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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독자
- 에세이문학 2017년 가을호-
方 旻
1. 수필은 작가가 쓰고 독자가 읽는다. 이는 수필도 사람 사이의 대화처럼 작가와 독자의 소통이란 말이다. 청자를 생각하며 말을 해야 하듯, 수필도 독자를 고려하여 써야 한다. 아주 기본 조건인데, 수필가는 쉽게 잊는다. 허공에 대고 혼자 말하듯 글을 쓰는 경우를 적잖게 본다. 듣는 이 없이 혼자 말할 수 있고, 그런 말하기가 필요한 때가 있다. 시에서는 이런 독백 허용 범위가 넓어서, 시 독자는 시인의 혼잣말을 엿듣는 경우가 매우 많고 자연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수필은 이점에서 시와 달리 혼자 말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서정성이 넘치는 수필의 경우엔 독백의 장場을 허용할 수 있으나, 이런 때는 자칫 작가만의 자아도취적 감상성에 빠지기 십상이다. 즉 홀로 춤추고 장단 맞추며 나르시스적 몽환의 사념과 감정을 질펀하게 펼쳐 놓아, 독자는 그 자리에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는다. 워즈워드 말처럼 넘치는 ‘감정의 유로’는 시에 해당하지, 수필에는 좀처럼 어울리기 어렵다. 시는 혼자 부르는 노래이고 춤이라면 수필은 함께하는 이야기고 걷기에 그러하다. 수필의 본성은 산문인 산보라는 점을 깊게 유념하는 게 좋다.
수필 독자가 위와 같이 필수불가결한 동반자 성격을 갖는다면 수필가는 독자를 대하는 정견定見을 나름대로 갖춰야할 것이다. 그 몇 항목을 이 자리에서 제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에세이문학 2017년 가을호’에 실린 작품을 읽어보기로 한다. 이 또한 필자가 생각하는 수필 독자관임은 두말할 게 없겠다.
2. 남과 소통을 잘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방책일까 생각해보자. 그것은 화자의 입장이나 생각을 앞세우지 말고 상대방 처지를 고려해야 한다. 권위주의적으로 내 말이 옳고 타당하니 무조건 듣고 따르라는 식으로 해선 바람직한 소통은 당연히 일어날 수 없다. 즉 수필가는 독자 앞에 자신을 낮추고 겸손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내세워 자랑하거나 과시할 생각을 버리고 최대한 독자에게 맞추도록 애쓸 일이다. 이것을 독자에게 아부하고 비위를 맞추라는 말로 오해할 수 있다. 사회의 갑을 관계로 바라보라는 말이 아니라 동등한 동반자로 생각하여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도록 하라는 말이다.
<영화관에서>(추선희)는 혼자 간 영화관에서 한 청년을 보았다. 그는 작가 옆에 앉았다 목발 때문인지 문 가까이 옮겼다. 한 달 뒤에 다른 영화를 보러갔는데 거기서도 그 청년을 만났다. 우연이지만 그에 대한 이성적 호감도 얼핏 품었고 영화를 좋아하는 동지애적 감정도 따라왔다. 그를 연거푸 만나니 영화는 혼자 봐야 한다는 애초의 생각도 사라지게 했다. 그와 동행하여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다는 상상적 희망마저 품었다. 평소의 영화 감상관鑑賞觀을 바꾸게 한 어떤 젊은 청년에게 흔들리는 감정과 동행을 꿈꾸는 심정을 진솔하게 고백했다. 그뿐이다. 독자에게 영화감독과 영화 지식을 자랑하지 않는다. 이토록 혼자서도 영화를 즐겨보는 작가는 아마도 상당한 영화 지식은 물론 관심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일절 함구한다. 영화김싱자로는 대가급일 수도 있겠지만 그런 내색을 전혀 비치지 않는다. 독자 입장에서는 이점이 부담스럽지 않다. 간혹 섣부른 작가는 감독이 어떤 경향의 사람인데, 어떤 작품이 유명하다는 둥, 또 소개한 영화가 얼마나 잘 된 작품이라는 둥, 독자에게 작가의 영화 상식을 불필요하게 과시하는 경우를 더러 만난다. 