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첩 목까지 베어 대접해야(이훈범)
인재 관리 리더십
몸 낮추고 의견 들어야…의자에 기대 곁눈질만 하면 소인배 꼬여
중국 속담에 ‘곽외부터 시작하라’는 게 있다. “멀리 있는 인재를 구하려면 먼저 가까이 있는 사람부터 대접해야 한다”는 뜻인데 중국 전국시대 연(燕)나라 소왕(昭王)과 곽외의 고사에 나온 얘기다.
연나라는 강대국 제(齊)나라 북쪽에 위치해 제나라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려야 했다. 연나라의 39대 왕인 소왕은 곧은 품성과 지혜로 연나라의 전성기를 일궈낸 인물이었다.
그는 땅에 떨어진 나라의 위신을 되찾고 제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세상의 인재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던 어느 날 곽외라는 선비가 찾아왔다.
소왕이 인재를 모을 방법을 묻자 곽외가 대답했다.
“제왕의 신하는 비록 신하이지만 실제로는 스승입니다. 왕자(王者)의 신하는 비록 신하이지만 실제로는 친구입니다. 그리고 위험한 나라의 신하는 비록 신하일지라도 실제로는 포로인 것입니다. 예를 갖춰 받들고 겸손한 자세로 가르침을 청하면 나보다 백 배 훌륭한 인재가 모여들게 됩니다. 그러나 상대와 똑같이 행동하면 나와 비슷한 사람만 모여들며 의자에 기대 앉아 곁눈질로 지시하면 소인배들만 들끓게 되고 무조건 화를 내고 다그치면 노복들만 남을 뿐입니다.”
“누구에게 가르침을 청하고 의견을 듣는단 말이오?”
곽외는 대답 대신 이야기 하나를 들려줬다.
“옛날 어느 왕이 1000금을 걸고 천리마를 사려 했지만 도무지 구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자기가 구해 보겠노라고 나섰습니다. 그 사람은 먼 나라에 천리마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는데 그가 도착했을 때는 말이 이미 죽은 뒤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죽은 말의 뼈를 500금에 사서 돌아왔습니다. 왕은 진노해 그를 나무랐지만 그는 태연히 대답했습니다. ‘죽은 말을 500금이나 주고 샀다는 소문이 퍼지면 살아 있는 말은 훨씬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세상의 명마들이 몰려들 것입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일 년도 못 돼 왕은 천리마를 세 마리나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소왕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곽외가 웃으며 말했다.
“지금 대왕께서 진심으로 인재를 구하시겠다는 뜻이 있으시다면 대왕의 주변에 묻혀 있는 이름 없는 인재부터 후하게 등용하십시오. 그러면 천하의 인재들이 앞다퉈 밀려올 것입니다.”
주공, 밥 먹다 뛰어나와 인재 맞아
“인재가 눈앞에 있는데 왜 멀리서만 찾느냐”는 얘기다. 가까이 있는 인재인 나를 대접해야 다른 인재들이 찾아올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소왕은 그 말을 따라 몸을 낮추고 주위 인재를 대접했다.
그러자 각지에서 출중한 인걸들이 모여들었다. 합종론(合從論)을 주창한 소진(蘇秦)과 제갈량이 관중과 더불어 가장 존경했다는 현인이자 무장인 악의(樂毅)도 이때 소문을 듣고 소왕을 찾아온 인물이었다.
훌륭한 리더가 되려면 그렇게 찾아낸 인재를 능력과 그릇에 걸맞은 대접을 할 줄 아는 지혜도 갖춰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서운한 감정을 느끼게 하면 어렵게 찾아낸 인재가 떠나버릴 수 있다. 그것은 돈만으로 되지 않는다.
물론 많은 보수가 인센티브가 될 수 있겠지만 “돈을 많이 줬으니 내 맘대로 하겠다”는 식으로 하인 부리듯 하면 인재가 모욕을 느끼게 돼 조직에 대한 로열티가 떨어진다. 이뿐만 아니라 돈을 덜 받더라도 인간적인 대접을 받고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런 진리를 잘 알고 행동을 조심한 인물이 바로 주공(周公)이었다. 주(周) 무왕이 죽자 동생 주공은 어린 조카인 성왕을 보필했다. 그는 이를 위해 자신의 아들 백금을 자기 대신 영지인 노(魯)나라로 보내면서 훈계했다.
