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테르힘의 형성활동 가운데 대부분이 신경계와 감각계를 형성하는 임무에서 해방될 때 비로소 우리는 무엇인가를 상으로 만들어 기억하는 능력을 얻습니다(발도르프 치유교육, 2021, 100)."
슈타이너책을 읽으면 정신과학적인 요소인 '아스트랄체'와 '에테르체'가 늘 나온다. 책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로 취급되는데, 읽으면서도 과연 정신의 발달에 두 요소가 도움이 될까하는 생각을 하게도 된다. 왜냐하면 두 요소가 보이지도 않고 정신 또한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기한 것이 슈타이너의 책을 읽다보면, 슈타이너 책에서 나오는 단계와 같은 정신적인 체험을 한다. 짐작하건대 슈타이너가 직접 겪은 일을 순서대로 써 놓았기 때문인 듯하다. 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필자가 겪은 체험 두 가지를 소개한다. 일단 (슈타이너) 책을 읽으면, 누구라도 그 내용에 대해서 생각(사고)을 할 것이다. 처음에는 슈타이너 책의 내용이 거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모르는 것은 그냥 두고 꾸준히 읽었다. 반전이 일어난 것은 영혼의 속성에서 였다. 영혼은 현재 상태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예를 들어 내가 슬프면 영혼은 슬픈 감정 그 자체이다. 그러다가 시간이 흘러서 다른 감정에 놓이면, 영혼은 또 다시 그 감정에 놓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감정은 영혼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혼의 본래 모습은 무엇일까? 그때부터 감정(필자의 영혼이 놓인 감정)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슬픈 감정도 바라보고, 기쁜 감정도 바라보고, 화가 난 감정도 바라보니 어느 사이 변하지 않는 어떤 모습이 있었다. 어떤 감정에도 변하지 않는 모습, 이를 일컬어 불가에서는 변하지 않는 모습(본성 ?)이 거울에 비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변하지 않는 이 모습이 영혼의 본래 모습(또는 본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영혼은 드러나지 않았고, 뭔가가 영혼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이것이 아스트랄체임은 차차 알게 되었다.
두 번째로, 영혼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것이 무엇일까가 질문이다. 영혼체의 바탕이 아스트랄체이므로 내가 느끼는 이 감정, 영혼 주위를 감싸고 있는 이것이 아스트랄체이다. 필자는 아스트랄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이 감정에 집중했는데, 슈타이너에 따르면 아스트랄체는 구름처럼 몸을 감싸고 있으며, 몸 안팎으로 이동을 하기도 한다. 아스트랄체가 손끝 발끝으로 들어와서 이마 부근에 이르면 다시 몸 바깥으로 나간다. 아스트랄체가 몸 안으로 들어오면 잠에서 깨어나고, 다시 나가면 인간이 의식을 찾는다고 한다. 만약 아스트랄체가 몸 안으로 들어왔지만 몸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면 잠에서는 깨어나되 의식을 찾지는 못한다고 한다.
영혼은 몸을 통하여 사고하고, 느끼고, 행동한다. 그런데 이러한 영혼의 활동을 인간인 우리가 알기는 굉장히 어렵다. 영혼의 바탕체인 아스트랄체가 이런 활동을 하므로, 아스트랄체의 활동을 통해서 인간이 영혼의 활동을 파악할 수가 있다. 만약 아스트랄체를 파악한다면 영혼 활동을 통제할 수도 있고,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다. 즉 아스트랄체의 발달 정도에 따라서 자아가 더 높은 자아인 정신자아가 되는 것이다.
아스트랄체는 감정체로 물질로 드러난다. 우리가 슬프면 슬픈 감정이 드러나는 것과 같다. 음악의 정서가 표현되는 것이 아스트랄체가 물질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면서 노래의 정서를 표현하는 데에 아스트랄체가 이동하는지 지켜보았다. 유튜브에서 성악가(제시 노면, 세계 3대 흑인 소프라노 중 한 명)의 노래를 들으면서 성악가의 아스트랄체가 이동하는지도 살펴보았다. 알게 된 점은 노래의 정서가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듣는 사람에게 전달되어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결정적인 단서는 강에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이는데, 이 물결이 아스트랄체의 원형 상이다에서 찾았다. 여기에서 강은 에테르체이고 바람은 아스트랄체이며, 생긴 물결이 아스트랄체의 모습으로 우리가 보는 상이다. 그렇다면 나의 아스트랄체가 바람처럼 에테르체를 움직일수가 있는 것이다. 아스트랄체가 어떤 바람일 때 에테르체를 움직일 것인가 생각해 보면, 간절하게 원하는 경우, 내가 간절하게 원하더라도 정신세계의 속성에 맞아야 한다. 왜냐하면 에테르체 자체가 우주 에너지, 우주 생명의 힘에 의하여 움직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인류를 위해서 남긴 문화 유산은 모두 그렇게 남겨진 것이다. 그래서 가만히 필자의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필자의- 에테르체를 움직여 보았다.
