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을 위하여 / 차은량
백두산을 만나기 위한 닷새의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온 날이었다. 인천공항에 내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집 안 곳곳의 빠짐 없는 평화를 학인한 후, 샤워를 하고 안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한참을 울었다. 꽉 막힌 듯 답답했던 가슴이 조금 트이는 듯도 싶었으나 그대로 기운을 잃고 몸져눕고 말았다. 더욱 답답한 것은 ‘어디가 아픈가’ 묻는 가족들에게 ‘백두산이 아파요’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에 있었다. 얼마 후 문학 세미나가 있어 문경엘 가게 되었다. 차 안에서 뒷좌석에 앉아 계시던 김현규 선생님이 물으셨다.
“천지 어땠어요.”
“흐렸어요.”
“물빛 봤어요?”
“아니요, 봤지만 봤다고 말씀 드릴 수 없어요.”
“왜요?”
“보여도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왜 그랬을까요.”
“제 마음이 그랬으니까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눈을 비비고 부릅뜨고 몇 번을 다시 봐도 물빛은 흐렸다. 푸른색의 옅은 베일을 두른 것이야 고산의 변화무쌍한 기후 탓이거니, 흐린 날씨에 당연한 일이거니 하기는 했다. 그러면서도 부득부득 천지의 맑고 투명한 물빛을 기어이 보고 싶은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여태 봐 온 맑디맑은 것 중에 맑다’고 하는, 해발 2,670m의 천문봉에서 내려다보는 천지 물빛은 안타깝도록 흐렸다. 천지의 해발수면이 2,289m라고 하니 480여 미터 아래의 깊이이기는 하다. 게다가 전날 안경다리가 부러져 가뜩이나 흐린 날씨에 선그라스를 안경 대신 끼고 있었으니 천지 물빛이 흐리게 보이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물빛을 가리고 있는 옅은 베일을 내 두 손으로 거두어내고 싶었다.
천지를 향해 삼배를 올린 후 카메라를 떠내 들었으나 천지의 모습을 고스란히 단아 안을 광각렌즈는 내게 없었다. 화구를 부분적으로 나누어 서너 컷의 사진을 찍었을까 한데 정해진 30분이 넘었다며 가이드는 앞장서 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선두를 따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데 실제인 듯 한 환청이 듯, ‘다시 와야 해, 꼭 다시 와야 해.’ 하는 백두산의 탄식이 발목을 잡고 매달리는 것만 같았다. 차는 다시 S자로 곡예을 하며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관광 성수기에 손님을 한 번이라도 더 태워야 하는 중국인 운전기사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 남의 나라로 돌아 돌아온 배달민족의 비애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서둘러 지갑을 찾아 기사에게 팁을 건네주자 기사는 잠시 후 야생화 군락 앞에 차를 세웠다. 카메라를 들고 구릉 위로 올라갔다. 반의 반 뼘도 되지 않는 좀참꽃, 노란만병초, 나도개미자리, 세 종류의 꽃들이 큰 산의 울림에 전신을 내맡긴 채 가녀린 꽃잎을 흔들고 있었다. 좀참꽃의 분홍 꽃잎, 노란만병초의 노란 꽃잎, 나도매미자리의 희고 작은 꽃잎들이 부드러운 능선의 구릉 위로 물결치고 있었다. 웅혼한 꽃의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나도 거기 함께 엎드려 꽃의 물결을 이루고 싶었다. 성난 바람의 입자가 되고 싶었다. 작은 꽃잎들 서로 모아 큰 산을 이루고 싶었다.
달포 전이었다. 오장환 문학제에서 만난 김 시인의 “차 선생, 백두산 안갈래요?” 하는 말에 무턱대고 “갈래요.” 하고 대답을 했고, 다른 일로 여념이 없는 사이 날짜가 다가와 중국 심양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평소 같았으면 꼼꼼하게 정보를 입수해 다른 여행사와의 조건들과 비교한 연후에 갈지 안 갈지 여부를 대답했을 것이다. 더욱이 차를 타고 산을 오르는 일은 적어도 남한의 백두대간 종주를 한 내게 이제까지 없던 일이었고, 산을 오르는 일이야말로 인간의 지친 영혼을 정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내게는 더더욱 있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 김 시인에게 ‘간다’ 고 대답했고 간다고 대답한 이상 차를 타고 오르는 산행이라도 약속은 지켜야 했다.
