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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끼전 (작자 미상)
하늘과 땅이 처음 열릴 때 만물이 번성하니, 그 가운데 귀한 것은 사람이요 천한 것은 짐승이었다. 날짐승도 삼백 종류 길짐승도 삼백 종류인데, 꿩의 모습을 볼 것 같으면 의관1)은 다섯 가지 색이요, 딴 이름은 화충(華蟲)이다. 산새와 들짐승의 타고난 성질대로 사람을 멀리하여, 푸른 숲 속 시냇가에 휘늘어진 소나무를 정자로 삼고 상하로 펼쳐진 밭과 들 가운데 널려 있는 곡식을 주워 먹고 살아간다. 그러나 임자 없이 생긴 몸이라 관청의 사냥꾼과 사냥개에게 툭하면 잡혀가서, 나라의 높으신 벼슬아치들과 지방의 관리들, 다방골2)의 잘난 척하는 사람들이 새와 들짐승 고기와 같이 실컷 먹고, 좋은 깃털은 골라내어 군인을 지휘하는 깃대나 화살의 장식, 가게의 먼지떨이 등 여러 가지에 두루 쓰니 그 공이 적다고 하겠는가?
평생을 두고 숨어 있는 자취와 좋은 경치를 보고자 하여 구름 위로 우뚝 솟아오른 높은 산봉우리에 허위허위 올라가니, 몸이 날쌘 보라매는 여기서도 얼른 저기서도 얼른거리고, 단단한 몽둥이를 든 몰이꾼들은 여기서 “우와!” 저기서 “우와!”, 냄새 잘 맡는 사냥개는 이리로 컹컹 저리로 컹컹대며 배추 속잎 떡갈잎 뒤지듯이 찾아 대니 살아날 길이 전혀 없구나. 사잇길로 가려 해도 하도 많은 포수들이 총을 메고 들어서 있으니 엄동설한 굶주린 몸은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 하루 종일 푸른 산 더운 햇볕을 받은, 산 아래 펼쳐진 밭이며 넓은 들판에 혹시라도 콩알이 있을 법하니 한번 주우러 가 볼거나.
이때 장끼3) 한 마리가 붉은색 비단 두루마기에 초록색 비단 깃을 달고 흰 동정을 씻어 입고 주먹 같은 옥관자4)에 꽁지 깃털을 달고 나타나니, 대장부의 기상이 뚜렷하구나. 또 한 마리의 꿩인 까투리5)의 치장을 보면 잔누비 속저고리를 한 폭 한 폭 가늘게 누벼 위 아래로 갖추어 입었다. 아홉 명의 아들과 열두 명의 딸을 앞세우거니 뒤세우거니 하며,
“어서 가자, 바삐 가자! 질펀한 넓은 들에 줄줄이 퍼져서 너희는 저 골짜기 줍고 우리는 이 골짜기 줍자꾸나. 알알이 콩을 줍게 되면 사람의 공양을 부러워할 필요가 있으랴. 하늘이 낸 만물이 모두 제 나름의 먹거리가 있으니 한 끼 배불리 먹는 것도 자기의 재수라.”
하면서 장끼와 까투리가 들판에 떨어져 있는 콩알을 주우러 들어간다. 그러다가 불은 콩 한 알이 덩그렇게 놓여 있는 것을 장끼가 먼저 보고 눈을 크게 뜨며 말하기를,
“어허, 그 콩 먹음직스럽구나! 하늘이 주신 복을 내 어찌 마다하랴? 내 복이니 어디 먹어 보자.”
옆에서 이 모양을 지켜보고 있던 까투리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아직 그 콩 먹지 마오. 눈 위에 사람 자취가 수상하오. 입으로 훌훌 불고 빗자루로 싹싹 쓴 흔적이 매우 이상하니 제발 그 콩일랑 먹지 마오.”
“자네 말은 미련하기 그지없네. 이때를 말하자면 동지섣달 눈 덮인 겨울이라. 첩첩이 쌓인 눈이 곳곳에 덮여 있어, 산마다 나는 새도 그쳐 있고 모든 길에 사람의 발길이 끊겼는데 사람의 자취가 있을까 보냐?”
