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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출생과 고향 - 1 -
1958년 5월 초여드레 나는 전라도 어느 작은 도시의 초가집 골방에서 부유하지 않은
촌부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사와 잡부일 그리고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 하시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시고
그리고 위로는 큰형님과 형수님가족과 당신의 가족을 보살피면서 집안의 셋째로 태어나서
알게 모르게 가장역할을 하시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살아 오셨던 분으로 기억된다.
없는 살림이다보니 언제나 부지런히 일을 하여야만 하셨던 분이었다.
아버지의 형제는 4형제로 백부님은 내가 7살 무렵 여름에 위암으로 작고 하시었고
둘째작은 아버님은 나름 혼자만의 가정을 일구며 85세에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부모님은 나 몰라라 하시면서 오히려 원망의 세월로 살아가셨던 기억만이 내게는 남아있다.
막내 작은아버님은 현재 살아 계시지만 연세도 있고 건강이 여의치 않고 나쁘시다.
우리아버지가 젊은 나이에 작고하신 관계로 막내 작은 아버님께서 집안 대소사를 오랜
세월을 리드하여주시고 지도하여 주시었다.
늙고 병들어서 지금은 세상사를 접의려 하고 계시지만 너무나도 수고하여 주시어서
나는 작은아버님을 친아버지로 생각하면서 살아 왔다.
그리고 가업으신 백모님이신 큰어머님께서 팔순이 넘는 나이지만 건강하게 계신다,
네가 어린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가장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따뜻하게 보듬어
주신 분이시다.
나의 인생에 있어서 마음의 위로가 되어주시고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하는 백모님
이시지만 실질적 정신적 나의 어머니시다.
언제나 나를 걱정과 근심으로 마음 졸이시고 기도로 평생을 가족의 평안과 안녕행복을
기원하고 기도하시면서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까지 언제나 한결같은 어머니이시다.
어머니께서는 지금도 예전의 그 집터에서 살고 계신다.
내가 태어났던 시골 초가집 지금은 초가집은 아니지만 아직 그 집이 그대로 있다.
옛 생각을 하면 아버지께서 볏단으로 이엉을 역어서 지붕위에 올리고 용마루로 마무리
하고 새끼줄로 고정 시키고 대나무로 끝처리를 했던 기억이 새롭게 나는구나.
그때는 동네사람들이 서로협동하고 서로서로 품앗이로 일을 같이 나누곤 하였는데....
어린 시절의 추억을 - 2 -
정말이지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싸움을 하였는지 왜 그렇게 개구졌는지 하지만 나름 귀여움을 차지한 아이였나 보다.
나의 외갓집은 정읍에서 한 시간 가량 떨어진 전남 장성의 작은 시골 농촌마을 이었지요.
초등학교 시절에 그 곳에 놀러 항상 방학만 되면 어머니께서 보냈지요.
방학 시작과 동시에 그곳에 가서 방학이 끝이 나야만 집으로 오곤 하였습니다.
그 때는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어머니가 외할머니가 계신 그 곳에 보내어서 한 입이라도 줄일 겸 하고 우리를 보냈습니다.
외갓집은 그럭저럭 농사와 더불어 전빵을 운영하셨습니다.
그렇게 지내셨기에 어느 정도 먹을 것은 있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어머님의 마음을 이제는 이해할수가 있었읍니다.
그런데 나는 장성의 외갓집만 가면 언제나 싸움꾼이 되곤 하였지요.
그 곳에 있는 동네 형들이 또래 아이들과 싸움을 붙여서 언제나 이기니까 가기만 하면 싸움을
시켰습니다. 심지어 싸울 상대가 없을때는 한 살 많은 외삼촌과 싸움을 시켜서 외삼촌을 때려서 외할머니와 이모, 외숙모에게 정말로 많이 혼나기도 하였지요.
지금도 그 곳에 가보면 옛 생각이 절로 나지만 예전의 내 몸이 아닌 관계로 마음뿐인 지난날의 추억에 잠기곤 한답니다.
돌아가신 막내 외삼촌이나 이모,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군요. 개울에서 물놀이와 수영도 하고 밤에 복숭아밭에서 이모와 함께 원두막에 앉아 복숭아를 먹다가 벌레이야기도 하면서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기도 하였는데.
정읍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외할머니와 막내 삼촌이 몰래 손에 쥐어 주었던 50원짜리 지폐와 100원짜리 지폐가 생각나네요.
엄마 드리라고 하면서 제손에 쥐어 주었던 때가 엇그제 같은데.....
외가를 오고 갈 때면 기차를 타고 가는데 칙칙폭폭 증기 기관차의 기적 소리와 함께 터널을 지나갈 때면 기차 난간에 매달리어 가다보면 코밑이 새까맣게 그을리어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웃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나중에는 디젤 기관차로 바뀌었던 생각이 나는군요.
시골의 옛 기차역의 수조 탑과 기차역사의 추억과 하루에 3~4번 있는 기차 여행의 기억들과 도둑 열차에 담긴 사연은 그 당시에는 누구나가 한두번쯤의 경험이 있었을 거예요.
어렵고 없던 시절이고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나의 할아버지 - 3 -
외가에서는 개구쟁이에 싸움도 많이 하는 나이였지만 친할아버지의 기억들은 나에게 있어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구나..
할아버지는 참으로 곧고 엄하신 분으로 생각난다. 항상 위엄을 갖추시고 밥상머리의
훈육은 지금도 예사분이 아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자하면 항상 따뜻한 밥과 국,
반찬의 조화, 숯불에서 보글보글 끊여서 올리는 찌개. 정결하고 깨끗하게 차려 내놓은
밥상 항상 차려서 내어놓는 할머니의 손길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곧의셨던 분이셨고 할머니께서 고생도 많이 하셨지만 시대의 변천사라 할까?
할아버지와 겸상을 할 수 있는 이는 몇 안된다.
장손이신 큰형님과 막내와 그리고 나 인 것 같다.
다른 식구들은 겸상을 할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 만큼 엄하시기에 .....
그러나 나는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차지하여서 그런지 항상 용인하여 주셨다.
나는 항상 집에서는 최선을 다하여 일과 성의를 다하였다.
언제나처럼 심부름과 유실수에서 얻은 감과 밤, 딸기, 모든 것은 최고의 상품으로 할아버지께
가져다 드리곤 하였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한다고 이뻤겠는가.
손주의 성실함과 성의가 그러하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개구쟁이 시절이었지만 언제나 할아버지 생각을 하면 자연스레 할머니 생각도 난다.
우리 할머니는 한결 같으신 분이셨다.
오로지 가족들의 먹거리와 정안수의 마음으로 빌고 또 비는 그러한 분이셨다.
할아버지의 내연의 처는 두 분이나 더 계시니 "할머니의 속 깊은 마음은 어떠하셨겠는가" 상상하여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작은 마누라 자식들도 있었으니 정말로 이해 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분이셨다.
생각해보면 손주에게 계란을 주면서 팔아서 계정국(보신탕)을 사오라 하는가 하면, 계란을 바꾸어
막걸리로 받아 오라고도 하셨다.
그러면 나는 두 말없이 주전자를 들고 심부름을 하곤 하였다.
막걸리로 받아오면서 몰래 막걸리 한 모금 해보면 그 맛이 어찌나 달고 맛이 있었던지.
발그레한 얼굴을 하고 주전자를 내밀면 이놈 몇 모금 했구나 하시곤 하였다.
재 너머 논에서의 추억을 하면, 언제나처럼 하얀 모시적삼에 지팡이와 모자, 1971년 돌아가시던 그 날까지 한 가족에게 있어서 기둥이 되어 주시었던 분이었다.
할아버지의 나들이에는 항상 ‘케리’라는 개가 곁을 지키고 그 늠름한 자태 또한 생각나게 한다.
행복했었던 어린 시절과 고난 - 4 -
한창 뛰어 놀고 싶은 어린 시절에서는 누구나 어린이의 추억이 있겠지만 개구쟁이로 또한 효심이 가득한 아들로 착한 아이로 잘 자라주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은 다 같을 것이다.
아버지도 나에게 있어서는 정말로 엄하게 훈육 하셨던 것 같았다.
누구에게 지지 않을 정도의 체력을 키우고 몸을 만들라 하셨다.
9살 무렵부터 새벽에 일찍 일어나 아침운동으로 산에 올라가라 하셨다.
산길을 올라 능선을 따라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를 눈보라가 치거나 비가
줄기차게 내려도 언제나처럼 뛰어 다녔다.
어머니는 항상 나에게 사랑으로 이끌어주시었고 책임감을 주시곤 하셨다.
일곱 남매를 낳아 기른 부모님은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그러나 언제나 웃는 얼굴로 우리들에게 사랑과 은혜로 이끌어 주신 것이다.
허나 그것의 추억은 오래 가지 않았으니...
호사다마라 했던가 ,,.. 우리 가족의 불행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중1 때 시작되었다.
행복을 시기라도 했었던가. 생각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14살 나이에 갑자기 닥쳐온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 였었다.
어머니는 막내아들(구현)을 낳고서 그의 후유증으로 몸이 많이 부어오르는 신부전증이 오고 몸이 너무나도 약하게 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뛰어 가시다가 졸지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되셨지요.
1971년 11월말 경 어느 일요일 아침 그날 어머니께서는 광주병원에 가서 진료를 하고
장성외가에 들러 오겠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나에게 부탁하면서 집에서 나가셨었다.
아버지는 장성 외가에서 집수리를 위하여 그 곳에 기거하고 계셨기에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야 두 곳을 들려 늦게 오는 기차를 탑승하여야만 했었기에 무리하게 뛰어야
하는 행동을 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은 그 곳에서도 있었다.
어머니가 갑자기 길을 뛰어가다가 심장마비가 와서 쓰러지셨는데 그곳을 마침 지나던 경찰이
간질병 환자니까 하면서 응급조치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병원은 그 곳에서 불과 100m 쯤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나와 큰집 형님이 그 현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그날 밤, 첫 눈이 내리고 어찌나 많이 왔는지 장례 치르려고
산에 오를 때 정말로 눈에 정강이 까지 빠지곤 하여 애를 먹었다.
고난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어린 7남매가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아버지의 애환은 참으로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내 위로는 형님이 계신다. 형님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70년>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래서 시골집에서는 내가 맏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없는 우리는 어떻게 생활을 하였던가.
