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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보탑을 줍다
유안진
고개 떨구고 걷다가 多寶塔(다보탑)을 주웠다
국보 제20호를 줍는 횡재를 했다
석존이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땅속에서 솟아나 찬탄했다는 다보탑을
두 발 닿은 여기가 영취산 어디인가
어깨치고 지나가는 행인 중에 석존이 계셨는가
고개를 떨구면 세상은 아무데나 불국정토 되는가
정신 차려 다시 보니 빼알간 구리동전찰
꺾어진 목고개로 주저앉고 싶은 때는
쓸모 있는 듯 별 쓸모없는 10원짜리
그렇게 살아왔다는가 그렇게 살아가라는가.
소리의 거처
천양희
신은 우리에게
세상 소리 잘 들으라고
두 귀를 주었으나 귀꺼풀이란 없다
없으므로 귀는 참으로
많은 소리를 가졌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 생각하자
소리만 생각하자
귀는 그렇게 다짐했던 것인데
다짐도 짐이라서
세상은 잊어서는 안 되는 소리를 낸다
소리는 누구의 무릅쓴 울음일까
울음에서 소리를 훔쳐낸 건 또 누구일까*
소리는 귀로 들어와 마음에 스민다
세상에서 가장 먼 소리는
귀의 뒤편으로 사라지는 머나먼 기적소리
소리는 소리 하나로도 충분해서
쌓인 것 위에 또 쌓여도
탑이 되지 않는다
21세기 재난은 소음이란 말이
오늘은 옳았다
죽어라고 세상이 그립다고 하면
‘네가 좋아하는 세상을 찾아다 줄게’
별을 따다 주겠다는 한 소절에 겹쳐져
그 말 때문에
나는 또 세상에 귀기울인다
귀기울이는 만큼 해도 기울어
사는 게 아우성이냐, 중얼거린다
나에게도 여러 소리가 지나갔던 거다
모든 소리의 거처에는
귀나무가 있어
그 나무도 가끔
귀를 닫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어디서 구급차소리 들린다
구아구아救我救我 사람 살려!
소리쳐 보는 것이다
* 이영광 시에서
오후 4시
강인한
물상
한 컵의 물이 공중에서 엎질러진다.
물은
침묵이 무서워서 저희끼리 꽉 부둥켜안은 채
공처럼 떠 있다.
무서움과 무서움으로 결합된
물의 혼은
허공에서 일순 유리공의 탄성을 지닌다.
해, 저 붉은 얼굴
이영춘
아이 하나 낳고 셋방을 살던 그 때
아침 해는 둥그렇게 떠 오르는데
출근하려고 막 골목길을 돌아 나오는데
뒤에서 야야! 야야!
아버지 목소리 들린다
“저어—너—, 한 삼십 만 원 읎겠니?”
그 말 하려고 엊저녁에 딸네 집에 오신 아버지
밤새 만석 같은 이 말, 그 한 마디 뱉지 못해
하얗게 몸을 뒤척이시다가
해 뜨는 골목길에서 붉은 얼굴 감추시고
천형처럼 무거운 그 말 뱉으셨을 텐데
철부지 초년 생, 그 딸
“아부지, 내가 뭔 돈이 있어요?!”
싹둑 무 토막 자르듯 그 한마디 뱉고 돌아섰던
녹 쓴 철 대문 앞 그 골목길,
가난한 골목길의 길이만큼 내가 뱉은 그 말,
아버지 심장에 천 근 쇠못이 되었을 그 말,
오래오래 가슴 속 붉은 강물로 살아
아버지 무덤, 그 봉분까지 치닫고 있다
나는 나의 대가족
최문자
벼랑 끝에서 돌아온 날은
이 집이 가득해
잼 같이 끈적끈적한 과거와
파멸하고 추락하고 실패하고 실족한 것들까지 다 모여
모두 흩어져 살기를 원했는데
나는 나에게 주렁주렁 매달려
나를 묶고 싶은 그들의 로프는 어디에도 있지
가만히 있어도 모인댔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도
나는 가득 차
시끌벅적한 과거 미래 모두 모여
오래 전에 죽은 고모까지
내가 잠들지 못하는 밤
그들도 악몽을 꿔
서로 보여준 적 없는
슬프게 건넬 한 마디의 말도
같이 듣고 있어
가족이 되지 않겠다면서도 서로 몸을 묶어
개인 접시 앞에 두고도 같이 떠먹다
같이 고요해지는
나는 마침내 수 많은 나를 거느린
나의 대가족
내가 왜 이렇게 많아?