까투리도 지지 않고 입을 연다.
“사리는 그럴듯하오마는 지난 밤 꿈이 크게 불길하니 잘 헤아려 처리하오.”
그러자 장끼가 또 하는 말이,
“내 간밤에 꿈을 하나 꾸었는데, 누런 학을 빗겨 타고 하늘에 올라가 옥황상제께 문안드리니, 상제께서 나를 보시고는 산림처사6)에 임명하시고 만석 창고에서 콩 한 섬을 내어 주셨으니, 오늘 이 콩 하나 그 아니 반가운가? 옛 글에 이르기를 ‘주린 자 달게 먹고 목마른 자 쉬 마신다’ 하였으니, 어디 한번 굶주린 배를 채워 봐야지.”
그러나 지지 않고 까투리 또 말하기를,
“당신의 꿈은 그러하나 이내 꾼 꿈 해몽해 보리다. 어젯밤 이경7) 초에 첫 잠이 들어 꿈을 꾸었는데, 북망산 음지쪽에 궂은 비 흩뿌리면서 맑은 하늘 쌍무지개 갑자기 칼이 되어 당신 머리를 뎅겅 베어 내니, 이야말로 당신 죽을 흉몽임에 틀림없소. 제발 그 콩일랑은 먹지 마오.”
장끼 또한 그대로 있을쏘냐.
“그 꿈 또한 염려 말게. 춘당대8) 알성과9)에 문과 장원으로 급제하여 어사화 두 가지를 머 리 위에 숙여 꽂고 서울 큰 거리로 왔다 갔다 할 꿈이로세. 어디 과거에나 한번 힘써 보세나.”
까투리가 다시 하는 말이,
“한밤중에 또 한 번 꿈을 꾸니, 천근이나 되는 무쇠 가마솥을 그대 머리에 흠뻑 덮어쓰고 만경창파 깊은 물에 아주 풍덩 빠졌기에, 나 홀로 그 물가에 앉아 대성통곡하였으니, 이야말로 당신 죽는 꿈이 아니겠소? 부디 그 콩일랑 먹지 마오.”
장끼란 놈 또 하는 말이,
“그 꿈은 더욱 좋을씨고! 명나라가 다시 일어날 때 구원병을 청해 오면, 이 몸이 대장 되어 머리 위에 투구 쓰고 압록강 건너가서 중국 땅을 평정하고 승전 대장 될 꿈이로세.”
그래도 까투리는 또 말한다.
“그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사경에 또 한 꿈을 꾸니, 노인은 마루 위에 있고 소년이 잔치를 하는데, 스물 두 폭 구름 장막을 받쳤던 긴 장대가 갑자기 우지끈 뚝딱 부러지며 우리 머리를 흠뻑 덮어 버렸으니, 어찌 답답한 일을 볼 꿈이 아니리오? 오경 초에 또 한 꿈을 얻었는데, 낙락장송이 뜰 앞에 가득하고 삼태성10), 태을성11)이 은하수를 두른 중에 별 하나가 뚝 떨어져 당신 앞에 걸렸으니, 당신 별이 그렇게 된 듯하오. 중국의 삼국 시대에 제갈 공명이 오장원에서 운명할 때도 긴 별이 떨어졌다 하옵디다.”
장끼란 놈 더욱 신이 나서 하는 말이,
“그 꿈도 염려할 게 전혀 없네. 장막이 덮여 보인 것은, 푸른 산에 해가 저물어 밤이 되면 꽃 그린 병풍 둘러치고 잔디 장판에 나뭇등걸을 베개 삼고 칡잎으로 요를 깔고 갈잎으로 이불 삼아 자네와 내가 추켜 덮고 이리저리 뒹굴 꿈이요, 별이 길게 떨어져 보인 것은, 옛날 중국 황제 헌원씨의 큰부인이 북두칠성 정기를 받아 첫째 아들을 낳았고 견우직녀성은 칠월칠석날 서로 만나니, 자네 몸에 태기가 있어 귀한 아들 낳을 꿈이로세. 그런 꿈이라면 제발 좀 많이 꾸게나.”
