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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론방 Re: 백제왕기 우대왕(우태-소서노-주몽 3대의 기록)
정성일 추천 0 조회 610 09.11.17 09:09 댓글 3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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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1.17 14:52

    첫댓글 동명묘를 해부루의 사당이라 하신 근거를 알고 싶습니다.

  • 작성자 09.11.17 15:15

    명치호태왕님// 立東明廟라고 적혀 있는 기록의 공통점을 찾은 것입니다. 해부루의 사망, 금와의 사망, 주몽의 사망시에 모두 동명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동명묘는 선왕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라 볼 수 있는 것이죠. 고구려사초에는 서기20년엔가 동명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때에 죽은 사람이 없는데 고구려본기에는 서기18년에 유리왕이 죽었다고 합니다. 즉, 유리명왕이 죽은 것이 서기18년의 사실인데 고구려사초는 유리명왕의 재위기를 늘려놓았다는 것은 동명묘의 건립기록으로 보는 것이죠. 고구려에서 서기18년에서 서기28년 사이에 제3자가 왕이 되었는데 이 분이 곧 백제의 온조왕입니다.

  • 09.11.17 15:23

    해부루의 사망, 금와의 사망, 주몽의 사망시에 모두 동명묘를 세웠다는 기록은 남당유고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명묘가 단순히 선왕의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라면 저 세 명 이후에도 누대에 걸쳐 관련 기록이 있어야 하는데 없는 것으로 보아 동명묘는 부여 시조 동명을 제사 지낸 것이 아닌가 합니다.

  • 작성자 09.11.17 15:30

    삼국사기 백제본기 원년 첫 기사에 동명묘를 세웠다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바로 주몽의 사당입니다. 제가 백제왕기와 고구려사초(략)의 이질적인 기록을 같이 옮겨놓은 것은 바로 이런 공통점을 찾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구려 유리왕과 대무신왕 사이에 온조왕이 즉위하였다면 백제의 건국시기는 언제이냐는 의문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유물이 부여융의 묘지명이지요.

  • 09.11.17 15:37

    삼국사기 백제 본기상 비류왕과 온조왕은 고구려에서 마한으로 좋게 남하한 것도 아니라 추모왕의 친아들인 유류왕(儒留王)과의 권력 쟁탈전에서 밀려나서 어쩔 수 없이 남하한 것이었습니다. 비류왕의 발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머니인 소서노와 자신들을 이용할 대로 이용하고 버린 고구려나 추모왕에게 결코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수가 없기에 추모왕을 위해 제사지내거나 추모왕의 후손을 자처할 이유가 없습니다. 게다가 구삼국사 이전의 당대 기록들(금석문, 문헌)에서는 동명왕과 추모왕을 양자로 분명히 구분을 하고 있지요.

  • 작성자 09.11.17 16:02

    우리는 추모왕의 비가 누구인지 한번도 생각을 해 본적이 없지요. 동부여에 있던 유리왕의 어머니인 예씨일까요? 유리왕의 어머니 예씨는 추몽왕을 생각하며 수절하고 살았을까요? 추모왕은 동부여에서 도망왔을 때 맨몸이었죠. 그런데 초기부터 비류국 등 활발한 정복활동을 할 수 있는 원천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추모왕이 영웅이었다 할 지라도 소서노의 졸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또 졸본은 추모왕이 없었다면 망하고 없어졌을 나라였죠. 졸본과 고구려는 서로가 윈윈한 것입니다.

  • 09.11.17 16:04

    정성일님/ 금와와 해부루가 죽었을 때 동명묘를 세웠다는 기록을 남당유고에서 보았던 기억이 없는데... 혹 그냥 별 주의하지 않고 지나쳤던 것인가 싶어 여쭤봅니다. 남당유고 가운데 어느 것에 나오는지 알려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 09.11.17 16:16

    끝까지 서로 윈윈하면 좋았겠지만, 결과적으로 소서노 세력은 뒤통수를 맞고 자신들의 터전으로부터 마한지역으로 남하했습니다. 애초부터 믿음이 가지 않았거나 모르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은 것보다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이 더 기분나쁘지요. 소서노 세력이라고 예외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들도 생각할 줄 알고 피가 통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다시 보니 금와왕과 해부루왕이 죽었을 때 동명묘를 세웠다는 기록은 보지 못한 것 같습니다.