바로 밑의 여동생 (초등학교 5학년)이 학교를 그만두고 어린 나이에 밥을 하고 빨래를 하였고
나는 중학교 2학년 이였기에 학업을 그만 둘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여동생이 희생양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막내(구현)이가 심한 폐렴에 걸려 아버지를 힘들게 하였고 아버지 또한 그 막내아들을 살리기 위하여 무던히도 애를 쓰셨건만 72년 늦은 봄날에 우리의 곁을 떠나서 엄마 품안으로
그렇게도 떠나가 버렸지요.
아버지는 우리를 키우기 위하여 새 엄마를 들이시고 생활을 하셨지요.
그러나 나와 새엄마는 마음이 잘 맞지 않아서였는지 항상다툼과 앙숙관계로 지냈었다.
아버지는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일을 나가서 사 나흘 출장 나가 계셨던 때가 많이 있었기에
나 하고 새엄마는 언제나 처럼 으르렁 거렸지요.
어린 동생들 편에서 옹호하려 하면 나에게 폭언이 난무하였고 폭력적인 행동을 서슴치 않았지요. 그러나 아버지의 앞에서는 천사인 양 하는 이면성이 있었기에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그런한 시간을 1년 넘게 참고 견디어야만 했었지요,
그러던 어느 늦은 여름 날, 참기 힘든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큰집에서 동네 친목계가 어울려 지고 있었는데 나는 학교를 하교하는 길에서는 항상 할머니가 계시는 큰 집에 들러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하곤 하였지요.
그 날도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하는데 큰 어머니가 음식상을 차려주시면서 부엌에서 간단하게 먹고 가라고 하셨어요.
방에서는 동네 어르신께서 친목계를 치르는 관계로 그날따라 부엌에서 음식을 먹고
있었는데 그때마침 새엄마가 그곳에 와서 음식을 먹는 광경을 보더니만 하는 소리가 집구석에서 네가 보기 싫어서 여기서 밥을 쳐 먹고 있냐 하는 것이 었어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난 얼굴로 쳐다보았더니 욕설과 폭언이 나에게 향하였고 심지어 부엌칼을 들고 죽이겠다고 달려오는 것이 아니겠어요 !
폭력을 피해 시골집을 두어 바퀴 돌로 있었는데 그러한 광경을 동네 어른들과 할머니가 보았지요. 큰어머니가 그만하라고 소리쳤고 화가 난 할머니께서는 뜰 안의 장작을 들더니만 새엄마를 두어 차례 때려 버렸답니다.
얼마나 속이 상하였으면 그러셨을까,
너무나도 어이없는 상황에 동네 사람들도 어안이 벙벙 하였겠지요.
그런 일이 있었던 그날 밤.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보고 싶기도 하여 뒷산에 있는 묘지를 베게삼아 누어서 어머니의 그리운 얼굴을 그려보다 그만 잠이 들고 말았었지요.
아직은 16살 어린나이인데.. - 5 -
그리하여 그날 밤에 아버지가 내가 집에 들어오지 않으니 동네를 다 찾고 다녀 보았지만 없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늦은 새벽 시간에 엄마 묘지에 와서 보니 그 곳에 제가 묘지를 베게삼아 잠들어 있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요.
그 때 아버지의 마음은 어떻겠어요. 낮에 일어난 일들을 누군가 말하여 주었겠지요.
나의 곁에 와서 조용히 깨우시더니 한 동안 아무 말없이 계시다가 말씀하시기를 "그렇게도 힘이 드니" 라고하시는 거예요.
그때 나는 “지금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공부도 할 수가 없고 집에서 내가 있으면 계속해서 다툼과 갈등만 커지고 동생들을 보호할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함니까” 라고 아버지에게 반문하였지요.
아버지께서는 “너만큼은 꼭 가르키고 싶었는데” 하시면서 말을 잊지 못하시는 거예요.
그리하여 그 해 가을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상경하여 나름 나의 객지 생활이 시작되었답니다.
서울의 작은 아버님께서는 학교나 열심히 다니지 뭐 하러 올라 왔냐고 하시었어요.
“공부나 하지” 하면서 핀잔 아닌 꾸중을 하시는 거였어요.
시골의 상황을 전혀 모르시기 때문에 그러하셨겠지만 어떻게 알 수가 있었겠는가.
훗날 내가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생각하여 보면 그 때의 아버지의 심정은 어떻게
표현 할 수 가 있을까요,
너무나도 기가 막힌 현실에 두 어깨에 짊어진 짐들이 너무나도 무거웠을 거예요.
지금의 나라면 어떻게 이겨낼 수가 있었겠는가.
그렇게 서울로 상경하여 가구 공장에서 또한 유리 가게에서 어린 나이에도 참기 힘든 생활을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세상을 배워가면서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밥만 먹여주고 재워주는 그러한 열악한 생활과 한 달에 두 번 쉬는 날에 당시 500원의 보수를 받으면서 (당시 버스10원, 좌석15원, 극장40원, 자장면60원으로 기억된다.) 힘든 객지 생활이었건만.
그 해로 상경한지 1년여 지난 즈음에 아버지의 병환소식과 더불어 75년 4월에 아버지의 죽음으로 나는 고아 아닌 고아로 이 세상과 맞서 이겨 내야만 하였지요.
그렇게도 건강하시고 강하신 아버지께서 그 짧은 시간에 견디기 힘든 시련이 그 분을 무참히도
꺾어 놓아 버렸지요.
당시 아버지 연세는 45세로 지금 생각하면 한창 청춘인데...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과 막내 구현이의 죽음, 어린 아이들과 새엄마의 갈등 속에서 자식을 제대로 지켜내지 못한 자신과의 정신적 충격을 이겨낼 수가 없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의 마지막 임종이나 유언은 들을 수는 없었지만 어렴풋이나마 그 분의 마음을 이제는
알 수가 있을 것 같아요.
흩어진 육남매 - 6 -
아버지의 죽음과 동시에 우리가족은 모두가 한사람씩 흩어지게 되었다.
형님은 70년에 중학교 졸업과 함께 서울로 상경했다. 형님은 유리가공 공장에 취직하여 그곳에서 기술을 배우면서 생활을 하였고 나는 남의 집 생활과 기술을 배우기 위하여 이곳저곳 전전하였다. 나의 마지막 직업은 목수가 천직이 되어서 그쪽 분야의 기술을 배워 오랜 시간 그쪽 목공분야에서
종사 했다.
첫째, 여동생은 서울숙부님 집에서 살림을 가리켜 시집까지 보내겠다면서 데리고 갔고
둘째, 여동생은 장성에 있는 외할머니께서 데리고 있겠다고 하시면서 데리고 가셨다.
셋째 ,여동생은 정읍 둘째숙부 집에서 , 넷째는 정읍 큰집에서 데리고 가서 그곳에서 큰어머니께서 돌보아 주셨다.
새어머니는 그 당시 당신 친정으로 돌아가시겠다고 하여 그분에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새어머니께 어린 동생들을 데리고 시골집에서 같이 살았으면 권유도 하여 보았지만 싫다고
하시면서 떠나셨다.
그분은 그 뒤로 아무런 소식도 전해 듣지 못하여서 한편으로 마음이 아프다.
가족의 해체와 다름없고 흗어짐은 다시 모이기까지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아이들이 친부모 아닌 친척집에서 살다보니 적응이 하기가 참으로 어려웠었던 것 같다.
옛날에는 먹고 사는 것이 풍족하지 못하였기에 입 하나라도 줄여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더부살이 조카들이 왔으니 얼마나 천덕꾸러기 이였겠는가?
이집 저집으로 옮겨 다니기도 하고 셋째 여동생은 친할머니께서 먼 친척집의 할머니께
우리에게 알리지도 아니하고서 양녀로 보내기도 하였었다.
어느날 셋째여동생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고 싶다고 편지를 나에게 보내 왔었다.
할머니를 찾아가서 동생을 데려가겠다고 말씀드리고 데려갈 수 있게 해달라고 했으나 보내줄 수 없다하여 다시 데려 오기가 정말로 힘들게 이루어 진적도 있었다.
그러던 중에서도 세월은 흘러갔고 1979년 11월 형님께서 결혼을 하게 되어서 동생들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가진 것도 없는 집으로 시집을 와준 형수께서 이해하여 주어 다행으로 가족들이 하나둘씩 형님
집을 기점으로 뭉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린나이에 부모님을 잃은 우리 형제자매 모두가 어렵게 성장하였지만 지금은 자기의 맡은 가정에서 잘 지내고 있어서 나의 마음이 참으로 평안하다.
우리 가족은 어려서부터 갖은 고난과 역경 속에서 자라 와서 그런지 참으로 잡초 같은 인생 역경 이었던 같다.
자기의 맡은바 일들에 최선을 다하는 형제 자매 이기에 다들 잘해주고 있다.
누구나 갈등과 관목이 없었겠야만은 잘 이끌어 주고 이겨 나가는 우리 가족들 같다.
앞으로도 건강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들이 될 것 같다.
젊은 청춘 시절 길들 - 7 -
어려운 환경에서 도움이적실히 필요할때도 있었지만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한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하면 기술이라도 익혀서 독립을 할 수 있는가?
배움이 부족한 나이기에 내가할 수 있는 일들은 남보다 빠르게 기술을 습득하여
그 분야에서 독립을 하는 그런 기술자가 되겠다고 그때는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누구보다도 빠르게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었고 비록 한 분야의 기술이기는 하지만
나는 잘나가는 기술자가 되었다.
목수 그것도 소목장 목수였지 찬장과 신발장, 장롱을 만드는 가구공장.
76년 목수 일을 시작하여서 배움의 시기를 거처 77년 안양의 가구공장에 취직하여 6년 여에
공돌이 생활과 공장장으로 지냈었지요.
그 와중에도 79년 10월에 6개월의 짧은 군 생활을 하였고 의가사 제대로 하게 되었지요.
그다지 길지 않은 군 시절 이었지만 추억은 담겨 있어요.
군대생활을 어떻게 글로써 다 표현 할 수가 있겠어요.
안양의 가구공장에서 생활은 지금 그렇게 하라고 하면 지금의 젊은 사람은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한 달의 일정을 말하자면 일과가 이렇게 진행 되었지요.
첫째와 셋째 일요일만 휴일이고 월요일 ~ 금요일까지는 아침 8시에 작업을 시작하여
밤10시까지 작업을 하여야 했고 토요일에만 6시에 작업이 끝나 야간작업이 없었지요.
그러니까 하루작업시간이 평균 14시간정도 이었으니 아침 먹고 일시작하여 점심 먹고
30분정도 쉬었다가 일시작하여 저녁 먹고 다시 시작하여 밤10시에 작업을 마치고 나서
씻고 나면 10시30분 정도 소주라도 한잔 하자면 자정 12시가 다되었지요.