까투리는 또 다른 꿈 이야기를 하는데,
“새벽녘 닭이 울 때 또 꿈을 꾸니, 색저고리 색치마를 이내 몸에 단장하고 푸른 산 맑은 물가에 노니는데 난데없는 청삽사리12) 입술을 앙다물고 와락 뛰어 달려들어 발톱으로 파헤치니, 놀라고 두려워 갈 데가 없어 삼밭으로 달아나는데 긴 삼대 쓰러지고 굵은 삼대 춤을 추며 잘룩 허리 가는 몸에 휘휘청청 감겼으니, 이내 몸 과부 되어 상복 입을 꿈인 듯하더이다. 제발제발 먹지 마오. 부디 그 콩 먹지 마오.”
이 말 들은 장끼란 놈 매우 성이 나서 까투리 멱살 잡고 이리 치고 저리 차며 소리질러 하는 말이,
“꽃다운 몸매 저 간사한 년, 기둥서방 마다하고 다른 남자와 즐기다가, 참바13)로 뒷죽지 꽁꽁 묶어 이 거리 저 거리 종로 네거리를 북 치며 조리돌림14) 당하고 세모 방망이 치도곤15)으로 난장16) 맞을 꿈이로세. 그 따위 꿈 얘길랑 다시 말아라! 앞정강이 꺾어 놓을 테다.”
그래도 까투리는 장끼 아끼는 마음 풀풀 나는지라. 입을 다물지 않고 하는 말이,
“기러기 물가에서 울며 갈 때 갈대를 물고 낢은 장부의 조심이요, 봉황이 굶주려도 좁쌀을 쪼아 먹지 아니함은 군자의 염치이거늘, 당신이 비록 미물이라 하나 군자의 본을 받아 염치를 좀 알 것이며, 안자는 단표17)를 낙으로 삼았고, 백이 숙제는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았으며18), 장자방은 병을 핑계하여 곡식을 끊었으니19), 당신도 이런 것을 본받아 근신을 하시려거든 제발 그 콩 먹지 마오.”
장끼 또한 그대로 있을쏘냐.
“자네 말 참으로 무식하네. 예절을 모르는데 염치를 내 알쏜가? 안자의 도학 염치로 도 삼십 살밖에 못 살았고, 백이 숙제의 충절 염치로도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으며, 장자방 의 사병벽곡20)으로도 적송자21)를 따라갔으니 염치도 부질없고 먹는 것이 으뜸이로세. 호 타하22)의 보리밥을 문숙이 달게 먹고 중흥 천자가 되었고, 빨래하는 여자의 식은 밥을 달 게 먹은 한신도 한나라의 대장이 되었으니, 나도 이 콩 먹고 크게 될 줄 누가 알 것인 가?”
까투리는 그래도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그 콩 먹고 잘된다는 말은 내가 먼저 말하오리다. 잔디 찰방23)으뜸 후보로 황천 부 사 임명 받아 푸른 산을 생이별할 것이오니 내 원망은 부디 마오. 옛 글을 보면 고집 너무 피우다가 패가망신한 자 그 몇이요? 먼 옛날 진시황의 몹쓸 고집 부소24)의 말을 듣 지 않아 민심 소동 사십 년에 나라를 잃었고, 초패왕의 어리석은 고집 범증25)의 말 듣지 않다가 팔천 명의 고향 군사를 다 죽이고 면목 없어 자살하고 말았으며, 회왕은 굴삼려26)의 옳은 말을 고집불통 듣지 않다가 진문관27)에 굳게 갇혀 가여운 넋이 되었으니 물 속의 충혼28)에 부끄럽다오. 당신 고집 너무 피우다가 목숨 그르치리이다.”
그렇지만 장끼란 놈 그 고집 버릴쏘냐.
