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너인 줄도 모르게
공포에 질린 그때
계엄령의 공수부대만이 있는 그때
학살과 고문과 약탈로 얼어붙은 그때
온통 이 강산 패배주의에 빠져버린 그때
그 공포의 아가리에서
한 이름 없는 학도
종로 5가 6층 옥상에서 떨어져 죽어 부르짖었다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일어나자 마지막 한 사람까지 일어나자
우리의 싸움 역사의 정방향에 서 있다 우리는 이긴다
그 절망의 아가리에서
하나의 섬광으로 빛나며
모든 무덤과 노예의 그때
오직 그대가 승리를 일컬었다
김의기!
그대가 유신잔당을 이기고 승리를 일컬었다
죽어 피투성이 몸뚱어리로
(고은 詩. 김의기)
한번이라도 김의기(金宜基)의 얼굴을 보았거나 마주 앉아 보지 못한 사이에서 하늘이 맺어준 인연으로,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자형-처남의 관계가 되었다. 의기가 죽고 나서 몇 년 후 그의 누나 김주숙(金宙淑)과 연애 끝에 결혼을 했고, 지금은 두 아들에 딸 하나를 두었다. 그래서 대충 처가집의 분위기를 살필 기회가 생겼고, 한 인간-의기의 죽음과 삶의 흔적, 또 그로 인한 어머니의 삶에 대해서 비교적 소상하고 담담하게 주목할 수 있었다.
내가 처음으로 의기의 문제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된 것은 25년 전 ‘김의기 열사 추모사업회’에서 발간한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추모집에 실린 의기의 일기를 읽고 나서였다. 나는 그의 진솔한 삶-나라를 사랑하는 착한 마음씨, 군사독재와 독점재벌에 대한 투철한 저항정신, 예수님과 사람 사랑하기, 농촌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과 해박한 이론-의 역역한 삶의 흔적을 살피면서 너무나 부끄러워 아내도 모르게 이불속에서 한참 울었다. 의기의 삶은 한마다로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저에게 그의 삶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의기는 사랑의 화신”이었다고 서슴없이 말하고 싶다.
그의 가슴속에 무엇이 불붙고 있었기에 나라와 민족을 그토록 사랑하고, 마침내는 민주와 역사의 제단 앞에 자신의 온몸을 남김없이 내던졌는지. 그가 의기충천하여 자신의 올곧은 삶에 대해 정진할 수 있었던 것은, 마치 ‘모세의 가시덤불 이야기’(출3:1-12)를 연상하듯이 그의 가슴에 뜨거운 사랑의 불덩이가 솟구쳐 올랐기 때문이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동생이 언제나 작업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고 다니는 게 안쓰러워 양복 한 벌을 사주었는데, “좋은 옷 입으면 편해지고 싶고 편해지면 더 편해지고 싶어 도둑 같은 마음이 들어서”하고 사양했다고 한다.
그래서 의기의 대학졸업사진도 셔츠만 입은 채였고, 의기의 추모행사 때마다 이때 찍었던 졸업사진이 영정으로 걸리곤 했다. 의기가 대학을 입학하여 졸업을 앞두기까지 의기집안은 정말 빈한한 살림살이였다. 장모님께서 어느 철공소 부엌살림을 맡아 생계를 유지했으니 집안형세가 오죽했겠는가. 그 당시 장모님께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기 위해 동사무소를 가셨는데, 열 손가락의 지문이 다 닳아 도저히 찍을 수 없었단다.
▲ 김주숙 사모에게 추모집을 헌정하는 김홍기 감신대 총장
이런 가정형편에서 의기는 상아탑에 매달리거나 교과서에 안주하기보다는 혁명적 삶의 전환을 시도했고 그의 일기를 보면 언제나 철저한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 자신의 진로를 모색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의기는 자신의 삶의 근거를 자신이 태어난 농촌에 두었고, 대학 4년 동안 줄곧 과학적 세계관에 접근하여 자신의 진로에 대한 에너지를 축적하였고, 졸업과 동시에 자신의 고향인 영주에 내려가 농사를 짓기로 작정했다. 그러던 중 1980년 5월 광주항쟁에서 계엄군들의 처참한 살육행위를 목격하고, 진상을 밝히기 위해 진리에 목마른 선구자처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겨두고 그해 5월 30일 기독교회관 6층에서 계엄군의 탱크 위에 한 잎 꽃잎처럼 주검으로 떨어졌다.