  • 작성자 09.11.17 16:25

    해부루의 사당은 위의 기사를 참고하시고, 금와의 사당은 고구려사략 유류왕13년 기사에 있습니다. 十三年 甲寅 正月 阿爾后崩 金蛙老王殂 帶素立 納漢公主 以松妃爲后 溫祚立東明廟 13년 갑인(B.C.7) 1월 아이(阿爾)후가 죽었다. 금와(金蛙)노왕이 죽어 대소(帶素)가 섰다. 한공주(漢公主, 평씨의 딸)를 거두었다. 송비(松妃)를 후(后)로 하였다. 온조(溫祚)가 동명묘(東明廟, 금와의 사당)를 세웠다.

  • 09.11.17 16:38

    거론하신 기록들에서는 동명묘가 해부루왕, 금와왕을 모신 사당인지 알 수 없으며 동명묘의 주체가 누구인지도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별개인 것처럼 보이지요. 이는 단순히 시기가 맞아 떨어졌을 뿐이며 여겨집니다. 앞서 지적드렸다시피 동명묘가 선왕을 모신 사당의 일반명사라면 이후에도 계속 해서 동명묘가 나와야 할 것인데, 더는 나오지 않습니다. 또한 동명이 부여의 시조로 명확하게 기록에 있는 이상 시조의 이름이 일반명사화 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 작성자 09.11.17 16:47

    유리왕이 온조를 적대시 했다는 것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온조의 세력은 처음에 말갈과 낙랑에게 휘둘릴 만큼 약했으며, 소서노가 죽었을 때도 기회가 있었고, 또 온조가 마한을 정복했을 초기가 바로 기회였죠. 이상하게도 고구려와 백제초기에는 분쟁이 없는데 엉뚱하게 대무신왕때에 소서노의 구신인 백제계를 축출하는 요상한 기사가 등장합니다. 백제의 실질적인 분립은 태조왕때인데 아직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죠. 또한 이것이 부여융의 묘지명의 기록과 연결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 09.11.17 17:07

    정성일님/ 그 기록들을 그리 보신 것이었군요. (그러고보니, 이건 참 오래간만에 보네요.) 전체적으로 무슨 말씀 하시는지 이해하였습니다. 금와가 즉위하던 해에 우태가 즉위하면서 동명묘를 세웠으니, 곧 해부루의 묘라는 말씀이시군요. 유리가 즉위하던 해에 금와가 죽었는데, 동명묘를 세우니까 금와의 묘라는 말씀이시고. 그런데, 묘廟는 묘墓와 달리 꼭 죽은 해에 설치하는 것이 아닌 만큼, 동명묘의 주인으로 단정하기 곤란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예컨데, 백제왕기 온조왕 13년에 소서노가 사망하지만 그 묘는 17년에 세우고, 혹은 이어지는 기록의 비류왕 13년에 소서노가 사망하지만 묘는 온조 원년에 세우고 있으니까요. :-)

  • 작성자 09.11.17 17:00

    명치호태왕님의 말씀대로 해부루, 금와, 주몽의 사망과 동명묘의 건립이 우연히 시기적으로 일치하는 것일수도 있습니다. 제가 남당유고를 고찰해 본 결과 온조의 사후에 100년 동안이 백제의 공백기로 남아 있습니다. 백제가 다시 부활했을 때에는 동부여가 멸망했었습니다. 본기신편열전에 나와 있는 기록으로 백제가 온조의 후손이라는 것을 짐작할 뿐 계보의 단절되어 사실 확인이 불가능한 부분이 많습니다. 또한 옛 풍속중에 없어진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유두, 단오와 같은 행사는 사실상 사라진 것이 아닙니까? 또 시간이 지나면 풍습도 바뀌는 것은 아닐까요? 남당유고를 해석하며 안타까운 것은 백제의 사서의 빈곤입니다.