그 시절에는 통행금지가 있어서 자정이 지나면 경찰이 잡으러 다닌답니다.
나 또한 몇 번 잡히어서 파출소 신세를 진적도 있었지요.
한참 젊고 피 끊는 청춘이고 보니 여러 추억들이 많이 있었지요.
청춘의 나이에 연애도 하고 싶었다고 하여서 룸싸롱을 전전하다 보니 힘들게 벌어논 돈도 다 탕진하게 되었었고 젊은 처자를 만나 첫사랑에 부풀어 한때 결혼도 생각하게되었던 시절이 있었지만 한 때의 추억에 묻힌 사연이 되어 버렸지요.
세상을 잘 보지 못하는 젊은 날들은 먼 훗날에 생각하여 보면 내가 그 때에는 왜
그랬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답니다.
젊은 혈기에 의하여 그렇겠지요.
격동의 80년에는 참으로 조심하여야만 했던 시절 이었지요
TV에서 나오는 장면들과 언론들은 그 당시의 상황은 이해할 수가 없었지요.
[10,26사태][12,12사태] 하극상 군부정권, 광주사태, 삼청교육대, 언론의 통제, 참으로
알 수 없는 상황들이 연속이었기에 젊은 청춘의 나는 직분에 충실했던 일 잘하는 청년
이었기에 관내 형사들이 찾아와서 항상 조심 또 조심 하라고 당부와 조언을 하던 그런
시절이었지요.
나와 조국을 위하여 - 8 -
한창 갈등과 방황을 하던 시절이다 보니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돈도 벌고 마음도 정리하는 계기를 가져야 하였기에 해외파견 근로자로 응시를 하여 84년 2월에 아프리카 리비아로 출국하게 되었다.
그때에는 많은 한국의 노동자들이 외화벌이와 함께 중동의 붐이 일어나던 막바지 무렵이었던 것이었다. 아무것도 준비가 덜된 상황에 도착한 그곳은 나의 생각보다 열악하기 그지없는 황무지와 같은 곳이기도 하였다.
국내에서 소목공과 내장목수 생활을 오랜 세월에 하다가 그 곳에서 갑자기 형틀목공으로 파견
되었으니 나는 그 쪽 분단에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던 것이었다.
그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다 보니 일에 대한 능률이나 애착은 없었었고 그저 시간만 가기를 바라는 거였다.
한 동안의 방황과 열악한 그 곳의 환경은 보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떠한 일로들 자기가 보람을 가지고 해보겠다는 마음이 있어야만 몸과 마음이 편안 하건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으니 불만과 불평만 늘어나고 어려운 나날의 기간이었다.
이러한 나를 유심히 관찰하던 노련한 과장님께서 나를 불러 상황을 알아보시고 과장님께서 직접 가르쳐 줄테니 앞으로는 나와 함께 현장에서 배우자 하셨다.
2개월여 간의 교육과 훈련을 나에게는 보약과도 같았다.
나는 그곳에서 학교를 건설하는데 그 분야의 기초공사를 하였다.
어느 지역에 학교를 짓는데 허허벌판이나 다름없는 곳 이었다.
띄엄띄엄 멀리 집들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와의 사정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현지인들의 생활은 일부다처제라는 제도라서 한 집에 보통 아이들이 10~15명 정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하기에 가옥이 몇 채만 있어도 학교하나를 그 지역에다 세우고 했던 것 같다.
리비아는 사회주의 국가이고 그 때도 가다피 대통령이 정권을 잡고 있었다.
장기 집권에서 죽는 그 날까지 권력을 놓지 않았던 그였기에 지금 생각해보면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 곳에서 이제는 누구 보다 더 적응을 잘하여 다른 동료들을 리드하여 진행 하였는데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는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어떤 동료가 말하기를 너는 대우에 양자 들어왔냐 하는 비아냥 섞인말도 들었으니 얼마나 열심히 하였던가.
나는 맡은 일에는 어렸을 적부터 최선을 다하고 일처리를 정확하게 하였었다.
그러기에 몸에 베인 성격은 아마도 지금 이 나이에도 진행 중 인가 보다.
아프리카 리비아의 생활은 추억과 낭만, 조국에 대한 마음, 가족이 소중함과 그리움, 어렵고 힘든 일의 연속이지만 나름 보람과 긍지를 느끼고 젊은 청춘 시절의 애환이라 할까?
그 곳에서의 생활상은 다시 한번 생각하여 보는 계기가 된 것 같아서 한 편의 추억을 글로 표현할까 한다.
역경과 보람, 젊은 청춘의 추억 - 9 -
사막의 생활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삶의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과 대자연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삶은 가장 극적인 곳이기도 하지만 나름 가장 여유와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가 있구나
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곳에서 추위에 떨었던 기억이다. 마음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맞이하게 된
밤의 추위는 우리들을 한숨도 잘 수가 없는 상황을 맞게 한 것이다.
그곳의 현재 겨울인데 한 낮의 기온은 25˚~32˚ 정도이고 밤에는 2˚~7˚까지 내려간다.
낮에는 약간 덥다고 느끼곤 하는데 밤이 되면 바람과 함께 찬 기운이 살을 애는 듯한 추위가 찾아온다.
기온 차이가 너무 커서 느끼는 체감 온도는 영하의 기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급받은 담요 두 장으로 콘테이너 숙소 안에서 어찌 추위에 견딜 수가 있겠는가.
그래도 작업은 계속 해야만 하는 우리들이 아니었던가. 지중해바다가 가까운 캠프로 이동하면서 조금 나은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한 동안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현지인들과 소동은 참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공사현장에 들어와서 방해를 하지 않나, 아이들이 몰려다니면서 폭언과 우리가 데리고 있는
삼국인들에게도 폭행 또한 서슴치 않았으니 그들의 학교를 짓는 것 이건만 처음에는 그렇게 해방을 놓곤 하였다.
차츰 익숙해지고 그들과 소통과 대화가 조금씩 이루어지면서 그 또한 잘 이끌고 나갈 수 있었다. 무지에서 오는 단순함과 그들만의 우월성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들 나름 민족의 자존심이 있던 것은 아닐까?
4월 중순~5월 말경까지 사하라 사막에서 부는 모래 폭풍 ( 일명 할라스바람 )은 우리를 가장 고통에 빠지게 한다. 그 기간 동안에 서 너 차례 바람이 일어난다.
그 징조는 아침부터 답답함과 후덥지근한 바람과 더불어 기온이 급상승 하면서 온천지가 아주 짙은 안개가 덮어 버린 모양으로 아주 고운 모래가 사방 천지로 가득함과
동시에 기온 또한 섭씨 50˚이상으로 올라가기 때문이다.
눈으로 보이는 시야는 심한 날에는 10~15m 앞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우리 몸의 체온은 36.5˚~37˚이기에 50˚이상의 고온의 바람이 불어와 뜨거운 바람이 콧구멍에 들어오니 참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에 이른다.
그것 뿐 이겠는가. 가는 모래 또한 어떻겠는가, 우리 몸의 구멍구멍으로 다 들어오고 눈은 뜨기가 힘이 들고 입만은 온통 모래가 씹히어 자근거리고 숨을 쉬는 콧구멍에는 가는 모래가 들어오기 때문에 수건으로 코와 입을 막고 지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맨손으로 쇠붓이로 만든 물건은 만질 수가 없을 정도다.
차량 손잡이도 그렇고 문 손 잡이도 그냥 맨손으로 함부로 만졌다간 화상을 입을 정도로 뜨거
우니 한번 상상 하여 보세요.
그 날은 아침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계속해서 이런 바람이 불어오니 참으로 견디기가 고생스러웠지요.
모든 작업은 중지되고 식사 또한 밀폐된 공간에서 에어콘의 힘에 의지하여 지냈구요.
이런 날이 계속 되면 살 수가 없겠지만 1년에 서 너 차례 되니 그때만 잘 참고 견디면 나름 살기가 좋은 환경이 되곤 하지요.
여름 낮에는 40˚에 이르지만 습도가 높지 않기에 그늘만 가면 시원하여 좋답니다.
오히려 밤에는 적당한 온도에 편히 쉴 수도 있구요.
허나 밤에는 단독생활이나 외출은 절대로 아니 된답니다.
몰려다니는 들개와 알 수 없는 일들은 언제나 상존하고 있기에 단체 생활의 활동만 되었답니다. 그렇다고 그 곳에서 고생스런 날만 있었겠어요?
예쁜 추억과 멋진 풍경 또한 잊을 수 없었지요.
쉬는 일요일에는 지중해 바다로 나가 유럽의 아름다운 여인들의 비키니 수영복도 감상하구요.
수경을 착용하고 작살을 준비하여 바다 속의 문어 잡이와 더불어 즐거웠던 그 시절은 잊을 수가 없지요.
너무나도 긴 백사장과 깨끗한 지중해, 오염되지 않은 그 곳 지중해 바닷가는 참으로 추억이 깃든 곳이기도 합니다.
그 젊은 날 넓고 긴 백사장 해변에서 공놀이와 말아톤은 아직도 아련한 추억의 한 장면으로 스쳐 지나가곤 한답니다.
한 편 고대 문명의 발자취가 많은 그 곳에 옛 유적지의 정취는 새롭기도 하였답니다.
클레오파트라의 땅이기도 하고 멋진 사브라타 유적지, 훈, 주와라 고대 공연장,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들려보고 싶은 곳이기도 한답니다.
갈 수가 있으련지요..
어쩔 때면 상상의 나래를 펴고 그 곳에 가곤 한다지만 어딘가 모른 허전함 마음을
달래줄 길은 없겠지요.
추억을 먹고 살 수는 없겠지만 그립구만요.
몇 해 전 오랜 독재 정권이 무너져 자유의 새로운 땅으로 거듭 낫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우리가 가기엔 너무나도 멀고 어려운 곳이기에 나로써 힘든 일이겠지요.
25년 전 그 곳에서 같이 고생하던 동료들이 가끔 연락이 되어 그곳의 추억을 이야기 하다가보면 지금은 시간을 되돌아보곤 한답니다.
그 나라의 인사말로 시작하여 추억 어린 말들은 아직도 나의 마음에 뭉클함이 되살아나곤 합니다.
쌀라 말리 꿈!, 슈크런, 꾸에이스, 밤비누, 리비아의 화폐 디나 ( 양고기를 갈아 넣어 야채와 더불어 만든 ) 바게트 빵의 속을 파내 그 안에 넣어서 맛있게 먹었던 맛은 눈에 선하구요.
