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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딸과 함께 읽는 소설 여행 14
9. 엄마의 말뚝 3
박 완 서
어머니는 그 후 7년을 더 사셨다. 그 7년 동안은 고요하고 참담했다. 80 고령의 골절상은 역시 치명적이었다. 더군다나 골반 골절이었다. 몇 번에 걸친 재수술 끝에 뜨개질바늘처럼 긴 쇠막대기를 일정 각도로 구부려서 골반과 대퇴골을 연결하는 걸로 겨우 보행을 할 수 있을 만큼 다친 다리를 복원할 수는 있었지만, 그 다리가 세 치는 짧아진 듯했다. 회복된 어머니는 몹시 절룩거렸고 막대기의 각도 때문에 의자에 앉는 것 외엔 바닥에 털썩 앉는 게 불가능해졌다. 누울 때도 걸터앉았다가 윗몸을 뒤로 제치면서 다리를 올려 뻗는 순서로 누워야 했기 때문에 침대를 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집집마다 양변기를 쓰고 있어서 대소변은 받아내지 않아도 되었다. 만일 예전에 그런 일을 당했더라면 정신 멀쩡한 채 기저귀를 차는 수모를 감수해야 했으리라.
“이만하기가 다행이다”
오랜 입원생활 끝에 퇴원하여 맏손자네로 돌아온 어머니의 첫마디였다. 그게 결코 살아났음에 대한 감격이 아니라 타인에게 대소변 치다꺼리는 안 시키게 됐다는 안도감이라는 걸 우리는 스스로 알아차렸다. 불면 날아갈 듯 극도로 바랜 백지장 같은 인상은 감동 감격 따위를 할 더운 피가 남아 있을 성싶지 않았다. 손자들은 그 연세에 한 번도 버거운 대수술을 몇 번씩이나 받았으니 어찌 안 그렇겠느냐고 수긍하면서도 차후 좋은 음식과 보약으로 몸보신만 잘해 드리면 곧 예전의 기력을 회복할 수 있으려니 믿는 눈치였다. 나는 안 그랬다. 나는 어머니의 무시무시한 괴력을 알게 된 유일한 목격자였다. 어머니의 초인간적인 난동에 죽자꾸나 몸으로 부딪힌 기억은 살아서 체험한 지옥과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마취가 덜 깨어난 상태라고 해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게 어머니의 전 생명력을 건 마지막 발언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불쌍한 어머니는 그때 생명력을 다 소진해버려 지금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그런 어머니는 내 어머니 같지가 않았다.
나는 조카들과 의논해서 어머니를 번갈아 모시기로 했다. 조카들 또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인 눈치였다. 백지장처럼 식구들의 생활에 전혀 무게로 실리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조용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존재 그 자체로 부담이 되고 있었다. 조카들도 그랬지만 나도 내가 안 모시는 동안 열심히 기력회복에 좋다는 음식이나 보약을 사가지고 문병을 다녔다. 그리고 과연 젊은 것들이 그것을 제때제때 잘 챙겨드릴까 의심하곤 했다. 우리집에 계실 때 장조카가 개소주를 해온 적이 있다. 잘하기로 소문난 집에다 웃돈 얹어주며 부탁한 특제니 하루에 두 번씩 꼭꼭 거르지 않고 드시도록 고모가 신경을 써달라는 신신당부와 함께였다. 그 애도 나와 비슷한 의심을 하고 있었나 보다. 한 치 건너 두 친데 내가 아무리 저만 못할라구, 좀 아니꼬운 생각도 들었지만 역시 기특했다. 그러나 나는 조카의 당부를 들어주지 못했다. 복용하기 편하게 1회분씩 팩에 넣은 보약을 어머니는 백지장처럼 표정이 바랜 웃음으로 거부했다. 배 아파 소화제 먹고 감기 들어 해열제 먹는 것까지 피할 생각은 없지만 몸 보하려고 무얼 먹지는 않겠노라고 했다. 치료제는 할 수 없어도 보약은 싫다는 어머니의 거부와 나는 싸워 보지도 않고 졌다. 떨리는 마음으로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역시 떨리는 마음 때문에 그 동안 해다 드린 보약은 다 어떻게 했느냐고 묻지 못했다. 나는 조카의 보약을 처분하는 부담만으로도 벅찼다. 연줄연줄로 그런 약이 필요한 노인을 찾아내서 보내주고 조카한테는 다 드셨다고 거짓말을 시켰다. 어머니는 세끼 식사도 최소한의 일정 분량밖에 들지 않았다. 나는 물어보지 않고도 그 최소한이 화장실을 출입할 만한 기력을 유지할 정도일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어떤 영양가나 맛으로도 어머니로 하여금 그 최소한을 넘도록 유혹할 수 없었다. 운동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침저녁 두 차례씩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주로 걷기 운동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베란다를 천천히 열 번 가량 왕복을 했다. 절룩거리는 것 외에는 지팡이 없이도 잘 걸으셨다. 도도한 성격대로 꼿꼿한 허리도 변함이 없었다. 베란다에서는 노인정이 곧바로 바라보였다. 어머니가 아침운동을 할 즈음은 노인들이 모여들 시간이고 저녁운동을 할 때는 노인들이 헤어질 시간이었다. 그중엔 어머니보다 훨씬 더 못 걷는 노인도 적지 않았다.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는 노인 중엔 허리가 직각으로 휘고 다리가 부은 건지, 자기 살인지 보통사람 허리만한 할머니도 있었다. 어머니는 운동을 하다 말고 그런 노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계실 적도 있었다. 어머니는 위로받고 있는 걸까, 측은해 하고 있는 걸까, 그보다도 나는 어머니보다 못한 노인이 어머니로 하여금 바깥 출입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기를 바랐다. 어느 화창한 봄날 나는 용기를 내어 어머니에게 노인정에 가보시지 않겠느냐고 권했다.