그런데 이 작가는 간단히 제목만 말할 뿐, 이 수필의 요체인 영화관에서 만난 청년과 사연에만 집중한다. 독자는 작가 시각으로 담담하게 들려주는 어떤 우연한 사건, 누구에게나 간혹 있을법한 얘기를 듣는다. 즉 공감한다. 편안히 작가와 독자는 소통의 자리에 함께 앉는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박용수)는 자성이 글의 핵심이다. 자아를 인식하는 매재媒材로 자주 문학에서 애용하는 거울 관점을 말한다. 수필 본령인 자아 성찰을 주제로 삼아 그만의 시각을 보인다. 이 성찰적 관점이 일반 타인에게도 촉수를 들이미는 듯 하지만 멀리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통상 선을 넘지 않고 근처에 머뭇거리다 자신에게 귀착시킨다. 자성한 결과를 독자에게 넝쿨처럼 뻗어가는 글도 적지 않다. 성찰해서 얻은 것을 타자에게 연관시키나, 과시하지 않고 일반 경향만 터치하고 결국엔 자신에게 돌린다. 자성의 주체를 잊지 않고 마무리 한다. 독자는 어느 작가 한 사람의 자아 찾기 과정에서 동반자일 뿐이다. 설득이나 충고의 대상이 아니라서 권고하지도 않는다. 독자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라 말하고 그는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둘은 소통한 것이다.
<산국 한 묶음 안고>(윤연희)는 다가온 노년과 앞으로 닥칠 죽음까지 관심을 보인다. 때가 이르면 누구라도 생각해 볼 수 있는 주제다. 이것을 얼마나 개성적으로 펼치는지에 작가 역량이 드러나고 독자에게 호응 받을 수 있다. 작가가 보여주는 노년의 바람직한 모델을 이국 할머니한테 발견한다. 이것을 책에서 인용하여 강화하고 희망의 그림을 그린다. 이 결미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시간과 공간 폭은 길고 넓다. 시간으로는 10 여년이 넘고, 공간으론 미국과 페루, 스위스 등으로 꽤 넓게 펼친다. 그만한 시공에선 얼마나 할 말이 많고 자랑할게 넘치겠는가. 하지만 주제와 어긋나는 건 조금도 내세우지 않는다. 노년의 추한 여러 간접 체험을 곁들이며, 왜 작가가 산국을 꺾어 말리는지, 바라는 노년상이 어떤 것인지 청자에게 들려주기 위한 용도로만 쓴다. 내가 어디어디를 다녔는데 그곳은 어떠했고, 어떤 책을 읽었는데 그 내용은 어떠하고, 또 무엇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를 주제와 긴밀하게 연결도 안 되는데 여기저기 흘리며, 독자가 참기 어렵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숙고하지 않도록 조근조근 작가 관점에 집중하여 주제를 통합하는 방향에서만 얘기를 펼친다. 노년기에 가까이 다가 선 독자라면 작가의 희망 상에 견주어 나는 어떤 노년 상을 바라는지 돌아보게 한다. 부끄럽지 않게, 요란스럽지 않게, 각자 처한 입장에 따라 한번쯤 생각해볼 계기를 마련하게 하니 진솔한 소통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3. 소통이 잘 되려면 내 속을 감추지 않고 터놓고 말해야 진심이 상대에게 전달되어 좋은 결과를 얻는다. 진솔하게 내가 품은 생각을 과장하거나 축소하지 않고 그대로 풀어내야 한다. 자신의 전 인격을 걸고 모든 것을 펼쳐야 한다. 수필의 진정성은 이러할 때 얻을 수 있고 이 진정성은 독자에게 소통되어 공감하고 감동하기에 이른다. 내 주장만을 옳다고 강요하거나, 그것을 설득하기 위해 허구나 허위 사실을 말해서는 진정한 소통은 불가하다. 간혹 일시적으로 상대를 속일 수 있으나, 허위의 유통 기한은 그리 길지 않다. 생각보다 짧고 쉽게 거짓의 민낯이 대낮에 훤히 드러난다. 수필의 특징은 바로 작가 전 인격이 그대로 노출된다는 점이다. 이것을 수필의 한계나 약점이 아닌 장점으로 깊이 인식하고 충분하게 살릴 때 진정성이 전달되며 이것은 독자 공감을 일으켜 감동의 파문을 새길 수 있다.