현지인들이 그 나라의 전통적인 양고기와 야채를 함께 카레 밥은 그 향신료의 냄새와 더 불어져서 추억의 한 장면이기도 한답니다.
그 곳에서 가장 많이 먹었던 것은 뭐라 해도 오렌지겠죠.
여러 오렌지 중에서 배꼽이 큰 오렌지와 속이 울긋불긋한 오렌지는 정말로 맛이 있었답니다.
울긋 불긋한 오렌지는 처음 먹었을 때에는 상하였다고 까놓고서는 먹지 않고 버렸다가 나중에 먹어보았더니 그렇게 달고 맛났지요.
수박은 어떠하구요. 날씨가 항상 화창하고 햇볕이 많이 받아서인지 당도 또한 끝내주었어요.
크기 또한 정말로 크고 길었지요. 한 개가 25kg정도 나갔으니 정말로 컷지요.
우리들의 내무반 12명이 한 개면 충분히 먹었지요.
동료들과 회식 때면 수박 1개와 오렌지 한 자루면 실컷 먹고 즐겼으니까요.
사막의 야생에서 자란 포도와 아몬드도 기억에 남는군요.
세상 어느 곳이든지 그 곳에서 잘 적응하여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 생각된다,
사람마다 다르고 성격 또한 각양각색 이듯이 현지에서도 어떤 집에서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배려와 환대를 해 준 기억이 있다.
수고하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음식과 음료를 준비하여 우리들에게 함께 할 수 있도록 베풀어 준 이도 있기 때문이다.
문화와 풍습 또한 다르기 때문에 항상 조심 하여야 하겠지만 그래도 개방 되고 환영하는 사람도 있어 이곳도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구나 하는 마음이 있었다.
나는 그 곳에서 정말로 크나큰 대자연의 장관을 목격한 적이 있다.
대자연의 힘이란 어떤 것인가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니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작은가를 알았다.
그 날은 쉬는 날이기에 아침 일찍 식사를 마치고 지중해 바닷가를 나가서 몇몇 동료들과 함께
수영을 하고 문어 잡이와 고기를 잡고 있다가 잠시 쉬기 위하여 바닷가의 둔치 위에 올라서서
내륙 방향으로 눈을 응시 하였었다.
그런데 눈앞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구름의 산이 우리들을 향하고 있지 않는가. 말로만 듣던 모래폭풍의 구름들이 지중해 바닷가를 항하여 맹렬하게 우리를 덮고 저멀리 바다 위에까지 덮어 버리는 것이었다.
참으로 신기하고 위대한 대자연의 힘을 눈앞에서 직접 체험하고 나니 나의 마음이 숙연하여지기 까지 하였었다.
나는 그곳 리비아 현장에서 4년여를 보냈다.
보람과 긍지를 가졌었고 추억 또한 많았다.
어느 정도 이곳에서 생활하다 보니 가족들도 그립고 결혼도 해야 겠다는 마음도 있고 해서 귀국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어서인지 일손이 잡히지가 않았다.
펜팔 하는 아가씨도 있었고 하니 그 얼마나 만나 보고 싶었겠는가.
젊은 피 끓는 청춘이고 하니 이런 마음이 이르니 귀국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때는 88올림픽이 시작되는 9월 말 경이었다.
올림픽도 참관하고 싶었기에 귀국을 하였었지만 막상 입장권도 구입할 수가 없어서 직접 가보지 못하였고 TV로 경기들을 시청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하여 여행도 다니고 결혼도 해야 했기에 선도 보고 다니는 시기가 되었다.
전공을 살려 시골에 주택도 직접 지어보고 경험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앞으로 건설업에서 마음을 두었기에 그 쪽 분야에 대하여 알아야 했었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과는 달리 그 당시에는 안정된 직장의 상대자를 알아보는 것이 아닌가.
건강한 젊은 청춘이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 하였건만 결혼은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이었다. 물론 모든 조건이 충족하게 이루어지기란 정말로 어려워 보였었다.
훗날에 생각하여 보면 인연이란 참으로 알 수가 없는 것 같다.
엇갈린 인생길 - 10 -
안정된 직업과 직장은 어떤 것인가 ?
그러한 조건을 원하니 나는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보직을 요구하였더니 적당한 자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임시로 일당 일이나 하면 어떻겠냐는 제의로 나는 증축 공사를 하는 현장에 나가게 되었었다.
현장에 투입되는 둘째 날 아침에 사고는 일어나고야 말았다.
89년 5월 그 때 나의 나이 32세. 힘이 장사이고 두려움 없이 일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나였었다. 그 당시에는 나와 같이 젊고 힘이 좋은 목수는 드물었다.
사고 당일은 일요일 아침이었기에 잡일을 하는 인부가 나오지 않아서 나는 잡일을 하는 사람의 몫의 일을 하게 되었었다. 우인찌 (작업용 엘리베이터)로 목재를 올려왔기에 그것을 내리는 작업을 하게 되었는데 작업 도중에 우인찌가 갑자기 하강하게 되면서 나의 몸이 우인찌와 작업대 사이에 끼는 사고가 발생하게 되어버렸다.
우인찌 위에 실려 있는 목재 무게는 2000kg정도 이였기에 나는 온몸으로 그 무게를 버티어 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우인찌가 하강하면서 어깨를 타고 내려와 허리를 짓누르면서 나의 몸은 쐐기가 되어 허리의 척추 뼈가 골절되고 그 자리에서 하반신 마비가 되어버렸다.
현장 동료들이 사고가 나자 더 이상 하강을 못하도록 잡고 다시 그것을 들어 올려
나를 꺼내 주었지만 그 때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었던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왜 갑자기 우인찌가 하강하게 되었는지 정신은 또렷이 있기에 아래를 내려다 보았더니 우인찌를 조작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우인찌를 조작하는 사람이 소변이 마려워서 브레이크를 채워놓고서 잠시 자리를 비우게 됐다고는 하였지만 위에서 작업이 끝나기 전에는 절대로 자리를 비워서는 아니된다.
그러나 기계진동에 의하여 브레이크가 풀려 버렸고 그리하여 나는 억울하게도 사고의 당사자가 되어버렸던 것이었다.
사고 현장은 안양 7동에 위치한 산업체 증축 공사 현장이었다.
급히 안양병원에 이송하여 검사하였더니 더 큰 병원으로 가라한다.
차를 달려 용산의 00대 00병원에 이송되어 응급실에 왔건만 그날은 일요일이다.
응급처치만 하고 다음날에 과장님이 오셔야만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한다.
이것저것 검사하고 수술 날을 잡고 수술을 하였건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배꼽 아래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고 움직일 수 없었고 조금만 몸을 뒤척여도 허리의 통증은 어찌나 오는지 침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할 정도로 너무 고통스러웠다.
갑자기 나에게 닥쳐온 시련에 나는 아무런 대책도 없었고 희망 또한 없었기에 어떻게 해야만 할 것인가 나는 내가 알 수가 없었다.
시련 - 11 -
하반신 마비.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하반신 마비 장애자.
그 날의 현실이 내가 감당해야 하는 실제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야 말았으니 그 때의
심정으로 글을 써볼까 한다.
사고가 나자 제일 먼저 형님에게 연락이 되었고 작은 아버지께서 오시어서 병원상황도
알아보시었고 문제되는 뒷일을 맡아 처리하여 주시었다.
검사를 하고 정형외과 과장님이신 강기서 선생님께 1차 수술을 하였건만 아무런 진전도 없었고 가장 큰 문제는 내가 내 자신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나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형제자매들과 함께 열심히 살아야 하는데 병상에서 이렇게 누워 있으면 안 되는데 하는 마음과 이 지경에 될 바에는 현장에서 죽어버리지 이렇게 살아서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살아갈 수 있을지 캄캄한 세상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또 하나 자신감을 잃었지만 더욱더 현실적인 것은 먹고 배설을 해야 만이 살 수가 있는데 기본적인 배설을 할 수가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혼자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었고 24시간 옆에서 지켜 주어여만 하였기에 모든 가족들이 번갈아 가면서 번을 서야만 하였던가.
형님은 낮에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퇴근하여 환자 옆에서 밤새 간호를 해야 했었고
여동생들은 번갈아 가면서 낮에 번을 서야만 하였던 것이었다.
희망이나 있으면 암담하지나 않겠지만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시간만 흘러가니
가족들도 얼마나 고생스러웠겠는가.
나를 아는 친척들과 친구들도 병문안을 와서는 그저 어쩌면 좋겠는가 하면서 슬픔의 눈물과 크나큰 한숨과 안타까움에 혀를 끌끌 차는 것이 아니었던가.
처음에는 동생에게 보험을 적용받기 위하여 진단서를 띄어 오라하니 진단서 내용은
요추 3번 탈골 골절, 척수 손상, 하반신 마비, 진단은 24주 6개월이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6개월만 잘 참고 견디면 나을 수 있다는 생각에 한 때 희망을 가졌었건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기적에나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진단은 최고 6개월 이상은 띄어줄 수가 없다는 것과 추가 연장이 가능한 관계로 하는 것이었다. 나 스스로 혼자서 휠체어를 탈 수도 없었고 휠체어에 앉아 있으려면 몸을 휠체어에 묶어야만 앞으로 넘어지지가 않았기에 묶어야만 훨체어를 탈수가 있었고
나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병상 생활은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관장을 하여야만 대변을 볼 수가 있었고 소변은 스스로 배설할 수가 없기에 폴리(소변줄)을 몸에 꽂아서 주머니로 달고 나면 주머니에 소변이 차면 그것을 열어서 버리면 되니 어찌 사람이 살았다고 하겠는가,
그러하니 먹는 것도 싫고 그저 죽어 버렸으면 하는 생각에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너무나도 화가 나고 속에서 치미는 울화통에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죽을 수가 있을까 ?
먹는 것을 거부할까 아니면 옥상에 올라갈 수만 있다면 그 곳에서 뛰어내리면 죽겠지 하지만 올라갈 수가 있어야지 하체가 마비되어 일어설 수가 없는데 .
휠체어를 계단으로 밀쳐 버리면 될까 하지만 죽지는 않고 더욱 더 고통만 당하겠지. 항상 죽었으면 하는 마음과 절망 더 이상의 희망도 보이지 않으니 어찌 내가 견디고 살 수가 있을까?
7월의 어느 날 장마철 장대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날.