자식의 죽음으로 인한 비통한 심정이랴 부모님만큼 애절하고 한이 맺힐 사람이 누가 또 있겠는가? 그러나 의기의 죽음이 작게는 그의 가족 가운데 다시 의기(義基)로 부활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의기의 죽음을 개인적 한이나, 가족사의 문제를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그의 어머니 권채봉 집사 아버지 김억 집사는 천 날을 하루같이 의기가 원했던 참 세상- “높푸른 하늘을 우러르며 자유 시민으로 맑은 공기 마음껏 마시며 환희와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그가 남긴 동포에게 드리는 글中)-의 도래를 빌며 살다가 몇 해 전 두 분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가셨다.
▲ 푸른학교 학생들의 합창
2000년 김의기는 광주민주화운동 특별조치법에 따라 광주희생자로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해 5월 광주 5.18묘역으로 이장했다. 해마다 5.18 기념일이 되면 장모님을 모시고 광주를 방문했었다. 장모님은 연세가 많으셔서 거동이 원활하지 않으셨다. 그래도 매우 강하신 분이셨다. 역사관이 분명하셨고 그야말로 깡으로 버텨 오신 분이셨다. 아내는 장모님을 십분의 일만 닮는 것이 소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로 체구는 작지만, 큰 거목(巨木)같으신 분이셨다. 이따금 장모님이 생각난다. 참으로 그립고 보고 싶다.
나의 처남 김의기가 살아 있으면 서강대를 졸업하고 신학을 해서 농촌 목회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지금 살아 있다면, 오십 초반이 되었을 것이다. 나와 좋은 동역자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가는 사람 붙잡지 못하고
가게 만든 아픔을 견디며
얼어붙은 들판이 꿇어 엎드린 사람아
알몸 맞잡아 온 지난 세월
다 주고 다 받고
다 줘버려 떠난다는 당신은 그것으로 족한가
사랑이 죽을 만큼 강하다면
사랑은 파멸을 넘어서는 것
헤어져 가는 발길에
어두운 하늘이 내리고
단지 징그러운 몸뚱이만이
흐느적거리며 춤추는 것
사랑을 버리고 영혼을 기만하고 희롱하는
형벌 받은 사람아
얼어붙은 들판에 꿇어 엎드린 사람아
사랑은 조용히 사라져야지
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일까
(박철 詩. 사랑은 왜 갑자기 떨어지는 것인가)
몇 차례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을 방문할 때 마다 다 기억할 수 없는 원혼들의 호곡 소리가 오버랩 되어 가슴을 저미게 한다. 치유할 수 없는 역사의 상흔에 손을 대는 것 같아서 발걸음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다.
▲ 김의기 열사 추모 30주기 기념예배 감신대 체플
김의기가 죽어가면서 외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토록 강한 신념과 의지를 불태우며 일구고자 했던 아름다운 삶의 이상향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의 죽음은 결코 자신의 삶을 저주하거나 포기한 비겁, 나약한 불신앙의 행위로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는 생명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생명의 모독을 너무나 참을 수 없어서 분노와 저항의 몸짓으로 우리를 대신해 죽어간 것이다. 그러한 불의한 세상에서는 목숨 연명 그 자체가 참을 수 없는 모욕이며 죄악일 수도 있다는 것을 광주의 5월은 가르쳐 주고 있다. 그가 참 생명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지 않았다면 역시 불의한 세력 앞에 모르는 척 했으면 그만이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잠에서 깨어날 것을 외쳤다. 불의와 살상에 감금되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를 향하여 처절한 주검으로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라고 외쳤던 것이다. 우리는 80년 5월의 한 맺힌 죽음들을 그리고 지금까지 죽어간 수십 명의 열사들의 피맺힌 절규를, 이름 없이 죽어간 노동자·농민들의 죽음의 의미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살아가야 한다. 김의기가 떠나 간지 30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이 땅의 현실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기만과 허위의 잿빛 조국은 언제 그 기백이 살아날 것인가? 그러나 실망할 수는 없다. 낙담하여 패배주의자로 살아 갈 수만은 없다. 세계 역사 가운데 자유·인류사회를 위해서 수십 명의 젊은이가 분신 자결한 유례가 없으므로.
▲ 감리교청년연합회 옛동지들의 5.18묘역 방문
지난 월요일 처남, 김의기가 묻혀있는 광주 5.18묘지를 가게 되었다. 약속을 지키게 된 것이다. 아내는 동생의 무덤에 앉자마자 서럽게 흐느껴 울었다. 오랫동안 침묵만이 흘렀다. 아내가 울자 아이들도 말이 없다. 산소에서 잡초를 뽑고 집에서 준비해 간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봄 햇살이 따스하다. 아내는 오랜 침묵을 깨고 아이들에게 말한다.