“미쳤냐? 내가 저 늙은이들하고 화토나 치게”
어머니의 정열 없는 노여움은 마치 팽팽한 백지장이 바람에 파르르하는 것처럼 비인간적이었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조용한 어조였지만 미쳤냐?의 의미는 길고 도전적이어서 내 의식을 나사못처럼 조여 오는 것 같았다. 나 역시 정서적인 반응이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했지만 속에서는 “아아, 꼴보기 싫어, 제발 가버려. 석이네나 경아네로 썩 가버려”하는 악다구니가 아우성치고 있었다. 어머니의 규칙적인 운동은 정해진 소량의 식사와 마찬가지였다. 화장실 출입에 지장이 없을 만큼의 운동신경을 유지하려는 노력에 불과했다. 어머니가 긴 입원생활 끝에 마침내 퇴원할 때 주치의는 말했었다.
“할머니 댁에 가셔도 걸음연습 거르시면 안 됩니다. 그 연세에는요, 며칠만 운동을 안 해도 오금이 붙어버려서 변소 출입도 못하게 된다구요, 아셨죠?”
어떡하든 그렇게는 안 되도록 최선을 다하되 그 이상은 죄악시하려는 어머니의 고집을 나는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오로지 화장실 출입을 삶의 유일한 목표로 사는 이가 식구 중에 섞여 있다는 것은 아마 누구도 참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 부피가 설사 백지장 정도밖에 안된다고 해도 말이다. 7년 동안에 어머니는 몇 달에 한 번꼴로 딸네서 맏손자네로 맏손자네서 둘째손자네로 옮겨 다닐 때말고는 전혀 외출을 안 하셨다. 다행히 집집마다 차가 있어서 엉치뼈를 일정 각도 이상 구부릴 수 없는 어머니를 안전하게 모셔오고 모셔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건 몸의 이동일 뿐 외출은 아니었다. 단독주택에 사는 손자네서도 허설쑤로라도 대문 밖에 발을 내딛는 법이 없었다. 참 할머니 자존심 센 것 하나는 알아줘야 한다고 손자들도 그 점에 있어서는 혀를 내둘렀다. 절룩거리는 병신 걸음걸이를 남에게 안 보이려는 할머니가 기를 쓰고 답답한 걸 참는다고 손자들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바깥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까 답답해 할 까닭조차 없다고 판단했다면 내가 너무 잔인한 딸이었을까.
엉치뼈와 넓적다리를 철근으로 연결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어머니가 정확하게 이해한 건 그 수술이 성공하고 걸음연습도 순조로워 보조기 없이 혼자 걷게 된 연후였다. 우리는 사전에 주치의로부터 그 수술이 성공한다 해도 어머니가 여생을 어느 정도의 불편을 감수하며 살아야 되는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오랫동안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병구완에 지친 우리들은 다시 걸을 수 있게 되리라는 것만도 기적 같았다. 바닥에 쭈그리고 앉을 수 없게 되는 정도의 후유증은 너무 가벼워서 차라리 웃음이 났다. 자손들은 다들 아파트 아니면 양옥집에 살고 있었다. 부엌은 입식이고, 거실엔 소파가 있고, 아이들 방엔 침대가 있고, 화장실엔 의자식 양변기를 갖추고 있었다. 노인네를 위해 침대나 하나 사놓으면 모시는 데 조금도 지장이 없었다. 더군다나 사셔야 얼마나 사시겠는가. 어머니의 길지 않은 여생을 가정하는 것도 우리를 한껏 너그럽게 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모시는 입장 위주의 생각이었다. 부모를 모신다는 걸 시혜(施惠)쯤으로 여기는 세상인심에 우리라고 어찌 물들지 않겠는가. 그래서 상한 다리에 삽입한 이물질이 당신 몸을 어느만큼 부자유스럽게 하나를 몸으로 깨달은 연후의 어머니의 낭패감은 한층 고독하고 쓸쓸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내 생전에 강화 잇집네 가보긴 다 틀렸구나”
심한 낙담과 좌절 때문에 젖은 종이처럼 눅눅하고 무력해진 어머니의 나직한 탄식이었다. 그 소리를 들은 손자들이 웃음을 참느라 입귀를 씰룩거렸다. 기껏 한다는 걱정이 잇집네 못 갈 걱정이라니, 서서히 망령기가 든다고 여기는 듯했다. 이(李)씨 가로 출가해서 잇집이라 부르는 이는 어머니의 재당질녀(再堂姪女)뻘 되는 동향의 친척이었다. 강화도에 살고 있었다. 강화도엔 1․4후퇴 때 바닷길로 피난왔다가 눌러 사는 개성 개풍쪽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집안 내의 가까운 친척끼리 한 마을을 이루고 사는 데도 있었다.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서로 알려 왕래를 유지하고 소식을 끊지 않는 걸 친척의 의무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의무에 철저한 건 암만해도 시골 사는 쪽이었다. 서울 사는 쪽은 바쁘다는 핑계도 있었지만 동창이나 직장관계로 이미 형성해 놓은 인간관계가 다양해서 무슨 때 별로 시골친척이 아쉽지가 않았다. 그런 서울인심이 행여 시골친척을 섭섭하게 할까 봐 어머니는 중간에서 늘 신경을 많이 써오셨다. 청첩장이나 부고를 받았는데 당신이 못 갈 사정이 있으면 손자들을 시켜서라도 부조돈을 보내고야 말았다. 귀찮아하는 기색을 보이면 “내 생전만 참거라. 나 죽어봐라 저절로 남 되지” 이렇게 언짢아하곤 했다. 그러나 아무런 경조사도 끼지 않은 평상시에 나들이삼아 훌쩍 가서 하루이틀 묵었다 오는 데는 잇집네밖에 없었다. 같은 서울에 사는 하나밖에 없는 딸네집에도 초대받지 않은 날 들르거나, 단 하룻밤도 주무시고 간 적이 없는 어머니였다. 출가외인에 대한 편가름과 사돈을 경원하는 조심성이 그렇게 유별난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에게 시집간 재종질녀의 집이 아랑곳인가. 더군다나 근근이 사는 형편이었다. 딸린 자식은 많고 농사는 넉넉지 못해 잇집이 1년 내내 화문석을 짜서 살림에 보탠다고 했다. 다행히 잇집과 이 서방이 순박하고 무던하여 어머니를 편안하게 해드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녀오실 적마다 그 집 식구 칭찬으로 입에 침이 마르셨다. 그러나 그럴수록 정떨어질세라 신세지는 걸 삼가야 했다. 그걸 모를 어머니가 아니었다. 가실 때마다 당신 형편엔 과도한 선물을 장만하는 것만 봐도 알 수가 있었다.
