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이 물질로 환원된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사실 정신이 있는지도 모르는데 물질로의 환원이라니 무슨 어불성설인가하는 생각이 들것이다. 우리가 정신을 모르는 것은 정신의 속성인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의 정신이 발달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먼저 자신의 정신을 파악해야 한다. 문제는 내가 나의 정신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 출발은 '이것이 뭘까', 분명히 뭔가는 있는데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고 또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을 궁금해 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의 자아가 '저절로' 안내한다. 그랬기에 정신을 파악하는 수많은 방법이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전해져 오는 것이다.
정신의 물질로 환원은 고래로 부터 그 사람의 행동, 언어, 성격(이건 오래된 습관이다) 등등 으로 파악했다. 이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기에 그랬을 것이고, 이것이 사실은 영혼의 작업이다. 그러므로 먼저 나의 영혼의 작업을 파악해야 한다. 내가 하는 사고, 느낌, 행동(의지)이 나의 영혼의 작업이고, 그 결과가 나의 영혼의 수준이다.
여담으로 길을 걸으면 도처에 쓰레기, 생수 병, 캔, 과자 봉지 등등이 널려있는 것을 본다. 점점 갈수록 그런 현상이 심해진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서 생각을 해봤다. 첫 번째, 버린 사람의 분노가 느껴진다. 왜 우리는 화가 나면 그 대상을 향해서 욕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한다. 그런데 그 대상에게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힘이 약하거나 또는 특정할 대상이 없는 경우 웬지 모르지만 화가 나는 경우 그렇게 분노를 표출한다.
이건 필자도 경험을 했는데, 조금 오래 된 이야기이다.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중국 연수에서의 일이다. 안 중근의사가 순국한 여순 감옥에서 안 중근의사가 갇힌 감방도 보고, 그 당시 독립투사를 어떻게 고문했는지도 보았다. 또 장보고 선생님의 활동 근거지도 직접 가서 걸으면서 보았다. 또 가이드를 하는 한족(우리 말을 할 수있었기 때문인 듯하다)이 우리를 무시하는 행동도 겪었다. 무엇을 물어도 잘 가르쳐주지도 않고 짜증을 내기에, 왜 우리를 무시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대한민국이 중국의 속국이 아니냐고, 대한민국이 형편없으니 그렇게 중국이 무시하지 않느냐고 한다. 조금 어이가 없었지만 크게 보아서 대한 민국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듯해서 그냥 넘어갔다. 물론 우리를 더 이상 무시하지 않았다. 이런 저런 감정에 속상한 필자가 가지고 갔던 우산이 부러져서 못 쓰게 되자, 그 우산을 중국 땅 어디에 확 팽겨친 것이다. 지금도 기억이 뚜렷한데, 지금은 약간 후회(?)가 되기는 한다. 마찬가지로 뭔가 화가 날때 분노를 그렇게 표출하는 것이 쓰레기를 배출하는 아이들이다. 어른들도 그렇겠지만, 이런 아이들이 어른이 되므로 아이들 경우로 한정해서 볼 것이다.
이 분노가 어디에서 왔을까. 이 분노를 없애주어야 아이들이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 지식으로 가르쳐보아야 효과는 그닥 없을 것이므로 그렇다. 또 이러한 분노가 있으면 아이들 역시 자신의 삶을 살기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혼이 분노에 매몰되어있으므로, 영혼이 자신의 일, 이상을 구현하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질문은 아이들이 길에 쓰레기를 버리는 그런 심성, 분노가 어디에서 왔는가이다.
인간은 세 가지 의식, 깨어있는 의식, 꿈꾸는 의식, 잠자는 의식을 함께 지니고 삶을 영위한다. 깨어있는 의식은 우리가 현실에서 사고하는 의식이다. 문제는 이 의식상태에서는 자아가 상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불가에서 이 의식을 허망한 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꿈꾸는 의식은 인간이 잘때 꿈을 꾸는 의식과 같은 의식이나 반드시 체험해야 하는 의식이다. 이 의식의 주체는 감정이다. 감정이 꿈처럼 모호하다는 사실을 보면 이해가 갈 듯하다. 잠자는 의식은 무의식으로, 인간이 깨어있는 의식상태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접근을 하지 못한다. 그런데 꿈꾸는 의식 상태에서는 무의식에로 접근이 가능하다. 그래서 간절히 열망, 사랑하면 꿈이 이루어질 수가 있는 것이다. 이는 무의식에 의지가 내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런 인간의 의식이 발달단계를 거치면서 자아가 탄생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발달 단계에서 9-11세 사이쯤 인간의 꿈꾸는 의식이 전면에 나선다. 즉 꿈꾸는 의식이 전면에 나서면, 아이들의 자아는 꿈을 꾸는 상태가 된다. 인간이 처음 탄생했을 떄는 자아를 지각하지 못한다. 3세 쯤 인간의 자아가 드러나는데, 이때의 자아는 우주에 연결된 상태로 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아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의 자아는 우주에서 벗어나고, 지상의 모든 존재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게 된다. 이갈이가 시작되면 에테르체가 탄생, 이 시기 아이는 지상의 모든 존재와 하나가 되어서 같이 호흡하고 뛰어 논다. 그리고 9세 즈음 자신과 다른 존재와의 차이를 드디어 파악하는데, 파악하기 전에 먼저 아이들의 의식이 꿈을 꾼다는 것이다.
자면서 꿈을 꾸고 있는 데 누가 갑자기 꿈을 깨우면, 몹시 화가 났던 경험을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아이들의 상태도 똑 같다. 아이들이 꿈을 꾸고 있는 상태라면, 아이들이 꿈에서 스스로 깰 때까지 깨워서는 절대 안된다. 물론 다른 방법, 우회로로 아이들의 잠을 깨울 수는 있다. 단 너무 깊이 자는 경우, 시간이 흘러도 계속 잠을 자는 경우에 한한다. 현재 우리가 하는 교육 중에서 지식교육은 아이들의 꿈을 그냥 몽땅 깨우는 교육이다.