<밥>(노혜숙)은 세태가 관심 대상이다. 청년 실업과 빈곤 현장을 주목한다. 이어서 노상에서 응급상황을 맞은 사람에게 구원의 손길을 편다. 그것은 작가 동생이 겪었던 급작스런 사고를 환기시킨다. 이 모든 게 ‘밥’으로 대표하는 생존 문제와 연결된다고 작가는 판단한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세상의 다양한 문제에 작가가 관심의 시선을 돌리고, 어떤 해결책을 제안하거나 아니면 개인적 비탄의 감상에 젖거나 막연한 동정으로 맺기 쉽다. 하지만 작가는 외부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즉 남 문제이지 나와 무관한 사회 여러 현상의 하나로만 치부하지 않는다. 세상살이 이치인 “밥그릇 싸움”에 작가 가족도 직결된 것을 정직하게 인정한다. 아들은 군대에서, 남편은 은퇴해 여전히 그 자리에서 고투중임을 담백하게 인정한다. 세상이 그렇지만 ‘나는 안 그래요’라고 외면하거나 회피하는 건 진지한 자세가 아니다. ‘나만 빼고’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백안시하거나 배제하지도 않는다. 우리 함께 같은 세상에 살고 있고, 나도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아픔을 공유한다. 내 문제로 끌어안고 마음에 담는다. 그럼으로써 작가도 남편에게 밥상을 차리고, 아들의 무사 제대를 빈다. 그 진심이 독자에게 다가든다.
<귀뚜라미는 가을에만 우는 게 아니다>(송연희)는 식용 곤충으로 쓰이는 귀두라미 분양광고에 끌려 사육장을 방문한 얘기다. 금전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식용곤충의 여러 정보는 곁가지다. 금전욕의 투기성에 있지 않고, 인류의 먹거리 고민을 해결해 줄 공익적 행위인 것으로 돌려 말하기 위해, 또는 작가가 재산 축적의 욕망을 감추지 않는 대체재일 뿐이다. 여기에 작가의 솔직함이 동행한다. 한편으로 건전한 투자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금전욕으로 노출된 민망함을 감추려는 의도가 아니다. 인류 식량 문제에 작가가 갖는 관심은 이 시대 조류의 하나임을 밝히고 그 문제 해결에 동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투기성 아파트 분양은 해본 적이 없지만, 이 귀뚜라미 분양은 받아볼까 고민 하는 것, 마음 갈피를 잡지 못하게 휘저어대는 그 심사를 그대로 한 자락도 감추지 않고 드러내는 정직함에 독자는 공감할 것이다. 건전하건 그렇지 못하건 금전욕을 두고 일어나는 심리적 충돌을 실상 그대로 터놓고 있다. 이 시대 상식인이라면 이와 유사한 경우를 겪거나 보고 들었을 거다. 그 적나라한 잠재 욕구를 이토록 말갛게 드러내니 어떤 독자인들 감수感受하지 않겠는가.
