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優台의 가계도 |
|
|
| |||||
|
|
|
|
|
| ||||||
|
|
|
|
|
|
|
|
|
| ||
|
金蛙(父) |
|
|
優台(本人) |
|
|
|
|
| ||
|
( ? ~B.C.7.1) |
|
|
( ? ~B.C.41.1) |
|
|
|
|
| ||
|
|
|
|
|
|
|
|
|
|
|
|
|
乙氏(母) |
|
|
召西奴(妻) |
|
|
沸流(子) |
| |||
|
( ? ~B.C.41.1) |
|
|
(B.C.66~A.D.6.2) |
|
|
(B.C.47~B.C.2) |
| |||
|
|
|
|
|
|
|
|
|
|
|
|
|
|
|
|
|
|
|
|
|
溫祚(子) |
| |
|
|
|
|
|
|
|
|
|
(B.C.44.3~A.D.28.2) |
| |
|
|
|
|
|
|
|
|
|
|
|
|
|
|
|
|
|
|
|
|
|
阿爾(女) |
| |
|
|
|
|
|
|
|
|
|
(B.C.41.4~B.C.7.1) |
| |
|
|
|
|
|
|
|
|
|
|
|
|
※ 검정색은 남자를, 청색은 여자로, 적색은 분명하지 경우로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 백제왕기를 기준으로 함.
|
|
|
召西奴의 가계도 |
|
|
| |||||
|
|
|
|
|
| ||||||
|
|
|
|
|
|
|
|
|
| ||
|
延陀勃(父) |
|
|
召西奴(本人) |
|
|
|
|
| ||
|
( ? ~B.C.37.2) |
|
|
(B.C.66~A.D.6.2) |
|
|
|
|
| ||
|
|
|
|
|
|
|
|
|
|
|
|
|
乙旒(母) |
|
|
優台(夫) |
|
|
沸流(子) |
| |||
|
( ? ~ ? ) |
|
|
( ? ~B.C.41.1) |
|
|
(B.C.47~B.C.2) |
| |||
|
|
|
|
|
|
|
|
|
|
|
|
|
|
|
|
|
|
|
|
|
溫祚(子) |
| |
|
|
|
|
|
|
|
|
|
(B.C.44.3~A.D.28.2) |
| |
|
|
|
|
|
|
|
|
|
|
|
|
|
|
|
|
|
|
|
|
|
阿爾(女) |
| |
|
|
|
|
|
|
|
|
|
(B.C.41.4~B.C.7.1) |
| |
|
|
|
|
|
|
|
|
|
|
|
|
|
|
|
|
|
朱蒙(夫) |
|
|
甘兒(女) |
| ||
|
|
|
|
|
(B.C.58~B.C.19.9) |
|
|
(B.C.38.2~ ? ) |
| ||
|
|
|
|
|
|
|
|
|
|
|
|
※ 검정색은 남자를, 청색은 여자로, 적색은 분명하지 경우로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 백제왕기를 기준으로 함.
|
|
|
朱蒙의 가계도 |
|
|
| |||||
|
|
|
|
|
| ||||||
|
|
|
|
|
|
|
|
|
| ||
|
解慕漱(父) |
|
|
朱蒙(本人) |
|
|
|
|
| ||
|
( ? ~ ? ) |
|
|
(B.C.58~B.C.19.9) |
|
|
|
|
| ||
|
|
|
|
|
|
|
|
|
|
|
|
|
柳花(母) |
|
|
召西奴(妻) |
|
|
甘兒(女) |
| |||
|
(B.C.74~B.C.24.8) |
|
|
(B.C.66~A.D.6.2) |
|
|
(B.C.38.2~ ? ) |
| |||
|
|
|
|
|
|
|
|
|
|
|
|
|
|
|
|
|
禮氏(妻) |
|
|
琉璃(子) |
| ||
|
|
|
|
|
(B.C.57~A.D.28.8) |
|
|
(B.C.40.7~A.D.18.10) |
| ||
|
|
|
|
|
|
|
|
|
|
|
|
※ 검정색은 남자를, 청색은 여자로, 적색은 분명하지 경우로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 백제왕기를 기준으로 함(고구려사초(략)는 朱蒙의 사망을 4월이라 함)
|
|
|
溫祚의 가계도 |
|
|
| |||||
|
|
|
|
|
| ||||||
|
|
|
|
|
|
|
|
|
| ||
|
優台(父) |
|
|
溫祚(本人) |
|
|
|
|
| ||
|
( ? ~B.C.41.1) |
|
|
(B.C.44.3~A.D.28.2) |
|
|
|
|
| ||
|
|
|
|
|
|
|
|
|
|
|
|
|
召西奴(母) |
|
|
甘兒(妻) |
|
|
多婁(子) |
| |||
|
(B.C.66~A.D.6.2) |
|
|
(B.C.38.2~ ? ) |
|
|
(B.C.16.5~ ? ) |
| |||
|
|
|
|
|
|
|
|
|
|
|
|
|
|
|
|
|
|
|
|
|
馬婁(子) |
| |
|
|
|
|
|
|
|
|
|
(B.C.14.11~ ? ) |
| |
|
|
|
|
|
|
|
|
|
|
|
|
※ 검정색은 남자를, 청색은 여자로, 적색은 분명하지 경우로 구분하여 표기하였다.
※ 백제왕기를 기준으로 함.
北夫餘解夫婁王之庶孫也 解夫婁王以日神降靈之後 布德北方天下泰平 分遣王子于列國 以監民疾苦
북부여(北夫餘) 해부루(解夫婁)왕의 서손(庶孫)이다. 해부루왕이 일신(日神, 태양신)이 강령(降靈)한 후 덕을 베풀어 북방 천하가 태평하였다. 왕자를 열국(列國)으로 나누어 보내어 백성들이 질병과 고통(疾苦)을 살펴보게 하였다.