  • 09.11.17 17:02

    "처음에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도망하여 이곳에 왔을 때 우리 어머니가 가산을 털어서 나라를 세우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런데 대왕이 세상을 뜨신 후 나라가 유리에게 돌아가고 말았다. 우리들은 여기 헛되이 있으면서 몸에 붙은 혹처럼 우울해 하느니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만 못하다." 유류왕이 적대했다기 보다는 소서노 세력이 터전을 버리고 남하할 정도로 고구려에 좋은 감정을 가졌을 상황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비류왕의 위와 같은 발언에서 나오듯이 소서노 세력의 고구려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을 알 수 있습니다.

  • 09.11.17 17:02

    대무신왕이 축출한 세력은 구비류국쪽 세력 아닌지요? ^^;

  • 작성자 09.11.17 17:14

    또 덧붙이자면 유리명왕의 사망이후에 대무신왕 3년(서기20년)에도 동명묘(사당)를 세웁니다. 저는 동명묘의 건립이 선왕의 사망이라고 보기 때문에 고구려사초(략)의 유리왕이 서기 28년에 죽었다는 기록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서기28년은 백제 온조왕이 사망한 해이지요. 그리고 서기20년 동명왕의 사당을 짓는 기사를 뒤로 하여 동부여가 一頭二身의 붉은 까마귀를 보냅니다. 붉은 색은 남방을 상징하며 머리가 하나에 몸이 두개인 것은 나라가 병합되는 상징인데, 통설은 동부여와 고구려가 병합됨을 말한다고 하나 저는 백제와 고구려의 병합을 상징하는 상징물로 봅니다. 또 유사기사가 백제의 온조에게서 한번 더 등장하지요.

  • 09.11.17 17:22

    정성일님의 동명묘가 선왕의 묘에 대한 일반명사라는 견해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첫 번째로는 누대에 걸쳐 동명묘를 건립한 사례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고구려 본기에서도 동명묘를 최초로 세운 이는 대무신왕이며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입니다. 두 번째로는 시조의 이름은 쉽게 일반명사화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09.11.17 17:31

    부여왕 해부루가 죽었는데 졸본에서 동명묘를 세우고, 부여왕 금와가 죽었는데 백제에서 동명묘를 세우고, 고구려왕 유리가 죽으니 이번에는 (졸본도, 백제도 아닌) 고구려에서 동명묘를 세우고... @@ 어지러워지네요. 제가 요청드린 자료에 대한 답변 감사히 들은 것으로 만족하고 이만 물러갑니다. 좋은 토론 계속하시길. :-)

  • 작성자 09.11.17 17:24

    명치호태왕님// 비류국은 송양의 사람들이고, 곧 대무신왕의 어머니가 송양의 딸이죠. 송양의 집안은 소노부가 되었으니 대무신왕이 자신의 지지기반이자 척족을 몰아냈다는 논리에 걸립니다. 혹시 소서노의 아들 비류의 세력을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오해한 것은 아닌지요.

  • 09.11.17 17:34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이 재위 15년 되던 해에 추모왕의 옛 신하인 비류부의 구도, 일구, 분구 세 명이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는 횡포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이들의 지위를 박탈하고 일반 백성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추모왕의 옛 신하이자, 비류부 사람이라면 구비류국사람들로 봐도 무리 없을 듯 합니다. 또한 재위 15년 째인데다가 그간의 전쟁의 성과가 큰 만큼 대무신왕 개인의 지지기반도 척족에 의지 안 해도 될 정도로 확립되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 작성자 09.11.17 18:03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 기사에는 구도, 일구, 분영이 소서노의 구신이라는 기록이 없군요. 다만 동명의 구신이라는 기록만이 남아서 이리송하게 합니다.

  • 09.11.17 22:53

    동명의 구신이라는 표현은 당연히 추모왕의 옛 신하로 봐야 할 것입니다. 구삼국사 이래로 거의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추모왕을 두고 동명왕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 작성자 09.11.17 15:41

    桂婁初擾 遼川不寧 薄言 攜育寔賴威靈 계루(桂婁, 고구려의 계루부)가 이전에 어지러워지더니 요천(遼川, 요하)가 불안해지고 깔보아 말하니, 어린 백성을 데리고 이에 의지하여, (고구려의) 명령이 듣지 않게 되었다(威靈). - 부여융 묘지명 발췌 -

  • 작성자 09.11.17 15:37

    삼국사기 백제본기 원년 기사 元年 夏五月 立東明王廟 원년(서기전 18) 여름 5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

  • 09.11.17 15:42

    계루가 고구려의 계루부에 연원을 두고 있음은 분명하나 7세기 무렵의 계루라는 표현은 고구려의 옛 땅을 가리키는 이칭으로 자주 등장하기도 합니다.