나는 동생에게 휠체어를 태워 달래서 병원 주차장으로 나갔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는 어떻게 달랠 길이 없었기에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한 시간정도 맞고 있으니 주변 사람들이 말렸건만 내가 접근을 못하게 하였다.
그렇게 세찬 비를 맞고 나니 어딘가 모르게 조금은 끓어오르는 분노는 삭힐 수가 있었던 것 같다. 끓어오르는 분노는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고 너무도 암담한 시련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참하고 보잘 것 없는 몸둥이를 생각하여 보면 감당하기가 너무나도 힘이 드는 현실이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갔지만 어떻게 돌파구를 찾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 일이 있고 며칠 후 나는 수술을 하여준 과장님께 직접 면담 하겠다고 하고 무작정 진료
상담실로 과장님께 면담 요청을 하였고 지금 현 상태와 앞으로 어떻게 해야 만 나을 수 있느냐고 질문 하였었다.
정형외과 과장님께서 답하여 주시기를 이렇게 답변을 하여 주시는 것이었다.
사고가 나면서 척추 뼈가 골절되면서 척추 둿 쪽으로 지나가는 척수를 손상 시켰는데
척수는 지금의 현대의학으로는 원상복구를 할 수가 없다는 것과 그 자리는 1.5mm가
조금 넘는 척수의 관이 있는데 수 억 개의 신경다발이 지나간다.
조금 이라도 손상이 가거나 충격을 가하면 그 위치 아래로 마비가 일어나서 어떻게
손을 쓸 방법은 없다는 것이라는 대답이었고 담을 주는 것이었다.
내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은 10~15%이고 당신의 의지에 달렸다.
통상적인 의학적 소견은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하여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 그랬었다. 현재 아무런 진전도 없고 희망도 없고 허리통증이 너무 심하니 재수술을 하여 달라고 요청 하였다.
그리하여 1차 수술 3개월 후 2차 수술을 하였던 것이다.
2차 수술은 손상된 척추 뼈와 척수 손상이 된 지점에 골반 뼈를 잘라 끼워서 보강하는 수술을 하게 된 것이다. 8시간의 긴 수술이 있지만 나는 그때 무엇이든 간에 해보아야 하였기에 모든 검사를 다시 하여 수술을 하였던 것이다. 수술을 받고 난지 일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이었다.
손상된 허리부분에서 전기에 감전된 양 미세한 전기 흐름이 느껴지면서 누워있었는데 하체 아래로 스물 스물 거머리가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러기를 1~2시간 후에 피부의 감각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여동생에게 발가락을 한번 만져보라고 했었다.
그랬는데 느낌이 있는 것이 아니 였던가 이쪽 발 저쪽 발 번갈아 확인 보았더니 알 수가 있던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보이지는 않고 반듯이 누워있기에 발들에 나있는 다리에 나있는 털을 당기어 보라고 하니 아픈 느낌과 함께 느낄 수가 이었던 것이었다.
그 때의 심정은 정말 이제 다 나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생겨서 너무도 기뻤었다.
그런 기쁨도 잠시, 시간의 지남과 동시에 나는 정말이지 죽음의 아픔을 느껴야 했었다.
우리 몸은 운동신경, 반사 신경, 감각 신경이 있는데 감각 신경이 살아나면서 죽었던 운동 신경이 되 살아 나기 위하여 모든 하반신 마비된 부위에서 극심한 자극을 받는데 이것을 정말이지 죽음의 고통이다.
처음에는 심장의 박동과 더불어 수십만 개의 바늘이 마비된 부위를 찌르는데 어떻게 이렇게 큰 통증이 있는지 상상할 수도 없었으니 말이다.
지금은 좌변기를 많이 사용하여서 그런 걸 경험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예전에 재래식 변기에서 오랫동안 쪼그려 앉았다가 볼일을 다 보고 일어나 보면 발바닥에서 발 절임과 함께 몇 초 동안 자극을 받은 경험이 있을 거예요.
아마도 팔딱팔딱 뛰고 했던 경험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그 자극이 마비된 부위 전체에서 계속 지르고 있으니 어떻겠어요.
수 천 수만 아니 수 천 만개의 바늘이 육체를 찌르고 자극을 주면서 그 통증의 증상이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위쪽을 향하여 심장으로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으니 진통제인 모르핀을 주사하여서 견디게 할 수 있었다.
그 약 효과는 2시간 정도여서 그 여력으로 4시간은 견딜 수 가 있었다.
그러하기에 하루에 진통제를 6번씩 주사하여야만 견딜 수가 있었다.
계속해서 통증은 계속되고 고통의 시기와 진전 없는 시간은 계속되었었다.
한 번은 간호사가 내가 거짓으로 통증을 호소 하는가 시험하는 일이 있었다.
통증을 호소하면 모르핀을 주사하여야 했지만 약한 진통제를 주사하였다.
심한 통증은 심장을 넘어서 목 위로 올라와 그만 졸도를 하고 말았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실험이었다.
간호사는 확인하고 싶었겠지만 나는 너무나도 큰 아픔을 느껴야 했었던 것 이었다.
그러한 싸움 속에서 3~4개월이 지나갈 무렵에 왼쪽 다리의 허벅지 근육이 경련이
오면서 꿈틀거리는 거였다.
참고로 마비가 오고 근육은 사용하지 않으면 근육과 조직들이 퇴화가 되면서 수축되어 버린다.
나는 160cm의 단신이지만 장사의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팔씨름은 누구에게나 지지 않았었고 허벅지 다리둘레가 60cm가 될 정도로 단단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80kg 쌀가마를 혼자 어깨에 둘러메고 4층 계단을 쉬지 않고 올라갈 수 있는 그러한 체격과 몸을 가지고 있었지만 무력하게 누워만 있고 마비가 된 다리는 뼈와 가죽만 남아 있는 그야말로 몰골을 하고 있는 처지가 되고야 말았었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근육과 운동신경에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나는 누워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소변을 스스로 볼 수가 없었기에 소변 줄에 의지하여 소변을 해결하여야만 했지만 부작용으로 방광의 염증으로 인하여 심하게 열이 났다.
소변 줄을 소독하고 교체를 하려고 할 때면 너무나도 큰 또 다른 고통이 찾아온다.
감각 신경이 살아나면서 아픔을 느껴야 하였기에 요도에 관을 삽입할 때면 정말이지 고통스러웠지요. 수시로 그러한 일들을 반복해야만 하기에 나는 스스로 소변 줄을 제거하여 버렸고 힘이 들었지만 방광자극과 두 손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압박과 수축의 노력으로 소변 줄 없이 소변을 해결하였던 것이었다.
대변은 감각이 살아나면서 그런대로 관장과 약의 도움을 받아서 원만하게 이루어지어서 해결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때의 나는 젊은 청춘의 남자였다.
남자면 무엇을 생각하게 하였을까?
성욕, 아니 성기능이었다. 성욕은 마음만 있었고 느낌도 들지 않았고 발기 또한 아무런 반응도 없는 무용지물의 상태가 되어 버렸던 것이었다.
남자 아니 수놈 이었던 사람이라고 느낄 수도 없었고 반응 또한 없었기에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남자의 구실을 할 수가 없는 사람으로 변하여 버렸으니 어찌 좌절감이 오지 않겠는가.
그리하여 비뇨기과에 의료하여 당시 김세철 교수님께 상담과 진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총각이고 남자 이였기에 더욱 더 느낌이나 비뇨기에 대하여 서는
민감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 것 저것 검사를 하며 생각하지도 못한 방법으로도 검사를 하여 보고 여러 가지의 검사를 하여 보았던 결론은 척수 손상에 의한 후유증으로 발기 부전이 돼어 이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성욕과 발기가 되어야만 검사도 원활하게 할 수가 있었지만 아무리 자극적인 비디오를 보아도 반응이 오지 않았으니 좀 더 시간이 지나 보아야 겠다는 것과 교수님 께서는 현재로써는 뭐라 해결하여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기다려 보자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이르니 더더욱 그때 사고현장에서 죽어버리지 이렇게 살아서 고통과 시련만 나에게 주니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었던가.
시간과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나는 재활의 끈을 조금 씩 조금 씩 당겨가면서 어떻게든 다시 살아야 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조금 더 노력을 하여 보기로 하였던 것이다.
희망의 빛을 찾아서 - 12 -
보이지 않을 정도의 호전이 이루어지는 일은 있었으나 오랜 시간 누워서 지내서면서 뼈와 가죽만 남은 것은 불과 6개월의 시간이 걸리지 않았었고 그것을 회복할 수 있는 것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픔의 감각은 살아서 느낄 수 가 있는 아픔은 있었지만 얼마나 다행한 일이었던가.
감각이 살아 있다는 것은 희망의 끈이 있다는 것과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되는 것이니 아픔을 참고 견디어 이겨낸다면 언젠가는 일어나 걸어 나갈 것이라는 의지가 생겼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나와 같은 환우들을 보자면 그들이 말하는 것은 아마도 걸을 수 없다는 것이었고 휠체어를 의지하여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조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더 강하게 나를 키워준 아버지가 있었다.
그 분께서 나에게 강하게 만들어준 몸을 어떻게 허무하게 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시간은 조금씩 나에게 희망의 빛을 주었었고 나는 더욱더 노력의 경주를 하게 되었다.
하체의 허벅지 근육을 차츰 회복할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팔의 힘을 빌려가면서 반복하는 그러한 시간이 흘러 사고가 난지 1년의 세월이 지날 무렵에는 간호사나 담당 의사도 지독한 사람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재활의 끈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었다.
참고로 나의 병원침상은 내가 손을 잡고 일어날 수 있게끔 철봉으로 사방은 둘러쳐있었고 두 손을 잡고 일어날 수 있게끔 손잡이가 달린 것을 머리 위에 매달려 있었기에 다리를 붕대에 묶어 봉을 지지대 삼아 손으로 움직여 주는 그러한 구조였던 것이었다.
세월의 시간은 흘러 허벅지의 근육이 살아났고 예전의 20%정도의 다리 힘을 가지고 나의 전체 몸을 일으켜 세우는 재활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하체 근육이 굳어지지 못하게끔 물리치료 선생님께서 하루 한 번씩 근육
운동을 시행 하였었다.
