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 제32권 : 경상도(慶尙道) 웅천현(熊川縣)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2권 : 경상도(慶尙道) 웅천현(熊川縣)
동쪽으로 김해부(金海府) 경계까지 15리이고, 남쪽으로 제포(薺浦)까지 2리이며, 서쪽으로 창원부(昌原府) 경계까지 25리이고, 북쪽으로 김해부 경계까지 15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9백 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웅지현(熊只縣)이다. 경덕왕(景德王)이 웅신(熊神)이라 고쳐서, 의안군(義安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현종(顯宗)은 금주(金州)에 예속시켰다. 본조 세종조(世宗祖)에서 구자(口子)를 설치하여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었는데, 문종조(文宗朝)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현감(縣監)을 두었다.
【관원】 현감ㆍ훈도(訓導) 각 1인.『신증』 금상(今上) 5년에 왜구(倭寇)를 평정하였으므로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곧 사시 현으로 만들었다.
【군명】 웅지(熊只)ㆍ웅구(熊口)ㆍ웅신(熊神)ㆍ병산(屛山)ㆍ웅산(熊山).
【성씨】 본현 서(徐)ㆍ주(朱)ㆍ유(劉), 김(金) 금주(金州).사법(寺法) 제(諸). 천읍(川邑) 공(公). 완포(莞浦) 전(田)ㆍ정(鄭)ㆍ김.
【형승】 천 층 줄지은 멧부리와 만 이랑 파도 정사(鄭賜)의 시에, “천 층 줄지은 멧부리는 3면을 둘렀고, 만 이랑 파도는 한편에 넓다.” 하였다.
【산천】 웅산(熊山) 현 북쪽 5리 지점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병산(屛山)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으며 북쪽으로 웅산과 이어졌다. 고방산(庫房山) 현 서쪽 6리 지점에 있다. 장복산(長福山)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고산(高山) 완포현(莞浦縣) 북쪽 5리 지점에 있으니, 본현(本縣)과의 거리는 45리이다. 사현(私峴) 현(縣) 서북쪽 30리 지점인 창원부 경계에 있다. 율천현(栗川峴) 현(縣) 동쪽 15리 지점에 있다. 수락암(水落巖) 천읍부곡(川邑部曲) 동쪽에 있으며 본현(本縣)과의 거리는 13리이다. 율천현(栗川縣) 산의 남쪽 시냇물이 산허리 바윗돌 사이에 흘러들어서 수십 장(丈) 폭포가 되며, 세 가닥으로 갈라져 수직으로 내린다. 그 지방 사람들은, “전라도가 가물려면 서쪽 물줄기가 마르고, 경상도가 가물려면 동쪽 물줄기가 마르며, 충청도가 가물려면 복판 물줄기가 흐르지 않는다.” 하여, 이것으로 올해의 홍수와 가뭄 여부를 점쳤다. 바다 현 남쪽에 있다. 백산도(白山島)ㆍ흑산도(黑山島) 모두 현 동쪽에 있으며 물길로 20리인데, 두 섬 사이는 1리이다. 가덕도(加德島) 현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 둘레는 75리이며 목장이 있다. ○ 정이오(鄭以吾)의 시에, “한식(寒食) 시절 옛 나루터에, 어지러운 물결과 질펀한 숲이 사람을 시름겹게 하네. 백 년 남은 성 여기인데 사람은 어디 갔나. 지난 일 알 길 없어 백구(白鷗)에게 묻노라.” 하였다. 감물도(甘勿島) 염소를 기르는 목장이 있다. 사의도(蓑衣島)ㆍ대죽도(大竹島)ㆍ소죽도(小竹島) 모두 현 서쪽 바다 가운데 있다. 이슬도(里瑟島)ㆍ벌도(伐島)ㆍ우음지도(亏音之島) 모두 현 서쪽에 있다. 송도(松島)ㆍ연도(椽島)ㆍ수도(水島) 모두 현 남쪽에 있다. 만산도(滿山島)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초리도(草里島) 제포(薺浦) 바다 가운데에 있다. 물길로 13리이니, 곧 거제현(巨濟縣) 경계이다. 부곡포(釜谷浦)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웅포(熊浦) 현 남쪽 2리 지점에 있다. 덕산포(德山浦) 현 서쪽 16리 지점에 있다. 양곡포(梁谷浦) 현 서쪽 55리 지점에 있다. 제포(薺浦) 현 남쪽 5리 지점에 있으며 늘 거주하고 있는 왜호(倭戶)가 있다. 주포(主浦) 현 동쪽 30리 지점에 있으며 김해부(金海府) 경계이다.『신증』 부인산(夫人山) 현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날씨가 가물면 비가 내리기를 기원한다.