여름이 가고 있을 때
우리 집인데
내가 알지 못하는 공기로 가득 차 있었어
죽은 나무처럼 생긴 웅크린 짐승 같은 가구들
나는 가끔 서 있고
가끔 책 페이지를 넘기고
같은 데서 자고 일어난 사람들
모두 다른 데로 가서
이 시간에도 그만두고 싶은 일을 하고 있겠지
시를 쓰는 시간이란
너와 떨어지는 중이다
나와 떨어지는 중이다
세상과도 떨어지는 중이다
책을 덮는 시간이다
책같이 좋은 것들이 자꾸 접히는 시간이다
사람들이 멀리 지나버리는 소리가 나도
꺼낼 것이 하나도 없는 책상서랍은 계속 침묵하고
우리 집인데
내가 너무 많아
서로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
쪽
승 한
내부가 외부로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양식糧食과 걸음이 필요했을까 내부가 외부의 옷으로 갈아입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구름과 바람과 햇볕과 비의 날들이 필요했을까 풀이 색이 되기까지 탈색이 다시 착색이 되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용서와 사랑과 채찍과 혼돈의 외경畏敬이 필요했을까 너에게 물들기까지 온몸으로 내가 네가 되기까지 네가 내가 되기까지 맹세와 기다림의 경經이 필요했을까 쪽, 그 발묵潑墨 앞에서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너의 내부가 된다 원시가 된다 시원이 된다 색에서 색이 나오는 시색是色이 된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묘유妙有의 순간 아, 거기 어람於藍이 있었구나 누비옷 같은 기다림의 먼 시간이 하늘 속에 괴어 있었구나 숙면으로 괴어 있었구나
트럼프 현상
전기철
먼 나라에서 전쟁 중인데 미사일 날아가는 소리에 잠이 오지 않는다.
어차피, 답은 없었다. 뜻도 이유도 모르겠고 추론조차 불가능하다. 누워도 말똥말똥, 두근두근, 멈출 수 없는 떨림, 답이 너무 많았는지도 모른다.
노이즈 노이즈,
거짓말과 딥페이크가 시야를 어지럽힌다.
전쟁으로 죽은 아이들이 소란을 피우고 비둘기들이 페르시아어로 울어 별들은 안착할 밤하늘을 찾지 못할 것이고, 아무 데서나 나는 침략의 냄새는 음식 맛까지 변하게 했다. 맥주는 맛이 나지 않았고 시는 읽어줄 가슴을 만나지 못했다.
황당무계한 이 미사일의 시대에 하늘은 검게 물들고 무기상들의 차가운 손이 포탄 떨어진 골목을 더듬고 티브이 속 잔해에서는 비참한 한 사내가 우두커니 멍하다.
독재자들이 판치는 이 전쟁광 시대에
바람이 속삭여주는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다케시의 비가 내리는 영화 속 찢어진 우산의 고독을 읽을 수만 있다면
마루에 점점이 무늬 지는 햇볕을 읽을 수만 있다면
치매 걸린 아내가 옷에 똥을 쌌어도 괜찮아 괜찮아, 웃어 줄 텐데
포탄의 파편이 빗소리인 양 속삭이는
이 불한당들의 시대에
엉킨 실뭉치들이 머릿속에서 회충처럼 꿈틀거리는 밤
두꺼운 사전을 뒤적여 달의 숨소리, 흐붓이 우는 여우의 울음소리를 듣고 싶다.
한 달이 넘도록 미사일이 쏟아지는 이 캄캄한 시대에 기묘한 도착에 빠진 아이들이 설쳐대는 밤거리 중국집 환풍기 소리에 섞여 들리는 소리
유 크레이지 바스타드 You Crazy Bastrds!
