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끄러미 - 길상호 (1973~ )
물끄러미 라는 말 한 꾸러미 너희들 딱딱한 입처럼 아무 소리도 없는 말 마른 지느러미처럼 어떤 방향으로도 몸을 틀 수 없는 말 그물에 걸리는 순간 물에서 끄집어낸 순간 덕장의 장대에 걸려서도 물끄러미, 겨울바람 비늘 파고들면 내장도 빼버린 뱃속 허기가 조금 느껴지는 말 아가미를 꿰고 있는 새끼줄 때문에 너를 두고 바다로 되돌아간 그림자 때문에 보아도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말
‘물끄러미’는 원래 ‘바라보다’라는 동사와 함께 쓰이는 부사이다. 그 뜻과 소리에 전혀 악의가 내포되지 않은 순우리말인 데, 요즘은 거의 쓰이지 않는 것 같다.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서 있는 한국인이 드물기 때문이다. 오천만 인구 가운데 영유아 만 빼놓고는 모두 눈을 부릅뜨고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화면 아니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지 않은가. 머지않아 ‘물끄러 미’를 ‘꾸러미’와 ‘지느러미’의 합성어쯤으로 생각하는 후손들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덕장의 장대에 걸려 건조되고 있 는 명태의 눈에서 시인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을 느낀다. 마땅한 명사와 동사가 없어서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 는 부사의 의미를 시인의 눈이 새롭게 발견한다.
<김광규·시인, 한양대 명예교수>
-출처 : 시가 있는 아침 물끄러미 중앙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