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8)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는 같은가 다른가/ 시인 이승하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는 같은가 다른가
네이버 블로그 - 구미 김천 칠곡 인테리어/ 봉곡초,야은초 수학학원[어머니 - 김초혜]
시에 쓰이는 말, 혹은 시에 나와 있는 말이 따로 있을까요? 우리가 의사를 전달하는 데 쓰는 일상용어는 시어와 다른 것일까요? 결론을 미리 말씀드리자면 ‘같지만 다르다’입니다. 도대체 무슨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냐고요? 자, 이것에 대해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가갸거겨
고교구규
그기가
라랴러려
로료루류
르리라
한센병에 걸려 불우하게 살다 간 시인 한하운이 쓴 〈개구리〉의 전문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의 교과서에서나 볼 수 있는 한글 자모음의 나열, 그 가운데 몇 개를 뽑아놓았군요. 이 시에 무슨 뜻이 있을까요? 저는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이렇게 표현해본 것일 수도 있고, 개구리 울음소리와 아이들 글 배우는 소리가 비슷하다고 생각해본 것일 수도 있고, 자신의 우울한 심사를 개구리 울음소리에 빗댄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껏 울 수 있는 개구리의 자유와 울음조차 울 수 없는 자신의 슬픈 처지를 비교해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신세가 한철 울다 가는 개구리와 다를 바 없음을 이렇게 한글 자모음을 빌어다가 고백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다르다고요? 여러분의 생각이 물론 맞을 수도 있지요. 이것이 시이기 때문에 여러 측면에서 해석을 해보는 것이지, 일상용어의 차원이라면 단순히 한글 자모음을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이 어찌 시라고 할 수 있냐고요? 아, 분명히 시입니다. 시인인 한하운이 시라고 발표했은데 시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겠습니까. 시는 의미 전달에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지 전달, 마음과 정(情)의 전달을 꾀할 때도 있습니다. 충격도 주고 감동도 주고 깨달음도 줍니다. 일상어의 목적은 의사 소통과 정보 전달에 있지만 시어의 목적은 ‘낯설게 하기’, ‘뒤집어 생각하기’, ‘일상어 넘어서기’ 등에 있습니다. 일상어의 세계에서는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가 1:1이 아니면 곤란합니다. 밥이 영어 meal, prey, one’s share처럼 사전에 나오는 의미 중 하나로 쓰이지 않으면 우리 사회에 큰 혼란이 올 것입니다. 밥이 meal을 가리킬 때는 meal만 가리켜야지 meal이기도 하고 prey이기도 하고 one’s share이기도 하다면 곤란하다는 거지요. 시인은 ‘밥’이라는 낱말의 사전적인 의미에 충실하기도 하고 반항하기도 합니다. 특히 시인은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를 1:다(多)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어 중의 밥은 meal, prey, one’s share뿐만 아니라 다른 것까지 포함하기도 하는데, 그런 점을 시어의 애매성이라고 합니다. 일상어는 명확성을 지향하는 반면 시어는 애매성을 지향하므로 일상어와 시어는 다르지만 사용되는 언어 자체는 다르지 않습니다. 밥을 일상적으로 쓸 때는 ‘밥’이라고 하고 시에 쓸 때는 ‘법’이라고 하지 않거든요. 다 ‘밥’이라고 쓰지만 해석은 달리 하게 됩니다.
이런 밥,
부잣집 개라면 안 먹일 거야
기계라도 덜거덕 소리가 날 거야
우리들은 식사를 거부하고
마지막 지점,
옥상으로 모였다
―박노해, 〈밥을 찾아〉의 제1연
이 시에서의 밥은 우리가 끼니때마다 먹는 그 밥과 일용할 양식 정도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런 시를 보십시오.
밥으로 고통(苦痛)을 만든다 밥으로 시(詩 )를 만든다 밥으로 철새의
날개를 만든다 밥으로 오르가슴을 만든다 밥으로 양심가책에 젖는다 밥으로
푸념과 하품을 만든다 세상은 나쁜 꿈 나쁜 꿈 나쁜
밥은 나를 먹고 몹쓸 시대(時代)를 만들었다 밥은 나를 먹고 동정과 눈물과 능변(能辯)을 만들었다. 그러나
밥은 희망(希望)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밥이 법(法)이기 때문이다 밥은 국법(國法)이다. 오 밥이여, 어머님 젊으실 적 얼굴이여
―이성복, 〈밥에 대하여〉 끝부분
국어사전 속에 나오는 밥의 의미만을 가지고는 이 시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밥으로 고통·시·철새의 날개·오르가슴 등을 만든다고 하는 것도 이상야릇하지만 밥이 나를 먹고 눈물과 능변을 만들고, 밥이 곧 국법이고, 끝에 가서는 “어머님 젊으실 때 얼굴‘이라고 하니 몹시 혼란스럽습니다. 이 시에서는 밥이 상징의 기재(機材)로 쓰였기 때문에 사전적인 의미 영역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요즘에는 시인들이 ‘시어’에 대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듯합니다. 소월과 영랑, 지용과 백석, 미당과 청록파 3인의 시를 보면 정제된 시어 선택이 시 쓰기에 있어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 있게 합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1980년대 초반의 몇 명 시인에 의해 쓰인 해체시(혹은 포스트모더니즘 시)의 등장 이후 시인은 언어의 연금술사가 아니어도 무방하게 되었습니다. 패러디(남의 작품 변용하기)를 잘하는 사람, 혼성모방(남의 작품 짜깁기)을 잘하는 사람, 몽타주와 콜라주를 잘하는 사람, 펀(pun, 말장난)의 재주가 있는 사람도 얼마든지 시인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가 언어를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시어는 우리의 정서를 자극하는 데 이용이 되고, 그렇기 때문에 풍부한 애매성을 지니는 것이 좋습니다. 애매성이란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여러 가지 뜻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는 뜻에서 ‘다중의 의미’를 뜻합니다. 자, 이제 ‘같지만 다르다’라는 앞에서 한 제 말의 뜻을 이해하셨습니까?
< ‘시(詩) 어떻게 쓸 것인가?(이승하, 도서출판 Kim, 2017)’에서 옮겨 적음. (2020.07.27.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8) 시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는 같은가 다른가/ 시인 이승하|작성자 화룡이의 행복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