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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국으로의 사행은 매년 정월 초하루에 도착할 수 있도록 출발하는 ‘정기 사행’과 중국과 조선의 특별한 행사에 맞춰 파견하는 ‘임시 사행’으로 구분되었다. 이전까지는 한 해에 여러 차례 사행이 이뤄졌지만, 청나라는 이를 모두 통합하여 1년에 한 차례만 사신단을 파견하도록 간소화했다고 한다. 박지원이 참여했던 사행은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 겸 사은사’로서의 임시 사행에 해당하였다. 삼종형이 박명원이 사행단의 정사로 선임되었기에, 박지원은 박명원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약 5개월에 걸친 중국 여향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비록 과거를 일찍 포기하면서 관직에 진출하지는 않았지만, 당대의 유력가문의 구성원이었기에 이러한 기회가 그에게 주어졌다고 하겠다.
<열하일기>의 여정을 집중적으로 번역한 이 책의 하권에서는 한 달이 넘는 기간이 소요되었던 사행길에서 가장 중요한 ‘산해관부터 연경까지’ 11일 동안의 여정을 ‘관내정사’라는 제목으로 가장 앞부분에 수록하고 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번성한 연경을 구경하는 것 자체가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꿈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비록 정식 사신의 신분은 아니지만, 연경을 다녀올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박지원으로서는 그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저작이 바로 <열하일기>이며, 그 내용을 통해 이른바 ‘대명의리’라는 명분에 갇힌 조선의 지식인들의 실상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던 박지원의 관점에서 청나라의 문화 가운데 필요한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자는 ‘북학(北學)’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40여 일에 걸친 여정 끝에 연경에 당도했지만, 정작 청나라의 건륭제는 여름의 무더위를 피해서 북쪽의 열하로 피서를 떠났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하여 황제의 명을 받들고 사행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신단의 일부는 다시 열하까지 가야만 했다. 정사인 박명원의 요청으로 박지원은 열하행에 동참하게 되고, ‘연경에서 열하에 도달하기까지’ 5일 동안의 여정이 ‘막북행정록’이라는 제목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열하에서 머무는 6일 동안 황제를 알현하고 다양한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것이 바로 ‘태학유관록’이다. 그리고 열하를 떠나 연경으로 귀환하는 6일 동안의 과정을 기록한 것이 ‘환연도중록’이라고 하겠다.
이후 연경을 떠나 조선으로 귀환하는 과정은 생략되다시피 했으니, 사실상 <열하일기>의 여정은 여기까지인 셈이다. 여기에 자신이 겪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별도의 제목으로 남겨 첨부했으며, 그 과정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과 들었던 이야기들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중국에서 돌아온 후에 박지원의 글은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읽히게 된다. 그리고 그의 주변에는 소외받았던 이들이 넘쳐나면서, 이른바 ‘연암학파’를 형성할 정도로 사람들과의 교륭에 적극적이었다. 이처럼 적자가 아닌 서얼이라는 이유로, 혹은 당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권력에서 소외되었던 이들과의 사귐조차 박지원은 소중하게 여겼다.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나이 50이 넘어서야 벼슬길에 나설 수 있었지만, 당시 권력자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박지원의 글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그의 정치적 위상이 어떠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고 하겠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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