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품고 사랑이 부르는 대로 따라가라
당시 내가 얼마나 견문이 얕은 촌놈이었던가를 실토하리다.
기차를 타고 놀라다니 말이 돼! 국민학교 6학년 때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면서 처음으로 탄 기차가 얼마나 나를 놀래키던지. 여행을 다녀와서 교실에 앉았어도 교실이 어디론지 움직이는 거 같아서 멀미가 나더라니까. (어이구 촌놈아! 기차를 그때 처음으로 탔다고. 놀랠 노짜다. 니네 집이 자전거 바차놓고 삼십리는 걸어가야하는감?) 하지만 우얍니꺼. 우리가 살던 소도시에 버젓이 기차역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기차여행을 해 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외가를 가거나 시골에 가는 건 버스로 또는 걸어서 다녔으니까. 하필이면 외가와 친가쪽 친척들이 살던 시골은 기차 길하고 상관없는 곳이라서 그랬지만, 그래도 그건 너무했다 그지요?
어라~ 바닷물이 소금물이네! 또 하나, 경주 수학여행 때 포항까지 갔거든. 포항 부두에 가서야 바닷물이 소금물처럼 짜다는 걸 알고서는 얼마나 놀랬던지....(넌 학교에서 공부도 안 했던가? 하고 야단치지 마.) 교과서에 바닷물이 짜다고 나온 건 '순 구라'라고 알아들었거든. 어떻게 물이 짤리가 있을까. 주구장창 헤엄치던 낙동강이 맹물인데 바다가 소금물이라니 말이 되냐고? 그 넓은 바다물을 어찌 소금을 풀어서 감당할까 싶었지. 동화에 나오는 소금이 나오는 멧돌이 바다에 빠지면서 바닷물이 소금물이 됐다는 이야기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어. 거짓말도 이쁘게 한다고 믿질 않았어. 내 고집이 황소 고집인지라. 어릴 때는 여행을 다니게 해서 견문을 넓혀주는게 얼마나 좋은 교육인지 몰라. 내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닐 때 벌써 유럽 여행을 시켜줬으니 아마 그때 포한이 맺혀서 그랬지뭐.
라디오는 언감생심, 무지막지한 촌놈이었다니까 내가. 밤만 되면 시장통 아이들과 어울려 온갖 못된 짓은 다하며 싸돌아다닌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네. 당시 밤이 되면 전기불이 심심찮게 나갔다. 정전이 일상이라 남포(램프)불은 반드시 준비해둬야 했어. 호롱불을 킬 정도로 촌놈은 아니었지만. 전기는 비상선과 일반선이 있었는데 높은 양반들과 빽 있는 사람들 차지고 일반선은 왜 그리 자주 나가든지. 하기사 공부하다가 말고 전기가 나가면 그냥 자버리기 딱 좋았지 뭐. 숙제도 어떡할 거야. 전기가 나갔다는데.....가끔씩은 남포, 램프 유리통을 꺼내서 닦아줘야 했지. 시커멓게 그을린 유리를 닦아줘야 환해지거든. 아마 이문열씨 "젊은날의 초상"인가 하는 글에 시골 색시집에서 상머슴하던 게 나오지. 밤이 오기 전에 맨 먼저 방마다 군불을 때서 따습게 하고 남포를 꺼내서 일일이 유리를 닦아주던 게 머슴의 일상이었다고 했다.
내가 중학교에 가서였지. 라디오조차 없던 우리 집에 전축이 들어온 거야. 미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전축이 내게 끼친 영향은 가히 메가톤급 폭탄이었지. 시장통에서 하던 책방이 시원찮아서 관두고 일제시대 순사부장 사택었던 기와집으로 이사를 간 거야. 일본식 집이었는데 해방후 한국식으로 고친 거지만 황송했다. 그 집에 맙소사 현관이 있었다니까. 현관하니 우습지만 현관은 무슨 양옥이나 일본식 집에나 있을 법했지 우리 집에 현관이라니. 현관을 들어서면 사랑방이 나오고 마당으로 큼직한 창이 나와 있는 신식 집이었어. 거기에 화분 같은 걸 놓을 수 있는 두어 뼘의 공간이 있었거든. 제라늄 화분을 들여놓았지. 화분이라고? 그래 요즈음 흔해 빠진 화분이지만 그때 화분조차 가정집에 가당키나했을까? 사람들이 우리집을 지나가면서 누가 저렇게 좋은 집에 살까 하고 부러워했지. 어느날인가 무작정 집을 나온 시골처녀가 우리 집이 좋아보였던지 식모로 써달라고 찾아온 적이 있다니까. 하루밤 재워 보냈지만 못살던 시절 입 하나라도 덜려고 집을 나온 그 처녀가 안돼 보였다.