세 번째로, 필자가 늘 산책하는 둘레길에는 '무릉도원'으로 들어가는 곳이 있다. 필자가 무릉도원이라고 이름을 지었는데, 마치 인간계에서 신선계로 들어가는 곳이기 때문인데, 그 곳을 통과하면 신선계가 펼쳐진다 그 날도 그 곳을 통과하면서 고개를 들고 감탄을 하는데, 필자의 에테르체가 그 곳의 나뭇잎이 햇살에 반짝이는 것과 똑같이 움직이면서 반짝였다. 순간 온 몸에 전율이 흘렀다. 구체적으로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이때 바람이 우주 에너지이다. 여기에 나뭇잎이 햇살에 반짝이는 것도 같은 에너지이다. 삼라만상이 언제나 그렇게 반짝이면서 움직이고 인간의 몸도 같이 반짝이면서 움직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인간의 자아가 상속에 있기 때문인데, 이 경우를 달리 말하면 상속의 자아가 상을 벗어났다는 의미가 된다. 우주의 에너지가가 필자의 자아에 그대로 전달되어서 순간 자아가 상을 벗어 난 것이다. 우주 에너지를 받은 것을 종교로 말하면 성령을 받은 것이다.
그 에너지, 우주 에너지로 만약 필자의 아스트랄체가 필자의 에테르체를 움직인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힘은 삼라만상의 생명을 움직이는 힘이다. 따라서 이 힘이 물질로 드러나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은 기본이고 치유 에너지가 되는 것이다. 물론 물질로 드러나야 하므로 다시 물질로 드러내는 연습은 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세계적이라는 음악가의 연주를 들어보니,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연주가 가장 -그 에너지에- 가까웠다. 우주 에너지의 진동과 같은 진동이 전달되었다.
네 번째로 어떻게 해서 그와 같이 느낄 수가 있었을까하고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산책 길의 자연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산책길을 걷기 시작해서 9개월 즈음 되었을 때 버려진 쓰레기를 보고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줍기 시작했다. 주운 지 3개월 정도 된 듯한데, 버려진 쓰레기를 보고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은 그곳의 자연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원래 필자의 에테르체는 자연과 하나이다. 이것이 정신의 속성인데 상속에 있지 않은 자아는 원래 그렇게 같이 진동을 한다. 하지만 자아가 상속에 있기 때문에 깨닫지 못했는데, 필자의 정신이 조금씩 자연과 하나가 되어서 그 순도가 같게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마지막 그렇게 해서 무엇이 달라졌는가. '위 문장'(제목)이 저절로 필자의 자아에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다. 에테르체는 인간의 신경계와 감각계를 형성하는 것이 원래 임무이다. 이런 임무에서 벗어나는 에너지가 상을 만들고 기억하는 힘이 된다. 에테르체가 만든 상은 영혼이 사고, 추상적인 사고를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만약 에테르체가 상을 만들지 못하면 추상적인 사고로 나아가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해도 될 정도이다. 즉 에테르체가 추상적인 사고를 하게 하는 것이다. 더불어 기억도 에테르체의 역할이므로 기억도 가능하다. 만약 그동안 에테르체에 문제가 있었다면 우주 에터지에 -한번이라도- 연결이 된다면 그동안의 문제가 많이 해소되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 화가,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이런 상황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컨대 화가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서 그림을 그렸고, 감상하는 사람은 자신의 에테르체의 문제까지 나아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주 에너지에 자신의 자아가 노출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도록 하는 것이 예술이다라는 것이다. 특히 음악은 소리의 전달인데 소리는 에테르체의 진동을 공기가 전달한다고 한다(슈타이너의 주장). 그러므로 전달할려면 자신의 에테르체가 우주의 진동과 같아야 한다. 문제는 우주의 진동을 파악하기도 어려운데, 현실의 삶에서는 자아가 상속에 있다는 것이다.
삼라만상이 생명을 영위한다는 것은 우주의 진동에 따르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에테르체의 진동을 파악한다면, 우주 진동을 파악할수가 있다. -세계적인- 연주자들의 연주를 들어보면, 우주 진동에 가까울수록 감동을 주었고, 세계적인 음악가로도 인정을 받는다. 그리하여 결론은 자신의 정신과학적인 요소를 계발, 발달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에테르체가 중요한데, 현재 자신이 어떤 어려움을 겪는다면 에테르체가 발달하지 않아서 그럴 확률이 높다. 예를 들어 유튜브에서 어떤 강의를 들을 때 그 강의를 하는 분의 의도, 생각을 꿰뚫는 것이 추상적 사고인데, 이것이 에테르체의 역할인 것이다. 이 사고가 되지 않으면 언제나 거의 제자리 걸음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신이 나아가지 못하면 제자리 걸음인 것이다.
필자처럼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에테르체를 발달시켜도 되고 에테르체로 바로 들어가도 된다.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이 도움이 더 될 듯은 하다. 먼저 자신의 아스트랄체, 감정을 살펴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첫 번째이다. 그리고 아스트랄체를 느껴야 한다. 이어서 아스트랄체가 에테르체를 바람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강가에 앉아서 가만히 강을 바라보면 일렁이는 물결에 따라서 자신의 몸도 일렁일 것이다. 이때 같이 인위적으로 움직여주면 자신의 자아가 그 움직임에 함께 한다. 강물과 하나가 되면 자아가 그 움직임에 동참하는 것이다. 이것을 꾸준히 해주면, 어느 순간 자아가 드러날 것이다. 서서히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건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