【토산】 대구[大口魚]ㆍ청어ㆍ전어ㆍ홍어ㆍ문어ㆍ전복[鰒]ㆍ오징어[烏賊魚]ㆍ조개[石首魚]ㆍ굴[石花]ㆍ소금ㆍ미역ㆍ표고[香蕈]ㆍ오사(烏蛇)ㆍ산무애뱀[白花蛇]ㆍ석류ㆍ유자ㆍ대ㆍ해삼ㆍ실미역ㆍ세모(細毛).
『신증』 낙지[絡締]ㆍ조기ㆍ숭어[秀魚]ㆍ농어[鱸魚]ㆍ모래무지[鯊魚]ㆍ담채.
【성곽】 읍성(邑城) 석축(石築)이다. 둘레는 3천 5백 14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성안에 우물 둘이 있다.
【관방】 제포진(薺浦鎭) 우도 수군첨절제사영(右道水軍僉節制使營)이 있다.
관할하는 곳은 안골포(安骨浦)ㆍ사량(蛇梁)ㆍ당포(唐浦)ㆍ영등포(永登浦)ㆍ옥포(玉浦)ㆍ조라포(助羅浦)ㆍ평산포(平山浦)ㆍ적량(赤梁)이다. 석성(石城)이 있는데 둘레는 4천 3백 13척이며 성안에 우물 둘이 있다.
○ 첨절제사 1명이다. 안골포 영(安骨浦營) 현(縣)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석성이며, 둘레는 1천 7백 14척이고 높이는 10척이다. 성안에 시내 하나, 우물 하나가 있다. ○ 수군 만호 1명이다.
【봉수】 가덕도 봉수(加德島烽燧) 동쪽으로 김해부(金海府) 성화례산(省火禮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사화랑산(沙火郞山)에 응한다. 사화랑산 봉수 현 남쪽 6리 지점에 있다. 동쪽으로 가덕도에 응하고, 서쪽으로 창원부(昌原府) 여음포(余音浦) 및 본현(本縣) 장복산(長福山)에 응한다. 장복산 봉수(長福山烽燧) 동쪽으로 사화랑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고산(高山)에 응한다. 고산 봉수 동쪽으로 장복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같은 여음포에 응하며, 서쪽으로 같은 부(府) 성황산(城隍山)에 응한다.
『신증』 성산(城山) 봉수(烽燧) 정덕(正德) 병인년에 가덕도 봉수를 여기에다 옮겼다.
『신증』 【궁실】 왜관(倭館) 제포 남문 밖에 있으니, 왜국 사신을 접대하는 곳이다. 정덕 경오년에 왜구를 평정하고 관을 폐쇄하고 사절(謝絶)하였다. 이전에 대마도(對馬島) 왜놈이 국내에 옮겨와 살기를 청하여 관 앞 바닷가에 살게 하였는데, 점차 불어나서 오백 호(戶)가 넘었다. 부산포(釜山浦)에 살던 왜가 진장(鎭將)이 돌봐주지 않는다고 분하게 여겨서 제포 왜놈과 난리를 일으키기로 모의하였다. 현성(縣城)을 습격하여 함락시켜서 거의 다 도륙하고 불태우니, 우리 조정에서 방어사(防禦使) 유담년(柳聃年)과 황형(黃衡)을 보내어 길을 나눠 토벌하고 평정하여 왜놈들의 소굴을 태운 다음, 다시는 거류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 뒤에 왜놈이 정성을 다해서 항복하고 조빙(朝聘)하기를 청하니, 다시 관을 설치하였다.
【누정】 진동루(鎭東樓)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 현감 양찬(梁瓚)이 지었다.『신증』 식파루(息波樓) 곧 성 남쪽 문루(門樓)이다. 회원루(懷遠樓)ㆍ수항루(受降樓)ㆍ조종각(朝宗閣) 모두 제포(薺浦)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역원】 보평역(報平驛) 현 서문 밖에 있다. 낙수원(落水院) 현 동쪽 11리 지점에 있다. 혜제원(惠濟院) 현 서쪽 20리 지점에 있다. 팔현원(八峴院) 현 서쪽 7리 지점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현 북쪽 1리 지점에 있다. 여단(厲壇) 현 북쪽에 있다.
『신증』 웅산신당(熊山神堂) 산 꼭대기에 있다. 그 지방 사람이 매년 4월과 10월에 신을 맞이하여 산에서 내려와서 반드시 쇠북과 북을 치며 여러 가지 놀이를 벌이는데, 멀고 가까운 곳의 사람들이 앞다투어 와서 제사한다.
【고적】 완포폐현(莞浦廢縣) 현 서쪽 30리 지점에 있다. 본래 합포현(合浦縣) 완포향(莞浦鄕)인데 고려에서 현으로 승격하여 전주(全州)에 예속시켰고, 본조(本朝) 문종(文宗) 때에 본현에 내속(來屬)시켰다. 석성(石城)이 있으니, 둘레가 4천 1백 72척이고 높이는 15척이다. 성안에 시내 하나, 샘 둘이 있다. 사법부곡(寺法部曲)ㆍ천읍부곡(川邑部曲) 현 동쪽 10리 지점에 있다. 고산성(高山城) 석축(石築)이며 둘레가 4천 1백 71척이다.
