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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고령가소년 살인사건 영화 GV나
영화소개때 이 2.28을 이야기하려 했는데
2월28일 이제서야 이야기하네요.
△대만에서 2.28 대학살 소개 영상.
지난 2016년 5월
차이잉원 대만 총통 취임식때
2.28학살장면이
취임식 식전행사에 등장했죠.
차이잉원 총통 취임식 식전 행사에 나온
2.28 학살묘사.민진당 집권이라 가능한듯.
아마도 팟캐스트 "그것이 알기싫다" 를
들어보신 분들은 대만환타의 설명등으로
대만 역사 이야기에서 2.28을 들어
보셨을겁니다.
대만은 1895년~1945년까지 일본 식민지였죠.
식민지 조선보다 일본에 대한 저항이
적었지만 전쟁말기 일본의 착취가 심해지고. .
대만인(대만 거주 한인들. 한인=한족.
대만 고산족들은 1930년 우서사건으로
한번 일본에게 학살당하는 가슴아픈 사건이
있었죠)들도 일본의 2등국민 취급에 분노
하고 있었기에 전쟁이 끝나고 내심 장개석
국민당 정부에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같은 한족이니 잘해주겠지. .
그러나 그 생각은 곧 산산조각이 납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곧이어 국공내전
재개로 인해 대륙에서조차
인플레이션과 인력, 물자 부족 문제로
곤란을 겪고 있었던데다가,
대륙의 역사와는 상당히 이질적이었던
대만에 대한 이해도가 장개석 국민당정부는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일부 국민당원은
본성인(원래 대만에 거주하던 한족)들을
일제의 중국침략에 협조한 조력자들
정도로 간주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정부의 요직은
외성인들이 차지하였고,
그나마 차지한 소수 본성인들의
임용도 본토에서 활동한
사람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본성인들은 다시 2등 국민으로
전락하며 차별과 착취를 당하는
모양새가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엔 대만이 국공내전의 전선에서
멀리 떨어져있었던 까닭에
국민당이 갈등을 조정할 유능한
인재를 대만에 파견할 수 없었던
상황도 한 몫 합니다.
그리고 이런 조치에 배신감을 느낀
본성인들은 국민당에 대한
기대감만큼 실망감 역시 매우
커지게 됩니다.
당시 돌았던
"개가 떠나니 돼지가 왔다."
라는 말이 당시 이들의 심정을
잘 대변해주는 말인데,
일본인은 개 같이 대만인들을
괴롭히고, 국민당은 돼지 같이
대만의 재산을 먹어치우기 바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장개석(장제스)이 대만을
통치하는 행정장관에 진의(중국식 발음
천이:이하 천이라고 하겠습니다)를
임명하는데 이 천이가 얼마나 탐욕스럽고
무능한지 보여주는 미국의 문서는 그후
공개되었죠.
【신임장관(천이)은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그 섬에 도착하였는데 수행원들은
교묘하게 타이완(대만)을 착취하기에
바빴다……. 군대는 정복자처럼 행동하였다.
비밀경찰은 노골적으로 민중을
협박하며 본토에서 온 중앙정부의
관리가 착취하는 것을 용이하게 하였다.”
미 국무부, 중국백서】
△사건의 발단이 된 린장마이.
옛날 2.28을 다룬 책에는 린장마이를
노파로 소개했는데 사진에서 보듯이
노파는 아니었죠.
1947년 2월 27일, 타이베이 시
위엔환(圓環) 빌딩 안의 복도에서
과부 린장마이(林江邁)가
담배노점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 중국 대륙에서 담배는
전매품이 아니었지만
대만에서는 정부의 전매품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매국 직원과 경찰이
이 노점을 단속하러 갔는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경찰이
총신으로 머리를 때리는 등
린장마이를 강압적으로
대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과 학생들이
거리로 모이고 거세게 항의하자
겁에 질린 경찰과 전매국 직원이
총을 발사합니다.
△경찰과 전매직원이 발포하여 사망한 당시
사건을 그린 판화도.
위에 차이잉원 총통 취임식 식전행사에도
이 판화도가 배경이었죠.