“콩 먹고 다 죽을까. 옛글 보면 콩 태(太)29)자 든 사람은 모두 귀하게 되었더라. 태곳적의 천황씨는 일만 팔천 살을 살았고, 태호 복희씨30)는 명성이 높아져 십오 대를 전했으며, 한 태조 당 태종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나라를 세운 주인이 되었으니, 오곡 백곡 잡곡 가운데서 콩 태(太)자가 제일일세. 곤궁하게 팔십 년을 살던 강태공은 현달31)하여 팔십 살을 더 살았 고32), 시인 중의 왕인 이태백은 고래를 타고 하늘에 올랐고, 북방의 태을성은 별 가운데 으뜸일세. 나도 이 콩을 달게 먹고 태공같이 오래 살고 태백같이 하늘에 올라 태을선관33) 되리라.”
장끼가 끝끝내 고집을 굽히지 아니하니 까투리는 할 수 없이 물러났다. 그러자 장끼란 놈 얼룩덜룩한 꽁지를 펼쳐 들고 꾸벅꾸벅 고갯짓하며 조금씩 조금씩 콩을 먹으러 들어가는구나. 반달 같은 혓부리로 콩을 콱 찍으니, 갑자기 덫 두 개가 뒹굴어지며 머리 위에 치는 소리, 박랑사중에 진시황을 저격하다가 다음 수레 맞히는 듯34), 와지끈 뚝딱 푸드드득 푸드드득 꼼짝없이 치었구나.
이 꼴을 본 까투리 기가 막히고 앞이 아득하여,
“저런 광경 당할 줄 몰랐던가. 남자라고 여자 말 잘 들어도 집안 망치고, 여자 말 안 들어 도 몸을 망치네.”
하면서, 넓은 자갈밭에 머리 풀어 헤치고 당글당글 뒹굴면서 가슴 치고 일어나 앉아 잔디풀을 쥐어뜯어 가며 애통해하고, 두 발을 땅땅 구르면서 성을 무너뜨릴 듯이 매우 원통해 한다.
아홉 아들 열두 딸과 친구 벗님네들이 불쌍하다 탄식하며 조문하고 슬피 우니, 가여운 빈산 나뭇잎 떨어진 빈 하늘에 울음소리뿐이었다. 까투리는 그 슬픈 가운데서도,
“빈 산에 달 밝은 밤 두견새 소리, 슬픈 회포가 더욱 섧구나. 통감35)에 이르기를, 좋은 약 은 입에 쓰나 병에는 이롭고 옳은 말은 귀에 거슬리나 행실에는 이롭다 하였으니, 당신도 내 말 들었다면 이런 변 당할 리 없지. 애고, 답답하고 불쌍하다. 우리 두 부부 좋은 금실 누구에게 말할쏜가. 슬피 서서 통곡하니 눈물은 못이 되고 한숨은 비바람이 되는구나. 애 고, 가슴에 불이 붙네. 이내 평생 어찌할꼬?”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장끼 그래도 덫 밑에 엎디어서 하는 말이,
“에라 이년, 요란하다! 호랑이에게 죽을 줄 미리 알면 산에 갈 사람 누가 있겠나? 미련은 먼저 오고 지혜는 누구나 그 뒤의 일이니라. 죽는 놈이 탈 없이 죽을까? 그것은 그렇다 치고 사람도 죽고 삶을 맥으로 안다 하니, 나도 죽지는 않겠나 어디 한번 맥이나 짚어 보소.”
까투리가 그 말을 듣고 장끼의 맥을 짚어 보다가,
“비위36)맥은 끊어지고 간맥은 서늘하고 태충37)맥이 원수로다.”
장끼란 놈 몸을 한 번 푸드득 떨고 나서 또 하는 말이,
“맥은 그러하나 눈동자를 살펴보게. 동자부처38) 온전한가?”