쇼윈도우에 비친 두 번째 구름의 사용설명서
변종태
조율 안 된 첼로의 선율로 목을 조여줄래 첼리스트의 시선은 새벽 놀에 걸린 채 시들어 가고 반음씩 이탈하는 선율이 점점 더 삶을 조여오는데
_ 오늘은 무엇을 해야 할까
인력사무소 오픈런을 해 봐도 나비 날개처럼 가벼워질 뿐인데 개점 준비하는 카페 문틈으 로 새어 나오는 낯선 소리 저 소리에 목을 매도 좋을 시간일까
_ 오늘은 내가 나를 부를 수 있을까
첼로는 조율되지 않은 음색으로 몸통에 무엇인가를 채워놓고 활대를 쥔 손이 떨리는지 현 은 네 갈래의 빛으로 늘어져 손끝이 닿을 때마다 조금씩 새벽을 흘린다
첼리스트의 눈빛이 희부윰한 새벽 놀 얼비치는 쇼윈도우에 붉은 유리 조각 박힌 하루가 금 간 채 흘러내린다 반음씩 비켜나는 선율은 미끄럼틀처럼 더 빠르게 미끄러진다
_ 오늘은 어떤 리듬으로 허밍을 해야 할까
오늘의 문장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입 안에 맴도는 것은 이름 없는 직업들의 먼지뿐 인력사무소 앞에 줄을 서면 이름은 휘발되어 구겨진 번호가 되고 나는 접히지 않는 공기라서 호명되지 않은 채 더 가벼워진다 가벼움은 나비가 아니라 날개가 떨어진 후의 이야기라서 날지 못하는 방향으로만 천천히 떠오른다
_ 오늘은 또 어디까지 미끄러질까
오픈 준비가 끝난 카페 문틈으로 귀에 익지 않은 음악이 흘러든다 음률은 시멘트 벽에 기대앉은 등을 스치고 빈 비닐 페트병을 구긴다 활대가 미끄러질 때마다 줄감개를 한 바퀴씩 돌린다 조금씩 어긋나는 쪽으로
조여도 좋을 시간이라는 것이 있다면 숨이 아니라 조율되지 않게 되는 때 끊어지지 않을 만큼 현 하나를 더 감는다 아직 불리지 않은 번호가 이름이 될 때까지
_ 오늘은 어떤 음정으로 나를 조율할까
폭탄 돌리기
신미균
심지에 불이 붙은 엄마를
큰오빠에게 넘겼습니다
심지는 사방으로 불꽃을 튀기며
맹렬하게 타고 있습니다
큰오빠는 바로 작은오빠에게
넘깁니다
작은오빠는 바로 언니에게
넘깁니다
심지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에게 넘깁니다
내가 다시 큰오빠에게 넘기려고 하자
손사래를 치며 받지 않겠다는 시늉을 합니다
작은오빠를 쳐다보자
곤란하다는 눈빛을 보냅니다
언니는 쳐다보지도 않고
딴청을 부립니다
그사이 심지를 다 태운 불이
내 손으로 옮겨 붙었습니다
엉겁결에 폭탄을
공중으로 던져 버렸습니다
엄마의 파편이
우리들 머리 위로
분수처럼 쏟아집니다
카오스 Chaos
-허공과 혼돈 속에서
박정이
가이아 너는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 속에서 아무 형체도 없이
카오스로부터 나온 여자, 뭔가 형체를 가진 여자
태초에 갈라진 틈 사이로 넓은 젖가슴을 가진 여자
모든 신들의 어머니 생명의 모태로서
분명 숭배받던 모계사회의 흔적의 의미지만
어쩌면 나는,
금지된 것을 더욱 갈망하는 칼리굴라처럼Caligula
덧없는 해골처럼, 너, 가이아가 되어
태초의 무대 1막 1장으로 오르고 있다
때론, 캄캄한 빈 허공을 에레보스, 그리고 닉스와
함께했던 것처럼
땅속의 어둠을, 빛이 없는 하늘의 어둠을
나는 거울도 없이 Chaos카오스 무대의
깊숙한 곳에서 침묵으로 기다린다
가끔씩, 허공의 한 귀퉁이에 앉아
청동모루를 던지면 구일 만에 지상에 닿고