  • 09.11.18 10:10

    일단 백제의 '동명묘' 의 동명이 고구려 건국왕인 추모일 가능성은 적다고 봅니다. 명치호태왕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대략 삼국통일기 혹은 나말여초까지의 당대기록에서 동명과 추모를 동일시한 예를 찾기 힘든 데다가, 백제는 성왕 때 '남부여' 라 국호를 개칭하고 성씨를 부여씨로 하는 등 '부여계승의식' 을 강하게 표출했다는 점, 그리고 수서 등 중국측 사서에 백제의 동명묘로 보이는 것을 '구태묘' 라 표현했다는 점 등 때문입니다. 구태(우태)의 경우 부여의 왕족으로 묘사되므로, '동명묘' 로 불려진 저 시조묘의 대상이 정확히 부여 동명왕과 우태(구태) 중 어느 쪽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부여계 인물' 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 09.11.18 10:12

    그리고 '계루가 어지러워지고 요천이 평안치 못하게 되었으니 어린 백성들을 이끌어 천자의 위광에 의지하였다' 라는 표현은 문맥상 백제건국기사가 아니라 백제멸망기사로 보입니다. 부여융이 백제멸망시에 당나라에 항복한 '공적' 이 있음을 표현하는 구절인 것 같네요. 이 구절의 앞 부분을 읽어 보면, 이 구절이 '건국구절' 이 아니라 '멸망구절' 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바로 아래의 꼬리말입니다) // 그리고 고구려를 일반적으로 '요하' 와 관련시키려면 고구려가 요동을 확보하여 요하를 경계로 확립하게 될 광개토대왕 이후의 시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해당 기사에서 말하는 '계루' 는 후기의 고구려인 듯합니다

  • 09.11.18 10:08

    "바다 한 귀퉁이에서 겨레를 이루니 하백(河伯)의 자손으로서 상서러움을 드러냈고, 나라 기틀을 우뚝 세우니 국운이 멀리 이어져 내려왔도다.(이 부분이 백제 건국과 초기 발전) 집안의 명성을 능히 계승하고 대대로 이어받은 국업(國業)이 더욱 번창하였으니, 은덕이 사수(㴲水)에 흘러넘쳤고 위엄이 대방(帶方)에 발하였구나. (백제의 융성 부분) .... 나라를 위해 몸바쳐 자신의 몸은 가벼이 여겼고, 나라 걱정에 집안 일을 잊고 의로움을 중시하였으니, 왕회편(王會篇)에 기록된 법을 준수하여 마침내 천자의 은총을 받게 되었구나(백제의 멸망) // 이후 문제의 기사가 나오고 그 뒤에는 멸망후 부여융의 지위상승 과정이 묘사됩니다

  • 작성자 09.11.19 09:57

    계루(부)는 고구려 태조왕 이후에 고구려의 왕을 배출한 곳이지요. 백제는 고구려보다 먼저 멸망을 했고, 백제의 멸망이 고구려의 분열때문이라 해석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그리고 백제는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패배하여 항복한 것이지, 의자왕이 스스로 나라를 바친 것이 아닙니다. 온조왕이 부여씨라고 주장하거나 해씨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많은데 조선왕조실록 정종 원년 기사에 온조가 고씨라고 나와 있습니다. 남당유고에는 온조가 유리명왕에게 계루(부)에 봉함을 받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태조왕은 곧 온조왕의 후손이며, 고구려의 사서가 온조를 굳이 추모(주몽)의 후손이라 기록하는 연유가 분명해 집니다.