잇집네는 강화도 최북단, 양산면이란 데서 살았다. 그 마을에 들어가려면 검문소에서 뉘집에 무슨 볼일로 가는지를 자세히 대고 주민등록증을 맡겨야 하는 최전방이었다. 이 씨 가의 종중산이라는 야트막한 뒷동산에 오르면 바로 발아래로 바다가 보이고 바다 건너로 북쪽땅이 보였다. 섬과 육지 사이에 낀 바다는 강 너비밖에 안 돼 꼭 한강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는 정도의 거리감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거기가 갈 수 없는 고향땅 개풍군이라고 생각하면 그 지호지간(指呼之間)은 소름이 끼쳤다. 그러나 거기가 오빠의 무덤, 어머니의 상처라고 생각하면 그 바다의 너비는 가이 없었다. 당신 딴에는 자제하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어머니는 적어도 1년에 두세 번은 잇집네를 다녀오고야 말았다. 그 목적이 순전히 뒷동산에 올라 그 바다와 그 바다 건너를 하염없이 바라보고자 함이라니. 지친 듯 나른한 목소리로 “에그 독종들, 에그 독종들”하고 중얼거릴 적도 있었다. 누구더러 그러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인두겁 쓴 건 다 독해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땐 아이들까지도 뜨악한 눈으로 바라보곤 했으니까. 오빠의 뼛가루를 그 바다에 흩날린 지 30년이나 너머 지난 뒤까지도 어머니는 지치지도 않고 그 짓을 낙처럼 계속해 왔다. 우리는 이제 어머니의 그런 청승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넌더리가 났다. 헤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당신의 뻗정다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들을 몸소 확인해 보고 나서 가장 결정적인 충격을 받은 것은 바로 그 짓을 할 수 없게 됐다는 것이었다.
잇집네는 재래식 농가였고, 물론 옛 모습 그대로 측간이 대문 밖, 밭 가운데 있었고, 방방이 요강을 쓰고 있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화장실에 갈 수 없게 됨으로써 비롯됐다. 그 후 한 달 동안에 어머니는 서서히 죽어갔다. 어머니가 이상해졌다는 기별을 받은 건 마침 맏손자네 계실 때였다.
“고모, 할머니가 이상해요. 뒤를 그냥 흘리시지 뭐예요”
“뭐? 뒤를?”
나도 단박 일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그만큼 어머니는 그 문제에 무서우리만큼 깔끔했었다.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둘러 달려가 뵌 어머니는 혼곤히 잠들어 있었다. 혹시나 해서 사가지고 간 유아용 기저귀 중 제일 큰 치수가 꼭 맞았다. 나는 하기스를 채우면서 참 곱게도 말랐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의 육신은 희고 깨끗하고 가벼웠다. 그런 상태가 오래 간다고 해도 욕창이 생길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싶게 피골 외의 군더더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은 것처럼 곤한 잠에서 깨어난 어머니는 나를 보자 희미하게 웃으면서 물었다.
“애야, 내가 죽었냐? 살았냐?”
어처구니 없는 물음에 나는 살아계신다고 대답하면서 어머니의 손등을 살짝 꼬집어 주었다.
“아직두?”
실망도 기쁨도 아닌, 허위적대는 소리를 내더니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든 것은 아니어서 빨대로 약간의 미음과 과즙을 빨기도 하고 삼키기도 했다. 나는 어머니를 흔들어 눈을 뜨게 하고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또 미미하게 웃으면서 내 이름을 정확하게 대었다.