병원복도에는 정형외과 병동이었기에 길이 4m 높이 70~80cm의 평행봉의 재활기구가 있었고 나는 그것을 이용하여 처음에는 봉을 잡고 흐느적거리는 다리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스스로 일어서는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말이 재활의 시작이지 두 다리가 마비된 다리로 일어 선다는 것은 정말로 어렵고 힘들 엇었고 봉을 잡고 운동을 시작하여 한 달여쯤 나는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봉을 잡고 스스로 일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나는 평행봉을 두 손에 잡고 두 팔의 힘으로 4m정도의 철봉을 조금 씩 조금 씩 말고 나갔었고 정말로 나는 할 수 있다는 의지력에 이를 악물고 그 아픈 고통을 이겨가면서 서서 나아갔었고 스스로 설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이렇게 운동을 하고 나면 나는 땀으로 목욕을 했다.
환자복이 흠뻑 젖을 정도로 나는 하루하루 그렇게 해 나갈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정말이지 그 때를 회상하여 보면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 내 자신이 믿어지지 않는다.
아직도 나는 양쪽 다리의 무릎 아래로는 마비가 그대로 있다.
조금은 차도는 있지만 겨우 나의 몸을 일으켜 세워 천천히 보조기에 의지하여 한 발 한 발 걸어갈 수는 있으나 나의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바닥이 고르지 않거나 계단이 있을 때에는 어려움을 겪는다.
예전부터 나는 산을 정말로 좋아하고 즐겼건만 나는 산에 오를 수가 없다.
가고는 싶지만 어떻게 올라갈 수는 있을 수 있겠지만 내려올 수가 없는 그러한 몸의 처지를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장애를 입고 나서 항상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것은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나는 올라갈 수가 없다는 것과 나무에도 올라갈 수 없던 것이었다.
조금이라도 부자연스러우면 나는 행동에 제약을 받으니 서글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그러러니 하면서 마음을 접으니 현재 생활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인연 - 13 -
하루하루 시간과 재활의 싸움 속에서 나의 인연은 그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어렵고 힘든 날들이 그렇게도 무의미하게 지나갈 즈음에 나는 병원의 창가에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앉아있는 한 여인을 보게 되었다.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아무런 말없이 창밖만 바라다보는 모습은 어딘가 모를 수심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그렇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 또한 힘든 병원 생활에 차츰 적응하여 가고 있지만 처량한 나의 모습은 누구에게 내세울 수 없는 그러한 시절이 아니었던가.
그 때 내 나이 33세 노총각이라는 말을 들을 시기였다.
그 때에 만난 그 아가씨는 24세의 젊은 아가씨 이였고 동그란 얼굴에 눈이 크고 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병상련의 말은 이런 곳에서 하는 것인가 보다.
내 처지가 이 모양이다 보니 어떤 아가씨에게 말을 붙일 수가 있었을까,
그러나 그 때에 그 아가씨에게는 말을 붙일 수가 있었다.
나의 병실은 바로 옆 병실에 입원하고 있었고 병원에서 다리가 조금 아파서 검사를 하고 수술을 하면 잘될 거라 믿고 수술을 하였건만 다리를 더욱 더 쓸 수 없게 만들어 버렸으니 그 때의 젊은 아가씨는 어찌 낙담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그렇게 서로가 조금씩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여주다가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때의 나는 산전수전 다 격고 지내온 노총각이었고 아가씨 또한 어려운 생활 속에서 누구보다 더 열심을 다해 살아야 했던 착하고 예쁜 아가씨였던 것이었다.
사람의 인연은 따로 있구나하는 옛말이 생각난다.
사고 나기 전에 나는 선을 보고 다음 주에 고향 정읍에 내려가서 날을 잡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면서 그 당시 약속을 하고 안양에 왔다가 사고가 나서 다시는 그 여자의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내 여자의 연분을 이렇게 따로 있었으니 말이 예요.
처음부터 우리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가 있었겠어요.
조금씩 서로가 이해하여 주니까 마음을 이야기 할 수가 있었겠지요.
당시에 나는 비뇨기과의 문제가 참으로 깊은 고뇌를 가지게 하는 시기였기에 담당의사에게나 말을 할 수가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나의 마음을 전할 수가 없는 것이었지요.
당시 담당의사는 비뇨기에 심각한 어려움이 있기에 2세는 갖기가 어렵겠고 발기부전 또한 보형물 삽입 술이나 약물에 의하여 시행할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었던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그 당시의 나는 정말이지 낙담을 아니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의 의학에 의한 거니까 나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지요,
그렇게도 어려운 시점에서 아내를 만났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인생사가 아닐 런지요.
당시의 그 아가씨의 이해와 아량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우리들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당시의 언행이 다시 나에게 기회를 준 것이라 생각이 되었다.
내가 요구하는 스스럼 없는 행동이었건만 그것을 이해하여 주지 못 했다면 나는 파렴치한 으로
몰릴 수 있는 그러한 일들이기에 더욱 더 당시의 일들을 아내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어렵게 만난 우리들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 후 우리의 만남은 병원을 옮겼지만 계속 되었고 그 와중에도 우리의 첫째 딸 수진이가 생겨서 세상에 선을 보게 되었다.
그렇게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2세를 볼 수 있다는 것에 나는 너무도 감사 했었고
당시에 엄마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자신에 의지를 관철을 지켜내 준 아내에게 너무나도 고맙고 사랑스러웠다.
그 후에도 둘째인 아들 수호가 태어났고 그렇게 우리의 결혼 생활이 시작되게 되었던 것이었다. 만남과 인연은 하늘에서 정하여 주는 것이 아닐 런지요.
나를 이해하여 주고 사랑으로 보듬어 줄 수 있는 그러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으니 참으로 감사하고 감사한 것이다.
재활과 제 2의 병원 생활 - 14 -
사고로 병원에 들어와서 수술을 하고 재활의 시련을 겪어오면서 대학 병원의 아량은 계속하지 못하고 22개월의 대학 병원 생활을 접고 00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지요.
오랜 대학 병원 생활을 하다 보니 그 곳에서 나가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치료는 끝이 났으니 재활 치료는 00 병원으로 옮기어 치료를 하자하여 옮기려고 하였으나 이 병원에서는 특별한 치료는 다했으니 받아 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당시 작은 아버님께서 병원에 옮기는데 같이 가셨는데 00병원에서 병실에 입원할 수가 없다기에 작은 아버지께서 친구 분이신 원장님에게 전화하였다.
그곳 원장님께서 직접 병원장님께 전화를 하니 병원장님께서 우리를 불러 물으시기를 조카가 된다고 하니 담당자를 불러 입원과 편의를 최선을 다하여 돌보아 주라고 하셨다. 그 후에도 담당자는 나에게 정말로 많은 정보와 편리를 봐주었고 나에게는 보다 나은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하여 00병원의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고 대학 병원에서 느낄 수 없었던 생활이 이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곳에 와서 가장 먼저 느낀 것은 나는 이곳의 누구보다도 힘들고 아픔을 가지고 지내는 것이라 생각하였건만 이곳에 와서 보니 나는 이렇게라도 움직이고 생활할 수가 있다는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게 한 것이었다.
여기에서는 기본 5년은 보통이고 오래된 사람은 10년을 넘게 이곳에 있으면서 죽어서야만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조금 다쳐서 잠시 이곳에서 치료하고 요양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보다 더 심한 육체적 고통과 아픔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잠시 소개하자면 이렇다.
26세 젊은 청춘이 경추 손상으로 인하여 전신이 마비되어 내가 있는 병실로 함께한 적이 있다. 그것을 본 나는 하나님에게 감사해야만 했었다.
두 다리는 쓰지는 못하지만 손은 멀쩡하게 사용할 수가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조금은 불편하다 할 수 있지만 움직일 수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 사람은 어떻겠는가.
말도 할 수 있고 정신은 말짱하지만 목 아래로 사지는 움직일 수가 없으니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눈을 뜨고 말을 할 수 밖에 없으니 파리가 눈앞에 와
앉아서 가려워도 고개만 가로 저을 수밖에 없고 몸 어딘가 가려워도 긁을 수도 없으니 이거야 말로 죽기보다 더 힘든 지옥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뭐라 표현 할 수 도 없는 그런 모습을 본 나는 내가 생각을 달리 하여야 하겠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하반신이 완전히 마비되어 오랜 병원 생활에서 욕창이 생겨 뼈 속 깊이 파고드는
욕창의 균에 의하여 결국에는 죽음에 이르러서 그 곳을 떠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더 마음의 다짐을 나는 하고 있었다.
이 곳 00병원의 생활의 의지는 나를 한 걸음 나가게 해주었다.
다시 살아가야 한다. 나도 다시 일어나 남들처럼 가정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러한 집념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었다.
병원을 옮기면서 나는 더욱 더 일어나 혼자 힘으로 걸어야 한다는 마음이 나를 채직질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예전의 어렸을 때 운동을 하였던 새벽에 아무도 없는 병원을 휠체어를 타고 나가서 휠체어 뒤에서 제동 장치를 고정시키고 한발 한발 날마다 병원을 돌고 또 돌고 하였던 것이었다. 너무도 힘이 들었지만 나도 걸을 수 있다는 희망에 2년의 세월을 하루도 빠짐없이 땀이 범벅이 되었지만 이겨냈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면 땀이 범벅이지만 그렇게도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땀범벅이 된 환의를 벗고 샤워를 하고 나면 아침 밥 맛이 정말 좋았다.
내 자신을 북돋아 가면서 그렇게도 열심히 재활에 나는 열정을 다하였다.
내가 00병원으로 와서는 내가 알지 못했던 산재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사고 당시 나의 임금은 일당 3만원, 당시 목수 임금으로도 제법 받았지만 세월의 변천으로 임금이 급상승하게 되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문외한 이었기에 그 곳에서 알아본 결과 정말로 바보로 지냈었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 때에 어느 공장의 반장님께서 사고로 입원을 하게 되었는데 놀라운 것은 당시 그 사람의 월급이 000 만원이 넘는다는 것과 휴업 급여로 000 여만원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시 00 여만원을 받고 있었는데 너무나도 차이가 많이 나고 실망스러웠지만 현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변의 모든 지식과 노동법의 책을 사서 공부하게 되었고 나의 권리를
차츰 하나씩 찾아 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더 아는 것이 힘이 되는 그러한 세상이었다.
생각하건대 나는 몸이 망가져 버렸으니 육체적으로 돈을 벌어 생활을 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병원을 나아가서 생활을 하자면 무엇보다도 경제적 밑받침이 있어야
한다는 것과 나를 지켜줄 지식과 가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풍족하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연금을 받아 생활을 하고 있다.