까투리는 장끼의 눈동자를 살펴보고 나서는 한숨을 쉬면서,
“이제는 속절없네. 저편 눈의 동자부처 첫새벽에 떠나가고, 이편 눈의 동자부처는 지금 막 떠나려고 바랑39)에 짐 싸고 곰방대 불 붙여 물고 길목버선40) 감발41) 하네. 애고 애고 이내 팔자 이다지도 기박한가, 남편상도 자주 하네. 첫째 낭군 얻었다가 보라매에 채여 가고, 둘째 낭군 얻었다가 사냥개에 물려 가고, 셋째 낭군 얻었다가 살림도 채 못 하고 포수에게 총 맞아 죽고, 이번 낭군 얻어서는 금실도 좋거니와 아홉 아들 열두 딸을 남겨 놓았는데 아들딸 혼사도 채 못 하는구나. 먹고사는 게 원수라, 콩 하나 먹으려다 덫에 덜컥 치였으니 속 절없이 영영 이별하겠구나. 도화살42)을 가졌는가, 이내 팔자 험악하네. 불쌍하다 우리 낭 군, 나이 많아 죽었는가 병이 들어 죽었는가. 망신살을 가졌는가 고집살을 가졌는가. 어 찌하면 살려 낼꼬? 앞뒤에 서 있는 자녀는 누가 혼인시키며, 뱃속에 든 유복자 해산 구완 누가 할꼬? 운림초당 넓은 들에 백년초를 심어 두고 백년해로 하잤더니, 단 삼 년이 못 지나서 죽어 영영 이별하니 이별초가 되었구나. 저렇게도 좋은 풍채 언제 다시 만나 볼꼬?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고 한탄 마라. 너는 내년 봄이 되면 또 다시 피겠지만 우리 낭 군 이번 가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미망43)일세 미망일세, 이내 몸이 미망일세.”
한참 동안 통곡을 하니 장끼는 눈을 반쯤 뜨고,
“자네 너무 서러워 말게. 남편상 잦은 자네 집안에 장가간 게 내 실수라. 이 말 저 말 잔말 말게.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음이라. 다시 보기 어려울 테니 나를 굳이 보겠다면 내일 아침 일찍 먹고 덫 임자 따라가 보게나. 김천장에 걸렸거나 청주장에 걸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감영도44)나 병영도45)나 수령도46)에 있거나 관청 창고에 걸렸거나 봉물47)짐에 얹혔거나 사또 밥상에 오르거나, 그렇지도 아니하면 혼인 폐백에 쓰는 건치48) 되리로다. 내 얼굴 못 본다고 서러워 말고, 자네 몸 수절하여 정렬부인49)이 되어 주게. 불쌍하다 불쌍하다, 이내 신세 불쌍하다. 우지 마라 우지 마라, 내 까투리 우지 마라. 장부 간장 다 녹는구나. 자네가 아무리 슬퍼해도 죽는 나만 불쌍하네.”
그러면서 장끼는 기를 벅벅 쓴다. 덫 아래를 디디고 덫 위쪽을 당기면서 버럭버럭 기를 쓰나 살 길은 전혀 없고 털만 쑥쑥 다 빠진다.
이때 덫 임자 탁 첨지가 망을 보고 있다가, 쥐 가죽 모자 우그려 쓰고 지팡이를 걷어 짚고 허위허위 달려들어, 장끼를 빼어 들고 희희낙락 춤을 추며,
“지화자 좋을씨고, 안 남산50) 벽계수에 물 마시러 네 왔더냐? 음식 탐내다 죽는 줄 모 르고서 콩 하나 먹으려 들다가, 푸른 물 푸른 산에 놀던 네가 내 손에 잡혔구나. 산신님께 치성 드려 네 일가친척까지 다 잡으리라.”
하면서, 장끼의 빗겨 문 혀를 빼내 바위 위에 얹어 놓고 두 손 합장하고 빈다.
“아까 놓은 저 덫에 까투리마저 치이게 하옵소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꾸벅꾸벅 절을 하며 빌기를 마친 탁 첨지는 신이 나서 어깨까지 들썩이며 내려간다. 까투리가 뒤미처 밟아 가서는 바위에 얹힌 털을 울며불며 찾아다가, 갈잎으로 소렴51)하고 댕댕이52)로 매장하고 원추리53)로 명정54) 써서 어린 소나무에 걸어 놓고, 밭머리 내려앉은 데에 구덩이도 없이 묘를 만들어 관을 묻고 산신제와 불신제55)를 지내고 제물을 차린다.
