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은 짙은 고향의 향수에 젖어 울적해지는 추석 명절의 달,
이역 만리 사반세기 한 장소에서 늘 머물러 있어도, 마음은 언제나 고향을 향한다.
고향은 생각만 해도 풍성한 구수함으로 가득한 꿈이 서렸던 희 망을 품은 곳이기 때문인가.
구월에 뜨는 보름달은 고향의 보름달 마저 품고 뜨는 지, 지난 밤의 다리 건너 빙그레 뜨는 달이 유난히 크고 밝다.
고향은 어릴적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
6.25 전쟁이 우리 가족을 피난민으로 전락시켰다. 뜬금없이 미군 군함에 올라탄 피난살이, 어머니는 치마를 벗어 가족의 누울자리, 임시 집 터를 마련했다.
아비규환의 삶 속에서 살아남은 유년시절. 가난 속에서도 구수한 된장국, 재치국 냄새가 베인 흐뭇한 추억들이 살아 숨쉬던 곳이다.
논밭의 메뚜기를 한병 가득하게 잡아오면,
어머니가 기름에 볶아 내느라 온 집안이 연기로 자욱하다.
지척의 냇가에서, 손 그물로 흐르는 풀섶에 양발로 몰이를 하면, 군용 항고통에 메기, 붕어가 가득하다. 밤나무의 낙과와 함께 드리면 뚝닥 만든 메기탕 요리, “된장 밤 메기탕이다.” 몰래 감추어 왔던 보리가 조금 섞인 따끈한 쌀밥을 주시며 “애들(형제들)이 오기 전에 얼른 먹어라” 그 맛을 잊을 수 없어 요리 비법을 늘 궁금해 했는데 아내가 언젠가 귀띔 해 주었다. “ 할머니가 원산 부둣가에서 반찬 가게를 하셨데요”
어머니는 나에게만 지나온 뒤안길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셨다.
시골에서 대신중학교에 입학하자 4남매 방 두 칸 판잣집이 좁았다. 판자집 모퉁이에 아버지가 흙벽돌을 쌓고 철판으로 지붕을 인 마루 공부방을 만들어 주셨다. 어설프게 만드신 책상, 의자이지만 열심히 공부했다.
오늘같이 가을비가 후두둑 세차게 오는날은 함석 두들기는 소리가 요란하다. 비가 그친 가을 밤, 시험공부하느라 밤늦게 까지 석유 호롱불에
매달리면 어느새 반디불이 작은 창가에 춤추듯 어른거리고, 귀뚜라미 소리가 요란한데 방구석을 뒤적이면 툭툭 귀뚜라미가 튀며 논다.
추운 겨울날에도 이중 비닐막을 치고 교복을 입은 채 담요 몇 장을 휘두루고 잠을 청하고 뻐꾸기 울음소리에 선잠을 깨기도 했다..
빠른 걸음으로 1시간 넘는 거리를 삼 년 동안 아프거나 결근한 적이 없어 삼 년 개근상을 받았다. 내리 삼 년 반장을 했다. 재건학생회(전교 학생회)회장을 했다.
내가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하니, 부산 여중 다니는 여동생, 부산여고를 졸업한 누이와 함께 시골 괴정 동네에서 꽤 알려져 있었다.
이것이 나의 어릴적 꿈이 서리던 곳, 부끄러움도 외면하며 읊조리는 고향 자랑이다.
십여 년 전 누님 댁을 찾아 가다가 부산 사하 초등학교 앞에서 옛 고향 집을 찾았다. 고층 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서고 정답던 길들이 온데 간데 없다.
그 이후로 나는 고향의 집 열쇠를 잃어버렸다.
꿈꾸던 소년 시절의 희망이 켜켜하게 녹아 들었던 그리움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존재의 의미 마저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노년의 존재는 실존으로 이어지고 소박하고 단순한 것들을 찾아 나선다. 나의 하루는 온통 포플라 나무, 자작나무, 소나무로 휘감긴 자연과 더불어 시작한다. 고향으로 연결되는 마음의 고향이다. 소박하고 선한 것들로 가득한 세상이다.
첨단 AI 시대, 길을 잃을 번 했던 나그네, 고향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허무와 권태 사이를 오가는 덧없는 세월을 보내는 것, 나의 존재마저 잃어버리는 것, 오늘도 부슬비 내리는 호수길을 걸으며 자연의 세밀한 음성에 귀를 기울인다. 미래의 불안을 극복하는 길이다.
이제 고향은 지친 영혼을 포근히 감싸주는 공간, 영원한 주님이 계신 곳, 언젠가 돌아가서 묻히기를 희망하는곳, 마음의 고향이다.
나는 생전에 가족 묘지를 평상 무덤으로 바꾸고 두 곳을 준비해 두었다. 세상을 이별하면 항아리를 둘로 나누어 절반은 가족들이 잠든 본향의 부모님 곁으로, 절반은 이곳 나의 자손들 곁에서 잠들기를 소망한다.
첫댓글 청야 선생님 고향을 잃어버린 중년의 절절함이 가슴 뭉클하게 다가옵니다.
흥남부두 LST군함에 올라타 실향민이 되셨고 부산 어디메쯤 실존으로 이어지는 고향의 그림자에
저 또한 선생님의 고향 원산을 고향으로 가진 처가의 애뜻함을 보았습니다.
늘 건강하시고 건필하셔요. 9월은 가을과 더불어 캘문의 멋진 문학제가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글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