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지도의 수바이쳐, 의사는 성직자라 하셨던 의사 임융의장로님, 목사님,
선교사님이 83세의 일기로 주님의 부름을 받았다.
우리교회가 속한 경안노회목사로 우리교회소속으로 일본에 파송된
임융의선교사님이 지난 주일 오후 2시(일본시간)일본 치바현 훗쯔시에서 별세
하셨다.임목사님은 평생 의사로 병자를 고치는 인술을 펼친 분이었다. 그가
뒤늦게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다.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서 근무하시다가 뜻한바가
있어 동교동 로터리에 혜성병원을설립하고 긴세월 병원을 운영하면서 난지도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위한 인술을 펼처"난지도의 슈바이처"라고 불리기도 했고
1987년 국민훈장목련장을 받았고 국제 로타리클럽이 주는 초아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평소에 의사는 성직자라는 자세를 강조 하셨고 의사는 돈을 버는
사람도 아니고 돈을 벌기위해 의사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고 했다.
난지도의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위해 10여년간 치료는 물론 수술과
입원을 도맡아 하셨고 일체의비용을 병원이 담당하여 수많은 이들을
살려냈다. 그들을 위해 희사한 돈만 수억이 넘는다. 그리고 아세아연합
신학대학의 외국인 학생들 전원에게 의료혜택을 주어 진료와 치료를
받게 했다. 뿐만 아니라 구소련국가에서 핵시설폭발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아이들이 백혈병으로 죽어갈 때 직접 그들에게 찾아가 치료를 의논했고
그 중에 두 아이들을 데려다가 수술하여 생명을 살렸고 그때부터
대대적으로 그들을 치료하는 일을 했다. 그 때 국민적인 호응을 얻어
그들을 돕기 위한 음악회와 연극무대가 올려졌고 그들에게 놀라운 사랑을
베풀었다. 또한 1981년에는 평양을 방문하여 평양에 병원을 설립하는
일을 시작하셨고 북녘동포들을 위한 인술을 펼치는데 아낌 없이 헌신하셨다.
임목사님은 선이 굵으신 분이다. 웬만해서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시고
자신의 사회적역할이 커갈 때 정치적 유혹도 있었지만 단호하게 거부하시고
의사로서의 숭고한 삶을 견지하셨고 특히 혜성병원을 설립하여 준 종합병원으로
운영하실 때는 의료보험이 시행되기 이전이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혜택을 받기 어려울 때 노동자들과 또한 가난한 목회자
들을 위해 많은 도움을 주셨다. 나 또한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인생후반기에는 일본에서 의사로서 목사로 선교사로 마지막을 불태우시면서
동경에서 멀지않은 치바현의 작은 교회를 섬기셨다. 일찌기 일본
교토의과대학에서 유학을 하셨고 일본역사와 문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셨던
분이셔서 우리 동포들에게 따뜻한 사랑과 말씀을 전하셨고 사모님이신
최은영 장로님은 80이 넘으셨음에도 일본교회의 선교사로 섬기시면서
노년의 부부사역이아름답게 펼쳐진 선교사역이었다.
임박사님은 고향이 평양이시다. 15살에 6.25가 발발했고 홀로 남쪽으로
피난오셔서 2년동안 고아로 살아야 했다. 다행히 교회에서 부모님을
만나시는 기적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에 남겨놓고 온 두명의 동생들
때문에 평생 죄인의 마음으로 사셨다. 평양을 세차례 다녀오셨는데
1997년 두 번째 방문할 때 동생들을 만났는데 그 때 두시간을 아무 말도 못하고
부둥켜 안고 울기만 했다고 하셨다.
사실은 나의 장모님과 임박사님의 사모님(최은영장로)과는 북한에서
아주 가까운 친척이다. 나는 결혼을 하고 나서 이분들이 아내의 이모님과
이모부라는 것을 알았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내가 대학에 처음 몸담기
시작할 때 이모님과 이모부님이 우리 대학과 신학대학원을 다니셨는데
나는 그 때함께 식사할 때가 있었는데도 몰랐다. 결혼식날 그분들이
오셔서 알게 된 것이다.