그 광경을 지켜본 손자 손부들은 쉬 돌아가실 것 같지는 않다는 냉정한 판단을 내린 듯했다. 한 사람씩만 의무적으로 병상을 떠나지 않도록 저희들끼리 조를 짜는 듯했다. 어디 매인 데 없이 자유로운 나는 되레 의무적인 당직에서 제외가 됐다. 줄창 지키고 있어 주려니 믿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마냥 비몽사몽간과 깊은 잠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비몽사몽간일 때 빨대로 유동식을 공급하고, 그 결과로 더러워진 하기스를 제때제때 갈아주는 게 간병의 주된 일이었다. 그러다가도 쥐구멍에 볕들듯이 반짝 어머니의 눈빛과 표정이 명료해질 적이 있었다. 그럴 때는 병상을 둘러싼 식구들을 일일이 알아볼 뿐 아니라 빠진 식구를 찾기도 했다. 때때로 그 이상을 봐서 탈이었다. 아무도 없는 발치를 바라보며 “호뱅이 너 오래간만이다” 하기도 했고 “자네도 왔네그려, 업힌 애는 누군가. 내려놓고 편히 앉게” 하기도 했다. 웬 애들이 저렇게 득시글거리느냐고 귀찮은 표정을 짓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빈자리를 보고 너무도 능청스럽게 말을 시키는 어머니를 젊은 애들은 싫어하기도 하고 무서워하기도 했다. 여러 사람의 이름을 불렀지만 내가 누구라고 알 만한 사람은 몇 안됐다. 자주 알은체를 한 호뱅이만 해도 어릴 적 시골 마을을 잠시 스쳐간 떠돌이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아직도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내 또래의 장난꾸러기들과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알라리 꼴라리, 호뱅이 잠뱅이엔 이가 서 말, 호뱅이 바지 속엔 똥자루가 서 발이래, 어쩌구 하며 놀려먹었을 때의 리듬감 때문이지 우리집과 특별한 연관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로 미루어 어머니의 환각에 나타나는 다른 이들도 어머니를 주역으로 한 어머니의 인생에선 미미한 엑스트라로 스쳐간 이들에 지나지 않을 성싶었다. 그렇다면 참 이상도 하지. 변의조차 퇴화된 몽롱한 의식 속에서 하필 그 엑스트라들이 튀어나올 건 또 뭔가. 여느 때도 아닌, 장장한 인생의 막을 내리려는 이 금쪽같은 시간에. 인간 의식의 불가사의가 조금도 신비하거나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고, 조잡한 허구처럼 여겨져 무안스럽기도 했다. 어머니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인간을 위해서. 혹시 어머니는 지금 일생일대의 마지막 연기를 하고 있는 거나 아닐까, 당신 의식의 밑바닥에 찰싹 늘어 붙은 걸 꼭꼭 감추기 위해 부스러기만 내보이는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내 이런 조바심은 실은 내 의식의 밑바닥에 늘어 붙어 있는 것 때문이었다. 나 죽거든 내가 느이 오래비한테 해준 것처럼 해다오. 누가 뭐라든 상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너밖에 없다. 내가 어떻게 어머니의 그 절절한 부탁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그건 유언인 동시에 신뢰감이었다. 어머니는 그후 7년이나 더 사시는 동안 한 번도 그 사실을 재확인시켜 준 적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어머니가 좀 이치에 닿는 헛소리를 해주길 나는 갈망하고 있었다. 7년 전 그 얘기를 나한테 전해들은 조카들은 별로 깊이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았다.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조카들은 전형적인 현대인이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과 형편없는 기억력이 가장 큰 걱정이자 자랑이었다. 어머니가 재확인이든지 하다못해 의미 있는 암시라도 해주지 않는 한 나는 어머니의 신뢰에 보답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혼수상태는 길어지기만 했고 어쩌다 하는 헛소리도 워낙 기진한데다 혀가 굳어 점점 알아듣기 어렵게 됐다. 짐작으로 겨우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내가 죽었냐? 살았냐? 하는 말밖에 없었다. 그 말은 임종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침울한 분위기에 장난스러운 팔매질처럼 파문을 일으켰다. 염치없지만 유쾌한 파문이었다. 식구들은 잠시 긴장을 풀고 킬킬댔다.
“고모, 호뱅이가 도대체 누구유?”
그런 웃음 끝에 큰조카가 물었다. 어머니가 호뱅이 타령을 안 한 지도 며칠 됐건만 조카가 불쑥 물었다.
“예전에 우리가 시골 살 때, 우리 마음에 흘러들어온 떠돌이였는데, 참 노인네 망령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난데없이 호뱅이가 보이실 게 뭐람”
“그땐 할머니도 젊었을 거 아뉴?”
“그럼 지금부터 반세기도 더 옛날 일인걸”
“호뱅인 미남이었구요?”
“미남?”
나는 조카가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헤아리기 전에 웃음부터 나왔다. 이가 서 말에 똥자루가 서 발이라는 아이들 놀림이야 과장이라 쳐도 그 몰골이 거지와 진배없었고, 지능도 반편이었다. 다만 어떡하든지 일을 해주고 밥을 얻어먹으려는 결벽증 하나는 있어서 비렁뱅이 취급은 안 당한 듯했다.
“그 옛날에 우리 할머니, 호뱅인가 그 사람하고 썸씽이 있었던 거 아닐까?”
조카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능글댔다. 농담치곤 때와 장소를 못 가린 무엄한 농담이었지만 하도 가당찮은 추측인지라 탄하는 게 되레 이상할 것 같아 아이구, 실없는 소리 좀 작작하라는 정도로 그만두려고 했다. 그러나 조카는 뜻밖에 집요했다.
“실없는 소리 아녜요 고모, 고몬 이상하지도 않아요? 할머니가 지금까지 앞세운 식구가 한두 사람이유. 식구뿐인가 친한 친척이나 친구분들도 거의 다 먼저 가셨을 걸”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니? 장수하면 누구든지 그건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게지 할머니 잘못은 아냐”
“누가 할머니 잘못이랬우. 그냥 이상하단 소리지. 고몬 괜히 핏대를 올리고 그래”
“뭐가 또 그렇게 이상하다는 거니?”
“그럼 이상하잖아요? 왜 하고많은 친한 사람 다 제쳐놓고 하필 호뱅이가 저승에서 할머니 마중을 오냔 말예요”
나는 하도 어처구니없어 픽하고 실소 먼저 터뜨리고 말았다. 조카는 그럼 저승사자가 돼서 온 호뱅이를 할머니가 보았다고 믿는 것일까. 나는 할머니의 헛소리는 다만 헛소리일 뿐이라고, 조카의 말을 일축했다. 우리가 꾸는 수많은 꿈 중 영검한 꿈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것도 억지로 갖다붙여서. 우리는 수많은 꿈속에서 보고 싶은 사람이나 친한 사람보다는 그냥 스쳐지나간 사람이나 생소한 사람과 노닌다. 결국 꿈은 무의미하고 무의식은 믿을 게 못된다. 헛소리 또한 그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얘기도 했다.