마음은 언제나 넓고 풍요롭게 생활하자고는 하지만 막상 세상을 살아가자면 어려움이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인가 보다
또 다른 방향 - 15 -
00병원에서 병상 생활을 하다 보니 하반신 마비가 된 환우들도 운전을 하고 나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 때의 나는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당시의 나는 운전면허를 가지고 있었지만 적성 검사 시기를 넘긴 상태에서 면허가 취소되었다.
적성검사를 받을 수가 없었기에 어찌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던 것이었다.
검사를 받을 수가 있었을지 언정 나는 특수한 조건의 면허가 필요했다.
그리하여 나는 병실의 동료의 도움을 받아 동료의 차량을 빌려 개인 레슨과 함께 연습을 하였고 나에게 맞는 면허를 치러서 다시 끔 운전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었다.
처음 운전면허를 취득한 것은 78년도 이었고 그 뒤에도 타이탄 화물차를 운전하였다.
또 외국에 있을 때에는 11톤 카고 차량도 운전했었는데 지난 추억이 되었던 것이었다.
지금도 나의 모든 일과는 차량과 함께 이루어지고 있기에 지체 장애인의 경우에는 정말로 필요한 차량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
지체 장애를 가진 나는 대중교통인 지하철은 무료지만 이용하기란 쉽지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자리는 나는 함께 갈 수가 없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나는 나의 몸의 균형을 잘 잡지 못하기 때문에 피하여야만 한다. 일반 버스는 더더욱 타기가 힘들다.
어쩌다 한번 씩 타다 보면 위험하기도 하지만 운전기사들의 눈치를 많이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나의 몸 사정을 이해할 수가 없기에 내가 먼저 피하여 사전에 예방하는 지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길을 걷다가 보면 서로 몸이 부딪치고 하건만 나는 그것을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고가 난 뒤에는 나는 아직 한번 도 기차를 탄 적은 없는 것 같다.
많은 인파와 계단이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의 일상의 모든 것이 차량과 함께 한다.
먼 거리나 가까운 곳에 이동을 하더라도 차는 나의 다리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지체 장애인은 차와 함께 세상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처음 차량을 구입하여 운전할 때는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언제나 함께 생활하는 그런 사이가 된 것이다.
새로운 출발선 - 16 -
00병원에서 2년여를 지낼 무렵 나는 새로운 출발선에 서있었다.
병원에서 계속 생활할 수 없는 노릇 아니던가.
이제는 비록 힘든 몸이지만 사회에 나아가 나도 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도전의 의지가 생겼던 것이었다.
무엇보다 더 새로운 것은 지금의 아내가 임신의 소식을 나에게 전하는 것이 아니던가.
처음에는 설마 했었는데 정말로 임신이었던 것이었다.
한 편으로는 기쁘고 고마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안 된다고 하던 장모님의 말씀에 망설여 지기는
했지만 고맙게도 건강하고 예쁜 딸이 태어난 것이다.
지금은 대학 2학년의 어엿한 성숙한 여대생이 되었고 그 뒤 둘째인 아들이 태어나서 1남 1녀의 가장이 되어있는 현실이다.
첫째 딸 수진이가 태어나고 예전에 다니던 교회에서 94년 3월에 여러 친지 가족과 친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식을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춘 3월이라 그 때에는 왜 그렇게 추웠던지 결혼식 당일 웨딩 사진을 찍기 위해 도선사 아래 고향산천의 옛 풍경이 묻어있는 식당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정말이지 추워서 혼줄이 났다.
아무튼 그 날 아무 탈 없이 목사님의 주례 아래 식을 마칠 수가 있었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딸 수진이를 이모에게 맡기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
우리는 차량을 가지고 완도 항에서 출발하는 카페리를 타고 제주에 도착하여 3박 4일을 여행할 수 있었다.
여행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우리가 힘을 합하여 성산 일출봉을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1시간이면 왕복을 할 수가 있겠지만 우리들은 거의 3시간여를 걸려 올라갔다올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잘 올라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든 장관이 눈앞에 있었기에 상쾌한 기분으로 내려올 수가 있었다.
훗날 그렇지만 아내는 나중에 후유증으로 발가락이 멍이 들고 발톱 하나가 빠져버리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보람은 있었다.
제주에서 추억은 병실에서 함께 있었던 환우 한 분께서 우리에게 멋진 호텔을 잡아주고 식사도 집으로 초대하여 그곳의 특산품인 옥돔을 구워 정성들여 차리어진 식사를 정말 맛있게 먹었던 기억과 감귤 나무 농장은 함께 했던 일과 돌담장들이 뇌리에 스쳐지나간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 17 -
어린 딸 수진이를 데리고 나는 차량으로 갈 수 있는 전국을 여행하고 다니는 시간이 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더 오랜 병상 생활에서 오는 갈증을 해소하려 했지만 그보다 통증이 너무 심하여 심한 통증을 견딜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차를 운전하다 보면 운전에 집중하여 그 증상을 잊게 하였기에 나는 가족을 데리고 무던히 여행을 즐겼던 것이었다.
길을 가다가 피곤하거나 쉬고 싶을 때면 그 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 행선지를 찾아 그렇게 전국 구석구석 차가 갈 수 있는 곳이면 거의 다 가보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나들이를 하였던 것이었다.
그 와중에 둘째 아들인 수호가 태어날 무렵에 참으로 어이없는 사고가 생겨 가족들이 고생을 하게 되었다.
그 날은 성탄절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수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내가 먼저 유모차 뒤를 밀고 슬럼프를 내려가다가 미끄러지면서 주저앉았는데 그만 우측정강이 다리뼈가 분쇄골절 되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아내는 불편한 다리에 출산이 한 달도 남지 않은 만삭의 몸이기에 이거야 정말로 엎친 데 덮친 꼴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다리 수술을 해야 했었는데 분쇄 골절된 다리와 정강이 뼈 중앙에 철심을 박아서 고정시키는 수술을 하였다.
둘째 아이의 출산이 다가오자 나는 깁스를 한 다리로 집으로 퇴원을 했었다.
병원에서 둘째 수호가 그렇게 어렵고 힘든 상황 이었지만 건강하게 태어나 주었던 것이다.
둘째 출산을 하고 나는 깁스를 한 다리로 집안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내가 만약 이렇게 다시 다쳐 버리면 안 되겠구나 는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 운전 연습을 하여 면허를 취득하게 하였다.
그렇게 되니 여행할 때도 이전보다 훨씬 안심이 되고 든든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지금은 아내가 나보다 운전을 잘 하는 것 같다.
나보다 젊어서 그런지 이제는 베테랑이 다 되었다. 시간이 그렇게 흘러 예전과 같이 이제는 두 아이를 데리고 전국 여행을 계속 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첫째 딸 수진이는 94년 1월생이고 둘째 아들 수호는 95년 2월생이다.
연달아 두아 아이를 낳아서 키워버리니 오히려 잘한 일인 것 같다.
우리들의 처음 보금자리는 창동의 아파트에서 전세를 얻어 살았다.
한 집에서 전세로 10년 그곳에서 이사 한번하지 않고 그렇게 살았던 것이었다.
우리의 형제 가족들인 6남매가 창동에 다 모여 있기에 그 곳에서 오랜 세월을 그렇게 지냈다 보다. 작은 아버님 댁도 수유리에 있었고 상계동에는 장모님이 살고 계셨으니 아마도 그 지역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나보다.
어떤 날은 창동에서 살면서 순간 죽음이 왔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다.
96년 여름 폭우가 내리는 날, 양주 덕정리에 사시는 사촌 큰누나 집에 갔다가 그만
계곡 물살에 휩쓸려 버렸을 아찔한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날은 너무도 많은 비가 와서 밤 9시경 비가 많이 오면 창동 집에 갈 수가 없을 것 같기에 밖에 상황을 보려고 뒤쪽 허술한 다리를 보려고 나갔다가 그만 다리가 부러지면서 난간 끝에 서 있던 나를 계곡으로 끌려 들어가는 순간 나는 그 곳에서 겨우 나올 수가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 이었지만 겨우 모면할 수가 있었다.
정강이 다리에 조금은 상처를 입었지만 그만하기가 천만다행이다 싶었다.
그 때 나는 아이들과 아내를 데리고 곧바로 누나 집에서 나와 창동의 집으로 어렵게 나왔었다.
그 날은 중량 천에 홍수 주의보가 내리어 졌고 하천이 넘칠 정도였고 하수가 역류하고 아파트 주차장의 차량은 높은 지역으로 대피하는 소동도 있어 밤새도록 정말로 비가 많이도 왔었다.
다음날 나는 누나에게 안부 전화를 하였더니 그 곳에서 내가 나가고 1시간도 체되지 않은 시점에서 계곡물이 범람하여 누나 집과 공장부지 일부가 다 쓸려 나가고 누나의 차량은 완전히 흙탕물과 토사에 묻혀 버려서 엉망이 되었다는 소식 이었다.
내가 빨리 판단하여 그 곳에 나왔기 망정이지 큰 낭패를 면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의 어려운 여건 속이었지만 그런대로 아무 탈 없이 두 아이가 커주었고 시간 또한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악연일까? 필연일까? - 18 -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낼 무렵 사촌동생의 연락이 왔는데 투자를 하여 같이 동업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 들어 왔었다,
제주에서 케일과 감귤을 들여와서 항공 화물로 물류 사업을 하자는 것이었다.
항공 화물을 운영하는 친구는 고향의 동문이었기에 제안을 받아들여 시작하게 되었고 김포공항 근처 농장에 임시 창고를 임대하여 짖고 물건을 유통시켜야 했었건만
그 친구는 상황이 좋지 않다고 하면서 나에게 자금만 융통하여 가는 것이었다.
말로만 동업이지 실제는 자금이 필요하여 나를 필요로 했던 것이었다.
나중에 상황을 알고 그 친구이게 동업을 중단하고 돈을 돌려 달라고 하니 동업이기에 돈을 돌려 줄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원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게 되었고 소송과 함께 친구의 사업체의 차량과 부동산을 압류를 하게 되었었다.
사촌 동생이 증인이 되어 주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었건만 서로가 이해관계가 잘 되지 않아 변호사를 선입하여 수원지방법원에서 승소 할 수 있었지만 그 친구가
서울고등법정에 항소를 하여 서울의 항소심 재판까지 가게 되었고 서울의 고등 법원의 판결에서도 승소 하게 되니 결국에는 그 친구가 합의 요청과 함께 부동산을 우리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합의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부동산이 안양에 주소지가 있는 아파트인 것이다.
주공이 옛날에 지어 분양한 아파트였기에 재건축이 필요로 하는 작은 아파트였다.