時卒本太守延陀勃有女曰召西奴 甚美 優台聞之 請往卒本 王以優台母微不許 優台乃私行 至卒本與山 西奴相通 延陀勃以王不許 欲禁之 乃相逃避太伯山谷沸流川上〈今白頭山溫河〉
당시 졸본태수(卒本太守) 연타발(延陀勃)에게는 소서노(召西奴)라 불리는 딸이 있었는데 대단히 아름다웠다. 우태(優台)가 그 소리를 듣고 졸본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해부루)왕이 우태의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우태가 몰래 졸본 여산(與山)에 이르러 (소)서노와 상통(相通)하였다. 연타발은 (해부루)왕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하여 금(禁)하려 하니, 이에 태백산(太伯山) 골짜기 비류천(沸流川) 상류〈백두산 온하〉로 도피하였다.
≪견해≫ 지명 비정이 남당의 것인지 아니면 선대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며, 사서마다 제각각인 부분이 있다.
祀河神 而生子曰沸流 延陀勃聞之 使人迎歸 遂以卒本之地歸之 時漢元年初元二年甲戌歲也.
하신(河神)에게 제사를 지내어 아들을 낳고 비류(沸流)라 이름 지었다. 연타발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돌아오게 하여 맞이하였다. 드디어 졸본의 땅이 우태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때는 한(漢) 효원제(孝元帝) 초원(初元) 2년(B.C.47) 갑술(甲戌)년의 해다.
≪견해≫ 誤記가 있는 듯
時解夫婁王太子金蛙立 卽優台之父也 命優台 王于卒本.
당시 해부루왕 태자 금와(金蛙)가 섰다. 즉 우태의 아버지다. 우태를 졸본의 왕으로 명하였다.
≪견해≫ 우태의 졸본 건국, 우태 立
元年 甲戌 五月 立召西奴爲妃
원년(B.C.47) 갑술 5월 소서노를 세워 비(妃)로 하였다.
立東明廟 於沸流川
동명묘(東明廟, 해부루의 사당)를 비류천(沸流川)에 세웠다.
四年 丁丑 三月 次子溫祚生
4년(B.C.44) 정축 3월 둘째아들 온조(溫祚)가 태어났다.
≪견해≫ 고구려사초(략)과 다른 부분이다.
七月 分國爲東西南三部 使乙氏吃氏解氏 分長其州
7월 나라를 동, 서, 남의 3부(部)로 나누었다. 을(乙)씨, 흘(吃)씨, 해(解)씨로 하여금 나누어 그 고을의 우두머리(長)로 하였다.
七年 庚辰 正月 王母乙氏薨 於夫餘 王往迎其喪 而歸之 得疾而薨
7년(B.C.41) 경진 정월 왕의 어머니 을씨(乙氏)가 부여에서 죽었다. 왕이 모친상을 맞이하여 (부여로) 갔다가 돌아왔으나 병을 얻어 죽었다.
≪견해≫ 우태의 어머니 을씨(乙氏)는 을음의 어머니라고 하고, 을음이 소서노의 외형(外兄, 이종형제)이라고 한다. 또는 을음이 소서노의 동복형(同腹兄)이라고도 한다. 추모경을 숙독하지 하지 못한 상태에서 잘못 이해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잘못이 있는 부분은 교정하여 바로잡기로 하겠습니다.
四月 王遺腹女阿爾生
4월 왕의 유복녀(遺腹女) 아이(阿爾)가 태어났다.
五月 以妃召西奴爲女君
5월 비(妃) 소서노(召西奴)를 여군(女君)으로 하였다.
≪견해≫ 소서노 立, 고구려사초(략)에서는 연타발(延陀勃)이 죽어 주몽이 섰다고 하였다. 주몽을 왕으로 세운 이가 백제왕기와 고구려사초(략)이 서로 다르다.
八年 辛巳 七月 慕漱王太子朱蒙 自北夫餘逃來 年十九 而英雄無比 召西奴迎之 置于賓堂 侍之甚厚 朝暮同浴 朱蒙誘以甘言 曰 “女君年才二十七 能爲先王守貞乎” 召西奴曰 “非敢曰貞也 無可以爲夫者也” 朱蒙乃知其意 遂挑而通之 恐國人不悅 而諱之
8년(B.C.40) 신사 7월 모수(慕漱)왕태자 주몽(朱蒙)이 북부여(北夫餘)에서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다. 나이 19세로 견줄만한 것이 없는 뛰어난 영웅이었다. 소서노는 주몽를 맞이하여 빈당(賓堂, 손님을 모시는 방)에 모셔두고 대접함이 심히 후하였다. 아침저녁으로 함께 목욕을 하였다. 주몽이 달콤한 말로 유혹하여 말하기를 “여군(女君)의 나이 이제 스물일곱인데 선왕(先王)의 정조를 능히 지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어찌 감히 정절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히 남편으로 삼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주몽이 이에 소서노의 뜻을 알고 마침내 어깨에 메어들고 소서노와 통(通)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러한 사실을 숨겼다.
≪견해≫ 소서노의 나이가 백제왕기와 고구려사초(략)와 다르게 나온다.
十月 朱蒙與召西奴出獵 獲神鹿 朱蒙曰 “此天將祚 我夫妻也” 召西奴曰 “今汝與我潛通 以不告於國中 奈何” 朱蒙曰 “吾善射 汝宜擇夫 以善射者 何如” 召西奴諾之 乃令國中 曰 “吾年少而寡 不可空房 能善射者 可以夫之 各以其技 來試吾前” 令下應募者甚衆 皆不及於朱蒙 召西奴大喜 遂與朱蒙相婚 於廟中 不及者怒 欲作亂 朱蒙使其臣陜夫等 捕而治之.
