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 최서림 시창고
대나무 / 최서림
겨울날 삭풍에 대나무가 더욱 크게 휠 수 있는 것은
속에다 잔뜩 감추고 있는 구멍때문이다
남보다 더 곡진(曲盡)하게 더 음산하게 울 수 있는 것도
칸칸이 방방이 더 시퍼런 불 켜들고 있는 구멍 때문이다
구멍은 사물이 놀 수 있는 자리이다
구멍이 없는 사물들은 자유가 없다
대나무들은 각자 자기의 구멍을 차지하고서
스스로 놀고 있다
구멍에서 구멍으로 이어지는 큰 구멍 속에서
대나무들은 서로 얽히면서 부대끼면서도
각자 바로 놀 줄 안다
우주도 큰 구멍이면서
다른 구멍 안에 둘러 싸여있다
어떤 소리는 우주 밖으로까지 울려나가기도 하는데
대금이나 피리를 불려면
하늘과 땅 사이를 울리고 꽉 메우는 소리를 내지르려면,
우리의 늑골을 흔들고서 참말로
우리의 혼을 우주 밖으로 까지 끌어올리는 소리를 내려면
대나무 구멍 안에 감추어진 소리를 읽어야한다
겨울밤 미친년모냥 흔들리며 울어댄 소리,
가을날 풀벌레보다 더 외로운 빈 구멍의 소리, 침묵의 소리
남국의 햇살 기름이 자르르 빛나는 영원의 소리.
대나무 통 안으로 계시처럼 스며들어가 있는
태초의 소리부터 부지런히 먹어봐야 한다
<시와사상> 2004년 봄호
현대시작품상 이달의 추천작 (현대시 5월호)
최서림 시인
본명 최승호. 1956년 경북 청도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93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 현재 산업대학교 문창과 교수로 재직중. 시집 <이서국으로 들어가다>(1995),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1997),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구멍(2006년) 2000년 시론집 <말의 혀>가 있으며, <한국적 서정의 본질 탐구>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출처] 대나무/ 최서림 |작성자 마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