땅 밑으로 던지면 구일 동안 떨어져
타르타로스에 닿는다고 상상하면서 나는,
지금의 내 현실의 삶이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며 사랑한다는 신념,
죽음은 단지
본질을 캐낼 수 있는 광맥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서 있는 신기루 같은 삶 앞에서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가 뒤바뀐 것처럼
희망은 희망으로 남고
현실의 절묘한 한 수도 아름다운 허물이 되듯,
지금 나는 태초의 가이아가 되어
허공과 혼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샐비어의 한계치
마경덕
앞마당 샐비어가 피를 철철 흘리며 피고 있다
저 꽃빛,
이미 한계치를 넘어
스칠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수혈할 수도 없는 꽃의 피가 왜 미치도록 붉은가
무엇이든 지나치면 불편하다
나는 마음이 편하다
아니다
딱 한번이라도 심장을 찌르는 치명적인 시를 쓰고 싶었지만,
오늘 하루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굳이 두 삽의 흙이 필요할까
그동안 넘치도록 퍼담은 것들은 내 것이 아니었다
내가 작은 화분이라는 걸 알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그늘의 빛
김세영
여름산의 중심에 서 있는
상수리나무 그늘의 기공氣孔 속에
뿌리혹처럼 빛들이 숨어있다
열기의 정점, 정오의 상수리는
수천의 매미들이 한꺼번에 울 때
커다란 솜사탕으로 부푼 울음덩어리가 된다
그 울음소리에 잎사귀 뒷면에 붙어있는
푸른 빛 알갱이들이 아우라로 피어올라
집광판 이마의 열기를 식혀준다
자정, 그늘의 심저에서 발원한
검은 태풍의 몰이에
수만의 청어 떼가 질주할 때
불안에 떠는 눈알들이 서로 부딪혀
번뜩이는 빛 회오리가 되어
고양이 눈 성운1)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어깨선 높은 산 그리매 속,
등이 긴 사람의 갈비뼈 그림자,
묵언의 새장, 그 촘촘한 행간 사이로, 설핏
전류처럼 박동하는 새벽별 빛이 보인다
발꿈치 뼈 골수 속 빛의 싹들이,
기공 속 그늘의 빛들이,
지상의 가장 낮은 곳에서
천상의 가장 높은 곳으로
뇌량腦梁 위 시냅스2)로 올라간
정수리 천문의 기파들이,
북극성 별자리 중력의 당김으로
귀천하는 오로라처럼
궁륭을 가르며 솟구쳐 오른다.
1) 고양이 눈 성운(Cat's Eye Nebula, NGC 6543): 용자리에 있는 행성상 성운이다. 허블 우주 망원경을 이용한 고해상도 촬영을 통해 매듭·제트·거품·원호 모양 등의 주목할 만한 구조들이 발견되었다. 성운의 중심에는 밝고 뜨거운 항성이 있는데, 이 별은 약 1,000년 전에 자신의 겉면을 날려 버리고 성운을 형성했다.
2) synapse : 하나의 신경 세포와 신경 섬유로 구성된 신경 단위를 뉴런이라고 한다. 신경세포의 부분 중 자극을 세포 밖으로 전도시키는 돌기인 축삭의 끝부분과 신경전달물질이 오가는 다음 뉴런 사이의 틈을 시냅스라고 한다. 이 신경 단위 간의 접착부를 시냅스라고 한다.