10월 주몽이 소서노와 더불어 사냥을 나갔다가 신록(神鹿)을 잡았다. 주몽이 말하기를 “이곳의 하늘은 장차 우리 부부에게 제위(祚, 임금의 지위)를 내리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지금 당신과 나는 몰래 정을 통하였으나, 나라 안에 알리지 않았으니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주몽이 말하기를 “나는 활쏘기에 능하니, 당신은 마땅히 선사자(善射者, 활을 잘 쏘는 자)를 남편으로 선택함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승낙하여, 이에 나라 안에 영(令)을 내려 말하기를 “나의 나이 젊으나 과부가 되었으니 여자 혼자 사는 것은 옳지 않다. 활쏘기에 능한 자를 남편으로 삼음이 옳으니, 각자 그 기예를 나의 앞에서 시험하러 와라.”고 하였다. 영(令)에 응모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소서노가 크게 기뻐하며 드디어 주몽과 더불어 사당(廟)에서 혼인을 하였다. (시험에) 미치지 못한 자들이 노하여 장차 난리를 일으키려 하였다. 주몽이 그의 신하 협부(陜夫, 협보) 등에게 사로잡아 다스리도록 하였다.
九年 壬午 四月 朱蒙說召西奴 曰 “吾爲汝夫 而國人多不腹者 以吾無功 於國家也 吾欲養精兵 以攻隣邦之傲慢無禮者 何如” 召西奴曰 “吾爲汝妻 惟命是從 而已” 於是朱蒙選民壯丁 使習弓馬 分署部曲 以其心腹臣領之
9년(B.C.39) 임오 4월 주몽이 소서노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남편이 되었는데 나라사람들 중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내가 나라에 공(功)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정병(精兵)을 양성하여 이웃의 오만무례한 자들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처가 되었으니 명령에 따름이 마땅할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주몽이 민간의 장정(壯丁)을 선발하여 활쏘기와 승마를 배우도록 하고, 부곡(部曲)에 관청을 나누어 세우고, 그 심복들로 통솔하게 하였다.
十年 癸未 二月 召西奴生 朱蒙女甘兒
10년(B.C.38) 계미 2월 소서노가 주몽의 딸 감아(甘兒)를 낳았다.
是年 朱蒙盡平卒本諸部落 威振一國 召西奴曰 “吾以女子 不識時務 但居內 育兒主饋可也 天下事 惟郞君主之” 朱蒙大喜 曰 “汝眞吾妻也 奈汝旧臣不服何” 召西奴曰 “郎君以我爲妻 以吾子爲太子 則吾臣豈有不服之理哉” 朱蒙曰善
이해에 주몽이 졸본의 모든 부락을 평정하여 일국(一國, 온 나라)의 위엄을 떨쳤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나는 여자인 까닭에 (임금으로써) 그 때 그 때 할일을 알지 못한다. 다만 (궁)안에서 자식을 기르고 (나라의) 안 살림을 책임짐이 옳다(여군이 아닌 왕비의 역할을 하겠다는 뜻으로 주몽에서 선위를 하겠다는 의미). 천하의 일은 낭군(郞君)이 주재함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주몽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당신은 나의 진실한 아내다. (그러나) 당신의 옛 신하가 복종하지 아니하니 어찌할까?”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낭군이 나를 처로 삼고, 나의 아들을 태자로 삼는다면 곧 나의 신하들이 어찌 복종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주몽이 이치에 맞다 하였다.
≪견해≫ 백제는 주몽에게 국정을 위임한 사실을, 고구려는 주몽이 주변의 국가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힌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백제왕기는 백제인이, 고구려사초(략)은 고구려인이 쓴 古記를 저본(底本)으로 쓴 사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十一年 甲申 正月 召西奴立朱蒙爲王 而沸流爲太子 溫祚爲王子 命憂臺旧臣卒本諸臣與朱蒙之臣 相婚 爲親戚
11년(B.C.37) 갑신 1월 소서노(召西奴)가 주몽(朱蒙)을 세워 왕으로, 비류(沸流)를 태자로, 온조(溫祚)를 왕자로 하였다. 우대(憂臺)의 구신, 졸본(卒本)의 제신(諸臣, 모든 신하)가 주몽의 신하와 혼인하여 친척이 되도록 하였다.
≪견해≫ 고대의 국가간의 통합방식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改國號曰 高句麗
나라이름을 고쳐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다.
≪견해≫ 고구려의 건국, 주몽의 원년, 주몽 22세(B.C.58년생)
十二年 乙酉 六月 平沸流國 以其主松讓爲多勿候 沸流本屬卒本 今復歸故也
12년(B.C.36) 을유 6월 비류(沸流)국을 평정하였다. 그 나라의 주(主)인 송양(松讓)을 다물후(多勿候, 候는 侯의 오기)로 삼았다. 비류는 본래 졸본에 속하였는데, 지금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온 까닭이다.
十四年 丁亥 七月 城郭宮室始大成 王與后飮酒極樂 賞賜內外宗戚及諸臣
14년(B.C.34) 정해 7월 성곽과 궁실의 바야흐로 이루어졌다. 왕과 후가 술을 마시며 크게 기뻐하며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내외종척(內外宗戚, 종척과 외척)과 모든 신하에게 상을 내렸다.
十六年 乙丑 丁月 將軍烏伊芙芬奴 分兩道 攻太伯山南東荇人國 取其地爲城邑
16년(B.C.32) 을축 정월(丁月) 장군 오이(烏伊)와 부분노(芙芬奴)가 양쪽 길로 나누어 태백산(太伯山) 남동쪽 행인국(荇人國)을 공격하여, 그 땅을 취하여 성읍(城邑, 고을)으로 삼았다.
十九年 壬辰 五月 以荇人國王女碧蘿爲太子沸流妃 賜脯群臣.
19년(B.C.29) 임진 5월 행인국 왕녀 벽라(碧蘿)를 태자 비류의 비(妃)로 하였다. 군신에게 포(脯, 회식하다)를 내렸다.
二十一年 甲午 十一月 將軍扶尉厭寄 攻滅北沃沮國 以其地置溝婁爲城邑
21년(B.C.27) 갑오 11월 장군 부위염(扶尉厭)에게 위임하여(寄) 북옥저(北沃沮)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땅 치구루(置溝婁)를 성읍(城邑, 고을)으로 삼았다.