<계단, 그 상상속으로>(정해경)은 계단이란 인공물의 인간적 의미를 파고든다. 작가가 찾아낸 것은 수직과 수평 결합인 계단의 기능이 연결이라는 것, 밑과 위를 공유한 공간적 의미를 찾아낸다. 언덕의 경사에 내장된 수직과 수평이란 근골筋骨을 찾아낸 것은 작가의 명민함이다. 이 수평과 수직으로 조성된 계단이 비로소 경사의 위와 아래를 연결하여 언덕의 이쪽과 저쪽 세상을 이었을 것이란 상념은 공룡의 진화로 신화까지 이어지는 상상으로 넓힌다. 그녀가 계단 앞에서 막힌 유모차 바퀴를 들어 올려 길로 연결한 서두는 결미에서 친구를 배웅하며 계단 끝과 시작에서 서로 손을 흔들어 마지막 연결을 확인하는 행위와 상통한다. 결국 작가는 인간 소통 문제를 말하려는 심산이다. 사람의 소통-물리적 실체로서 소통을 실행케 하는 계단- 이 중요한데, 계단이 바퀴와 불통하지만 그 구조 안에 내장된 수직과 수평으로 두 세상 공간을 연결하여 소통하는 기능적 의미를 발굴한다. 즉 계단이 내재한 인간적 의미 발견에 이르러 수필의 품에 안긴다. 공룡의 특이한 이름이 등장하며 상상 진폭이 넓고 계단을 두고 펼치는 상념의 논리는 독자가 뒤 미쳐 따라가지 못할 만큼 넓기도 하고 깊기도 하며 멀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확신에 차서 당당하게 큰 목소리로 외치려 들지 않는다. 자신도 솔직하게 그렇게 펼친 사유에 자신감이 없다는 걸 누차 드러낸다. 여러 번 등장한 의문형 서술 의미 “~까”가 증거이다. 유보적이며 독자에게 조심스레 동의를 구하는 이 장치는 바로 작가 자신도 그 생각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을 토설하는 것이고, 이리저리 생각해 보지만 자신도 장담할 수 없다는 신중한 태도다. 이런 태도에서 혹간 거북할 수도 있는 공룡 등장은 작가가 그 지식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계단의 유래를 찾아내려는 상상이고 생동하는 결과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계단에서 용을 찾아내 연결하는 그 상상이 소통하려 노력한 성과인 셈이고 그런 감투敢鬪에 찬사를 보낸다.
<지금도 목에 걸리는 것>(홍정자)은 어린 시절에 무심코 저질렀던 비행을 고백한다. 후회스런 일이었기에 세월이 넘쳐흘렀지만 늦게라도 자백하고 용서를 빈다. 그로써 작가는 마음의 짐을 덜고 치유의 강물을 만났을 것이다. 물론 전쟁 통이니 그런 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 사변이란 비상 시기이기에 별것도 아닌, 일상으로 돌리고 무심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불가피한 경우라고 여기고 그 보다 더 부끄러운 짓을 잊거나 무시하고 태연하게 살아간다. 작가가 수필로 써서 치욕을 모두 드러내어 만천하에 공개하는 그 태도는 일종의 양심고백이라서 조금도 감추거나 덜어내지 않고 기억에 저장된 것을 들어내어 용서를 빈다. 공범이기도 한 사촌 오빠는 이미 불귀의 객이 된 처지인 만큼, 부끄러움을 간직하게 했던 그 어린애도 이젠 노년이 되었으리라 추정한다. 아직까지 수십 년을 거치며 더욱 커진 빼앗은 엿이 지금도 목에 걸린다고 자백한다. 용서받지 못할 일에 대한 솔직한 속내를 독자에게 공표한 바, 이제는 그 짐을 내려놓았으면 좋겠다. 문학은 독자와 작가 모두에게 치유가 틀림없다는 걸 확인하길 바란다.
