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넓은 의미에서 세계사의 위대한 이상은 직관하는 인식에서 비롯됐다(인간과 지구의 발달, 2021, 145)."
우연히 길을 가다가 거리에 앉아서 구걸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 요즈음에는 보기 힘든 광경인데 지난 번에도 같은 자리에 앉아 있어서 본 적이 있는 남자다.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게 검은 파카의 모자를 머리에 까지 쓴 것을 보면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는건가. 그렇다면 작은 일이라도 할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할수는 없는건가. 다리를 벌리고 앉아있어서 다리를 자유로이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인 듯 보이니 일을 하기가 어려운가. 그래서 그렇게 앉아서 사람들이 주는 것을 받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는건가.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생각이 다시 이동을 해서, 이 사람은 가지고 있는 돈을 죽기 전에 모두 쓸려고 마음 먹고, 마구 쓴다고 했다. 막 쓰는 것이 즁요한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생각을 하느냐'가 핵심이다. 당연히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구걸하는 사람도 가지고 있는 돈을 몽땅 쓰고 죽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어떤 생각은 분명히 하고 있다. 문제는 그 생각이 그의 인생을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까지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런 생각이 자신의 삶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나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산다. 바로 말하면 사람들이 이 생각이 나오는 곳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구걸하는 사람이 추위와 더위에 그대로 노출되는 속에서 그렇게 앉아 있는 것은 그 사람의 생각이 나오는 곳에서 그런 생각, 그런 행동을 하도록 하는 생각밖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앉아 있다. 만약 그 사람의 생각이 나온 곳에서 다른 생각이 나올 수있다면, 그렇게 앉아 있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다른 생각이 나오지 않는 이유가 궁금하다. 예컨대 그런 생각을 하니까 그런 삶을 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를 파악하지 못하니까, 그런 생각 속에서 그런 삶을 계속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비약하면 이 나오는 생각이 위 문장의 직관이다. 세계사의 위대한 이상이 나오는 곳도 여기이고,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되는 곳도 여기이다. 이곳이 무의식에 내재한 곳으로 정신이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결론은 이것이 '정신'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하는 행동도 그 출발은 그 사람의 정신이다. 그리고 정신이 내재한 곳이 인간의 무의식이다. 이것이 무의식인 이유는 정신작용이 이루어지는 곳이 무의식, 인간이 알지 못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한다면 그 전에 먼저 무의식에서 정신작용이 있었다. 이 정신작용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데에 의식 아래에서 이루어지므로 다만 인간이 파악하지 못할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이는 상속에 있는 자아가 내가 알고있는 자아이므로 나는 나의 자아를 만나지 못하는데에서 오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만약 내 안(무의식)에서 이루어지는 정신작용을 안다면, 나의 인생을 설계할 수도 있고, 또 나의 이상을 실현할 수도 있다.
무의식에서 이루어지는 정신작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 그리고 정신을 지닌다. 먼저 인간은 육체를 통해서 들어온 감각을 감각혼(영혼)이 받아들이고, 이를 오성혼에 전달, 오성혼이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를 다시 의식혼이 받아들여서 정신세계의 직관을 파악하는 것이 정신작용이다. 이 기능 중에서 어느 한 부분이 막히면 정신세계의 직관을 받지 못하므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하고 가까운 문제가 영혼의 속성인 영혼이 현재의 상황에 매몰되어 있어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내가 짜증을 낼 경우 영혼이 짜증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다. 이때 내가 짜증에 매몰되어 있겠지만, 정신을 차려서 영혼에게 짜증을 내는 이유를 물어보아야 한다. -이것이 명상이다-. 처음에는 가르쳐주지 않지만 계속 물어보면 반드시 답을 알려준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현 상황에 대해서 점차 파악을 할 수가 있다. 그러면 영혼이 매몰되더라도 차츰 그 상황에서 놓여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정신작용이다.
다음도 정신작용을 파악하는 방법인데, 같이 사용하면 조금 더 쉽게 파악할 수가 있다. 정신과학적인 요소를 통한 방법이다. 정신과학적인 요소는 육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그리고 '나'이다. 이 네 가지 요소를 활용해서 나의 무의식에서 일어나는 정신작용을 파악하는 것이다. 요컨대 정신과학적인 요소는 도구이다. 육체는 물질요소이고, 에테르체는 생명의 힘이다. 인간의 호흡, 맥박, 혈액이 흐르는 힘이 에테르체이고 이 힘은 우주에서 온다. 아스트랄체는 영혼의 활동인 공감과 반감을 주재하고 감정이 그 근간이다. 그리고 리듬을 통해서 물질로 환원, 드러난다. '나'는 이 세상에서 하나뿐인 '나'만이 나라고 말할 수있고 다른 세 요소를 총괄해서 움직이게 한다.
정신과학적인 요소로 들어갈려면 아스트랄체로 들어가는 것이 그나마 쉬운 편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 아스트랄체이므로, 이 감정을 통해서 에테르체를 만날 수가 있고, 나도 만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내가 만약 기쁘다면, 기쁜 감정을 가만히 바라보면, 그때 만약 노래를 한다면 아스트랄체의 기쁜 감정이 노래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 감정이 아스트랄체이고, 이것이 물질로의 환원이다. 이때 의지를 내어서 어떤 일을 열정을 가지고 한다면, '나'가 드디어 등장을 한다. 어떤 일이라도 일을 할때 '나'가 등장하지 않으면 그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등장하게 되어있다. 아니라면그 일을 하지 않는 경우이다.