二十四年 丁酉 王母柳花后薨 於扶餘 王與后發喪擧哀 于鴨宮水上 遣使 于扶餘 獻賻
24년(B.C.24) 정유 왕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부여에서 죽었다. 왕과 후가 압궁(鴨宮)의 상류에서 발상(發喪, 초상이 난 것을 알림)하였다. 부여에 사신을 보내어 부의를 하였다.
是年 王嫡子類利 自扶餘來 謁王 于獵途 王畏后不悅 不直率歸 使寄多勿候松讓家 而巡行國中 恤民窮乏者 而醫其疾 人稱其賢 召西奴聞 而怪之 謂王 曰 “夫婦一身 郎君之子來 居吾國 而不來謁者何也” 王曰 “彼雖慕父而來 我以沸流溫祚爲子 何可戀戀子 已棄之子乎” 召西奴曰 “父子天倫之親也 安可棄之哉 且妾與大王相婚二十餘年 只有甘兒一人 郎君之子乃妾之子也 何不召來 而置於宮中” 王曰 “吾妻之曰善矣 若以阿爾妻之 而共子 是子則好莫甚矣” 后曰 “夫婦之間 有何所惜 惟汝所慾者 是妾之心矣” 王大喜 乃召類利 置於阿爾宮中 而妻之 類利乃與阿爾 內媚于父王母后 外結執政大臣 暗畜奪嫡之志.
이해에 왕의 적자(嫡子) 유리(類利)가 부여에서 와서 사냥 가는 길에서 왕을 만났다. 왕은 후(后, 소서노)가 기뻐하지 아니할 것이 두려워하여 곧바로 데리고 돌아오지 않고, 다물후 송양(松讓)의 집안에 부탁하여 맡겼다. 나라 안의 이곳저곳을 돌며 궁핍한 백성을 구휼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였다. 사람들이 그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소서노가 듣고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까닭을 물어 말하기를 “부부는 한 몸이요. 낭군의 아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사는데, 어찌 오게 하여 만나지 아니 한가?”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 아이가 비록 아버지를 그리워하여 왔으나, 내가 비류와 온조를 아들로 삼았는데 어찌 아들을 연연(戀戀, 그리워 함)함이 가당하겠소. 이미 버린 자식이로다.”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부자(父子)는 천륜(天倫)의 친함이 있는데, 어찌 버림이 가당하리오. 또 첩과 대왕이 서로 결혼한 지 20여년이 되었지만 단지 감아 한명이 있을 뿐입니다. 낭군의 자식은 첩의 자식이기도 하니, 어찌 불러 오게 하여 궁중에 두려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아내의 말이 합당하도다. 만약 아이(阿爾)를 시집보내어 공동의 자식으로 한다면, 이 아들이 더할 나위 없이 좋도다.”라고 하였다. 후가 말하길 “부부사이라면 어찌 아까움이 있겠습니까. 당신이 바라는 것은 첩의 마음이기도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이에 유리를 불러 아이궁(阿爾宮) 안에 두고 아이(阿爾)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유리가 이에 아이(阿爾)와 더불어 안으로는 부왕(父王)과 모후(母后)에게 애교를 부리고, 밖으로는 집정대신(執政大臣)과 결탁하여 암중으로 적자의 자리를 빼앗을 뜻을 모았다.
二十九年 壬寅 四月 右輔烏伊等上言 曰 “自古帝王 莫不立其子以爲太子 今大王辛苦創業 而不立己子 臣等不取 千秋萬歲之後 沸流若立 宜以其父優台 配于吾后矣 大王安得血食 于此國乎 若以類利爲太子 而阿爾爲太子妃 則阿爾今已娠矣 他日大王聖后之孫 永久王子此土 大王聖后畏在 相配食在土是非 俱美之道哉” 王曰 “立子以賢者 以重社稷宗廟也 今沸流仁而有德 吾何敢私其所生乎” 群臣曰 “沸流雖仁 非帝王之器 守成之人也 類利才德雙全 万姓答曰 吾王之子 以歸之 今若不立 悔之晩矣” 王不聽其言 類利亦自辭讓 而群情一動 不可禁之 王與同枕 而憂之 后曰 “吾子沸流雖仁 而不及於汝子類利 人所共知也 阿爾若生好孫 而能繼是邦 吾於前夫後夫皆盡婦道矣 汝何固執而憂之乎” 王曰 “建國之道 莫如捀嗣以賢 吾實不知吾子之賢 若如汝言 明日可試 而爲之” 乃立幟 於王宮之左右 而令 曰 “欲立沸流者右 而欲立類利者左往” 左者三倍于右 王嘆 曰 “吾非不欲立沸流夫也 奈何” 乃立類利爲太子 而使分三部地 沸流弟其東南 溫祚弟其西南 類利治其北部 以慰后心 自是國政多歸類利 沸流溫祚 漸懷不平之志
29년(B.C.19) 임인 4월 우보(右輔) 오이(烏伊) 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옛날부터 제왕(帝王)은 그 아들을 태자로 세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의 대왕은 매우 고생을 하여 나라를 세웠으나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신(臣) 등은 천추만세(千秋萬歲, 꽤 오랜 세월)의 후를 의지할 수 없습니다. 만약 비류를 세운다면 마땅히 비류의 부친인 우태(優台)를 우리의 왕후와 짝지을 것이므로, 대왕이 어찌 이 나라에서 혈식(血食, 나라의 제사)을 받겠습니까? 만약 유리(類利)를 태자로 삼고 아이(阿爾)를 태자비로 삼는다면, 아이(阿爾)는 지금 임신 중이므로 다른 날 대왕과 성후(聖后)의 손(孫)으로 영구히 이 땅의 임금의 지위가 이어질 것입니다. 대왕과 성후가 두려워하는 바는 서로의 배우자가 이 땅에서 나라의 제사를 받는 일에 시비가 있는 것이니, 함께 아름다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현명한 아들을 세우는 것이 종묘사직에 중요하다. 지금의 비류는 어질고 덕이 있으니 내가 어찌 사사로이 소생(所生, 자기가 낳은 자식)을 세울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군신들이 말하기를 “비류가 비록 인자하나 제왕의 그릇이 아닙니다. 단지 수성(守成, 조상들의 이루어 놓은 것을 이어서 지킴)의 그릇입니다. 유리는 재주와 덕을 쌍으로 온전히 갖추었습니다. 만백성(萬姓)들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왕의 아들에게 보위가 돌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세우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늦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유리 또한 스스로 사양하며, 군신들의 뜻이 함께 움직이는 것을 금(禁)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다 하였다. 