97년 여름에 합의하여 인수 했었는데 재건축 아파트를 비싼 가격으로 인수를 하게 되었었는데 97년 말 IMF가 터져서 재건축 추진이 늦추어 졌고 다시 재건축을 시작하여 완공하기까지는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2004년에서야 입주를 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참으로 이상한 현상은 안양이라는 곳을 떠나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젊은 청춘을 이곳에서 보내게 되었고 사고 또한 이곳 안양에서 일어났었고 현재까지도 이곳에서 또 다시 10여년을 살고 있으니 악연인가 필연인가.
그 친구와는 악연이었겠지만 안양이라는 곳은 나에게 필연처럼 느껴지는 것은 알 수가 없는 인생사 인것 같다.
죽음의 그림자 - 19 -
창동에서 살고 있던 1999년 여름 어느 일요일 아침이었다.
일요일이라 그날은 아침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교회에 나가는데 그 날은 아침부터 왜 그렇게 기분이 좋지 않을 정도의 답답함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교회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아는 집사님이 우리 집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었기에
모셔다 드리기 위하여 차량에 오르려고 할 때에 갑자기 답답한 가슴과 현기증과 더불어 식은땀이 나는 것이 아닌가.
아상하다 싶기도 하였지만 1분쯤 지난 다음에는 아무렇지도 않는 몸 상태로 돌아가기에 의구심을 들었지만 그렇게 흘려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흘러 저녁 무렵에 좀 더 심한 압박과 현기증이 왔었고 기간 또한 2분여를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이상한 증세를 보였기에 오늘은 일요일이라 다음날
병원에 가서 확인을 하여야 한다는 마음먹고 그날 밤을 보내기로 한 것이 이었건만
응급상황은 그날 밤 자정쯤 일이 터지고 말았다.
TV를 보고 자정 무렵에 잠자리에 들어 같고 혼자서 잠을 청한지 30여분쯤 심한 압박과 함께 몸을 가눌수 없을 정도의 현기증과 더불어 가슴이 조이는 답답함이 온 전신을
감싸고 있었기에 소리도 지를 수도 없는 상황 이었었다.
가슴을 움켜지고 신음만 하고 있는 나를 아내가 발견하게 되였고 119에 연락하여 병원으로 황급히 이송 되였고 응급실에 도착한 나를 보더니 심근경색이 와서 그러하니
응급조치를 취하게 되였고 다음날 곧바로 진찰결과 심장의 혈관이 막혀서 그러하니
시급한 시술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판단에 혈관 조형술에 의하여 시술을 받게 되어
긴박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이었다.
사람들이 밤새 안녕이라는 말을 하는데 이러한 일이 일어나면 해당되는 말인 듯하였다
의사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이러한 증상이 왔을 때에 빨리 병원에 와서 조치를 취해야하는데 잠이 들어 버린 상태나 술을 먹은 상태에서 이증상이 오면 곧바로 죽음에 이르는 심정지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아침에서야 자는 줄 알고 깨워보지만 이미 황천길에 같으니 되돌릴 수 없는 일이라 한다.
정기적으로 이제는 검사도하고 약도 먹고 죽는 그날까지 약에 의존하며 살아야하지만 그래도 저승 아닌 이승에서 이렇게 살고 있으니 말이다
아내는 가끔 이런 말을 나에게 한다.
그때 내가 발견하지 못 했다면 당신은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되어있을 거라고 그러하니 나에게 평생은인으로 잘 모시고 지내라고 농담반 진담반으로 내게 말을 건네곤 한다.
그러하기에 죽음의 그림자는 나의 곁에 항상 있지만 잘 보살피면 그리 쉽게 나에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나는 믿는다.
인명은 제천이라 하였던가.
삶과 죽음은 언제나 우리의 곁에 있지만 그것도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들기면 삶이 풍요로워 지는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낙담만 하면 항상 불행이 그 사람 곁에서 있는 것 같다.
보다 긍정적으로 모든 것을 받아 주는 그러한 생활이 나에게 주어 주었으면 바램을
나는 원한다.
누구나가 자신의 삶이 녹록치 만은 않겟으나 자기 자신에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웃음과 행복한 마음이 따라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언젠가는 나도 저승사자의 부름을 받아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겠지만 저 세상으로 가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하는 삶의 지혜가 필요 할 것이라 생각한다.
또 다른 삶과 만남들 - 20 -
서울의 창동 생활에서 안양의 생활터전으로 2004년 2월에 이사를 하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안양의 터전은 그렇게 새로운 이정표가 되는 시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더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데 많은 활력소가 되는 곳이기도 한곳이다.
만남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는가 하면 자신이 그곳에서 얼마나 적응을 잘하느냐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겠지만 아무튼 나와 이곳은 아마도 인연이 깊은가 보다.
창동에서 살면서 심장병이 와서 재활치료의 일환으로 운동을 하라하여 헬스장에 갔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사양 아닌 거절의 쓴잔을 마셔야만 했다.
불편한 몸 상태에서 자칫 사고라도 나면 책임질 수가 없으니 다른 곳을 알아보라 하였다 .
그리하여 나는 그 지역의 복지시설을 알아보았으나 너무나 열악한 상태의 운동시설이나 환경이 열악하여 마음이 아팠다.
그리하여 타 지역의 복지시설인 곳을 찾아가 운동을 할 수 있었다.
그 시설은 다운증후군의 환우들이 만든 복지시설로 개관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인지 쾌적하고 운동기구와 강사진도 나의 마음에 들어서 2년여를 그곳에서 운동을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안양에 이사를 와서 시설을 알아보았는데 맨 처음 의왕의 체육시설이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에 접수를 하려는데 거정 당하였다 타 지역 사람을 받지 않는다고
하면서 안양에 소재를 두고 최근에 문을 연 복지관을 가보라 한다.
그리하여 내가처음만난 안양의 복지시설인 수리장애인 복지관을 그때에 알게 되었던 것이었다. 처음 만난 복지시설 이었지만 참으로 잘 지어지고 모든 여건이 나의 마음에 꼭 들었다 무엇보다 더 나와 같은 장애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 이었고 말동무도 할 수 있는 잘 어울려지는 시설 이었던 것이다.
만남의 중요성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더욱더 실감하게 되었다.
만남이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시설과의 만남도 하나의 행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남의 중요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더 실감하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도 중요하지만 이러한 시설과의 만남도 하나의 행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차츰 이곳 시설에 적응하면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친구 아닌 친구들과의 만남이 이루어졌고 어울렁 더울렁 그렇게 어울려 가면서 이 곳 안양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었다.
사람은 어느 곳에서도 잘 어울리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탁아소가 필요하고 학생들은 학교가, 사회인은 회사와 공장과 일터가 필요하고 살림을 하는 주부는 가정이 필요하지만 장애인이나 노인은 아직도 필요로 하는 공간이 있는데 열악한 환경이다.
노인들은 노인정에 장애인은 장애인 복지시설의 공간이 있어야만 만남과 쉼터가 될 수 있으련만 현실은 만족함이 떨어진다.
나는 이곳에 와서 이러한 시설이 있다는 것이 참으로 행운이고 다행인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수영장, 체력 단련실, 물리 치료실, 주 단기 보호시설, 언어 치료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설이며 보호 작업장이나 그것에 필요한 모든 시설과 이곳에서 주관하는 여러 가지의 프로그램 또한 나에게 있어서 정말로 행복한 공간과 시간을 주었던 것이다.
나는 더더욱 풍요로운 생활을 하게 한 정보화 교육은 모든 면에 있어서 잘 어울리는 삶을 주었던 것 같다.
내가 이곳에서 10여년을 생활하면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도 이곳 복지관 이고 이곳에 거주하고 있는 날까지 아마도 많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낼 것 같다.
복지관을 이용하면서 그 동안 느낀 점을 몇자 적어볼까 한다.
이 곳 시설을 이용하는 사람은 정말로 많이 있다. 아침 일찍부터 이곳에서 거주하는 사람까지 이 시설의 이용자들은 아마도 복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느 정도의 장애를 가진 사람마다 필요한 만큼의 시설을 잘 이용하면 풍요로운 생활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니 자기의 범주 내에서 이용하면 좋겠다.
이곳 시설에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입맛대로 맞출 수는 없는 것이니까.
식당을 이용한다던지, 프로그램을 이용하면서 100%만족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정도 만족하면서 이곳을 이용한다.
1년에 봄. 가을로 나들이도 하고 프로그램에 따라 바깥나들이도 할 수 있으니 이 어찌 아니 좋을 수가 없겠는가.
쾌적한 공간의 헬스장이나 강당 등 그 외의 부설시설 또한 잘 되어 있지 않은가.
합창과 노래교실, 여가 활동하는 프로그램 또한 잘만 이용한다면 삶이 업 되는 것이 아니던가.
지식의 삶의 정보화 교실이며 차 한 잔을 즐길 수 있고 다드림 까페 또한 풍요로움을 더해 주겠지.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공간이고 보니 불만과 불평을 토로하는 사람들도 있다.
서로가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여 주면 좋으련만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는 사람과 억지와 편견을 가지고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사례들도 많이 보았다.
이곳에서 지내다 보니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나 일들을 보고 느끼게 하는데 여러
장애의 유형이 있다 보니 그로 그러할 것인 것 같다.
다 나열할 수는 없지만 가장 안타까운 것은 정신적 장애가 있는 친구들을 보노라면 답답한 심정을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장애를 가진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얼마나 아픈 마음을 안고 살아가겠는가.
그 부모님들은 그저 자식을 위하여 희생을 감수하여야만 하고 타인의 눈총과 내가 부덕함에 대한 마음에 항상 짐을 짊어지고 가는 고된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던가.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었으면 하는 것이 그들의 바램 일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손을 내밀면 받아주고 넓은 이해와 아량으로 지켜보아 주고 그들의 입장에 서서 한번 봐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선생님들과 관리를 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다.
통제가 쉽지 않은 장애우 들을 데리고 생활 하다 보니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다.
너무나도 수고들 하고 계시는데 합당한 대우는 받는 것 같지 않아서 못내 아쉬운 마음인 것이다.
사랑과 봉사로 그렇게 하고 계시는데 보다 나은 환경과 조건들이 뒷받침하여 주었으면 한다.
아직까지도 사회복지에 근무하고 계시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정책적으로 따라가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보다 나은 지원 정책들이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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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진짜 글을 잘 쓰시네요
엄청난 일을 담담하게 써내려 가시다니... 먹먹합니다. 대단하시네요.
저도 글을 쓰며 더 단단해져가는 저를 발견했는데...
수호천사님은 아주 단단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