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이니 20대 후반 시절......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있었지만
이상을 먹고 살 수도 있다고 우기던 떡거머리 시절에 ....기우는 젊음을 불안하게여기며 금산을 딱 한번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내 동생(지금 직업은 만화가)이 진악산에 텐트를 치고 한 달째 건달 노숙중이었는데 위로 방문을 한 셈이다. '인삼아가씨대회'에도 출마했던 여자 후배가 마중을 나왔는데 절반을 자른 청바지 차림이었다.
'안녕하세요'
고개를 숙이는 그미의 밀짚모자가 훌러덩 떨어지면서 남실대는 생머리가 바닥에 쏟아졌다.
당구나 고스톱, 바둑이나 테니스, 영화구경까지 뭐 하나 할 줄 몰랐던 나는 (혹은 물라야 한다고 우기던) .......당연히 진악산 가는 길목의 주막에 들어갔고 취했고 토했던 것 같다. 여자는 호호호 웃다가 나중에는 조금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술떡으로 다시 대전행 직행을 탔던 것 같다.
그 금산을 30년만에 방문했다. 알싸하리라..예상했지만 .....예상보다 작았다.
소도시였는데 도로의 폭이 좁았고 커피숍을 찾을 수 없었다. 다방 이름이 '샴푸'니 '앵두'니 야리꾸리해서 들어가기가 거시기했다. (게다가 모두 지하였고 계단에서 퀘퀘한 냄새가 났다.) 순대국집에 들러서 한 그릇 뚝딱 비우고 냉수도 한 사발....그래도 시간이 남아 시장을 돌았다. 우리들의 어머니 같은 여자들이 풋밤콩이나 사과 몇 알을 놓고 소꿉장난 같은 좌판을 벌이다가.
'귤 좀 사유. 밤콩두 았다닝꼐유.'
잡은 가랑이를 놓지 않아서..... '울컥' 올라왔지만 물건을 살 수는 없었다. (승용차가 없어서 가지고 다닐 수가 없다. 지고 다니는 배낭은 이미 꽉 찬 상태였고). 참으로 미안한 마음으로 그 흑백사진 풍경을 오래도록 오래도록 가슴에 쟁여두었다.
소녀들은 초로의 사내를 낯설지 않게 받아들였고 가끔 손을 번쩍 들고 질문도 했다.
"선생님은 스트레스가 쌓이면 어떻게 푸시나요?"
"필름이 끊길 때까지 술을 마십니다."
"아니, 사춘기 때를 묻는 겁니다."
"문고리 잠그고 거울 보며 훌쩍훌쩍 울었어요."
"사귀는 여자는 있었나요?"
"짝사랑만 했습니다. 지금 다시 세월의 바퀴를 돌릴 수 있다면.... 스물세 살로 돌아가 스물한 살 여자와 사겨보고 싶어요. 솜사탕도 사주고 땅콩도 사주고......깨진 가로등 아래는.....부끄러운 표정으로 지나칠 거예요."
다시 금산터미널에서 동대전 터미널까지 70분(차가 많이 밀렸음) 동대전에서 공주까지 50분....창 밖으로
썩은새 같은 어둠이 밀려왔다. 배가 고파서 터미널 편의점에서 산 단팥빵을 먹으니 옛 추억이 콩당콩당 가슴을 때렸다. 아주 가끔이지만 풀빵이나 호떡을 사먹으면 앙꼬나 설탕물이 아까워서 자중에 먹기 위해 밀가루부터 쬐끔씩 떼어먹었다.
그 흑백사진들은 왜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붙어있을까.
반바지 아래 하얀 맨살로 고등어처럼 물 좋은 비늘이 뚝뚝 떨어지던 그미들도 이제 초로의 주름이 채워졌으리라. 그때 터미널 바닥에 주르르 흘러내리던 머리카락은 어디로 사라지고 채소좌판 누이들만 오그르르 모여있을까. 떄로는 칼러 텔레비전 그런 알싸한 필름들로 변신해 가슴을 서늘하게 비벼주었다. 마찬가지다. 동창생들도 날마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생애의 가장 젊은 날이야.'
바둥대며 시계추를 잡고 있겠지. 며느리나 사위를 보면서 (의자의 주인이 바뀌는 걸 망각한 채) 흐믓한 미소나 짓고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사실은 우리끼리 모여야 하는데.......아직은 모든 게 마뜩지 않다.
배추뿌리 뽑아낸 자리마다 억새꽃만 허옇게 흩날리는 초겨울에
강병철 드림
벗들 잘 지내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