왕이 (소서노와) 더불어 동침하며 후계자를 세우는 일을 걱정하였다. 후(后)가 말하기를 “나의 아들 비류가 비록 인자하나, 당신의 아들 유리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 만약 아이(阿爾)가 좋은 손자를 낳으면 이 나라를 능히 이어 나갈 것이고, 나는 전남편과 현재의 남편 모두에게 부인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됩니다. 당신은 어찌 고집하여 근심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건국의 도리(이념)는 어진 이를 후계자로 세우는 것이다. 나는 사실 내 자식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만약 당신의 말과 같은지 내일 시험하여 그렇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궁의 좌우에 깃발을 세우고, 영(令)을 내려 말하기를 “비류를 세우고자 하는 자는 오른쪽, 유리를 세우고자 하는 자는 왼쪽으로 가라.”고 하였다. 좌에 있는 자가 오른쪽에 있는 자보다 3배가 많았다. 왕이 탄식하며 말하길 “내가 비류의 사내(夫)를 세우고자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이에 유리를 태자로 세우고 3부로 나누도록 하였다. 비류는 차례(弟, 순서, 배열)는 동남을, 온조의 차례는 서남을, 북부는 유리가 다스리게 하여, 후(后, 소서노)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이때부터 국정(國政)의 많은 부분이 유리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비류와 온조는 점점 불평의 뜻을 품게 되었다.
九月 王薨 后哀痛欲殉之 群臣止之 曰 “大王忽棄 聖后亦從 臣等何歸” 后曰 “太子在 汝等奉之可也” 於是類利卽王位 奉后爲太后 以阿爾爲后 以沸流溫祚爲左右兄王.
9월 왕이 돌아가셨다. 후(后)가 애통하며 따라 죽으려하였다. 군신들이 말리며 말하기를 “대왕은 홀연히 버리고 (떠났는데), 성후(聖后, 소서노)는 역시 (대왕을) 따른다면, 신들은 누구를 따라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후(后)가 말하기를 “태자와 있으니, 너희들이 받들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유리가 왕으로 즉위하여, 후를 태후로, 아이는 후로, 비류와 온조를 좌우형왕(左右兄王)으로 삼았다.
≪견해≫ 고구려사초(략)과 다른 부분이 있다.
十月 阿爾后生 太子都切 大赦
10월 아이(阿爾)후가 태자 도절(都切)을 낳았다. 대사면을 하였다
類利初在宋讓之時 潛通其女宋花 至是阿爾産臥 而無後宮 宋花入內後 通之如故 太后不悅 曰 “吾女産君之子 而臥 爲人之夫者 當旦夕在其側 而分勞之 安可繼慾 納不美之女哉” 類利曰 “人君當廣其嗣孫 不可無一二後宮 況宋花者 吾之糟糖餠母言 不可棄也” 太后乃怒 曰 “汝爲太子時 欺吾夫妻 示以仁賢 今汝父沒 而忽敢如此乎” 乃召沸流溫祚 議 曰 “吾爲類利所欺 汝等宜早爲之計 各往所封之地” 沸流曰 “大王生時 愛吾等如子 今則未免疣贅 不如奉母 南行開創新國矣” 溫祚曰諾
유리가 처음 송양(宋讓)에게 있을 때, 송양의 딸 송화(宋花)와 잠통(潛通, 결혼하지 않고 정을 통하는 일)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아이(阿爾)가 출산하여 누워있었는데 후궁(後宮)이 없었다. 송화를 안(內, 여기서는 후궁의 침소)으로 들어오게 한 이후로 옛날과 같이 (정을) 통하였다. 태후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나의 딸은 임금의 아들을 낳고 누워있으니, 남편의 사람됨이란 마땅히 아침과 저녁으로 그 옆에 있으면서 수고를 나누어야 한다. 어찌 아름답지 못한 여자를 거두어 이어가기를 바라느냐.”라고 하였다. 유리가 말하기를 “임금(人君)은 마땅히 대를 이을 자손(嗣孫)를 넓혀야 하니 한두 명의 후궁은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不可無). 하물며 송화는 나의 조당병모(糟糖餠母, 조강지처)로 맹세하였으니,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에 노하여 말하기를 “너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였을 때, 우리 부부를 속여, 어질고 현명하게 보이려 하였다. 지금 너의 아버지가 죽고 없으니, 갑자기 감히 이처럼 대할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비류와 온조를 불러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유리에게 속임을 받았다. 너희들은 마땅히 계책을 서둘러서, 각자가 봉하여진 땅으로 가야한다.”라고 하였다. 비류가 말하기를 “대왕이 살아있을 때 우리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였는데, 지금은 곧 혹(疣贅, 혹, 사마귀, 군더더기의 뜻으로 쓸모없음) 같은 존재를 면할 수 없으니,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 새 나라를 열어 창업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온조가 승낙하였다.
≪견해≫ 추모경에는 온조가 동궁(東宮, 후계자)이었다고 한다.
첫댓글 동명묘를 해부루의 사당이라 하신 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명치호태왕님// 立東明廟라고 적혀 있는 기록의 공통점을 찾은 것입니다. 해부루의 사망, 금와의 사망, 주몽의 사망시에 모두 동명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명묘는 선왕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라 볼 수 있는 것이죠. 고구려사초에는 서기20년엔가 동명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에 죽은 사람이 없는데 고구려본기에는 서기18년에 유리왕이 죽었다고 합니다. 즉, 유리명왕이 죽은 것이 서기18년의 사실인데 고구려사초는 유리명왕의 재위기를 늘려놓았다는 것은 동명묘의 건립기록으로 보는 것이죠. 고구려에서 서기18년에서 서기28년 사이에 제3자가 왕이 되었는데 이 분이 곧 백제의 온조왕입니다.