전축을 들여놓았던 초여름, 그날이 생생해. 노래가 구성지게 흘러나오는 전축을 대면하고는 넋을 잃었다는 표현이 맞을 게야. 놀라지 마! 안방 벽에 턱 붙여 놓은 전축을 몰래 끙끙대며 옆으로 살짝 옮겨놓고는 베니다판으로 가려진 그 뒷편을 들여다 보았거든. 쪼끄만 사람이 들어앉아서 말을 하는 줄 알았다니까. 진짜야, 지금 이 나이에 거짓말을 할 건 뭐야. 중학교 2학년생이. 학교에서는 물상이라는 과학도 배우는 학생이 라디오 안에 사람이 들어 앉아 있을거라는 상상을 하다니. 왜 그래 내 물상 성적은 최우수였다고. 당시 집집마다 엠프라고 손바닥만한 스피커를 전기줄로 달아서 마루 기둥에 걸어놓았거든. 다이얼도 없고 맨날천날 케이비에쓰 중앙방송만 나오는 유선 방송이지. 그것만해도 대단한 호사였는데 우리집에는 단박에 전축을 들여놓은거야.
당시 제일 인기가 있었던 프로는 점심시간이 끝나는 1시 5분인가 10분 전에 하는 김삿갓 북한 방랑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금새 엄마랑 할머니는 연속극(라디오)에 빠져들고 난 레코드 판을 뒤적거렸지. 블루라이트 요꼬하마라고 가사가 나오는 곡이었지. 아~ 노래 끝에 '미나또 마찌 주 삼반지'라고 불렀어. 포마드를 잔뜩 쳐바른 샐샐 눈웃음 치는 일본 남자 가수가 표지에 나온 판이었어. 일본판이었지뭐. 대단한 히트를 친 걸로 기억나는데, 70년대에 술집에서 한때 블루라이트 요꼬하마가 유행을 했었지. 이게 에쓰피 판이었을거야. 포터블에 얹힌 체 돌아가는 걸 보면 눈이 돌아갈지경으로 회전수가 엄청 빨랐지. 엘피판은 1분에 33 1/3 회전하는데 에쓰비 판은 78회던가 두 배로 빨랐어. 엘피는 롱플레이, 에쓰피는 숏플레이라는 뜻이었을거야.
土耳其 행진곡이라고 아시는감? 쇼팽의 이별곡,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 트로이메라이, 홈스위트 홈하고 소녀의 기도와 엘리제를 위하여....뒷면에는 쌍두의 독수리, 콰이강 마치, 오케이 목장의 결투와 하이눈 같은 서부영화의 주제곡도 있었는 걸로 기억이 나. 불루라이트 요꼬하마 같은 일본판은 아버지 취향이었고 아이들 생각해서 클라씩 판도 하나 사오신게지 아버지가. 생전 처음으로 내 꺼가 된 레코드판 표지에 한자로 쓴 '土耳其 행진곡'이 바로 터키행진곡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지. 바로 이 토이기 엘피판이 촌놈이 만난 클라씩하고 첫날이었어. 물론 콰이강 마치 같은 미국영화 주제곡 같은 서양 팝과의 만남도 어찌 잊을손가. 내가 전축 앞에 앉아서 라디오 연속극을 듣는 것도, 레코드 판을 걸고 음악에 취한 것도 내게는 예사일이 아니었어. 눈은 전축 뒷편에 가 있었고 이따금 전축 안을 들여다보고 그안에 있을 난장이 아저씨를 그예 만나고말리라는 결심도 하곤 했어. 아무래도 나는 과학자 체질이 아닌가 봐. 당시 우리 전축은 진공관이었거든. 주황색 불빛이 삐져나오는 진공관이 접속이 시원찮았을거야. 소리가 나오지 않으면 손을 뒤로 넣어서 브라운관을 잡아줘야했어. 뜨거운 브라운관을 잡고서도 난 음악을 들었어야했어.