4. 수필은 내 얘기를 하는 문학이다. 그것도 실제로 겪어낸 체험이 주요 제재이다. 내가 겪어낸 삶이란 반드시 나만의 삶은 아니다. 내 삶 안엔 타자의 삶이 있고, 나와 타자의 공동체인 사회가 또 다른 체험의 장이다. 즉 나를 포함한 우리 사회인 세계를 작품 대상으로 삼는 건 내 이야기처럼 당연한 현상이다. 이것을 일러 세상과의 소통이고 자아화라 부른다. 수필가도 세상 이야기를 하고 싶고 마땅히 할 권리도 있고, 어느 면에선 발언할 책임까지 있다 하겠다. 수필이 우리 얘기를 할 때 독자에게 취해야 할 자세는 아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아는 척이 아니라 진정 아는 것도 조심스럽게 펼쳐서 독자를 가르치려들지 말아야 한다. 수필을 읽으며 무언가를 배우려하지 않는다. 읽으며 은연중에 스스로 배우게 될 수는 있지만, 수필 독자는 단초부터 수필에서 배울 거리를 찾으려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점을 수필가는 유념하는 게 좋다. 특히 사회 문제를 언급할 때는 더욱 그렇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전문가인 듯 행세하는 건 곤란하다. 종종 각 방면의 전문가가 그 지식과 식견을 수필 형식, 곧 자유롭고 호흡이 편한 산문으로 대중에게 전달하는 경우가 예전엔 적지 않았다. 철학 에세이라고 했던 안병욱 교수의 글이 그러했고, 해박한 잡 지식을 맘껏 펼친 이어령 교수의 에세이가 그러했다. 물론 이들은 그 방면의 전문가이니 그렇다 해도, 이 글은 문학 수필이 아니라 산문 수필일 뿐이다. 김형석 교수 글도 안병욱보다 묽어진 상태지만 역시 문학 수필은 아니다. 같은 철학자이지만 김태길 교수 글은 대부분 문학 수필에 속한다. 철학자연 하지 않고 인간적 소시민 면모를 주로 담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각계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과 행세하는 유명인들이 그 분야를 에세이란 이름으로 자유롭게 쓰고 책도 펴낸다. 학자와 종교인, 정치인과 연예인, 문인과 예술가 등이 펴내는 에세이는 모두 산문 수필이지 본격 문학으로서 수필은 거의 만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책의 내용 대부분은 드러내놓고 독자를 학생으로 여긴 듯, 무엇을 하지마라, 이렇게 해라, 이것은 아니다 식의 설교와 훈계가 넘친다. 꼬집어 말하자면 각자 인생론을 펼치는데, 실상은 인생을 요리나 건강관리와 식물 재배처럼 어떤 매뉴얼이 있는 것처럼, 정답이 정해진 것처럼 독자를 코치하려 들기 때문이다. 이 중에는 낙양의 지가를 간혹 올리기도 하고 에세이란 카테고리로 서점가에 진열하지만, 그들은 문학 에세이가 아닌 산문 에세이, 비문학 산문집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문학 수필은 달라야 하고 다르다. 문학 수필에선 작가가 수필로 선택해 쓰는 제재와 그 해석에 관해 독자 누구라도 안다고 여겨야 한다. 이미 다 알고 있고 조금 생각도 해본 것이지만, 작가는 그걸 상투적이지 않은 독특한 해석과 의미를 달아 내놓는 것이다. 그것도 체험 현장에서 겪어낸 자설화自說化한 어떤 것을 보이고, 그에 대한 독자 의견을 구하거나 공감을 유도할 뿐, 내세우거나 아는 척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런 문제는 독자도 어느 정도 알고 있거나 상당 수준 파악하고 있으나 말과 글로 미처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디 자리에 가면 누구나 대강 아는 것을 자신만이 혼자 알고 있는 듯, 좌중을 향해 보란 듯 과시하며 말하기를 습관처럼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누가 그 보고 그런 얘기를 해달라고 청탁한 적 없는데, 그는 신이 나서 열심히 입을 벌린다. 바로 이런 식으로 수필을 써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그런 자세에서 말하게 되더라도, 누구나 아는 것인데 내 관심사이므로 여러분에게 화제를 공유하는 차원에서 얘기를 꺼냈으니 당신은 어떠냐의 은근한 방식이 적합하다는 의미다. 제반 사회 현상에 관해 수필로 다룰 때 이런 태도가 독자에게 바람직하다 보겠다.