“고모가 할머니의 헛소리에 헛소리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신다니 안심이에요”
조카는 비로소 정색을 하고 7년 전 첫번째 대수술과 그 야단법석 끝에 나온 할머니의 유언을 헛소리로 돌릴 뜻을 분명히 했다. 그제서야 나는 조카의 말 수단에 말려든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의 태도가 하도 단호하여 나는 주눅든 소리밖에 못 냈다.
“그건 절대로 헛소리가 아니었어, 너”
“그게 유언이었대도 할 수 없어요. 내가 지키기 싫으니까요. 내 맘이에요”
“쟤 말버릇 좀 보게나. 그게 뭐가 어렵다고”
“어렵다곤 안했어요, 싫다고 했지. 할머니도 아버지처럼 화장해서 그 뼛가루를 고향이 바라다 뵈는 바다에다 뿌리라구요? 고모 제발 다시 그런 유난떨 생각 말아요. 내가 싫은 건 할머니나 고모의 그런 유난스러운 한풀이를 지금 이 시점에서 되풀이하는 거란 말예요. 아버지 땐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차라리 비통하기라도 했겠죠. 지금 그 짓 해봤댔자 쇼 부리는 것밖에 안 된다구요. 저도 남들이 하는 대로 보통 장례를 치르고 싶단 말예요. 저도 사회적 지위도 있고 체면도 있는 사람이란 말예요. 상주도 저구요”
“그래애, 고몬 출가외인이다 이거지. 할머니 속으로 낳은 자식은 나 하나밖엔 안 남았는데도 싹 무시하겠다 이거지”
나는 눈물까지 몇 방울 떨어뜨리는 체하면서 이렇게 징징거렸지만 속으로는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개운하고 상쾌했다. 나 자신도 전혀 예기치 않은 느낌이었다. 나 역시 그 짓을 하기가 싫었던 것이다.
“고모, 화났수? 누가 감히 고모를 무시한다고 그러세요. 자아 화 푸세요. 할머니 묏자리 골라잡는 일은 전적으로 고모한테 맡길 게요”
“얘는 묏자리가 무슨 보세 스웨터냐? 아무나 골라잡게”
그렇게 되받으면서도 싫진 않았는데 그것도 미리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벌써 몇 군데 알아봤는데도 교통 편한 서울 근교의 공원묘지는 이미 차서 도무지 어째 볼 도리가 없더라고 했다.
“그래도 연고권이 있는 데가 좀 납디다”
“그럼 느이 엄마 산소가 있는 신천지 공원묘지 말이냐?”
신천지묘원은 어머니가 너무 장수하신 탓으로 앞세운 며느리를 장사지낸 묘지이다. 교통으로 보나 거리로 보나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데였지만, 야산을 묘지로 개발해 분양만 해놓고 사장이 부도내고 잠적한 후 몇 번씩 사장이 바뀌는 통에 관리소홀로 좀 황폐해진 묘지였다.
“저도 거기가 썩 탐탁하지는 않지만요, 산 사람 편의대로 해야지 어쩌겠어요. 명절 때 성묘가 큰일인데 어머니 산소하고 할머니 산소가 각기 딴 묘지에 떨어져 있어 보세요. 부득이 한쪽은 접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얘 좀 보게나, 금방 장손 유세 부리더니 이젠 숫제 위협이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 눈을 흘겼지만 조카의 말이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어서 나는 아퀴를 지을 일만 남겨놓고 있었다. 어머니 바로 머리맡에서 장시간 그런 얘기를 했건만 어머니가 눈을 뜨고 당신 주장을 말하는 기적 같은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조카는 이미 신천지묘지주식회사 경리부장이라는 사람과 현장에서 만날 날까지 약속해 놓고 있었다. 교외선 일영역에서 가까운 신천지묘지의 사무실은 석유난로도 없이 미적지근한 연탄난로 하나로 여간 을씨년스럽지가 않았다. 사무실과 붙은 식당은 먼지가 부우연 테이블들이 한쪽으로 난폭하게 밀어붙여진 채 고르지 못한 양회바닥에 여기저기 의자가 나동그라져 있는 게 한층 썰렁해보였다. 우리는 임의로 난로의 불문을 열어놓고 나서 크고 작은 파도 같은 구릉을 타고 한없이 펼쳐진 무덤들을 망연히 내다보았다. 산 자의 피할 수 없는 운명, 영원한 위화감, 그런 생각이 두서없이 오락가락했다.
“식당꼴만 봐도 분양할 묘지가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알 만하죠”
조카가 쇠꼬챙이로 난로 뚜껑을 열어보고 나서 말했다. 벌써부터 그이 수완을 자랑하고 싶어 하는 걸 보면 전화상으로지만 분양은 된 거나 마찬가지인 듯했다. 작달막한 중년 남자가 잿빛 오리털 잠바에 찬바람을 잔뜩 묻혀 가지고 들어왔다. 조카는 명함을 내놓으며 나까지 인사를 시켰고, 그는 명함 없이 말로 송부장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송 부장은 연고권이 있으니까 그나마 어렵게 마련을 했지, 공식적으로 분양할 수 있는 묘지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소리를 힘주어 했다.
