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결과 학생은 6학년 이후 추상적 사고와 기억력 발달에 어려움을 겪을 수있다. 외부 감각 인상이 에테르체에 제대로 각인되지 못하기 때문이다(오드리 맥앨런의 도움 수업 이해, 2021, 225)."
위 문장은 에테르체가 온전하게 발달하지 않으면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이다. 에테르체는 인간에게 생명의 힘을 주는 생명체라고도 불리며, 0-7세 까지는 인간의 몸을 만든다. 인간의 물질 육체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되는 시기에 이갈이를 신호로 에테르체가 독립을 한다. 몸을 만드는 일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자유로와진 에테르체는 자신의 속성대로 발달을 하는데, 이 시기에 에테르체의 발달을 적극 지지해 줘야 한다. 만약 저지하면 위 문장 처럼 되기 때문이다.
에테르체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 이것을 필자가 직접 겪었는데, 겪으면서도 그 이유를 몰라서 늘 안타까웠지만,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었다. 어떤 문제에 있어서 거대한 막이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 이런 느낌은 영혼의 어려움에서 온다. 따라서 현실 삶에서 이를 해결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만약 누구라도 현재 이런 느낌을 느낀다면, 그것은 자신의 내부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데에 있지, 노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파악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자신의 내부가 발달을 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아이들, 청소년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발달단계에서 온전한 발달을 해야 한다는 사실은 언제나 강조되어도 절대 틀리지 않다.
필자가 이를 느낀 시기는 5학년 무렵이라고 생각한다. 5학년 무렵 무엇을 외우려 해도 잘 안되고, 특히 사고력을 요하는 선생님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 당시 생각하기를 '왜 그럴까', '이유가 뭘까[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도 봤지만 답을 구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꿈을 꾸지 못했다. 꿈을 꿀려면 스스로에게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금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슈타이너를 공부하고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이유가 에테르체가 발달하는 시기에 에테르체의 발달을 필자 스스로 저지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사소한 일, 이 일이 에테르체의 발달을 저지하리라고는 감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초등 2학년 시기의 일인데, 이 시기에 필자는 활달하고 다소 장난끼가 있는 학생이었던 듯하다. 물론 선생님은 주의를 여러 번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알아듣지 못한 듯, 어느 날 선생님으로 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는데, 그 당시 필자가 생각하기를, '큰일났다', '어떻게 하지' 궁리를 한 듯, 선생님의 말을 들을려면 필자 내부의 말을 들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파악한 듯 지금 생각된다. 구체적으로 초등 2학년 시기의 아이들은 외부보다는 자신의 내부에 더 많이 연결이 되어있다. 내부에 집중이 되어있는 상태이므로 내부 정신이 활발한 아이일수록 활발하게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는 인간 내부에서 외부와 연결이 이루어져야 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내부에 집중을 하면 계속 활발할 것이므로, 내부에 집중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그 당시 생각하였다는 말이다. 필자 스스로 내부의 문을 닫고 외부로 문을 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은 내부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 에테르체가 자유로와진 시기에 에테르체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다. 에테르체가 억압되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자유로와진 에테르체가 마음껏 활동해야 발달하는데, 억압을 받으니 위축되어서 발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필자는 2학년부터 내부를 봉쇄하였고, 이 사실을 5학년 무렵에 어렴풋이 깨달은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당시를 생각해 보면, 내부를 봉쇄하면 마치 허수아비처럼 외부에서 시키는대로 하게 된다. 또 내부에서 어떤 생각이나 판단이 올라오지 않으니 당연히 자신감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 그냥 외부에서 움직이는 인형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즐거움은 내부와 외부가 연결되어서 나오는 즐거움인데, 이 상태를 인간의 삶이라고는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필자는 2학년 부터 5학년 무렵까지 내부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 그 시기는 아무런 기억도 없는 상태, 마치 백지상태이다. .