<방목>(권순옥)은 집 앞의 까치둥지를 관찰하고 새끼를 키워 이소하는 광경의 감동을 전한다. 단지 자연 생태 관찰만이 전부라면, 생물학자의 산문으로 머물 것이다. 여기에 인간 삶과 대비하여 의미를 찾아내고 풀어내야 비로소 문학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작가의 진짜 관심사는 자녀 교육이다. 까치의 방목을 지켜보면서 우리네 자녀 교육도 방목이 바람직하지 않을지 조심스레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지금 만족한 자신의 삶 역시 부모 방목으로 가능한 것이라 자부한다. 물론 방목하기 힘든 사회 현실 문제를 인정하면서 이에 대해 전문가 의견을 인용하여 자기 관점을 살린다. 이것을 동생과 작가가 방목 당한 체험을 풀어내어 보강한다. 이 시대 자녀 양육은 누구일지라도 정말 힘들고 어려운 문제다. 정답 찾기는 난제 중의 난제다. 이럴 때 이를 주제로 삼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지만, 까치 생태와 성장기 체험을 도입하여 의견을 펼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까치 생태를 면밀하게 살피고 그 생각을 정리해서 내놓을 뿐, 교육에 대한 자신 의견을 강하게 내세우거나 교육 문제를 아는 척하지 않는다. 다만 “헬리콥터 맘”과 “드론 부모”가 있다는 정도로 세태 현실을 지적하는 데서 그친다. 그것도 말을 전할 뿐이고, 그 실제성을 “내집 며느리”를 끌어와서 자신에게도 예외가 아님을 애써 밝힌다. 말하자면 사회공동체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야 할 문제라고 인식한다. 그러하기에 “언제쯤일까”, “아닐까”의 양보적 태도를 보인다. 독자는 작가의 이런 의견에 동조하거나 부인하려 신경 쓸 일이 없다. 참, 우리 사회가 그렇지 하고, 현실 문제를 공유하고 환기하는 정도에서, 해결책은 각자 찾도록 하는 개방적 태도를 보이면 된다. 수필에서 다룬 사회 현상이 ‘탈 원전 방향이 바람직한가?’에 꼭 찬반을 내야하는 것처럼 정책적인 건 아니다. 또 그런 문제는 수필거리로 적합하지도 않다. 다양성이 담보된 문제, 개인 사유와 감성으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을 수필로 써야 마땅한 이유다.
<파리의 변>(신성애)는 파리 이야기다. 파리 생태와 습성을 관찰하고 공부하며 체험하면서 생명 존중의 생각을 펼친다. 일반적으로 해충으로 보는 파리가 익충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자연 생태의 역기능과 순기능을 두루 제시하며 뒤집어보기와 낯설게 보기를 섞어 재미도 함께 담아낸다. 사물이나 동식물을 제재로 삼는 수필은 사실상 쓰기가 그리 수월한 건 아니다. 단순하게 외양이나 기능, 생태와 습성을 관찰하거나 관련 지식을 나열하는 건 수필이 아니다. 그런 것은 그쪽 방면 전문가가 할 일이지, 문학자가 달려들 일은 아니므로 문학으로 제 구실을 하려면 반드시 문학 의미와 인생 가치를 고아내야 한다. 이점이 그리 만만치 않다. 그것조차 얼마나 어떤 면에서 가치가 있는지 발견하기도 용이하지 않고, 흥미를 주는 내용으로 엮어내기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은 성공적이다. 그러면서도 조금 아쉬운 대목은 작가 관점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데 있다. 제목처럼 파리 입장에서 나름의 존재 이유를 작가가 대변한 것이지만, 그에 관한 인간적 메시지가 무엇인지 불명不明하다. 구태여 찾아보자면 파리도 나름 세상 존재 가치가 있으니 너무 미워하고 야박하게 몰아치지 말라, 사람에게 많은 피해를 주지 않을 테니 파리의 존재를 용인해 달라, 또는 그래도 우리는 인간쓰레기보다 낫다 정도인데, 이건 그야말로 파리의 관점이지 인간적 가치나 의미가 미약하다. 파리와 인생의 연결 고리를 잡아채어 제시했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글도 파리에 대한 우리 상식을 벗어나는 지식도 나오고, 파리 생태를 세밀히 관찰한 것도 드러내지만 파리 관점에서 직접 말하는 거라서 작가도 독자보다 우위에서 아는 척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는다. 만약 이 시각을 파리가 아닌 관찰자로 인간 관점에서 써나갔다면 혹시 파리 습성에 대해 아는 척으로 비칠 수도 있을 테지만, 이처럼 대변자를 빌린 간접 진술은 그 점이 감춰져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시각 선택의 가상 화자를 내세운 것이 효과적 장치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외딴집>(조현미)는 십여 년간 보아온 집이 허물어지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이야기다. 