“더러 다녀보셨는지 모르지만 이 근처에 이만한 묘지 없을걸요. 공원묘지제도가 생기고 나서 초창기에 개발했기 때문에 돈푼 있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넓게 잡아 호화묘도 꾸밀 수가 있었죠, 교통 편하죠, 노적봉을 마주보고 있어서 자손들이 부자 되죠, 이만하면 묘지 중엔 압구정동 아닙니까”
원, 묘지 중에 압구정동이라니, 송 부장을 보아하니 좌청룡 우백호를 뇌까려봤댔자 어울릴 것 같지도 않았지만 말을 막 해도 좀 너무한다 싶었다. 저런 위인을 상대해서까지 꼭 묘지를 써야 하나, 정이 떨어지면서 역시 어머니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짓을 하긴 싫었지만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이 아직도 내 의식 밑바닥에 집요하게 늘어 붙어 있었다. 그 일의 실제로부터는 놓여났지만 그 의무감으로부터는 생전 못 놓여날 것 같았다. 그건 어쩌면 미련인지도 몰랐다. 그 짓을 하긴 두려워도 내 안에서 관념화된 그 짓에는 비장미 같은 게 있었다. 그 비장미에 대한 미련이 그러나 현실적으로 일을 지딱지딱 처리해 가는 조카 앞에선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난로가 아까보다는 달궈진 것 같았지만 조카는 송부장이 몸 녹일 시간을 주지 않고 채근했다.
“자아, 올라가 봅시다. 빨리 결정을 해야 하니까”
“차 가져오셨죠?”
송부장이 먼저 조카의 은빛 르망 앞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말했다. 송부장이 지시하는 길은 꽤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좀 낮은 덴 없소?”
“더운밥 찬밥 가릴 작정이면 아예 가지도 맙시다. 딱 한 자리 그것도 사장님한테 사정사정해서 마련해 놓았으니까”
송부장이 배짱을 부렸다. 조카는 말없이 차를 몰았다. 등성이를 휘감는 커브를 돌자 전망이 트이면서 편편한 주차장이 나타났다.
“여기 또 주차장이 있군요”
조카는 그게 퍽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시무룩했던 표정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송부장이 바로 조오기라고 턱짓을 하면서 거기서부터 걸어가자고 했다. 완만하지만 차가 다닐 수 없는 오솔길이 나왔다. 주차장서부터는 사람들이 운구를 해야겠군, 조카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철두철미하게 실제적인 조카가 밉살스러웠다. 송부장이 가리키는 묏자리는 얼마 안 걸어가서 나왔지만 거기다 어떻게 묘를 쓰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낭떠러지였다. 에잇 여보슈, 조카의 첫마디가 곱지 않자 송 부장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재빨리 낭떠러지 밑으로 몸을 날렸다. 거기도 물론 남의 묘역이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자막대기까지 꺼내 휘두르면서 그쪽에서 곧장 축대를 쌓아올리고, 또 뒤로는 길을 먹어 들어가며 축대를 쌓는다면 예닐곱 평의 평지는 넉넉히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을 그럴 듯하게 했다. 이 묘역의 수천수만 개의 묘가 다 그렇게 산의 경사를 깎고 축대를 쌓아 만든 거지 처음부터 공동묘지로 태어난 산 봤느냐는 맺음말이 특히 설득력이 있었다. 조카의 안색도 부드러워졌다.
“그건 그렇소만 길을 깎는다는 게 어쩐지 좀 할 짓이 아닌 것 같잖소?”
조카는 “도의적으로다”라는 말을 생략한 것 같았다. 송 부장을 상대로 도의 운운하는 것은 내 생각에도 코미디 같았다.
“아, 그거야 우리 걱정이지 선생님이 걱정할 일이 아니죠. 바른 대로 말씀드리자면 이 길도 이거 며칠 안 남았습니다. 조만간 다 뭉개서 팔아먹을 테니 두고보시구랴”
“길을 없애다니오?”
“길은 뭐 사장님 땅 아닌가요. 땅임자 맘이죠. 이 산꼭대기까지 찻길 내놨으면 됐지 따로 길 뒀다 뭐 할 겁니까. 봉분 사이가 다 길인데, 안헐 말로 봉분을 넘어다닌들 누가 뭐랄 겁니까. 말 많은 건 산 사람이지, 죽어지면 그만이니까요”
송부장이 영탄조로 나왔고, 조카도 그 문제는 그쯤 해둘 눈치였다. 아무튼 여덟 평 정도의 묘지를 조성하는 데 며칠이나 걸리겠느냐 따졌고, 송부장이 구인난을 핑계로 보름 정도를 잡자, 조카는 닷새 안에 해놓을 자신 없으면 그만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보아하니 이리루 오실 분이 숨을 모나본데 그렇다면 할 수 없죠. 열일 제쳐놓고 여기 일 먼첨 해드릴 밖에요”
서둘러 결정을 내려버린 송 부장은 행여나 이쪽에서 무슨 변덕을 부릴세라 다시 노적봉 얘기를 꺼냈다. 거기서 곧장 바라뵈는 먼 산봉우리를 손가락질하면서 저게 바로 노적봉이고, 이 묘원 중에서도 저 봉우리와 이렇게 정면으로 마주볼 수 있는 묘역은 이 지역밖에 없다는 얘기를 의기양양하게 했다. 또 부자 되는 얘기를 듣게 될 게 미리 낯간지러워서 우린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내려오는 차 속에서 조카는 나에게 평당 10만 원씩 여덟 평을 사기로 했다면서 더 넓게 쓰고 싶지만 개인묘지는 그 이상은 못 쓰도록 제한이 돼 있단 얘기를 했다. 구태여 차 속에서 할 것도 없는 얘기였는데 송 부장 들으라고 일부러 하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 비탈에서 여덟 평을 과연 만들어낼 수 있을까 적이 미심쩍었다. 더 미심스러운 건 과연 이렇게까지 해서 묘를 써야 하나 하는 문제였다. 강화도와 개풍군 사이의 한강 폭만한 바다가, 어머니의 상처가, 더운 그리움이 되어 몸속으로 흘러드는 것 같아 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조카는 한풀이에 동참하기를 거부했고 나는 졌다. 내가 져준 건 과연 잘한 짓일까?
