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글쓰기 22-9 장철문 詩 읽는 시간(2024.10.9)
오늘 '시 읽는 * 빵 익는 시간'에는 장철문 시집 <비유의 바깥/문학동네>를 읽기로 했다. 그 시집은 만나서 함께 읽기로 했기 때문에 나는 오븐에서 초콜릿케잌이 익어가는 동안 시인의 첫 번째 시집 <바람의 서쪽/창작과비평사>을 읽었다.
시집을 읽다 깜짝 놀랐다. 며칠 전 주문해서 받은 시집 값이 5,000원 밖에 안해서 확인해보니 무려 1998년에 나온 초판이었다. 그러니까 장철문 시인의 첫 시집은 아직 초판도 못 팔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나.
놀란 마음을 진정하고 책장을 넘기다 또 깜짝 놀랐다. 시집에 실린 시가 좋아서였다. 첫 번째 시 '마른 풀잎의 노래'부터 이어진 시들이 다 좋았다. 다정한 시어들은 이미 낯선 말들이 되었지만 그래서 더 반가웠다. 쉽고 편한 말로 쓴 시는 그야말로 마른 풀잎의 또는 한생을 잘 살고 사위는 시기를 맞은 어떤 존재의 노래같다.
시를 읽을 때 씨르래기는 찌르레기의 다른 말쯤 되는 건가 생각했는데 한 부지런한 사람이 찾아 알려줬다. "씨르래기는 곤충, 찌르레기는 새"라고. 앗, 그랬던가. 나중에 나도 찾아보니 씨르래기는 여칫과 곤충이란다. 씨르래기의 정체를 알고 읽으니 시에 대한 공감도가 확연히 달라진다.
함께 읽은 시집 <비유의 바깥>에 실린 시들도 그냥 읽을 때도 좋았지만 시인의 비유를 알아들었을 때 시에 대한 호감도가 급상승했다. 오늘 시 읽은 시간을 떠올리니 '정겨운 가을날'이라는 말이 생각났는데 이 정겨운 가을날인 한글날 읽기 딱 좋은 시집이었다. 함께 읽은 한 친구는 "시들이 다 한끗이 있더라구요." 뒷담을 남겼다.
멀리 순천에서 새벽기차를 타고 온 친구, 일하러 안 간 덕분에 올 수 있었던 친구, 아프지만 않으면 어떻게든 오는 친구, 마로니에 백일장에 나가 입선을 하고 우리도 시를 써보라 권하는 친구, 새 책이 나왔다고 선물한 친구, 몸이 안 좋은데도 둘둘 감고 어떻게든 함께하고 싶었던 친구, 매달 애써 길잡이가 되어주는 친구, 이 정다운 가을날을 함께한 친구들과 장철문의 시 덕분에 오늘 내 하루는 밝고 찬란했다.
"고맙다."(<비유의 바깥> 머리말에서)
마른 풀잎의 노래
씨르래기들아, 내 몸속에서
음악소리가 들린다
바랭이 풀섶 어두컴컴한 곳에서 노래하는
씨르래기들아
내 몸속에서도 물음표들의 음악소리가 들린다
물음표들은
내 몸통 어둑한 곳에서 뛰쳐나와
서로 부딪치며 저마다의 소리를 낸다
사위는 개망초꽃 사이에서
우는 씨르래기들아
물음표들은 저마다 푸른 소리가 있고
그것들은 서로 부딪치면서
때로는 빛살 속으로 미망迷妄 속으로 흘러간다
풀섶을 헤치면 너희들은 흩어지고.
이명耳鳴처럼 우는 씨르래기들아
내 몸속에서도
너희들의 노래 같은 울음소리가 들린다
- 장철문, <바람의 서쪽/창작과비평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