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39) 고백적 시 쓰기 - ① 백석의 시/ 시인 공광규
고백적 시 쓰기
네이버 카페 - 시산문(詩散門)/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백석
시 쓰기는 자기를 고백하는 직업입니다. 고백(confession)은 비밀이나 생각하는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고 ‘고백록’은 과거의 생활, 죄업, 마음속의 번민 같은 것을 신이나 여러 사람 앞에 고백하는 형식의 자서전인데 아우구스티누스와 루소가 유명합니다. ‘고백문학’은 자신의 내적, 외적 생활의 과실이나 약점을 기탄없이 폭로하는 문학을 말합니다. 고백체라는 소설도 있으며, 그 하위 양식으로 서간체와 사소설이 있습니다.
고백시는 시인의 삶의 사실들과 은밀한 경험들을 다룬 로버트 로웰의 「삶의 연구」(1959)에 자극받은 설화체적 서정시의 한 유형을 가리킵니다. 고백 시인은 자기 자신에 관한 충격적인, 또는 인상적인 세부 사항을 부끄럼 없이 담백하게 털어 놓습니다. 앨런 긴즈버그 등 다수의 미국시인들이 써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이명섭 편, 『세계문학비평사전』, 31쪽 참조)
시 쓰기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는 작업이며, 그 물음의 효과는 동시대와 후대 사람에게까지 윤리적, 도덕적 각성을 하게 합니다. 고백을 통하여 진정한 자아와 접촉을 하게 되는 것이며, 자아와의 접촉을 중시하는 문학은 낭만주의 문학의 전통입니다. 니체는 모든 위대한 철학은 창시자의 자기 고백이며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가족, 돈벌이, 정치에 대한 자기 기록이라고 하였습니다.
① 백석의 시
고백은 자신의 성찰적 행위로 “위선의 삶이 조건이 되었음을 개탄(한국문학평론가협회 편, 『문학비평용어사전·상』, 국학자료원, 2006, 178쪽)”하는 것입니다. 근대적 문학 양식은 고백을 통해 자아를 탐구하면서 형성된 것입니다.
백석의 시에는 자기 고백적 작품이 많이 보입니다. 아래에 소개할 「흰 바람벽이 있어」는 자기 고백투가 강한 작품입니다. 시 속의 화자는 어두운 방에서 쓸쓸하고 외로운 분위기를 돋우기 위하여 여러 쓸쓸한 정황을 떠올리며, 쓸쓸하고 외로운 분위기를 계속 변주합니다.
화자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 살아가도록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늘이 가장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며,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린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을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길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주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전문
백석의 시에서 우리는 강한 산문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시행들은 행을 나누지 않고 쓸 때 산문에 가까우나 시의 행을 나눔으로써 효율적인 리듬을 형성합니다. 행 사이에 적당한 휴지를 사용하여 리듬감을 주고 의미를 강화합니다.
시의 산문화는 느낌의 전달보다는 내용 전달을 목적으로 할 때, 특히 이야기를 구성할 때 효과적입니다. 이 시에서는 외로운 자신의 이야기를 산문형으로 계속 열거해 나가며 반복적으로 리듬감을 살려내고 있습니다. 흰 바람벽은 화자의 내면세계를 가시화시키는 영상 역할을 합니다.
1~7행, 8~18행, 19~27행, 28~35행 등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화자가 기거하고 있는 방의 풍경, 외로운 가운데 떠오르는 그리움의 대상, 화자의 운명적 처지, 자기 위안을 소주제로 합니다.
1~7행의 흰 바람벽은 전등이 지친 불빛을 내던지고 때가 절은 낡은 무명셔츠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는 곳입니다. 거기에는 좁다란, 쓸쓸한, 희미한, 때가 낀, 어두운 등 부정적 세계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8~18행까지의 흰 바람벽은 가난한 어머니와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의 모습이 상상으로 나타나는 곳입니다. 어머니의 추운 날 차디찬 물속에 손을 담그고 무와 배추를 씻노라고 시퍼런 손을 가지고 있고, 어여쁜 사람은 지아비와 마주앉아 저녁을 먹고 있는 모습입니다.
19~27행은 시적 전환을 이루고 있습니다. 화자의 쓸쓸한 자의식이 활자화되어 나타납니다. 화자 자신은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모습으로 살아가도록 태어났다는 운명론적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또 화자 자신의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또 슬픔으로 가득 찬다는 내면 성찰의 비극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28~35행은 1~27행까지의 화자의 이 같은 비극적 운명론에 대하여 화자 스스로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가치를 부여합니다.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1948년)은 그의 마지막 시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자기 고백적인 이 작품에 대하여 평론가 유종호는 “낙백(넋을 읽음, 영락)한 영혼이 펼쳐 보이는 비관론의 절창으로 한국 최상의 시의 하나”라고 극찬하고, “한국인의 생활 철학과 인생관이 집약된 대표적 사상시”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평론가 김현은 한국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이나, 한국인의 상상력의 원초적 장을 드러내며 폐쇄된 사회의 민속을 되살려내고 있지만 결국 체념, 수락의 수동적 세계관으로 후퇴한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굿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복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어서,
머리에 손깎지 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매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러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어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백석,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전문
단연 32행 5개 문장으로 되어 있는 백석의 대표작입니다. 첫 문장은 시적 화자가 처해 있는 정황을 나타냅니다. 아내와 집이 없어 쓸쓸한 거리를 헤매는 상황입니다. 두 번째 문장은 궁핍한 화자가 목수의 집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이라는 집주인의 방에서 객고의 신세를 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셋, 넷째 문장에서는 화자의 심리상황입니다. 화자가 머무는 방은 춥고 습기 차고 구질구질하고 답답하여 죽을 것 같은 심정입니다. 다섯째 문장은 현실적 한계를 느껴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려운 현실에서 새로운 전망을 생각하는 내용의 시입니다. 갈매나무는 전국에 분포한 가지에 가시가 있는 낙엽지는 나무입니다. 버들잎 모양의 잎이 마주 나 있으며, 여름에 노란 풀색의 작은 꽃이 피고 열매는 검고 둥글어 가을에 말려 이뇨제 등 약제로 쓴다고 합니다. 시인은 이 갈매나무를 인상 깊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공광규, 시인동네, 2018)’에서 옮겨 적음. (2020.08.27.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39) 고백적 시 쓰기 - ① 백석의 시/ 시인 공광규|작성자 화룡이의 행복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