사무실로 내려와 또 한 번 문제가 생겼다. 송 부장은 80만 원은 매장에 드는 지반 비용과 비석, 떼 등 조경비와는 상관없는 순전한 묘지 여덟 평 값이라는 걸 누누이 강조한 연후에 전액을 받아 챙기고 나서, 사장 명의로 된 영수증은 50만 원으로 떼어주는 것이었다. 안색이 변한 건 우리뿐 송 부장은 외눈 하나 깜빡 안하고 말했다. 평당 10만 원은 어디까지나 현 시세가 그렇단 소리고, 여기처럼 분양이 예전에 끝난 묘지에서 실무자와 연고자가 합의해서 자투리땅에서 재주껏 창출해낸 묘지에 있어서는 그 이득을 땅임자와 실무자가 적당히 갈라먹는 게 관례라고 했다. 너무 능청스러워서 말대답도 못하고 멍청히 서 있는 우리에게 송 부장은 “알아들으셨습니까?”하며 되레 답답하다는 시늉을 했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매우 쓰거운 얼굴로 차를 모는 조카에게 나는 위로삼아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탓하지 않길 잘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좀 깎아볼 것이지 어쩜 그렇게 어수룩하게 굴었냐?”
“고모가 그전서부터 그랬잖아요. 묘지가(價), 수의 등 망자에게 드는 비용은 함부로 깎는 게 아니라고”
조카의 말이 매우 불손하고 퉁명스러웠다.
“쟤 좀 봐, 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이제 와서 날 나무래네. 쟤가 언젯적에 고모 말을 그렇게 잘 들었다구”
곧장 앞만 보며 경직됐던 조카의 얼굴이 억지로 좀 누그러지면서 “그만 둡시다 고모 내가 잘못 했수” 했다. 혹시라도 내 입에서 또 딴소리가 나올까 봐 그런다는 걸 눈치 채고 나도 억지로 웃어주었다. 조카는 그 후 매일같이 전화로 송 부장에게 화급하게 묘지조성을 독촉했고 나는 그게 어머니의 죽음을 독촉하는 소리처럼 들려 언짢았으나, 또 무슨 탓을 들을까 봐 암말 안하고 참았다.
역시 조카가 옳았다. 여덟 평의 넉넉한 묘지가 조성됐으니 와보고 술 한 잔 사라는 송부장의 호기 있는 대답을 듣기까지는 열흘이나 걸렸고 어머니도 기다렸다는 듯이 그 무렵에 운명하셨다. 나는 이상하리만치 눈물이 나지 않았다. 딸의 곡성은 저승까지 들린다는 옛말도 있듯이 가장 서러워해야 할 사람이 난데 내가 울지 않으니까 상가에서 곡성이 나지 않았고 조문객도 한마디씩 호상이란 소리를 해서 곡성 없는 상가를 민망하지 않게 해주었다. 그러나 강화도에서 늦게 당도한 친척들은 대개 곡을 하며 들어왔고 특히 잇집은 서럽게 통곡을 했다. 그녀의 곡성에 온 집안이 숙연해졌고 나도 그녀를 달래다가 덩달아 울고 말았다. 어머니의 임종 후 처음 울어보는 울음이었다. 기어코 우리는 부둥켜안고 흐느꼈다. 병풍 뒤에 누운 죽음을 마음속 깊이 애련히 여기는 진정이 두 몸을 한 몸처럼 느끼게 했다. 강화에서 조상 온 친척 중엔 80 고령의 노인도 있었는데 우리가 항렬이 높아 어머니에게 손자뻘이 되었다. 그 노인을 모시고 온 그의 손자가 사십은 돼 보이는데 나에게는 증손뻘이 된다고 생각하니, 일가 못된 건 항렬만 높다는 속담이 생각나 절로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그 노인 역시 몇 마디 형식적인 곡을 했고, 곧이어 술상을 받더니, 상주를 불러 장지는 어디로 정했는가를 물었다. 조카가 신천지 공원묘지로 모시기로 했다니까 조카의 손을 덥석 잡더니, 고맙네 참으로 고마워, 우리 집안이 어떤 집안인가, 풍덕(豊德)에 기름진 논밭이 수십만 평, 종중산만 해도 수십 정보, 시제 때 문중이 모이면 풍덕땅이 온통 백절치듯 했던 유복하고 번성한 문중 아니던가. 그런 가문이 피난 내려와 살기가 좀 어려워진 걸 핑계로 화장으로 모시는 집이 늘어 참으로 괘씸터니 아우님은 안 그런다니 참말로 고맙네, 하면서 서울 사는 뉘집도 화장을 하고, 뉘집도 화장을 했다고 예까지 들어가며 개탄을 했다. 치아가 몇 안 남은 노인은 화장 소리는 영락없이 환장으로 들렸다. 듣다못한 그의 손자가 불안하게 말했다.