해부루의 사망, 금와의 사망, 주몽의 사망시에 모두 동명묘를 세웠다는 기록은 남당유고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명묘가 단순히 선왕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라면 저 세 명 이후에도 누대에 걸쳐 관련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으로 보아 동명묘는 부여 시조 동명을 제사 지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원년 첫 기사에 동명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바로 주몽의 사당입니다. 제가 백제왕기와 고구려사초(략)의 이질적인 기록을 같이 옮겨놓은 것은 바로 이런 공통점을 찾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구려 유리왕과 대무신왕 사이에 온조왕이 즉위하였다면 백제의 건국시기는 언제이냐는 의문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유물이 부여융의 묘지명이지요.
삼국사기 백제 본기상 비류왕과 온조왕은 고구려에서 마한으로 좋게 남하한 것도 아니라 추모왕의 친아들인 유류왕(儒留王)과의 권력 쟁탈전에서 밀려나서 어쩔 수 없이 남하한 것이었습니다. 비류왕의 발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머니인 소서노와 자신들을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버린 고구려나 추모왕에게 결코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수가 없기에 추모왕을 위해 제사지내거나 추모왕의 후손을 자처할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구삼국사 이전의 당대 기록들(금석문, 문헌)에서는 동명왕과 추모왕을 양자로 분명히 구분을 하고 있지요.
우리는 추모왕의 비가 누구인지 한번도 생각을 해 본적이 없지요. 동부여에 있던 유리왕의 어머니인 예씨일까요? 유리왕의 어머니 예씨는 추몽왕을 생각하며 수절하고 살았을까요? 추모왕은 동부여에서 도망왔을 때 맨몸이었죠. 그런데 초기부터 비류국 등 활발한 정복활동을 할 수 있는 원천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추모왕이 영웅이었다 할 지라도 소서노의 졸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또 졸본은 추모왕이 없었다면 망하고 없어졌을 나라였죠. 졸본과 고구려는 서로가 윈윈한 것입니다.
정성일님/ 금와와 해부루가 죽었을 때 동명묘를 세웠다는 기록을 남당유고에서 보았던 기억이 없는데... 혹 그냥 별 주의하지 않고 지나쳤던 것인가 싶어 여쭤봅니다. 남당유고 가운데 어느 것에 나오는지 알려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끝까지 서로 윈윈하면 좋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소서노 세력은 뒤통수를 맞고 자신들의 터전으로부터 마한지역으로 남하했습니다. 애초부터 믿음이 가지 않았거나 모르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은 것보다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이 더 기분나쁘지요. 소서노 세력이라고 예외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들도 생각할 줄 알고 피가 통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다시 보니 금와왕과 해부루왕이 죽었을 때 동명묘를 세웠다는 기록은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해부루의 사당은 위의 기사를 참고하시고, 금와의 사당은 고구려사략 유류왕13년 기사에 있습니다. 十三年 甲寅 正月 阿爾后崩 金蛙老王殂 帶素立 納漢公主 以松妃爲后 溫祚立東明廟 13년 갑인(B.C.7) 1월 아이(阿爾)후가 죽었다. 금와(金蛙)노왕이 죽어 대소(帶素)가 섰다. 한공주(漢公主, 평씨의 딸)를 거두었다. 송비(松妃)를 후(后)로 하였다. 온조(溫祚)가 동명묘(東明廟, 금와의 사당)를 세웠다.
거론하신 기록들에서는 동명묘가 해부루왕, 금와왕을 모신 사당인지 알 수 없으며 동명묘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별개인 것처럼 보이지요. 이는 단순히 시기가 맞아 떨어졌을 뿐이며 여겨집니다. 앞서 지적드렸다시피 동명묘가 선왕을 모신 사당의 일반명사라면 이후에도 계속 해서 동명묘가 나와야 할 것인데, 더는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동명이 부여의 시조로 명확하게 기록에 있는 이상 시조의 이름이 일반명사화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유리왕이 온조를 적대시 했다는 것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온조의 세력은 처음에 말갈과 낙랑에게 휘둘릴 만큼 약했으며, 소서노가 죽었을 때도 기회가 있었고, 또 온조가 마한을 정복했을 초기가 바로 기회였죠. 이상하게도 고구려와 백제초기에는 분쟁이 없는데 엉뚱하게 대무신왕때에 소서노의 구신인 백제계를 축출하는 요상한 기사가 등장합니다. 백제의 실질적인 분립은 태조왕때인데 아직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또한 이것이 부여융의 묘지명의 기록과 연결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정성일님/ 그 기록들을 그리 보신 것이었군요. (그러고보니, 이건 참 오래간만에 보네요.) 전체적으로 무슨 말씀 하시는지 이해하였습니다. 금와가 즉위하던 해에 우태가 즉위하면서 동명묘를 세웠으니, 곧 해부루의 묘라는 말씀이시군요. 유리가 즉위하던 해에 금와가 죽었는데, 동명묘를 세우니까 금와의 묘라는 말씀이시고. 그런데, 묘廟는 묘墓와 달리 꼭 죽은 해에 설치하는 것이 아닌 만큼, 동명묘의 주인으로 단정하기 곤란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컨데, 백제왕기 온조왕 13년에 소서노가 사망하지만 그 묘는 17년에 세우고, 혹은 이어지는 기록의 비류왕 13년에 소서노가 사망하지만 묘는 온조 원년에 세우고 있으니까요. :-)
명치호태왕님의 말씀대로 해부루, 금와, 주몽의 사망과 동명묘의 건립이 우연히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제가 남당유고를 고찰해 본 결과 온조의 사후에 100년 동안이 백제의 공백기로 남아 있습니다. 백제가 다시 부활했을 때에는 동부여가 멸망했었습니다. 본기신편열전에 나와 있는 기록으로 백제가 온조의 후손이라는 것을 짐작할 뿐 계보의 단절되어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습니다. 또한 옛 풍속중에 없어진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유두, 단오와 같은 행사는 사실상 사라진 것이 아닙니까? 또 시간이 지나면 풍습도 바뀌는 것은 아닐까요? 남당유고를 해석하며 안타까운 것은 백제의 사서의 빈곤입니다.