가랑잎에 이슬을 받아 도토리 잔에 따라 놓고, 속잎 대로 수저를 삼아 친가유무 형세대로 그렁저렁 차려 놓고, 호상56)의 소임대로 집사를 나누어 정하니, 의관 좋은 두루미는 초헌관57)이 되었고, 몸 가벼운 제비는 접빈객58)이 되었으며, 말 잘하는 앵무새는 진설59)을 맡았구나. 따오기는 제상 앞에 꿇어앉아 축문을 읽는다.
“때는 바야흐로 모년 모월 모일, 미망인 까투리는 감히 돌아가신 지아비 장끼에게 밝게 아뢰나이다. 형체는 무덤으로 돌아가시나 영혼은 집으로 돌아가사이다. 신주를 이미 완성하였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존엄하신 영혼이시여 옛것을 버리고 새롭게 임하소서.”
따오기의 축문이 끝난 뒤 제물을 거두어 치울까 말까 하고 있는데, 마침 소리개 한 마리가 날아다니다 굶주린 배를 생각하고 내려다보며,
“어느 놈이 맏상제냐? 내 한 놈 데려가리라.”
하고, 주루룩 달려들어 두 발로 꿩 새끼 한 마리를 툭 채 가지고 공중에 높이 떠서, 층암절벽 높고 높은 봉에 덥석 올라앉아 이리저리 뒤적뒤적 하면서,
“감기로 몸이 불편하여 십여 일 굶주려 입맛이 떨어졌더니, 오늘에야 사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을 얻었구나. 문어 전복 해삼찜은 정승들의 제일미요, 십 년에 한 번 나는 용궁의 복숭아는 서왕모60)의 제일미요, 일년장춘61) 약산주는 상산사호62)의 제일미요, 저절로 죽은 강아지와 꽁지 안 난 병아리는 연장군63)의 제일미라. 크건 작건 꿩 새끼 하나 생겼으니 배고픈 김에 먹고 보자.”
너울너울 춤을 추다가 아차 하고 돌아보니 꿩 새끼는 바위 아래 절벽으로 떨어져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소리개는 어안이 벙벙하고 어처구니가 없어 탄식하여 말하기를,
“삼국 시대의 명장 관운장님이 다 잡은 조조를 놓아준 것은 큰 의리를 생각하심이라. 험악한 연장군도 꿩 새끼를 놓아주었으니 이 또한 적선이라, 자손들이 크게 뻗어 나가리로다.”
이때 태백산 갈가마귀가 북악산을 구경하던 중 까투리의 소식을 듣고는 찾아 왔다. 까투리에게 조문하고 과실을 나누어 먹고 나서 탄식하여 말하기를,
“그 친구 풍채 좋고 마음씨 좋아 오래 살 줄 알았더니, 불은 콩 하나 잘못 먹고 어찌 비 명횡사했단 말인가? 가엾고 불쌍하도다. 우리야 그런 콩 본다고 냉큼 먹을쏘냐. 여보시오, 까투리 마님 들어보오. 오늘 이 말씀하는 것은 체면상 틀린 일이나, 옛말에 이르기를 ‘장수 나면 용마 나고 문장 나면 명필 난다’64) 하였는데, 그대는 남편 잃고 나는 아내 잃어 오늘 여기 오게 되었으니 이는 곧 삼물조합65)이 맞음이라. 꽃 본 나비가 불을 두려워하며 물 본 기러기가 고기잡이를 두려워하랴.66) 그대 형편과 그대 집안 내가 알고 내 형편과 내 집안 그대가 알 터이니, 우리 둘이 자수성가할 셈치고 평생을 함께 즐겨 보는 것이 어떠하오?”
