 선택했으면 어떤 모습일까. 어느 것이 더 좋은 판단인가는 아무도 속단키는 어려울 것이다. 누구나 오늘 이 자리 이 위치의 자신에게 만족을 한다면 그것이 최선의 아니 최상의 삶의 여정이리라. 해서 매일 주고 받는 동기들의 채팅이 그토록 기다려지며 재미있고 즐겁기만 한 것이리라. " 주혁 문혁 승홍 정식 종환 진해 정숙 우애 창수 먼저 하늘나라로 떠난 영한 경한 충의 또 누구더라 미국에 동기들이다. 계주 양자 영희 홍구 기봉 길군 주수 건일 호현 낙규 낙소 헌두 성연 양균 병구 재명 명언 돈은 재헌 채팅방에 초대한 성대약대 12회 동기들의 이름을 새삼 불러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