백두산 가는 길. 이도백하를 지나면서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미인송 숲지대가 끝도 없이 펼쳐졌다. 원시의 숲이었다. 숲인가 하면 숲 속에 물이 흐르고 물인가 하면 물 속에 숲이 흘렀다. 미인송 숲지대가 끝나면서 이번엔 만주자작나무와 사스레나무 숲이 보였다. 장백산(백두산)이 가까워 오면서 길 양옆으로 너무나 눈에 익어 정겨운 야생화들이 끝도 없이 피어 있었다. 기품이 넘치는 색색의 매발톱, 바람에 은종 소리를 낼 것 같은 초롱꽃, 하늘나리, 금낭화, 두메양귀비…마음의 준비도 없이 어쩌자고 내가 여기를 왜 왔던가 하는 탄식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아픔이고 눈물이었다. 슬픔이었다. 지금은 내 나라 땅이 아니란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가고 싶을 때 갈 수 없는 곳, 보고 싶을 때 볼 수 없는 것이 다 아픔이고 눈물이고 슬픔인 것이다. 사람도 내게는 그랬다. 어느 날 느닷없이 감정의 소통이 막혀 단절의 벽이 세워지는 숱한 인간관계가 그랬고, 사회적인 통념으로 인해 소통에 우선하여 견고한 성벽부터 쌓아야 하는 관계들이 또 그렇다.
기상대 앞 주차장으로 변한 백두산 천지의 외륜지대는 경사가 완만했으나 발을 옮기기가 힘이 들었다. 가뜩이나 화산재가 흘러내려 미끄러운 경사지를 하루 수십, 수백 대의 지프 바퀴가 할퀴어대니 천지 화구의 높이는 모르긴 몰라도 하염없이 낮아지고 있는 중일 것이었다. 민족의 성산이면서도 민족의 아픔으로 곪을 대로 곪아 있는 천지에 서서 누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가. 누가 기쁨의 탄성을 지르는가. 그대, 천지에서 흐리는 문물은 아픔의 눈물이어야 한다. 비통의 눈물이어야 한다. 남과 북이 화해하고 하나가 되어 손 잡고 올라가 철조망을 걷어낸 후라면 몰라도 아직은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나니.
사박오일 동안 수박 겉핥기식으로 돌아본 중국 심양과 연길. 백두산과 북경지역을 관광하고 돌아왔으나 백두산을 제외하곤 그 어느 곳에서도 내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금서의 규모가 크다고 하나 우리가 중국 대륙만한 땅에 경복궁을 지었다면 자금성의 규모에 멈추었겠는가. 만리장성이 달에서도 보인다고 하나 인간의 감정이 어디 규모로만 다스릴 만큼 동물적이기만 하던가.
남의 땅, 심양으로 연길로 돌아 돌아간 내가 천지의 ‘맑디맑은 것 주의 맑은 물빛’을 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적어도 백두산에서만큼은 그렇다. 훗날 원산으로 청진으로 다시 백두산을 찾게 되는 날, 내 두 발로 걸어서 오르는 그날을 위해 푸른 베일을 쓴 천지의 옅은 물빛을 기억하리. 그때는 세상에서 제일 큰 감격으로 환호하며 열광하리. 소리소리 지르다 피를 쏟아도 좋으리.
첫댓글 수 천년 전에도 국경이 있었던가. 로마 전성기 때는 그 넓은 변방을 지키기 위해 적군의 용병을 썼다. 현명한 방법이 아닌가. 중국은 백성들의 피과 살로 만리장성을 쌓았어도 오랑캐(?)들에게 수없이 당했다. 역사는 증언한다. 국가의 존망은 내부에 도사리고 있다고. 권력 쟁탈전이란 자충수를 두면 끝장나는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