이 말을 들은 까투리는 한마디로 한심하여 툭 쏘아붙이는데,
“아무리 미물인들 삼년상도 못 마치고 개가하는 법을 누구의 도덕책에서 보았소? 옛말 에 ‘용은 구름을 따르고 범은 바람을 따른다67)’ 하였고, ‘여자는 반드시 그 남편을 따르라’ 하였는데 아무 남자마다 따라가겠소?”
까투리의 말을 들은 까마귀는 자기의 경솔함은 생각지 않고 크게 성내어 말하기를,
“그대 말은 가소롭다! 시경에 이르기를 ‘유자칠인(有子七人)하되 막위모심(莫慰母 心)이라’ 하였으니, 이는 사람도 일곱 아들을 두고 개가할 때 탄식한 말이라.68) 사람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그대 같은 미물에게 수절이 맞는 말인가? 예부터 까투리의 열녀 정문을 내 일찍이 본 일이 없도다.”
이때 부엉이가 들어와 조문을 끝내고 까마귀를 돌아보며 꾸짖는다.
“몸뚱이도 검거니와 주둥이도 고약하구나. 어른이 오시면 몸을 벌떡 일으켜서 인사를 할 일이지, 일어나서 떠나지도 아니하고 그대로 앉았느냐?”
이 말 듣고 까마귀 그대로 있을쏜가.
“거만한 부엉아! 눈이 우묵하고 귀만 쫑긋하면 다 어른이냐? 내 몸 검다고 웃지 마라. 거 죽이 검다 한들 속까지 검을쏘냐. 우연히 산의 응달진 쪽을 날아서 지나가다가 이내 몸 이 검어진 것이니라. 내 부리 또한 비웃지 마라. 중국 월나라 왕 구천이도 내 입과 흡사하나, 하루 세끼를 계속 먹고 십 년을 돌아들어 제후국의 왕이 되었느니라. 옛 글도 모르면서 어찌 진짜 어른을 학대하느냐? 내일 식후에 통문을 놓아 대동회에 방 붙이고 명단에서 제명하리라.”
이렇듯이 까마귀와 부엉이가 서로 다투고 있을 때에, 푸른 하늘의 외기러기 한 마리 구름 사이에 떠 있다가 우연히 내려와서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는 좌우를 크게 꾸짖어 말하기를,
“너희들이 무슨 어른이냐? 한나라 소자경69)이 북해70)에 십구 년을 갇혀 있을 때, 고국 소식 몰라 애달파하기에 내가 편지 한 장 맡아다가 한나라 천자에게 바쳤으니, 이런 일을 보더라도 내가 먼저 어른이지 너희들이 무슨 어른이냐?”
이때 앞 연못 물오리가 일곱 번 아내를 잃고 후처를 구하고 있었는데, 까투리가 남편을 잃었다는 소식 듣고 결혼할 뜻을 전하지도 않은 채 결혼 잔치 하겠다고 온다. 옹옹 우는 기러기로 기럭아비71)를 삼고 관관저구 징경이72)로 함진아비73)를 하고 쾌활한 황새는 후행꾼74)을 삼았으며, 소리 큰 왜가리로는 길방이75)로 삼았고 맵시 있는 호반새는 전갈 하인을 삼았구나.
전갈 하인 호반새가 들어와 말하기를,
“까투리 신부 계신가? 우리 신랑 들어가네.”
느닷없이 이 모양 당하게 된 까투리는 울던 울음 뚝 그치고,
“아무리 과부가 만만하기로 궁합도 아니 보고 이런 억지 혼인하자는 법이 어디 있느뇨?”
뒤따라오던 오리가 불쑥 나서서 하는 말이,
“과부 홀아비 만나는데 예절 보고 사주 보랴? 신부 신랑 둘이 만나면 자연 궁합 되느니 라. 그럴 것 없이 택일이나 한번 하여 보세. 일상생기 이중천의 삼하절체 사중유혼 오상화 해 육중복덕일이요76) 천덕 일덕77)이 합하였으니 오늘밤이 으뜸이라. 남녀가 합하는 것은 모든 복의 근원이거늘 잔말 말고 지금 자세.”