이 상태에서 내부의 각성이 일어난 시기는 5학년 무렵이다. 필자가 '스스로' 왜 그럴까하고 묻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필자의 내부 각성이고, 스스로 자아를 찾고자 한 행동이다. 계기는 5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그 당시 학교에서 연 웅변대회에 필자를 내 보내셨다. 연습한 기억은 전혀 나지않는데, 웅변대회에 나가서 웅변을 하는 도중에 원고를 잊은 기억이 난다. 운동장에 앉아있는 아이들의 눈동자가 모두 필자를 향해 있었다. 몹시 당황했겠지만 그런 기억보다는 '이것이 뭘까' 지금 내 안에서 뭔가 움직이고 있는데, 이것이' 뭘까'라는 생각, 그 생각을 하는 존재가 기억이 난다. 그 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한 일이다. 필자의 내부를 봉쇄했으니 당연한데, 이 봉쇄를 뚫고 내부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필자가 몹시 당황한 순간 내부에 연결이 된 듯하다. 그때부터 필자의 내부에 미약하나마 연결이 되었다.
연결이 되니 비로소 외부의 일이 내부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났고 '왜 그럴까'하는 의문도 생기게 되었다. 그러니 선생님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중에서 특히 음악이 어려웠다. 에테르체의 키워드는 리듬이다. 생명의 힘이 심장, 맥박을 음직이고 혈액을 흐르게 한다. 이것이 리듬인 것이다. 그런데 이 리듬이 이 시기에 음악으로 연결되는 일이 에테르체의 발달인데, 이것이 안된 것이다.
에테르체는 우리 몸의 생명체계를 움직이고, 기억 작용, 상을 떠올리는 일을 한다. 그리고 우리 몸의 생명체계를 움직이고 남는 에너지가 추상적 사고에 이용된다. 5학년 시기 아스트랄체가 탄생하고 비로소 추상적 사고작용이 시작된다. 에테르체가 상을 만들고 이어서 아스트랄체가 그 상을 보고 사고작용, 추상적 사고작용이 이루어지는데 에테르체가 위축되어있으니 사고작용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다. 표현하면 마치 하얀 벽앞에 선 느낌이었다. 지금도 기억하는 일 중에서 특히 음악 악보를 외우는 일은 거의 안된다. 여전히 벽으로 남아있다.
인간의 발달단계가 중요한 이유는 발달 중에는 무의식이 열리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0-7세 중에서 3세까지는 자아가 드러나지도 않는다. 3세 무렵 미약하게나마 자아가 드러나고 점차 심화된다. 그리고 7-14세 사이 중에서 9세-11세 즈음 꿈꾸는 시기가 있다. 이때 자아는 꿈을 꾸는 상태이다. 그리고 12세 무렵 아스트랄체가 탄생하면서 무의식이 완전히 닫힌다. 이때부터는 자아가 사고를 통하여 삶을 사는 것이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자아가 상속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다.
즉 12세 아스트랄체가 탄생하기 전에는 무의식이 열려있어서 무의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무의식이 열린 시기에 끼친 영향이 12세 이후 무의식이 닫히면 회복이 불가능하다. 다시 무의식이 열리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이렇듯 인간의 내부 발달은 그 발달시기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외부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모습, 내부가 발달하지 않는 그 상태의 자신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론은 현재 자신이 가진 정신은 자신의 정신과학적인 요소의 발달 정도를 의미한다. 물질 육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 그리고 자아가 자신의 정신을 구성하고 창조한다. 모두가 각각의 역할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하나라도 발달이 되지 않았으면, 그것이 벽으로 남아 어려움을 야기한다. 더불어 지금 세계적으로 또는 어떤 일을 성취한 사람은 자신의 정신과학적 요소가 바탕이 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정신과학적 요소가 발달하지 않으면 노력을 해도 되기는 거의 어렵다. 필자가 에테르체 발달시기에 그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도 발달을 스스로 막았기 때문에 평생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과 같다. 노력을 해도 해소가 되기 어렵다. 그래서 현장의 아이들을 보면서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지금이 어떤 시기인데 발달시키지 않고 있는지, 말로 해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더더욱 안타깝다는 생각만 한다.
결론은 인간의 삶이 곧 정신의 발달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또 발달시기를 놓쳤다 하더라도 정신을 탐구하고 계속 발달시켜야 자신의 삶이 그나마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