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경상일보 신춘문예 / 양진영
폐가를 어루만지다 / 양진영
허물어지는 것은 새것을 위한 눈부신 산화
나는 철거될 농가의 마룻바닥에 가만 귀 기울인다
그들이 나눈 말이 옹이구멍에서 바스락대고
안 보았어도 떠오르는 정경이 살포시 열린다
문풍지에 꽃핀 청태靑苔는 그들의 회한 혹은 눈물의 자국
뒤틀린 문틀만큼 가족이 부서지는 아픔도 맛보았으리라
거북 등처럼 갈라진 목재에 왜,
산골에서 밭을 일구고 사는 노모의 손등이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인연의 무결이 배어 있을까
헐리는 것은 거룩하다 그것은 촛농과 마찬가지
스스로를 태워 주위를 밝히고 남은 잔해이므로
뜨락에 소나무는 송홧가루를 날려 금빛 보료를
까는데
새집을 짓는다는 설렘은 어디 가고 나는
누가 잠든 것 같아서
누가 숨어서 부르는 것 같아서 자꾸만
방바닥을 어루만진다
평생 주인을 덥히며 보낸 폐가의 일생은
불이었다
나는 안방에 누워 그들의 온기를 느낀다
코끝을 간질이는, 낯익은 엄마 냄새
햇볕을 모아 따스함을 지피는 구들장
그 열기로 앞뜰에 꽃이 피고 있다
[당선소감] 묵은내 나는 시에 주눅 든 날 어루만져 줘 감사
가끔 내 시를 들여다본다. 묵은 냄새가 난다. 수백 년간 궤에 담겨 있던 도자기 같은. 이 골동품의 가치는 아는 분만 알 터. 남들이 낡았다고 외면하는 시에 낙점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늘 서정빛을 띄는 나의 시심에 한숨 짓는다. 이른바 미래파적인 시, 현란하고 실험적인 산문시를 보면 주눅이 들 때가 많다. 내 시는 고풍스러운 것인가, 촌스러운 것인가? 자주 반문해 본다.
당선 소식은 움츠러든 나를, 내 시의 제목처럼 어루만져 준다.
나는 시류를 따르지 않고 나만의 시를, 아래 같은 시를 쓰겠다고 다짐한다.
한글 맞춤법이 정확한 시, 인문학적 소양이 배어나는 시, 미학과 철학이 겸비 된 시, 당대의 문제를 직시하는 시, 사회적 성찰이 깃든 시, 그래서 사유가 깊은 시.
누군가의 삶이 내재된 시, 타인을 배려한 시, 독자와 소통하는 시, 언어를 추구하지 않는 시, 화려함과 속됨에 기대지 않는 시, 무목적적인 시, 그래서 살아 있는 시.
[심사평] 능숙이 흠일 정도로 시적 구조가 탄탄한 작품
예심을 거쳐 심사자에게 우편으로 배달된 시들은 26편이었다. 시적 수준이 모두 만만치 않았다. 다 무엇인가가 있었으나 또 무엇인가, 한 가지 부족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너무 많이 말하고 있다거나, 혹은 반대로 너무 말하지 않아 필연성이 결핍된 작위적인 시를 보여주고 있다거나, 그럼으로써 진정성과 절규성이 결여되었다거나 했다.
몇 차례의 독해를 거쳐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다음 네 편이었다. ‘빙폭 외’ ‘물레돌리는 부추밭 외’ ‘낙서를 찾아가는 시간 외’ ‘폐가를 어루만지다 외’.
마지막으로 남은 시는 ‘폐가를 어루만지다 외’였다. 이 시는 너무 능숙한 것이 흠일 정도로 시적 구조가 탄탄하게 직조돼 있을 뿐 아니라 그 표현의 능숙함, 그에 더불어 진정성도 느껴지게 하며 그 절규도 강하게 전해왔다. 함께 응모한 시들의 수준도 고르다고 생각됐다. 따라서 ‘폐가를 어루만지다 외’를 당선작으로 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시인에게 걱정되는 것은 앞에 언급한 시적 재능들 때문에 너무 이른 정형화에 이르지 않을까하는 것이다. 시의 정형화란 상투화이며, 화석화이다. 그점을 염두에 두면서 계속 정진한다면 뛰어난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한국 현대시의 별이 되기를….
- 심사위원 : 강은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