의사 임융의는 장로님이였다. 그리고 신학을 하고 목사임직을 했고 그 다음엔
선교사로 삶을 마감하셨다. 얼마나 인간의 정으로 아쉽고 서럽고 슬픈지
모른다. 왜냐하면 나를 너무 많이 사랑해 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평생을 살아
가면서 이렇게 마음으로 존경하고 늘 사랑을 주시는 분이 두세분중에 한
분이셨기 때문이다. 게다가 친척관계였기에 더더욱 그런 아쉬운 마음이다.
내가 미국 유학중이었던 1985년 가을 이모부님 내외분 그리고 세 자녀들이
미국 여행중에 샌디에고에서도 동쪽으로 30마일이 떨어진 캠퍼스 기숙사로
찾아오셔서 나를 격려해주시고 그날 저녁 샌디에고 코리아하우스(한식당)에서
유학생활로 힘든 시기에 큰 위로와 격려를 주셨다. 마치 강도만난 자를
환대하던 선한 사마리아인 처럼 나에게 큰 용기를 주셨다. 나는 그 날
예수님의 사랑 그리고 어떻게 사람답게 살아야하는 가를 배웠다. 사실 가족과
함께 미국 여행을 하면서 일부러 낯선 주소를 물어 나에게 찾아오신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지금도 그 때만 생각하면 감동이다.
그리고 유학을 마치고서울에 와서 내가대학에 있을 때 나는 자주 혜성병원에
가서 이모부님과 많은 이야기도 나누고 진료가 끝나는시간을 기다렸다가
저녁을 함께 하고 특히 한국교회와 북한선교등 굴직한 사역이야기들을
많이 나누었다. 그리고 서울에 잠시 머무실 때 자주 만남을 가졌고 우리가
만날 때는 임선교사님이 평생 의술을 펼피셨던 마포지역의 모방송국안에
있는 중국집에서 옛날 짜장면을 즐겨 먹고 바로 옆에 있는 오래된 다방과
같은 커피솝에서 긴시간, 아주 오랜 시간을 마음을 나누고 사역을 나누며
이야기했다.특히 특히 북한의 자유와 통일, 그리고 어떻게 하면 북한을
열리게 할 까 하는 나름의 프로젝트를 나에게 말씀하시면서 박목사가
그 일을 해주기를 바란다고 심심당부를 하셨다.
어떻게 하나? 이젠 이렇게 소중한 삶의 이야기와 따뜻한 인생이야기 그리고
사명의 이야기들을 누구와 나눌까? 그분만이 갖고 계신 큰 꿈과 큰 그림들
을 하나씩 되새기면서 만들어 가야겠다. 개인의 이름과 명성을 날릴만한
분이셨음에도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잘하셨고 평생 남을 위해 사시는 것을
사명으로 기쁨으로 아신 분이다.사회와 이웃을 위해 헌신하신 삶은 주
예수님의 정신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셨고 그저 자녀들이 결혼하여 나름의 역할을 하고 사는 것만으로도
늘 감사하셨던 분이셨기에 더더욱 그립고 보고싶고 마음이 아프다.
더 배워야 하고 더 많은 사랑과 섬김을 배워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
참고로 임선교사님의 아들은 미국에서 공부를 했고 의과대학을 나와 미국에서
내과의사로, 두 딸은 목사의 아내로 교회를섬기고 있다. 큰 사위는 텍사스에서
목회하고 둘째 사위는 인천송도에서목회한다. 오는 토요일 일본에서 장례를 하고
서울에서는 10월29일모교회인시온감리교회에서 장례예배를 드리고 그날 오후 2시에는
에덴낙원에서 박종근목사가 집례하는 마지막 환송예배가 있다. '나는
상주가 된 심정으로 두 주간을 보내야 할 것 같다.' 너무 미안하고 아쉽다.
일본에 가서 뵈었어야 할 시간을 놓치고 코로나의 장벽에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아쉽다, 너무 아쉽다. 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