구체적으로 꿈을 꾼다는 말은 자아가 꿈속에 있다는 말이다. 이 상태에서 지식교육을 하면 영혼은 반감활동을 하게 된다. 지식을 가르친다는 것 자체가 대상으로 보게하기 때문인데, 생각해 보면 알 수가 있다. 예컨대 지식으로 친구를 가르치면, 아이들은 친구를 대상으로 보게 된다. 이때 아이들은 친구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상태이다. 여기에서 조금 놓여나 꿈속에서 다음 단계인 친구를 대상으로 보는 상태로 나아갈려고 하는 상태인 것이다. 대상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상태에서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는 상태의 중간 상태에서 아이들이 꿈을 꾸는 것이다. 그런데 지식교육은 그 상태가 아닌데에 친구를 대상으로 보라고 하니, 아이들의 무의식에서는 이를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이때 아이들은 자신의 무의식 상테의 감정을 의식 상태에서 짜증, 분노로 감지한다. 이것을 필자가 꿈을 꾸는 상태에서 꿈을 강제로 깨우는 상태라고 표현 한 것이다.
이런 분노, 짜증은 무의식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현실의 깨어있는 의식 상태에서 아이들은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무의식에 내재하면, 의식으로 순간 순간 올라오게 된다. 쓰레기 투기와 같은 상황이 이런 분노, 짜증에서 올라온 것이다. 이런 감정이 자신의 삶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은 물론 매우 당연하다. 더불어 자신의 이런 감정을 영혼이 주체하지 못하면 우울증 등과 같은 정신병으로 나아간다. 현재 많은 청소년들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분노, 짜증이 여기서 올라온다고 해도 절대 틀리지 않다. 학교폭력도 같은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법륜스님은 '억압'이라고 표현하였다. 아이들이 자신의 힘이 없을 때는 이 억압을 참고 있지만, 힘이 생기면 부모님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고도 하였다. 무의식에 내재한 분노, 짜증이 어른이 되어서 폭력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묻지마' 폭력도 같은 유형이다.
쓰레기를 길에 그냥 버리는 이유 두 번째는 자신의 영혼과 정신이 잠을 자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렇게 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정신이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버린다. 현실에서 -상속에서-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자아가 파악해서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알려줘야 하는데, 자아가 잠을 자므로 알려주지 못하는 것이다. 즉 상속에서의 삶, 그림자와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이는 다른 말할 필요 없이 먼저 잠을 깨워야 한다.
그렇다면 정신이 올바르게 발달하면 어떤 결과가 올까.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정신의 물질로의 환원이다. 인간의 정신기관이 발달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영혼이 본래하는 일을 파악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하나일 때, 그 존재를 나와 같이 생각할 때 정신기관이 발달한다. 정신기관이 발달하면 정신기관인 혼으로 보는것, 듣는 것이 가능하다. 물론 이것은 개인의 일이므로 하나의 비유나 참고사항으로 또는 나를 비추어보는 상황으로만 받아들여야 한다. 즉문즉설에서 법륜스님이 강조하시는 말씀이다.
필자는 생활악기 오케스트라에서 리코더를 부는데, 여기에서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부는 악기소리에서 영혼의 특징을 감지한 것이다. 부는 사람의 영혼에서 그 사람의 습관,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 다른 사람을 견제해서 자신이 피해를 입지 않으려는 경향, 욕심이 많아서 그 욕심으로 인해 힘들어서 짜증이 많은 경우, 소리에 그 특징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 소리가 영혼의 특성을 드러내는 이유는 그 소리가 에테르체의 진동에서 나오기 때문인데, 인간의 에테르체는 우주에서 태어날때 편취해서 죽을 때까지 지닌다. 이 에테르체는 인간의 자아가 드러남으로 해서 그 자아의 습관에 따라 진동이 달라지는 것이다. 예컨대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생각이 에테르체를 진동시키고, 이것이 에테르의 습관으로 이어져 그렇게 진동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는 본인은 이를 감지하지 못한다. 슈타이너의 주장은 이것이 영혼으로 듣는 것이다라고 하는데, 문제는 그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감동을 받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모든 소리는 진동을 하는데, 그 진동이 우주 에너지의 진동인 경우에만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필자는 늘 '왜 그럴까'에 관심이 있어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그러므로 당연히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만약 그랬으면 지금의 정신조차도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 필자가 놀란 것은 자신의 생각이 에테르체의 진동(?)을 그렇게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자신의 정신을 파악하는 일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또 다시 들었다.
느낀 점은 악기를 분다고 해서 모두 같은 진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다른 악기도 그렇다는 생각은 들지만, 아직 구체적으로 경험하지는 못했다. 우주와 같은 진동, -사람들은 이를 힐링한다고 말을 하는듯 하다-을 해야 다른 사람들에게 감동 나아가 치유효과도 있다. 에테르체가 생명의 힘인데 우주와 같은 진동을 만나면 내 에테르체가 생명의 힘을 받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신의 물질로의 환원이다. 자신의 생각이 정신인데, 되풀이 하지만, 에테르체를 통해서 그 진동이 드러난다는 사실에 필자도 매우 놀랐다. 그리고 자신의 정신기관이 발달하면 혼으로 들을 수가 있다(슈타이너의 주장). 그렇게 되면 나쁜 생각이 물질로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므로 쓰레기를 버리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과 같기 떄문이다. 물론 아이들의 꿈을 깨우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