『신증』 【명환】 본조 권승(權勝) 청렴하고 검소하게 정사를 하여, 백성의 재물은 추호도 침범하지 않았다.
【제영】 만리풍도제포변(萬里風濤薺浦邊) 강맹경(姜孟卿)의 시에, “오경(五更) 북소리는 웅성(熊城) 위이고, 만리 풍도(風濤)는 제포 가로다. 지금의 왕화(王化)를 알고자 하여, 두어 곡조 고기잡이 피리 소리 들으며 누선(樓船)에 기대었네.” 하였다. 태평강새한조두(大平彊塞閑刁斗) 이파(李坡)의 시에, 겹겹이 높은 산은 푸름이 끝없고, 아득한 큰 바다는 넓어서 가이 없다. 변방이 태평하니 조두(刁斗 순행 도는 딱다기)가 한가하고, 풍파가 고요하니 달빛이 배에 드네.” 하였다. 해일여반출효천(海日如盤出曉天) 김계창(金季昌)의 시에, “부상(扶桑 동방)의 사신 선위(宣尉)하는 자리에, 임의 은혜는 간 곳마다 기쁘구나. 섬 오랑캐도 마음을 고쳐 관호(官戶)에 편입되고, 바다에서 돋는 해 쟁반 같아 새벽 하늘에 나오는구나. 조두(刁斗)는 딱딱 옛 성첩을 돌고, 깃발은 펄럭펄럭 변방에 빛나네. 장군 장막 밖에 별일 없으니, 봉화도 편안함을 보고하고 달빛만 배에 가득하네.” 하였다. 한기공언여장변(漢旗空偃女牆邊) 이형원(李亨元)의 시에, “주(周) 나라 예법을 매번 융막(戎幕) 속에서 들었고, 한(漢) 나라 깃발을 성가퀴 곁에 눕혔네. 우리 백성은 안도하며 도무지 일 없으니, 다시금 낚싯대 잡고 고깃배에 오른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읍내(邑內) 끝이 7리이다. 동면(東面)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중면(中面) 북쪽으로 처음은 12리, 끝이 20리이다. 상서(上西) 처음이 2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하서(下西) 서북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 천읍부곡(川邑部曲)은 동으로 10리이다. 사법부곡(寺法部曲).
【성지】 완포고현성(莞浦古縣城) 둘레가 4천 1백 72척이다. 샘이 하나 시내가 하나 있다. 고성(古城) 고산(高山에 있는데 완포(莞浦) 고현(古縣)과 북으로 5리 거리이다. 둘레는 4천 1백 72척이다. 웅포성(熊浦城) 왜인이 새로 쌓았다.
【진보】 가덕도진(嘉德島鎭) 섬 가운데 수로(水路)가 30리이며 중종 30년에 진을 세웠는데 암석이 우뚝우뚝 서 있어 배가 정박할 수 없었다. 선조 임진년 후에는 안골성(安骨城)으로 옮겼다가 효종 7년에는 옛터로 다시 옮겼다. ○ 수군첨절제사가 한 사람이다. 천성포진(天城浦鎭) 가덕도(加德島) 가운데 있는데 가덕진의 남으로 10리에 있다. 중종 29년에 진을 설치하고 선조 임진년 후에는 안골성으로 옮겼고 효종 7년에는 옛터로 다시 옮겼다. 수군만호가 한 사람이다.
안골포진(安骨浦鎭) 동으로 30리에 있는데 성의 둘레가 1천 7백 14척이고 우물이 하나 있다. ○ 수군 만호가 한 사람이다. 제포진(薺浦鎭) 남으로 5리에 있는데 성의 둘레는 4천 13척이고 우물 둘이 있다. 회원루(懷遠樓)의 옛터가 있으며 첨사(僉使)가 있다. 선조 임진년 후에는 안골성으로 옮겼다가 인조 3년에는 옛터로 다시 옮겼다. ○ 수군 만호가 한 사람이다. 신문보(新門堡) 남으로 30리에 있다. ○ 수군별장이 한 사람이다. 청천보(晴川堡) 동으로 20리에 있다. ○ 수군별장이 한 사람이다. 풍덕포보(豐德浦堡) 서북으로 40리에 있으며 진에는 별장(別將)을 두었는데 영종 27년에 없앴다.
【창고】 읍창(邑倉)ㆍ서창(西倉) 서북쪽으로 45리에 있다. 진창(鎭倉)이 여섯이다.
【토산】 감ㆍ비자ㆍ김ㆍ홍합(紅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