"처음에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도망하여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털어서 나라를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런데 대왕이 세상을 뜨신 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우리들은 여기 헛되이 있으면서 몸에 붙은 혹처럼 우울해 하느니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만 못하다." 유류왕이 적대했다기 보다는 소서노 세력이 터전을 버리고 남하할 정도로 고구려에 좋은 감정을 가졌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류왕의 위와 같은 발언에서 나오듯이 소서노 세력의 고구려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알 수 있습니다.
대무신왕이 축출한 세력은 구비류국쪽 세력 아닌지요? ^^;
또 덧붙이자면 유리명왕의 사망이후에 대무신왕 3년(서기20년)에도 동명묘(사당)를 세웁니다. 저는 동명묘의 건립이 선왕의 사망이라고 보기 때문에 고구려사초(략)의 유리왕이 서기 28년에 죽었다는 기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서기28년은 백제 온조왕이 사망한 해이지요. 그리고 서기20년 동명왕의 사당을 짓는 기사를 뒤로 하여 동부여가 一頭二身의 붉은 까마귀를 보냅니다. 붉은 색은 남방을 상징하며 머리가 하나에 몸이 두개인 것은 나라가 병합되는 상징인데, 통설은 동부여와 고구려가 병합됨을 말한다고 하나 저는 백제와 고구려의 병합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봅니다. 또 유사기사가 백제의 온조에게서 한번 더 등장하지요.
정성일님의 동명묘가 선왕의 묘에 대한 일반명사라는 견해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첫 번째로는 누대에 걸쳐 동명묘를 건립한 사례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고구려 본기에서도 동명묘를 최초로 세운 이는 대무신왕이며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입니다. 두 번째로는 시조의 이름은 쉽게 일반명사화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여왕 해부루가 죽었는데 졸본에서 동명묘를 세우고, 부여왕 금와가 죽었는데 백제에서 동명묘를 세우고, 고구려왕 유리가 죽으니 이번에는 (졸본도, 백제도 아닌) 고구려에서 동명묘를 세우고... @@ 어지러워지네요. 제가 요청드린 자료에 대한 답변 감사히 들은 것으로 만족하고 이만 물러갑니다. 좋은 토론 계속하시길. :-)
명치호태왕님// 비류국은 송양의 사람들이고, 곧 대무신왕의 어머니가 송양의 딸이죠. 송양의 집안은 소노부가 되었으니 대무신왕이 자신의 지지기반이자 척족을 몰아냈다는 논리에 걸립니다. 혹시 소서노의 아들 비류의 세력을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오해한 것은 아닌지요.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이 재위 15년 되던 해에 추모왕의 옛 신하인 비류부의 구도, 일구, 분구 세 명이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는 횡포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이들의 지위를 박탈하고 일반 백성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추모왕의 옛 신하이자, 비류부 사람이라면 구비류국사람들로 봐도 무리 없을 듯 합니다. 또한 재위 15년 째인데다가 그간의 전쟁의 성과가 큰 만큼 대무신왕 개인의 지지기반도 척족에 의지 안 해도 될 정도로 확립되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기사에는 구도, 일구, 분영이 소서노의 구신이라는 기록이 없군요. 다만 동명의 구신이라는 기록만이 남아서 이리송하게 합니다.
동명의 구신이라는 표현은 당연히 추모왕의 옛 신하로 봐야 할 것입니다. 구삼국사 이래로 거의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추모왕을 두고 동명왕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桂婁初擾 遼川不寧 薄言 攜育寔賴威靈 계루(桂婁, 고구려의 계루부)가 이전에 어지러워지더니 요천(遼川, 요하)가 불안해지고 깔보아 말하니, 어린 백성을 데리고 이에 의지하여, (고구려의) 명령이 듣지 않게 되었다(威靈). - 부여융 묘지명 발췌 -
삼국사기 백제본기 원년 기사 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 원년(서기전 18) 여름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계루가 고구려의 계루부에 연원을 두고 있음은 분명하나 7세기 무렵의 계루라는 표현은 고구려의 옛 땅을 가리키는 이칭으로 자주 등장하기도 합니다.