  • 09.11.19 16:58

    1. '백제의 멸망이 고구려의 분열대문이라 해석하는 학자는 없습니다' =>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던가요? 위의 제 글을 다시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고구려의 분열 때문에 백제가 망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군요. 지레짐작하신 듯 합니다. 해당 글의 '앞뒤문맥' 을 보자는 것이 제 기본적인 지적사항인데 그에 대한 반론은 없으시네요. 비문에서 글의 내용이 백제의 건국과 멸망, 그리고 멸망에서의 부여융의 공적 및 이후 당나라에서의 승승장구(?)에 대한 흐름이 이어지는 만큼, 해당 구절이 이 흐름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생각해 보면 갑작스레 백제건국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생뚱맞다는 지적인데 여기에는 동의하신다는 것입니까?

  • 09.11.19 16:08

    그리고 '계루가 어지러워지고 요천이 평안치 못하게 되었으니...' 라는 구절에서 보면 고구려가 혼란해졌다는 의미를 추출할 수 있기는 한데, 여기서 언급하는 강이 고구려 수도 평양 인근을 흐르는 강인 '패수' 가 아니라 고구려의 대 중국 국경선이라 할 만한 '요수' 라는 점에서 이 혼란이 단순한 내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에 의한 혼란, 특히 '중국' 과의 전쟁에 의한 혼란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지러워졌다' 라고만 표현한 것으로 보아 중국의 침략에도 아직 고구려가 '멸망' 하지 않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 09.11.19 16:58

    2. 이 기록이 '백제 왕자 부여융의 묘지' 가 아니라 '당나라의 제후왕 부여융의 묘지' 라는 것을 생각해 주십시오. 백제측의 기록이 아니라 '당나라 측의 기록' 에 가까운 것이지요. 실제로는 당나라에 패해 항복한 것이더라도 마치 당나라 천자의 위광에 감읍하여 제발로 걸어나와 당 중심의 질서 속으로 스스로 들어간 것처럼 묘사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 3. 조선왕조실록상의 백제 온조왕 성씨 기록이 과연 얼마나 정확성을 가지는지 모르겠고, 설사 온조왕의 성이 고씨임이 확실하다 하더라도 그 이유만으로 후대의 백제왕족까지 '고씨' 였다고 말할 수 있는지 모르겠군요. 온조의 성이 고씨라는 건 아마 추모를 두고

  • 09.11.19 16:27

    그 성씨가 고씨라고(고주몽) 하는 데에서 나오는 말인 듯한데, 사실 추모가 고씨인지도 '확실' 한 상황은 아닙니다. 추모의 직계 후손들이 '해씨' 임금이라고 <삼국사기> 에서 밝히고 있는 상황에서 추모의 성씨가 해씨가 아니라고 단언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물론 어느 시기인가부터 고구려의 왕성은 '고씨' 로 변경되게 됩니다만, 그 이유만으로 고구려가 '단성' 으로 쭉 이어져 내려온 양 가정하여 추모의 성씨도 당연히 고씨라 말할 수는 없지요. 추모의 성씨가 고씨임을 확언할 수 없다면, 이에 근거한 '온조의 성씨는 고씨' 라는 주장 역시 추가적 근거가 없이 성립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 백제 역시 온조의 성씨가 무엇이었든

  • 09.11.19 16:31

    어느 시기인가부터는 '부여씨' 를 왕성으로 갖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여기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다른 근거들과 결부하여 생각해 볼 때) 부여계승의식을 추출해 내는 것이 그리 무리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꼬리말 개수를 초과했군요. 나중에 별도 글로 정리해 올리겠습니다.)

  • 작성자 09.11.20 10:07

    고주몽의 성씨는 본래 해부루의 아들이라 해씨이고, 고구려 2대왕인 유리는 본래의 성씨인 해씨죠.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며 고씨라 칭하였는데, 조조와 비슷한 부분이 있으니 참고바랍니다. 조숭(曹嵩, ? ~ 194년)은 후한 말기의 관료이며, 위 태조 무황제 조조의 아버지이다. 자는 거고(巨高)이다. 일설에는 하후씨라는 설이 있으며 하후돈의 숙부라는 설이 있다. 중상시 조등(曹騰)이 환관이라 아들이 없었으므로 조숭을 양자로 삼았다. 조숭은 조등의 작위를 이어받아 태위의 관직에까지 이르렀다. 무제기에 인용된 조만전의 일설에 의하면 원래의 성은 하후씨였으나 환관 조등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성을 조씨로 바꾸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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