에테르체는 가만히 자신의 호흡에 집중하면 이 호흡의 에너지가 우주에서 온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특히 따뜻한 태양을 받으면서 걸으면 온 몸에 힘이 솟는다. 이 힘이 태양에서 온 에너지로, 나의 에테르체를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이 자유로운 에너지가 우주의 에너지이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 힘이 모든 생물을 키우는 힘이라는 것도 알수가 있다. 이렇듯 우주 에너지는 자유롭게 모든 생물에게 전달된다. 이것이 모든 명상 단체, 종교단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신작용이다. 그리고 그 근간이기 때문에 어떤 단체에서도 겉 포장이 다를 뿐 그 근간은 같다. 즉 같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가만히 자신의 호흡이나 감정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면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꾸준히 인내심을 가지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제 진짜 여담이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인간의 몸에는 챠크라가 총 6-7개가 있는데 그중에서 후두에 있는 챠크라는 동식물의 힘을 활용할 수가 있다고 한다. 동식물의 힘을 활용하는데까지는 아니지만, 동식물이 나와 같은 존재임은 느낀다. 그래서 그들이 기거하는 자연이 더러워지는 것이 참을 수가 없어서 쓰레기를 줍는다. 아주 작은 비닐이라도 물속에 들어가면 물위에 거품이 생기고, 이어서 벌레가 생기고, 심하면 악취까지 난다. 그래서 작은 비닐이라도 물에 들어가지 않도록 줍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청둥오리와 왜가리 등등이 산다. 그런 곳에 사는 생물이 안타까워서 쓰레기를 줍는데, 특히 안타까운 것은 둘레길을 걷는 사람 중에 사탕을 입에 넣고 그 봉지를 길에 버리는 경우이다. 사탕봉지가 작아서 바람에 날리기도 쉽고 또 줍는 것도 쉽지 않은데 계속 버린다.
어느 날 둘레길을 걷는데 새들이 합창을 했다. 진짜 많은 새들이 지저귀는데 마치 천상에서 들리는 소리와도 같았다. 이때 가만히 내부에 집중을 해보니, 심장 부근의 챠크라가 움직였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리코더를 불때나 노래를 부를 때에도 심장 부근의 챠크라기 움직였다. 이 중 리코더는 호흡으로 부는 악기라서 악기 운지만 잘하면 심장부근의 차크라가 움직이지만, 노래는 몸이 악기라서 먼저 몸을 악기로 만들어야 하므로 시간이 걸려야 할 듯하다. 하지만 음악을 듣거나 할때면 심장 부근의 차크라가 움직여서 내는 소리가 마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천상의 소리가 나는 듯도 하다. 이것이 동식물을 활용하는 경우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이 고마와서 내게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은 든다.
나는 둘레길을 걸을 때 언제나 내부에 연결된 외부에 집중하면서 걷는다. 정신계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고, 나의 내부는 이 외부, 정신계에 연결되어 있어서 내가 정신계의 통지를 받기 때문이다. 만약 이 외부를 배제하면 나는 정신계와 연결이 금새 끊기고 만다. 둘레길에서 나무와 새들이 자유로이 노니는 소리와 모습, 강물이 쉼없이 흐르는 소리가 모두 정신계에서 들려오는 소리, 화음이다. 그리고 그 소리가 모두 나의 내부를 깨워서 정신계에 연결시킨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나도 그들과 하나가 된다. 아마도 필자가 작곡을 했다면, 분명히 훌륭한 음악, 정신계에서 오는 음악을 작곡했을 것이다. 다른 예술도 마찬가지로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를 것이다란 생각이 든다. 다만 물질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계사의 위대한 이상과 같은 종류의 직관이다. 직관은 이와 같이 정신계에서 받는다. 나아가 세계사에서 인간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그런 이상이 나올려면 정신작용이 일어나야하고, 정신작용이 일어나도록 나는 나의 내부를 깨워야 하는 것이다. 가만히 외부 정신계에 연결하면 필자 내부의 정신과학적인 요소가 활성화된다. 그들(동식물)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처럼 자유롭고 편안하고 행복하다. 산에서 사는 옛 선사들이 행복해하는 이유인 듯도 하다. 물론 정신계는 물질계가 바탕이 되어서 존재해야 한다. 그래야 정신계에서 얻은 직관을 물질계에 활용함으로 해서 물질계가 발전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 뿌리를 물질계에 견고하게 박아야 한다. 늘 되풀이 하지만 현 교육에서 아이들의 내부를 완전히 배제, 봉쇄해 놓고 정신계의 통지, 직관을 요구하니, 이건 어불성설이다.
누구도 육체를 가지고 있는 한 정신계에 온전하게 연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다르게 말하면 누구도 정신계에 촉수를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의 정신작용을 파악해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누구에게나 동식물의 힘이 열려있다고 봐야한다. 그런데 내가 문을 열지않기 때문에 그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