“우리 같은 시골사람은 아무리 없이 살아도 그렇게 환장은 못할 테니 걱정 말아요”
그리고 우리 식구들한테는 할아버지가 망령이 나서 저러신다고 역시 퉁명스럽게 해명을 했다. 그도 우리 문중이 고향에서 그렇게 잘살았다는 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양반행세만 유별나게 했다뿐 다들 근근이 살았고, 문중엔 찢어지게 가난한 집도 많았다. 나중에 잇집한테 들은 얘기지만 그 노인 역시 망령이 나고부터는 툭하면 뒷동산에 올라가 바다 건너를 바라보면서 저게 다 내 땅이라고 호기를 부린다는 것이었다. 우리집이 살던 마을은 바라 뵈는 땅에서 20리쯤 내륙으로 들어가야 하지만 그 늙은 조카가 살던 풍덕땅은 강화에서 곧바로 바라보였다. 나중에 젊은이들과 어울린 그 노인의 손자는 저런 늙은이가 다 죽어야 통일이 된다고 모진 말을 했다. 우리집 상주도 차마 드러내놓고 맞장구를 치진 않았지만, 빙긋이 웃으며 의미 있는 눈길을 주고받는 게 내 눈엔 꼭 그래, 저런 풍쟁이들이 죽어야 뭔일이 되고 말구, 하는 동감의 표시로 보여 눈꼴사나웠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만 그래 잘들 해봐라, 한을 품은 세대가 속속 죽어가니 너희끼리 잘들 해보라고 뇌까렸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어머니의 장례날은 푸근했지만 전날 밤에 많은 눈이 내려 교통이 걱정되었다. 해가 나면서 도심의 큰길은 눈이 다 녹아 별로 문제가 없을 것 같았지만 묘지까지 올라가는 급한 경사길을 생각하면 아찔했다. 눈하고 어머니하곤 무슨 악연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으로부터 산에 묻히길 원치 않는 어머니의 강력한 의사표시일지도 모른다는 허황한 생각까지 좋지 않은 생각만 꼬리에 꼬리를 물어 도무지 안절부절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뭘 변경시킬 수 있다고 여기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불안과는 상관없이 모든 절차가 제시간에 착착 진행이 되었고, 나처럼 불안해 하거나 하다못해 근심스러운 말마디 한번 하는 사람이 없었다. 눈은 되레 침울해야 할 장례분위기를 밝고 활기차게 하는 것 같았다. 나만 속으로 쟤들은 뭘 몰라도 한참 모른다니까, 저러다 무슨 일이나 없었으면 좋으련만 싶은, 도대체 불상사가 나기를 바라는 건지 걱정하는 건지 모를 방정맞은 생각에 계속 시달렸다. 마침 휴일이어서 영구차는 도심을 신속하게 벗어났다. 교외로 나가자 도시보다 한결 깨끗하고 푸근한 눈이 들과 산을 덮고 있어 딴세상 같았지만 역시 차들이 빠지는 데는 별 지장이 없는 듯했다. 영구차도 뒤따르는 승용차들도 내 생각으로는 좀 빠르지 않을까 싶은 속도로 잘도 달렸다.
우리 일행은 사무실 앞에서 잠시 정차한 후, 여자들은 해가지고 온 음식을 식당에 내려놓고 점심에 대해 이것저것 부탁하면서 젊은이가 두세 명 거기 남기로 했고, 상주의 친구들은 사무실로 가서 매장준비에 차질은 없나 알아보고 나서 다시 떠났다. 영구차가 가파른 오르막길을 허위허위 오르다 말고 딱 멎더니 스르르 뒷걸음을 쳤다. 차 안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뒤따르던 승용차의 안위를 생각해서 지르는 비명이었다. 가끔 신문에 나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결과가 되고 만 장례식 불상사가 반사적으로 머리에 떠올랐다. 다행히 느리게 움직이던 중이었고 뒤차와의 거리도 충분해 별일없이 영구차는 멎었지만 운전수가 심각한 얼굴로 여기서 더 올라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젊은이들이 내려서 삽으로 눈길을 찍어 자국을 냈지만 운전수는 어림없는 얼굴을 했다. 나는 이제야말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간이 콩알만해져서 눈감고 두 손 모아 어머니를 달랬다. 엄마 이제 그만 한 풀어. 그까짓 육신 아무데 묻히면 어때 난 어떡허든지 엄마 소원 풀어주고 싶었지만 쟤들이 싫다는 걸 어떡해? 쟤들한테 져야지 우리가 무슨 수로 쟤들을 이기겠어. 실상 쟤들이 옳을지도 모르잖아. 나는 엄마 치마꼬리에 매달리는 계집애처럼 어린 마음으로 울먹이며 빌었다. 영구차가 다시 움직였다. 그러나 차내의 수군거림으로 그게 내 기도 덕이 아니라 돈 덕이라는 걸 알았다. 처음엔 상주들이 운전수의 말귀를 못 알아들어 친구들을 시켜 눈길을 치게 했더니 경험 있는 친구가 그게 아니라는 걸 귀띔해줘서 돈을 건네주었다고 했다. 그 후에도 수도 없이 돈 달라고 내미는 손을 거쳐 어머니는 무사히 안장됐다. 조카들과 그 친구들은 그런 일에 능수능란했다.
삼우날 다시 찾은 산소에서 나는 어머니의 성함이 한 개의 말뚝이 되어 꽂혀 있는 걸 보았다. 정식 비석은 달포쯤 있어야 된다고 했다. 말뚝에 적힌 한자로 된 어머니의 성함에 나는 빨려들 듯이 이끌렸다. 어머니의 성함 중, 이름을 따로 뜻으로 읽어보긴 처음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어머닌 부드럽고 나직하게 속삭이며 아직도 내 의식 밑바닥에 응어리진 자책을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딸아, 괜찮다 괜찮아, 그까짓 몸 아무데 누우면 어떠냐. 너희들이 마련해준 데가 곧 내 잠자리인 것을.
생전의 어머니는 깔끔한 대신 차가운 분이어서 한 번도 그렇게 곰살궂게 군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생애만큼 먼 옛날의 작명(作名)이 나에게 그런 위무를 해주고 있었다.
어머니의 함자는 몸 기(己)자, 잘 숙(宿)자여서 어려서부터 끝자가 맑을 숙자가 아닌 걸 참 이상하게 여겼었다.『문학사상』(198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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