그 외딴집에 살던 할머니와 작가 할머니를 대비하고 그 집과 작가 옛집을 떠올리며, 자연에 터 잡고 사는 삶이 온전하게 견뎌내지 못하는 도시적 폭력을 전한다. 작가가 관심을 두고 말하고자 하는 건, 땅과 식물의 생명은 인간의 온정과 연결되는데, 그것을 지켜내지 못하는 우리네 팍팍한 콘크리트적 삶에 대한 마지못한 피동적 행태를 반성케 한다.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도 그걸 피하지 못하고 용인할 밖에 없는 현대인 삶, 작가의 따스한 시각은 수채화 풍경을 보는 듯 정적이다. 행위적 실천은 보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런 방식의 문제 제기는 마음에 담지 않는다. 결코 목소리를 높이거나 날을 세우지 않고 지켜보는 안타까움과 동정의 마음만 드러낸다. 개발 논리에 밀려나는 지연 친화적 삶을 지켜보면서 애달파할 따름이다. 마음이 끌리는 대로 놓아둘 뿐 허세를 부리거나 언뜻 해결의 발언을 삼간다. 다만 그 외딴집 할머니와 조금 더 많이 친교를 쌓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할 뿐이다. 독자에게 속마음을 그대로 펼치고 만다. 허나 아쉽게 보는 대목은 지나치게 서정 지향이어서 한편으론 외딴집 할머니 삶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작가에게 또는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모호하고 때론 헷갈린다. 흐릿한 작가의 태도를 감싸는 것은 화려하고 섬세하며 신선한 문장의 빛나는 언어들이다. 그녀의 문장은 참신한 비유가 넘치고 방금 바다에서 뛰어올라온 듯 생생한 언어로 빚어낸 제반 인식의 경쾌한 이미지가 펄떡이게 만든다. 회귀적 원형圓形의 서정 이미지와 진행적 직선의 서사 스토리는 잘 어울리지 못하고, 공들인 화장이 들뜬 여인의 얼굴을 보는 듯 안쓰럽다. 뛰어난 화장술과 값비싼 장신구만으로 진정한 미녀는 될 수 없다. 바탕의 원질이 미흡한데 포장의 완벽함으로 다 덮을 순 없기 마련이다. 마술적 언어에 취해 있다 어느 순간 깨어나면 허전한 법이다. 입술에 달라붙는 달콤함이 언제나 우리를 맛나게 하진 않는다. 주제를 앞서는 문장보다, 문장을 넘어서는 주제가 수필에 더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수필을 주제의 문학이라 불리는 까닭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수필은 가면서 이것저것 길가의 아름다운 꽃에 한눈팔며 심부름 가는 서정적 완보緩步라기 보다 주제라는 목적지로 거의 직진하는 서사적 산보散步에 더욱 가깝다는 걸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5. 수필은 타 장르의 문학처럼 작가가 쓰고 싶어 쓰는 글이다. 어느 문학이든 작가가 더욱 중요하다는 말이다. 작가가 있어야 독자도 있을 수 있는 일이니 맞는 말이겠다. 그렇다고 필지만이 강조되는 표현론적 문학론만 있는 게 아니다. 독자는 작가 주변으로 밀려나도 괜찮은 것은 아니기에 효용론적 수용 문학론도 역시 한 자리를 차지한다. 수필 역시 필자가 중심이 되고 앞장서는 문학임은 옳으나 독자도 문학 소통에선 필수불가결한 존재임을 고려하자는 말이다. ‘너’가 없는 ‘나’는 존재할 순 있지만, 바람직한 건 아니다. 그러므로 독자를 염두에 둔 수필 쓰기가 당연히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며, 앞에서 여러 작품을 읽으며 어떻게 독자를 대해야 하는지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부언한다면 독자에게 품격을 갖추어 그들을 배려하라고 요약할 수 있다. 상대방에게 예의를 갖추어 대하면, 상대도 나에게 동등한 방식으로 답한다. 속담에도 있듯,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것이다. 수필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걸 명심하고 글을 쓰고 발표한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첫댓글 교수님의 글을 읽으며 항상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이번 '수필의 독자'를 통해서도 수필의
서정성..또 다른 문학과의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또한 수필가로서 가져야 할 자세와 독자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도 따금하게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소슬한 바람에 찬 기운이 몰려드는 깊어가는 가을, 카페에 올려주신 깊이 있고 좋은 두편의 교수님의 또 다른 수필을 읽으며 따뜻해짐을 느낍니다. 항상 건강하세요.
의미를 새기며 읽었습니다.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