“나는 문왕의 아들이고 무왕의 동생이며 성왕의 아저씨다. 하늘 아래 결코 낮은 신분이 아니다. 그래도 나는 머리를 감다가도 손님이 찾아오면 세 번이나 머리를 잡고 뛰어나갔으며 밥을 먹다가도 세 번이나 뱉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인재를 맞아 대접한다. 그럼에도 천하의 어진 인재들을 잃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너는 노나라로 가면 제후라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교만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
이른바 토포악발(吐哺握髮)의 고사다. 주공이 무엇이 아쉬워 입 안에 든 음식물을 뱉어내고 젖은 머리를 부여잡고 뛰어나갔겠나.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했다. 밥을 먹다 말고 뛰어나오는 주공을 본 인재들은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인재관으로 주공은 주 왕실을 공고히 하고 예약과 법도를 제정하고 문물을 일으킬 수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이유다.
물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 아니 훨씬 많을 터다. 전국시대 조(趙)나라 왕의 아들인 평원군 조승이 그런 인물이었다. 세 번이나 재상을 지낸 그 역시 인재 대접을 좋아해 그의 식객이 된 사람이 3000 명에 이르렀다.
어느 날 조승의 애첩이 누각에서 놀다가 어떤 곱추가 절뚝거리며 물을 긷고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웃었다. 다음날 그 절름발이가 조승을 찾아와 말했다.
“각지의 인재들이 천리길을 멀다 않고 당신 집에 와서 식객이 되는 걸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인재를 귀하게 여기고 첩을 천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저는 불행히도 곱사병에 걸려 모습이 흉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애첩이 저를 비웃었습니다. 청하건대 저를 보고 웃은 애첩의 목을 제게 주십시오.”
세 치 혀가 백만대군보다 강해
조승은 웃으며 “알겠다”고 대답했지만 끝내 애첩을 죽이지 않고 꼽추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런데 일 년도 못 돼 식객들이 점점 빠져나가 절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조승이 한 손님에게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꼽추를 비웃은 여자를 죽이지 않은 것을 손님들은 당신이 여자를 사랑하고 인재를 경시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제서야 조승은 애첩의 머리를 베고 꼽추 집을 찾아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을 사과했다. 그렇게 하고 나니 떠났던 식객들이 다시 돌아와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의 실수담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유명한 ‘모수자천(毛遂自薦)’의 고사가 또 있다. 문자 그대로 모수가 자기를 천거했다는 얘기다. 기원전 258년 때 일이다. 진시황의 조부인 진나라 소양왕이 대군으로 조나라 수도 한단을 치게 했다. 이에 놀란 조 왕은 조승에게 급히 초(楚)나라에 가 구원을 청하도록 했다.
평원군은 문하의 식객 중 문무를 겸비한 20명의 인재를 선발해 함께 가기로 했다. 그런데 19명은 채웠으나 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이때 식객으로 있던 모수가 스스로 천거하고 나섰다. 평원군이 물었다.
“당신은 여기 온 지 몇 년이나 되었소?”
“3년입니다.”
“현인이란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가만히 있어도 드러나는 법인데 나는 3년 동안 당신에 대해 들은 게 없구려.”
“그러니 이제 주머니에 넣어달라는 말입니다.”
평원군은 별수 없이 모수로 스무 명을 채워 초나라로 떠났다. 일행은 초 왕에게 군사지원을 간곡히 요청했지만 19명이 다 나서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모수가 칼을 들고 초 왕 앞에 다가가 말했다.
“초나라의 강대함은 천하의 어떤 나라도 당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대왕의 명운은 지금 저의 손안에 있습니다. 진나라는 초나라를 격파해 초나라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주었습니다. 합종은 초나라를 위한 것이지 조나라를 위한 게 아닙니다.”
초 왕은 크게 놀라 사죄하고 조나라를 돕기로 했다. 평원군은 돌아오는 길에 모수에게 사과했다.
“선생의 세 치 혀가 백만대군보다 강했소. 선생을 보고서야 나의 지인지감(知人之鑑·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얼마나 천박했는지 깨닫게 됐소.”
그러고는 모수를 상객으로 높이고 극진히 대접했다. 아무리 인재를 귀하게 여긴다 해도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겸손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랫자리에 있을 때는 그렇지 않다가도 리더가 되면 기고만장해 안하무인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사람들 주변에 인재가 모여들 리 없다. 사람을 잘 살펴 인재를 찾아내고 그 인재에게 걸맞은 대우를 할 줄 아는 것이 리더의 가장 큰 덕목 중 하나다.
이훈범 중앙일보 논설위원 (cielble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