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경』, 일본이 엉터리 번역하고, 영역(英譯)하여 방류하고(20) - 법화경과 삼류 SF소설
佛說是時 娑婆世界三千大千國土 地皆震裂 而於其中
有無量千萬億菩薩摩訶薩 同時涌出 是諸菩薩 身皆金色
三十二相 無量光明 先盡在此娑婆世界之下 此界虛空中住
是諸菩薩 聞釋迦牟尼佛 所說音聲 從下發來
<從地涌出品 제 15>의 초반에 등장하는 이 경문은 네 가지 중요한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림 1.
佛說是時 娑婆世界三千大千國土 地皆震裂 而於其中
有無量千萬億菩薩摩訶薩 同時涌出
본 경문 바로 앞부분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가르침을 펼치는데 그대들이 나설 일이
아니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 땅에도 그 일을 감당할만한 대보살들이 충분히 있다>고
말씀하시자, 지금 이 법회에 참석하고 있는 사바세계의 수많은 대보살들이 부처님의
이 말씀에 호응하여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 그림 1에 그려져 있다.
속세의 말로 하면, 부처님께서 <이 법화경을 온 세상에 펼치기 위해 “굴러온 돌들”이
나설 일이 아니다, “박힌 돌들”로도 충분하다>고 말씀하시니, “박힌 돌”들이 일제히
땅을 뚫고 나왔다는 것이다.
여기서 <땅을 뚫고 나왔다>는 것은 글자대로 맨땅을 뚫고 돌연 솟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 법회에 참석하기 전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숨죽이고 있었지만, <“박힌 돌들”로도
충분하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용기백배하여 수천억 수만억의 법회 대중들 가운데서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혹은 깃발을 흔들며, 혹은 불끈 쥔 주먹을 치켜 올리며 그들의
존재성을 드러냈다는 말이다.
왜 그들은 지금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숨죽이고 있었던가?
그 당시의 모든 사회적, 종교적 분위기를 기성세력인 소승불교가 주도하며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그들의 존재성을 지금까지 어떤 식으로도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림 2.
是諸菩薩 身皆金色 三十二相 無量光明
이처럼 모습을 드러낸 대보살들이 어떠한 형상을 갖추고 있었는가가 그림 2다.
그들의 몸은 부처님의 몸처럼 황금색을 띠고 32 상을 두루 갖춘 가운데
무량의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들은 명실상부하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닫게 된 대보살들이었다.
그림 3.
先盡在此娑婆世界之下 此界虛空中住
이 법회에 참석한 대보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지금까지 이 대보살들은 어디서 지내고 있었는가가
그림 3에 서술되어 있다.
나성거사가 무겁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그림 3이고, <이 사바세계 아래의 공터에 살고 있었다>라는
시중의 모든 번역문을 보고 소금을 한 숟가락 입에 퍼 넣은 듯한 기분을 느낀 것이 이 그림 3이고,
아래 코세이 번역문을 보고 하마터면 욕이 튀어나올 뻔 했던 것이 바로 이 그림 3이다.
<지금까지 이 사바세계 아래에 있는 허공에 살고 있었다>고?
이게 법화경인가, 삼류 SF 소설인가?
여기서 <下>는 <낮은 곳>,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비천한 곳>, <지극히 하찮은 곳>을
의미한다.
또 <虛空>은 이 모든 대보살들이 지금까지 머물고 있었던 구체적인 장소, 다시 말해,
사바세계의 한적한 곳,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 숨죽이며 지내던 곳, 소외된 곳을
말한다.
이 모든 대보살들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러 몸에는 금색을 띠고
32 상을 갖추어 무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부처와 다름없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先盡)
이 사바세계의 하찮은(혹은 비천한) 곳에 몸을 낮추고 지내며(在此娑婆世界之下),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한적한 곳에 머물고 있었다(虛空中住), 는 말이다.
온갖 멸시와 질시와 수모를 당하며 인적이 드문 곳에서 대승의 가르침을 수행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압축해서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림이다.
나성거사가 이 그림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래 인용에서 보듯, <지금까지 이 사바세계 아래에 있는 허공에 살고 있었다>는 번역은
그야말로 <49층 빌딩 위에 있는 지하실에 살고 있었다>라는 말 만큼이나 황당한 번역이다.
또 법화경의 전문가로 알려진 분들 가운데는 이 구절에 일반불자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해설을 붙이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도 잘 모르는 불교철학의 난해한 용어나 개념을
끌어다 이 구절의 의미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아래 코세이의 영문 번역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글자 <下>, 그리고 단어 <虛空>이 이 경문에서 무슨 의미로 사용되었는지
잠시도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게 나성거사의 생각이다.
(<下>와 <虛空>에 대해서는 가지고 계신 한자사전을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림 4.
是諸菩薩 聞釋迦牟尼佛 所說音聲 從下發來
무량무수 대보살들이 몸을 낮추어 지내고 있던 하찮은 곳으로부터 몸을 일으켜
이 대법회 장소로 달려온 까닭이 그림 4에 서술되어 있다.
무슨 까닭인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신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현재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는 수천 억, 수만 억 대중들의 가운데 섞여
숨죽인 채 부처님의 설법을 귀 기울여 듣고 있는 중이다.
<내가 머물고 있는 이 땅에도 그 일을 감당할 만한 대보살들이 충분히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이에 고무되어, 바로 이 사바세계의 대보살들, 즉 “박힌
돌들”이 일제히 궐기할 용기를 얻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대승불교라 불리는 불교의 대혁명성을 본다.
<민중불교>는 대승불교의 다른 이름이라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니와노 닛쿄는 그의 책 『法華經의 새로운 해석』 서문에서다음과 같이
대승불교가 성립된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라 생각되어
원문 그대로 인용하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특히 그 당시의 출가불자들은 재가불자들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을
행하거나 설하는 등 출가의 권위를 내세우려고 하였습니다. 일부 출가불자들은
“왜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가”하는 근본정신보다도 그저 “오로지
계율을 지키는 것”만을 중요시하는 형식주의를 강조하였습니다. 또 본래
살아있는 인간을 위하고 인간의 삶을 위한 가르침이었던 것을 당시 인도에
있었던 다른 가르침이나 학문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부러 매우 어려운
철학으로 만들어버린 출가불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왜곡되고 생생한 힘을
잃어가는 불법을 보고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
석가모니부처님의 진정한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열렬한 소망이 주로
재가불자 사이에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신흥모임이
대승불교의 교단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일본 코세이 출판 영문번역은 다음과 같다:
(이 영문에 대한 우리말 번역은 여러분이 가지고 계시는 한글법화경 그대로이니 참고하시기 바란다.)
When the Buddha spoke these words, the group of the three-thousand-
great-thousandfold lands of the saha world began trembling
and splitting open, and all at once, innumerable thousands
of millions of bodhisattva-mahasattvas strang up out of it. These
bodhisattvas had golden-hued bodies, the thirty-two marks, and
immeasurable radiance. Up until then, they had all been dwelling
in the empty space beneath this saha world. These bodhisattvas
emerged from below upon hearing the sound of Shakyamuni Buddha
speaking.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