슬피 울던 까투리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자네도 남자라고 엉큼한 말 제법 하네.”
오리가 또 입을 열어 말하기를,
“잔말 말고 이내 호강 한번 들어 보오. 영주 봉래 청강수78)에 모든 신선들이 배를 타고달을 구경하며 길게 취하는 모습을 뚜렷이 구경하고, 소상강 동정호 넓은 물에서 붉은 여뀌 흰 마름으로 집을 삼아 오락가락 노닐면서 은빛 비늘 모양 좋은 생선 먹고 싶은 대로 실컷 먹으니, 천지간에 좋은 생활 물 밖에 또 있는가?”
물에서 사는 오리의 자랑을 듣고 까투리가 잠자코 있을쏘냐.
“물 생활이 좋다 한들 육지 생활 같을쏜가. 육지 생활 말할 테니 우리 생활 들어 보오. 평원 광야 넓은 들에 오락가락 노닐다가 층암절벽 높은 봉에 허위허위 올라가서 사해팔방 구경하고, 춘삼월 꽃 피는 시절 객사의 푸르고 푸른 버들잎 새로울 때79) 황금 같은 꾀꼬리는 버드나무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봄바람에 복숭아꽃 살구꽃 핀 밤 귀촉도80) 슬피 울어 불여귀81) 하는 소리에 초목과 금수라도 마음이 어수선해지니 그도 또한 놀랍고 신기하도다. 가을 구월에 누런 국화 피었을 때 온 산에 널린 열매 주워다가 앞뒤로 쌓아 놓고 치장군(꿩)의 좋은 옷과 스스로 우는 소리 예나 지금이나 비교할 데 없네. 물 생활이 좋다 한들 육지 생활에 당할쏜가?”
말이 막힌 오리가 할 말 없어 잠자코 있는데, 그 옆에 조문 왔던 장끼란 놈이 썩 나서서 하는 말이,
“이내 몸 홀아비로 산 지 삼 년이 지났으되 마땅한 혼처 없어 외롭더니, 오늘 그대 과부 되자 내가 조문하러 왔음은 하늘이 도우심이라. 우리 둘이 짝을 지어 아들딸 낳고 장가 시집보내 백년해로함이 어떠한가?”
이 말 들은 까투리 얼굴을 살짝 붉히며 하는 말이,
“죽은 낭군 생각하면 개가하기 야박하나, 내 나이 꼽아 보면 늙지도 젊지도 않은 중늙은 이라. 부부의 재미 알고 살림할 나이로다. 오늘 그대의 풍채를 보니 수절할 마음 전혀 없 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 불붙었네. 허다한 홀아비가 여기저기에서 청혼하나 끼리끼리 논 다 하였으니, 까투리가 장끼 신랑 따라감이 실로 마땅한 일이로다. 아무튼 같이 살아 보세.”
장끼의 청혼을 쾌히 승낙하는 까투리였다. 까투리의 허락을 얻어 낸 장끼란 놈은 껄껄 푸드득 하더니 벌써 이성지합82)이 되었다.
이 모양을 멀거니 구경하던 까마귀, 부엉이, 물오리들은 가차없이 청혼을 거절당하고 무안해서 훨훨 날아가 버렸다. 그 뒤를 따라 온갖 손님들도 모두 다 날아갔다. 깜장새 호루룩, 방울새 딸랑, 앵무새, 공작, 기러기, 왜가리, 황새, 모두들 날아가 버렸다. 그러자 까투리는 새 낭군 앞세우고 아홉 아들 열두 딸을 뒤세우고, 눈보라 무릅쓰고 운림벽계83)로 돌아갔다.
다음 해 삼월 봄이 되니, 아들딸 시집 장가 다 보내고 암수 꿩이 쌍을 지어 명산대천으로 노닐다가 시월이라 십오일에 두 부부 큰 물 속으로 들어가 조개가 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치입대수위합84)이라 하였으니, 치위합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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