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늘한 바람에 서둘러 스웨터를 꺼내 입을 즈음이면 한국시리즈가 막을 내립니다. . . 히힛~~~ 막상 이렇게 말문을 열고 보니 좀 뻘쭘해지네요.
허영만의 <태양을 향해 달려라>를 보고 야구에 눈을 떴으며(!), 지금으로부터 물경 이십 수년 전에 동대문운동장을 찾아가 동국대학교 야구부가 우승한 것 본 게 유일무이한 야구장 방문이며,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선수가 해태 타이거즈의 김성한 선수와 그 시절에 활약했던 몇몇 선수가 전부입니다.
이렇게 야구에 '내로라 할' 문외한인 내가 한국시리즈 계절이 끝나면 괜히 허전해지는 이유는, 분명 야구의 매력을 나름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철저하게 수비와 공격으로 입장이 갈리지만, 공격이라고 해서 마구 배트를 휘두를 것도 아니요, 수비라 해서 타자들이 쳐낸 공을 쫓아가기만 하는 것도 아닌 것이 야구입니다. 공격에 나선 타자진들은 철저하게 무방비에 가까운 자세로 투수의 공격을 기다렸다가 자신을 향해 뿌려진 공에 제 운명을 맡깁니다.
이 게임은 전적으로 공을 던지는 투수의 어깨에 달렸습니다. 다양한 구질을 준비해두었다가 포수의 사인에 따라 높게 낮게 빠르게 느리게 곧게 휘게 타자에게 미끼를 던집니다. 포수에게 가장 가깝게 서 있는 사람은 상대편의 타자인데, 그는 지근거리의 적군을 침몰시키기 위해 애써 18.44미터 떨어진 곳에 선 아군과 사인을 주고 받습니다.
그리고 이제 스탠바이~~ 포수와 투수가 숙고 끝에 공 하나를 고르고 투수의 한쪽 다리가 땅을 박차고 꺽여 오르면 드넓은 운동장은 일제히 숨을 죽입니다.
그러다 허공을 찢는 "깡~!"하는 소리와 함께 150그램이 채 되지 않은 작디작은 하얀 공이 배트를 맞는 순간 숨죽이고 지켜보던 아홉 명의 선수들은 느닷없이 혈관이 툭 터지기라도 한 듯 일제히 작동 모드로 돌입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자면 잘 짜인, 그러나 절대로 미리 짜여져 있지 않은 아름답고 절묘한 작품입니다.
중계하던 해설위원들은 걸핏하면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표현을 씁니다. 너무 진부한 표현이라서 짜증이 나지만 게임이 끝나고 나면 '정말 각본 없는 드라마야'라는 말이 내 입에서도 나옵니다.
어떻게든 막이 내려진다는 사실 하나만 분명히 정해져 있을 뿐 무대에 오른 그 누구도 그 몫이 결정되어 있지도 그 가치가 완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안하기 짝이 없는 무대에서 게임 전체를 읽어내는 눈을 가진, 냉정하지만 무한한 신뢰를 뿜어내야 하는 포수와 게임이 요구하는 그 어떤 공도 뿌릴 수 있는 투수. 포수와 투수, 배터리의 조화는 절대적인 힘을 갖습니다. 하지만 포수는 대단한 투수라고 할지라도 그의 능력에 함몰되어도 안 되고 투수는 볼 배합이 맘에 들지 않아도 기꺼이 담담하게 포수의 미트에 공을 박아 넣어야 합니다. 그래야 팀이 살고, 게임이 재미있어지고, 저들의 야구인생이 오래갑니다.
자, 이 길고 긴 야구 이야기를 하게 만든 책소개를 이제야 꺼내겠습니다. 아사노 아쓰코의 장편소설 <배터리>(전6권/양억관 옮김/해냄)입니다. 이 책은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가 주인공인 청소년 소설입니다.
출생신고서에 잉크가 채 마르지도 않았으면서 어른에게는 있는 대로 대들고 꼬나보지만 정작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완전 백짓장인 아이들, 그 아이들이 설상가상으로 각본 없는 드라마인 야구에 빠져들었습니다. 다 자란 어른인 감독마저도 자칫하다가는 함정에 걸려들 판입니다. 무엇을 결정할 수 있고, 무엇을 호언장담할 수 있을까요?
길고 긴 세월을 야구감독으로 지내다 은퇴한 할아버지의 눈에는 투수로서 천재적인 소질을 보이는 손자 다쿠미마저도 불안합니다. "어린 나이에 너무 완성되어 버렸어. 그렇게 빈틈없는 폼으로 공을 던지는 것은.."
중학교 야구부 감독인 도무라 선생은 이렇게 조심스레 되묻습니다. "그렇지만 선천적인 소질이 아닐까요?"
오래 살아온 할아버지는 그런 감독에게마저 경고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어린아이는 정말 알 수 없는 존재야. 어디서 어떻게 힘이 붙을지. 다쿠미의 경우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금 모두 펼치고 있는지도 몰라. 그렇다면 더 이상 발전할 수가 없어. 지금은 눈에 띄지 않지만 2년 후, 3년 후에 힘을 발휘하는 아이가 있을지도 몰라. 이보게, 다쿠미에게만 눈을 빼앗겼다가는 그런 아이들을 놓치고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네."(2권239쪽)
할아버지의 말은 다음 대목에서 가히 절정을 이룹니다. "두려움 말이야. 아이에 대한 두려움. 중학교, 고등학교... 그 이상은 나도 몰라. 그 나이의 아이들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 여태 한 번도 눈에 띄지 않던 녀석이 좋아하는 여자애가 시합을 보러 온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홈런을 세 방이나 날린 적이 있었어. 한 달에 10센티미터나 키가 자라서 수비 범위가 갑자기 넓어진 유격수도 있었고, 연습이라면 늘 땡땡이만 치는데도 정말 균형 잡힌 몸매에다 배팅 폼 하나 흐트러짐이 없는 녀석도 있었고 말이야. 도대체 알 수 없어. 이 녀석은 이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지나면 완전히 달라져. 너희 나이 때는 다들 그래. 무서워, 정말로."(2권 139쪽)
소년들의 야구 이야기 속에 정말로 엄청난 메시지를 발견하였을 때 나는 스르르 오한을 느꼈습니다. 사람에 대해 결정짓지 말자, 이 순간 이후의 일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말자. 말할 때 "결국은..."이라는 말로 함부로 마침표를 내리찍지 말자.
얼마나 살아야 다 산 것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두려움을 안고 안절부절 못하며 인생에 송두리째 내맡기되 그 결과를 담담하게 내 몫으로 받아들이려면 얼마나 더 부딪치며 살아야 할까.
지금쯤 야구장의 스타디움에는 병약한 가을 햇살만 슬며시 누워 있을 테지요. 길고 긴 몇 번의 계절이 바뀐 뒤에 그곳에서는 또 어떤 각본 없는 드라마가 펼쳐질지... 설렘과 두려움을 웅얼웅얼 안고 있는 빈 스타디움... 인생도 딱 그렇지 싶습니다. (이미령)
첫댓글 재미있고 또 깨닫는 순간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