“의빈아, 은빈아! 지금부터 엄마 말 잘 들어. 너희 삼촌이 여기 왜 묻혀 있는지 알고 있지? 1980년 너희 삼촌은 대학교 4학년이었어. 지금 살아 있으면 52살이 되었을 거야. 그때는 학생이어서 장가도 못 가고 죽었어. 그러니 부인도 없고 자식도 없지. 지금은 엄마 아빠가 이렇게 삼촌을 찾아오지만 엄마 아빠가 죽으면 아무도 찾아올 사람이 없어. 사람들 기억에 도 잊혀 지겠지. 그러니 너희들이 삼촌을 기억하고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야 삼촌이 덜 쓸쓸할 것 같아서. 엄마 말 명심해. 알았지?”
두 아이는 짧고 분명하게 “네”하고 대답한다. 내가 막내 은빈이에게 묘비문을 크게 읽으라고 했다. 그러자 은빈이는 큰 소리로 비문을 읽는다. 두어 시간 머물다 대학시절, 은사였던 서남동, 명노근 교수님 무덤에도 들려 안부 인사를 올리고, 내려오는 길에 참배단에도 들렸다. 5.18민주화 운동과 관련되어 희생된 분들의 영정 사진이 빼곡하게 걸려 있다. 저 분들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만큼이라도 된 것이지 싶으니 더욱 숙연해 진다.
▲ 감리교청년연합회 옛동지들의 김의기 30주기 추모예배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부산으로 오는 길, 아내는 차 안에서 몇 번이고 고맙다고 한다. 고마울 게 무에 있겠는가. 아내의 마음을 잘 살피지 못한 내가 나쁜 사람이지. 어제 서재에서 주일 설교 준비를 하고 있는데, 아내가 들어왔다. 동생 의기 이야기가 한국근현대사 고등학교 2학년 교과서에 실렸다는 것이다. 책 중간쯤에 우리나라 민주화 과정에 희생당한 김의기, 아내의 동생 김의기가 1980년 5월 30일 서울 기독교회관 6층에서 광주학살의 진상을 촉구하며 투신할 때 뿌렸던 유서 <동포에게 드리는 글> 일부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었다.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에 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과 머리를 짓이겨 놓으려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보이지 않는 공포가 우리를 짓눌러 우리의 숨통을 막아버리고 우리의 눈과 귀를 막아 우리를 번득이는 총칼의 위협 아래 끌려 다니는 노예로 만들고 있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무장한 살육으로 수많은 선량한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뜨거운 오월의 하늘아래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악랄한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과 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분칠해지고 있는 것을 보는 동포여,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김의기의 동포에게 드리는 글에서-
▲ 아내 김주숙이 동생에게 김의기 추모집을 헌정하며
세월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할 것인가? 세월이 많이 달라진 것이 아닌가. 아들의 죽음도 억울한데 거기에다 빨갱이 취급을 받으며 살아오신 부모님의 눈물과 아픔을 아는가. 부모님은 이미 세상을 떠나셨고 단 몇 줄이라도 처남의 이야기가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으니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인가.
동생을 끔찍하게 사랑했던 아내, 김주숙. 내가 백 마디의 위로의 말을 전해준들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아내에게 작은 위로와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의가 불의보다 강하고,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경구가 새롭다. 세상이 조금 밝아지려는가. 희망이 오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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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기 열사 연보
1959년 4월21일 경북 영주군 부석면 용암리 4남 2녀 중 막내로 출생
1970년 2월 영주 중부국민학교 졸업
1976년 2월 배명고등학교 졸업
1976년 3월 서강대학교 경상대 무역학과 입학. KUSA가입
1977년 서강대 KUSA 하계 농촌활동대장 역임
감청 농촌 선교위원장
감정 농촌 선교위원장
한국기독청년협의의회(EYC) 농촌 선교 분과위원장
1980년 5월30일 오후 5시경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남기고 종로 5가기독교 회관 6층 (607호)에서 투신 순국
1980년 6월 2일 경기도 금촌기독교 공원묘지에 묻힘
1990년 서강대학교 명예졸업장 수여
1991년 5월18일 광주민중항쟁 유가족회로부터 5월 시민상 수상
2000년 정부로부터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로 인정받음.
2000년 5월 광주 5.18묘역(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장
*김의기 판화는 박불똥 화백의 그림입니다. 박불똥 화백은 이 판화를 그렸다고 수배를 당하고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