붉은 습관처럼 붉은
양소은
해피는 강아지 이름이다 해피는
애인의 사과밭으로 가 똥을 눈다
능금빛이 아닌
부사를 닮은
개똥은 떨어진 사과들 사이에
얌전히 쭈그리고 앉는다 애인은
습관처럼 떨어진 사과를 주우면서
개새끼, 욕을 뱉는다
사과밭인 줄 알았는데 똥밭이네
벌겋게 부풀어 오르는 사과를
한입 아삭 베어 물고
습관처럼
맛있네 하늘을 사과나무를 올려다본다
붉은 것들은 달콤한가
저쪽 산마루로
노을이 질 때
새들도 모두 날아가 버리고
바람의 앙상한 가지마다
붉은 습관처럼 붉은
서로가 서로에게
습관처럼
사과밭의 몽상에 빠진다
강아지가 달려갈 때마다
사과의 당도가 깊어지는
해피의 똥밭 위로 사과들이 높이 열리는
비탈면 따라
농도의 중력들 사과밭으로 펼쳐진다
문득, 가까이
애인은 제 단맛의 비탈을 가늠할까
카페 빈
전비담
기다림이 보이지 않아
오랫동안
양파링 하품을 만듭니다
많이 참으며 둥근 웃음을 퍼냈는데
일어서도 하품을 만듭니다
등 뒤로 집을 짓는 물고기들이 많습니다
등을 돌리면
떠돌다 혼자 죽은 물고기비늘들이
머리칼에 하얗게 묻습니다
양파냄새가 납니다
앉아있다 일어서면
투명색 머리가 쏟아지는 그녀
얼굴을 감싸쥐면
웃던 눈동자의 둥근 즙액이 쏟아집니다
바닥으로 없어집니다
화장실을 가기 위해 통로를 걸어가는 건
기다림에서 떨어진 각질을 쓸어가는 일
눈을 감으면
눈 안으로 눈이 떨어집니다
눈 안으로 얼굴이 떨어집니다
무엇이 남아있을까 생각하는데
벽면 수족관에서 흰수염물고기가 하품을 합니다
빈 노트북에 기다림이 떨어지고
우리는 국적 없는 여권을 발급합니다
입추立秋에 만나는 니이체
권 욱
맹인의 감은 눈으로만 도달할 수 있는
높고 깊은 가을의 투명성
투명은 모든 것을 이기고
꺾이는 것은 날씨만이 아니다
살아 있는 아폴론을 내쫓고
죽어 있던 디오니소스를 되살린다
붉은 광풍의 여름을 건너가는 일은
조용하게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다
죽음 가까이에서 천착穿鑿된 사색
영면의 시작은 오히려 화려하다
무한한 입속으로 검은 구름덩이들을
막막한 바다 위에 뱉어 놓은 물거품같이 녹여버리고
창조와 사랑의 신을 부른다
건너가야 할 다리가 서서히 드러나고서야
명료해지는 머리
이성의 서리 돋친 삶은 삶이 아니다
비극의 카타르시스로 눈 뜬 삶을 살게 하는 가을
분노조절능력을 상실했던 여름의 차가운 몸뚱이에서
딱딱한 의지를 떼어내고 그 위의
반질거리는 자국들을 바라보면서
영원한 서정의 깊이로 몰아간다
겨울이 오기에 여름에만 머물 수 없는 것은
겨울은 마법 같은 긴 눈썹을 휘날리며
아폴론도 디오니소스도 잠재워버리기 때문이다
가을이 움켜쥔 불씨에
스스로의 살점을 조각내어 남김없이 태우고 태워
포용의 겨울을 준비한다
아무려면 어때
정안덕
활자들이 튀밥처럼 튀는 밤
방금 숲에서 도망 나온 강이 밤새 울고
구름은 추위에 떨고 있어
아무렴 캄캄하면 어때
내 푸른 얼굴이 가면처럼
달빛에 비치고 기억의 문이 살짝 열릴 텐데
때죽 같은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는
거리, 빈 깡통의 생활들 소란한
아무렴 넘어진들 어때
꿉꿉한 날씨를 비틀어
레쓰비 한 잔을 게 눈 감추듯 마시면서
어때 어때
무너진 시간 위에서도
어둠을 뚫은 문장이 울음을 토해내고
책장은 훌쩍훌쩍 자정을 건너가는 거야
길 없는 달의 세계를 걸어가면 어때
새벽이 오면 붉은 꽃 피워낼 것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