나중에 내 친구들이 직장에 취직하면 첫 번째 타는 월급은 대게 카세트를 사겠다 했어. 나도 소니 카세트를 샀지, 모노로. 친구가 산 소니가 참 마음에 들더라고. 우리나라 스테레오보다 훨 소리가 낫더라고. 명동에 근무할 때는 충무로 음향기기를 파는 곳을 자주 찾았지. 당시에는 충무로가 음향기기 상점(소리사)이 제일 많았을거야. 나중에 청계천이 좋았겠지만 그땐 그랬어. 죄송스럽지만 돈 아낀다고 테이프를 사지 않았어. 내가 듣고싶은 곡을 써서 소리사에 가지고 가면 그걸 일일이 뽑아서 공테이프에 담아 줬거든. 얼마나 좋아, 내가 듣고싶은 곡만 들을 수 있었으니까.
촌놈 출세기를 들어볼래. 브리티시 사운드라고 들어봤는감? 클래식 메니아들은 영국제 스피커를 갖춰야 최고로 쳐줬기에. 엠프는 마란츠에다 스피커는 나도 영제 '미션'으로 그예 샀어. 나도 브리티시 사운드 대열에 낀 거야. 본격적으로 사운드 시스템을 갖추면서 마음에 뒀던 것은 메켄토시였어. 무슨 전기기기 계기판 같이 생겨먹은 엠프가 푸르스름한 불빛이 흘러나오는게 흡사 철 지난 구닥다리 물건 같았어. 그게 바로 메켄토시였어, 지금도 메켄토시는 그래. 진공관 시스템이라서 시대에 떨어졌느니 해도 난 마음이 끌렸어. 전원 스위치를 넣어도 조금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소리가 나오지. 진공관은 트랜지스터 앞에 나온 거로 지금도 고급 뮤직 시스템은 으례 진공관이거든. 그리고 아날로그라 소리가 따스해. 가을에 진공관 시스템으로 음악을 들어봐. 가을의 쓸쓸함이 뚝뚝 묻어날거야. 그래 진공관에는 애린 가을의 서정과 곧이어 닥쳐올 겨울, 벽난로의 따스함이 어우러진 기가 막힌 음악의 조화로 그대를 이끌어 줄 게야. 친구들은 마크레빈슨 같은 디지털로 뽑아도 난 진공관에 눈길이 가더라고.
벼르던 어느날 그예 용산 전자상가에 갔어. 메켄토시를 사러갔다가 맙소사 골드문트를 본 거야. 메이드 인 스위스. 기가 막혔어. 깔끔한 스위스 타입의 황금빛 기기가 내 혼을 빼놓았어. 헤르만 헷세하고 전혀 관련이 없지만 기기 이름도 멋지잖아. 청음실에서 들어보니 그저그만이더라고. 그런데 가격이 장난이 아니데. 돈이 모자라서 돌아섰는데 그게 오디오하고 마지막이었어. 내가 낙마를 했거든. 아이엠에프가 내 전축 사는 걸 훼방놓을려고 온 게 아니겠지만 최고급 오디오 시스템을 들여놓으려던 평생의 꿈은 물거품이 된거지뭐.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골드문트는 때려치우고 메켄토시라도 살 걸 그랬어. 허영이 하늘을 찔렀어. 또 내 친구들도 그랬어. 생활은 검소했지만 취미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 메니아 기질이 다분했거든. 당시, 이야기의 시작하던 때말고 내가 직장 생활 들어가던 시절이야. 우리나라에도 천우사에서 만들던 별표 하고 독수리표 전축이 나오다가 마침내 인켈이라는 본격적인 사운드 시스템이 나왔거든. 동원산업이라는 회사에서. 한세트로 된 전축이 엠프랑 튜너랑 각각 떨어져서 취향에 따라 기기를 사서 조합해서 들을 수 있게 말이야. 며칠 전, 인터넷으로 검색해봤더니 메켄토시 엠프가 현재 시가로 3천만원대고 마크는 1억이 넘는데. 골드문트는, 관두지뭐. 억억을 몇번 해야할까? 고가의 기기는 중국의 벼락 부자들이 명품 사재기 때문에 값이 다락같이 올라서 그렇대요.