일단 백제의 '동명묘' 의 동명이 고구려 건국왕인 추모일 가능성은 적다고 봅니다. 명치호태왕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대략 삼국통일기 혹은 나말여초까지의 당대기록에서 동명과 추모를 동일시한 예를 찾기 힘든 데다가, 백제는 성왕 때 '남부여' 라 국호를 개칭하고 성씨를 부여씨로 하는 등 '부여계승의식' 을 강하게 표출했다는 점, 그리고 수서 등 중국측 사서에 백제의 동명묘로 보이는 것을 '구태묘' 라 표현했다는 점 등 때문입니다. 구태(우태)의 경우 부여의 왕족으로 묘사되므로, '동명묘' 로 불려진 저 시조묘의 대상이 정확히 부여 동명왕과 우태(구태) 중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부여계 인물' 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리고 '계루가 어지러워지고 요천이 평안치 못하게 되었으니 어린 백성들을 이끌어 천자의 위광에 의지하였다' 라는 표현은 문맥상 백제건국기사가 아니라 백제멸망기사로 보입니다. 부여융이 백제멸망시에 당나라에 항복한 '공적' 이 있음을 표현하는 구절인 것 같네요. 이 구절의 앞 부분을 읽어 보면, 이 구절이 '건국구절' 이 아니라 '멸망구절' 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바로 아래의 꼬리말입니다) // 그리고 고구려를 일반적으로 '요하' 와 관련시키려면 고구려가 요동을 확보하여 요하를 경계로 확립하게 될 광개토대왕 이후의 시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해당 기사에서 말하는 '계루' 는 후기의 고구려인 듯합니다
"바다 한 귀퉁이에서 겨레를 이루니 하백(河伯)의 자손으로서 상서러움을 드러냈고, 나라 기틀을 우뚝 세우니 국운이 멀리 이어져 내려왔도다.(이 부분이 백제 건국과 초기 발전) 집안의 명성을 능히 계승하고 대대로 이어받은 국업(國業)이 더욱 번창하였으니, 은덕이 사수(㴲水)에 흘러넘쳤고 위엄이 대방(帶方)에 발하였구나. (백제의 융성 부분) .... 나라를 위해 몸바쳐 자신의 몸은 가벼이 여겼고, 나라 걱정에 집안 일을 잊고 의로움을 중시하였으니, 왕회편(王會篇)에 기록된 법을 준수하여 마침내 천자의 은총을 받게 되었구나(백제의 멸망) // 이후 문제의 기사가 나오고 그 뒤에는 멸망후 부여융의 지위상승 과정이 묘사됩니다
계루(부)는 고구려 태조왕 이후에 고구려의 왕을 배출한 곳이지요. 백제는 고구려보다 먼저 멸망을 했고, 백제의 멸망이 고구려의 분열때문이라 해석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그리고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패배하여 항복한 것이지, 의자왕이 스스로 나라를 바친 것이 아닙니다. 온조왕이 부여씨라고 주장하거나 해씨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은데 조선왕조실록 정종 원년 기사에 온조가 고씨라고 나와 있습니다. 남당유고에는 온조가 유리명왕에게 계루(부)에 봉함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태조왕은 곧 온조왕의 후손이며, 고구려의 사서가 온조를 굳이 추모(주몽)의 후손이라 기록하는 연유가 분명해 집니다.
1. '백제의 멸망이 고구려의 분열대문이라 해석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던가요? 위의 제 글을 다시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고구려의 분열 때문에 백제가 망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군요. 지레짐작하신 듯 합니다. 해당 글의 '앞뒤문맥' 을 보자는 것이 제 기본적인 지적사항인데 그에 대한 반론은 없으시네요. 비문에서 글의 내용이 백제의 건국과 멸망, 그리고 멸망에서의 부여융의 공적 및 이후 당나라에서의 승승장구(?)에 대한 흐름이 이어지는 만큼, 해당 구절이 이 흐름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갑작스레 백제건국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생뚱맞다는 지적인데 여기에는 동의하신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계루가 어지러워지고 요천이 평안치 못하게 되었으니...' 라는 구절에서 보면 고구려가 혼란해졌다는 의미를 추출할 수 있기는 한데, 여기서 언급하는 강이 고구려 수도 평양 인근을 흐르는 강인 '패수' 가 아니라 고구려의 대 중국 국경선이라 할 만한 '요수' 라는 점에서 이 혼란이 단순한 내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에 의한 혼란, 특히 '중국' 과의 전쟁에 의한 혼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지러워졌다' 라고만 표현한 것으로 보아 중국의 침략에도 아직 고구려가 '멸망'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2. 이 기록이 '백제 왕자 부여융의 묘지' 가 아니라 '당나라의 제후왕 부여융의 묘지' 라는 것을 생각해 주십시오. 백제측의 기록이 아니라 '당나라 측의 기록' 에 가까운 것이지요. 실제로는 당나라에 패해 항복한 것이더라도 마치 당나라 천자의 위광에 감읍하여 제발로 걸어나와 당 중심의 질서 속으로 스스로 들어간 것처럼 묘사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 3. 조선왕조실록상의 백제 온조왕 성씨 기록이 과연 얼마나 정확성을 가지는지 모르겠고, 설사 온조왕의 성이 고씨임이 확실하다 하더라도 그 이유만으로 후대의 백제왕족까지 '고씨' 였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온조의 성이 고씨라는 건 아마 추모를 두고
그 성씨가 고씨라고(고주몽) 하는 데에서 나오는 말인 듯한데, 사실 추모가 고씨인지도 '확실' 한 상황은 아닙니다. 추모의 직계 후손들이 '해씨' 임금이라고 <삼국사기> 에서 밝히고 있는 상황에서 추모의 성씨가 해씨가 아니라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어느 시기인가부터 고구려의 왕성은 '고씨' 로 변경되게 됩니다만, 그 이유만으로 고구려가 '단성' 으로 쭉 이어져 내려온 양 가정하여 추모의 성씨도 당연히 고씨라 말할 수는 없지요. 추모의 성씨가 고씨임을 확언할 수 없다면, 이에 근거한 '온조의 성씨는 고씨' 라는 주장 역시 추가적 근거가 없이 성립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 백제 역시 온조의 성씨가 무엇이었든
어느 시기인가부터는 '부여씨' 를 왕성으로 갖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여기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른 근거들과 결부하여 생각해 볼 때) 부여계승의식을 추출해 내는 것이 그리 무리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꼬리말 개수를 초과했군요. 나중에 별도 글로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고주몽의 성씨는 본래 해부루의 아들이라 해씨이고, 고구려 2대왕인 유리는 본래의 성씨인 해씨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며 고씨라 칭하였는데, 조조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니 참고바랍니다. 조숭(曹嵩, ? ~ 194년)은 후한 말기의 관료이며, 위 태조 무황제 조조의 아버지이다. 자는 거고(巨高)이다. 일설에는 하후씨라는 설이 있으며 하후돈의 숙부라는 설이 있다. 중상시 조등(曹騰)이 환관이라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숭을 양자로 삼았다. 조숭은 조등의 작위를 이어받아 태위의 관직에까지 이르렀다. 무제기에 인용된 조만전의 일설에 의하면 원래의 성은 하후씨였으나 환관 조등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성을 조씨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