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장 (신경림)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이발소 앞에 서서 참외를 깎고
목로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키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들
호남의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
약장사 기타 소리에 발장단을 치다 보면
왜 이렇게 자꾸만 서울이 그리워지나
어디를 들어가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학교 마당에들 모여 소주에 오징어를 찢다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물어
고무신 한 켤레 또는 조기 한 마리 들고
달이 환한 마찻길을 절뚝이는 파장
- 창작과 비평 가을호(1970)
핵심 정리
성격 : 서정적. 사실적. 비판적. 향토적,
표현 : 묘사적. 비속어의 직설적 표현. 4음보 중심의 경쾌하고 투박한 리듬,
제재 : 황폐화되어 가는 농촌 현실. 파장(罷場)
구성 :
1-4행: 농민들의 공동체적 삶에 대한 애정, 5-10행: 농민들이 겪는 현실적 어려움에 대한 탄식
11-13행 파장 이후의 귀갓길 묘사
주제 : 황폐화되어 가는 농촌 현실을 살아가는 농민들의 애환과 인고(忍苦)의 생활 모습
이해와 감상
장터는 농민들이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겨'운 곳이며, 그들이 농사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거나 세상사에 대해 벌이는 열띤 토론의 장이다. 이 시는 파장시 농민들이 나누는 대화를 통하여 그들의 애환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장터에서 만난 서민들의 모습을 시간의 경과에 따라 압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향토적인 정취를 서정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연 구분이 없는 자유시이지만, 화자의 태도를 기준으로 보면 크게 3단락으로 나누어진다.
1단락은 1~4행으로 농민들이 그들의 공동체적 삶에 대해 갖는 애정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참외를 깎'아 함께 나누어 먹거나,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들이키'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모두들 한결같이 친구 같은 얼굴'이 되는 그들에게서 피붙이보다 더 진한 인간애를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1행의 '못난 놈들'은 자기 비하적 표현이 아니라, 친근감에서 우러난 동류애의 표현이다.
2단락은 5~9행으로 농민들이 겪고 있는 현실의 어려움을 표출하고 있는 부분이다.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나누던 그들의 대화가 차츰 '가뭄 얘기 조합 빚 얘기'의 현실적 문제로 바뀜에 따라 상경(上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화자의 모습에서 이농(離農)의 심각성을 유추할 수 있다. 뒤숭숭해진 마음에 일찍 귀가하기 싫어진 화자는 '섰다라도 벌일까
주머니를 털어 색시집에라도 갈까' 망설이며 농촌 현실에 대한 강한 불만과 자신의 삶에 대한 아픔을 드러낸다.
3단락은 10~13행으로 현실을 수용하고 그 아픔을 감내하고자 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 주는 부분이다. 화자는 '소주에 오징어를 찢'으며, 현실을 도피하고 싶었던 유혹들을 물리치고, '어느새 긴 여름 해도 저문' 밤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간다. 귀가 도중, 화자의 앞길을 비춰 주는 달빛은 그의 밝은 내일을 암시하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점점 황폐화되어 가는 농촌의 현실을 바라보는 화자의 비판적 심경이 '절뚝이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 양승준 외 <한국 현대시 400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