그딴 허영에 뻗힌 이야기 고마 치워뿌라. 야단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해. 요즈음 철이 들었지. 방에 모셔놓은 조그마한 카세트에 빠졌거든. 하루 일과가 끝나면 책상 앞에 앉아서 라디오를 들어. 93.1 케이비에쓰 에프엠이 고정이야. 저녁 8시 즈음이면 씨디를 듣지. 그날 따라 듣고싶은 걸 골라서. 내 방에 씨디가 몇장이나 될까? 한 100장에 가깝지 않을까. 집에서 가져온 게 기껏 일이십 장 넘지 않을 거니 여기서 장만한 게 칠, 팔십 장이 돼네 그려. 지난 겨울은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를 들으며 매서운 추위를 견디어냈다면 여름 무더위는 거쉬인의 포기와 베스에서 썸머 타임을 들으며 넘겼다고 할까. 조용필에다가 세시봉 형님들 찍고서 요즈음은 배호까지. 재즈는 웅산과 나윤선을 좋아하지. 핀랜디아에서 브라더스 훠까지. 포르투갈의 파두에서 쿠바의 Buena Vista Social Club까지 음악의 형식을 총망라해서. 이제는 음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네. 라디오면 어떻고 구닥다리 자동차 카세트 테이프면 어때. 들을 수 있는 귀와 감성만이 날 행복하게 해주는 걸. 하이 오디오 같은 명품만이 우릴 행복하게 해 주는 게 아니라는 거지. 그대가 용서한다면 진공관 라디오는 꼭 탐나는 물건이야. 특히 가을에 이놈으로 음악을 들어봐. 주~겨어줘요~!
다시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세나. 전축 앞에 앉아 있다가 공부 안 한다고 야단 맞기가 일쑤라 생각을 달리했어. 바로 내가 라디오를 산 거야. 무슨 돈이 있어서? 친구들한테 알아낸 정보거든. 자그마한 한 뼘도 안 되는 크기의 로켓 모형의 라디오를 산 거야. 이상도 하지. 하아얀 플라스틱 로켓 삐죽한 꼭대기에는 잡아 당기면 안테나가 나왔어. 로켓에 달린 전기줄이 두 개인데 하나는 끝에는 집게가 있었어. 그걸로 형광등 갓을 집어 놓고 로켓에 달린 또 하나의 줄에 달린 이어폰을 귀에 꽂으면 라디오 소리가 나왔어. 물론 'HLKA' 케이비에쓰 라디오만 들을 수 있었지. 하기사 근사한 일제 라디오래도 그것밖에 들을 수 없었어. 케이비에쓰 중계소가 우리가 살던 도시에 있었으니 다른 상업방송은 어림도 없었지. 고등학교때 처음으로 서울 와서 라디오에서 씨엠송이 나오길래 깜짝 놀랐지. 씨엠송하고 라디오 상품 선전조차 나에겐 달콤했던 걸 어떡허니.
공부한다고 책상에 앉아서 이어폰을 꽂고서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유행가를 듣고 있으니 오죽했을라고 공부가? 난 유혹에 약해서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하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거든. 그래도 시험 점수는 괜찮았어. 오죽하면 날 보고 시험치는 기계라고 했어. 어때, 내 얘기? "나랑 상관 없는 이야기 같은데." 어쩌면 좋아. 하지만 계속할래. "너 같은 촌놈 이야기가 뭔 재미 난다고" 고 하심 섭섭하지. 그냥 내 이야기 들어줘. 짧지 않은 세상살이, 내게 밀어닥친 엄청난 사건을 어떻게 삭혀내고 커왔는지. 한 인간의 성장사, 아니 연대기랄까.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시절이 누군가에도 없었을까! 내 글 기다려 주면 다음에 정모 같은 거 있을 때 커피라도 쏘지 뭐. 국민학교 졸업 때였을거야. 학원사에서 학생년감이라는 아주 두꺼운 책을 냈어. 앞에는 그해 일어난 사건을 찍은 사진화보가 차지했는데 싱가포르라는 나라에 우리나라 사람이 수상이 되었다고 행가레를 치는 거야. 이름이 이광요라고. 거 대단하네 우리나라 사람이 다른 나라에 가서 수상을 하다니. 나중에 알고보니 싱가포르 총리로 리콴유가 당선 된 기사야. 한자로 이광요하고 괄호 안에 한글로 이광요 했더구먼. 그런데 기묘한 것은 과학편이었어. 시대가 발전하면 사람들이 밖에서 멀리 떨어져서 전화기를 들고 통화를 하고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전화기가 나온데요. 그림은 나무에 기댄 여자와 벤취에 앉은 남자가 전화기를 들고 있더라고. 놀고 있네 이건 구라야 했던게 지금 우리가 쓰는 핸드폰이 아닌가? 과학은 엉뚱맞은 상상을 즐기는 공상가의 몫인가?
그렇게 20세기 중반 우리에게 닥친 세상의 변화는 대단했어. 암 대단하고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