이 발포로 대학생 천윈시가 총에 맞아
사망합니다.
천윈시는 총에 맞은 다음 날인 1947년
2월28일 사망하고 마는데, 이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국민당이 운영하고 있던
경찰서와 군 부대 본부로
몰려들어 해당 공무원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허나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급기야 경찰서에 난입, 경찰관을
구타해 사망케 하는 사태로 이어졌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2월 28일 당일에는 타이베이시
전역에서 파업과 철시 및 데모대의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기 시작했고,
그 다음 날인 3월 1일 이후엔
전 섬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 때 본성인들과 외성인들 사이의
갈등도 폭발했는데,
이는 결국 상호간의 유혈사태로
번지기도 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었던 마당에
특권 독점에 따른 갈등도 있었고,
거기다 의사소통까지 잘 되지 않으니
갈등이 결국 폭력으로 번진 것입니다.
지금은 대만에도 표준 중국어를
사용하지만 당시 대만 내성인들
말은 마치 오늘 한국의 육지와
제주도 방언말같이 의사소통이
힘들 정도였죠.
제주 방언 생각하심 됩니다.
그러지 않아도 제주4.3희생자분들과
대만 2.28사건 희생자분들은 아직도
교류한답니다.
당시 대만 본성인이 외성인과
국민당에 저항할 때 두 집단을
구별한기준은 대만어/
일본어구사능력이나
기미가요 제창 가능 여부였는데,
대만 본성인들은 저항의
메세지를 일본어로 방송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외성인이나
국민당에서는 '매국노'들이라면서
강한 반감을 보였으니
두 집단간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었죠.
3월 2일, 타이완의 지식인들은
'2.28 사건 처리 위원회'를 구성,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그리고 이에 대만 성 행정장관 겸
총사령관 천이는 방송을 통해
다음 4개 사항을 공포하였습니다.
1. 계엄은 즉시 해제한다.
2. 체포된 시민은 석방한다.
3. 군인과 경찰의 발포를 금한다.
4. 참의원에서 대표를 추천하여
정부 관리와 같이 공동으로
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번 폭동 문제를 처리토록 한다.
무차별한 발포를 하는 군·경을
대신하여 학생과 청년들로
조직된 치안 봉사대로
치안을 유지하고
처리위원회의 공정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3월 4일 이후부터 사태가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처리위원회의 성격이
점차 2·28 사건에 대한
수습을 넘어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고,
여기에 대만 본토인들의 지지가
더해지면서 대만 자치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32개조 요구'까지 나오자
국민당 측에서도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기류가
강해졌고 진압을 하기로 결심합니다.
타이완 섬 행정장관 겸 총사령관
천이(陳儀)는 겉으론
대만 현지 주민들과 대화를
모색하는 척 했지만,
한편으로는 대륙 본토에
진압 병력의 증파를 요청했습니다.
사건이 대만 섬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대만내 자체 병
력으로는 시위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장개석은
"이번 폭동이 정부 전복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말에
국공내전으로 바빠서
증파안하려던
맘을 바꿔
결국 3월 8일 증원군을
대만에 파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3월 8일부터
대대적인 진압이 시작됩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국민당군 21사단이
대만 북부에 투입되면서
시작된 진압은 일주일간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지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사건 발생 50주년에 나온 보고서에
따르면, 약 1만 8천명에서 2만 8천명.
또한 이와 별도로 외성인 7~8백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학살과 약탈로 인해 대만 전역이
초토화되었고,
결국 시위는 강제 진압되었습니다.
당시엔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수상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사살당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아무래도 대만 역사에 무지한
국민당군 입장에서는 2.28 관련
시위 참여자들이 순 매국노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당시엔 대만 섬 외부가
고향인 국민당군 장병들과
본성인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한 번 수상한 사람으로
오해되면 돌이키기 어려웠을 정도였죠.
2.28 사건 당시 타이베이시에 모인 군중들.
국민당군은 진압 과정에서 수상한 사람에게 표준중국어로 말을 걸었고 대답하지 못하면 친일파로 간주해 무자비하게 학살했습니다.(...)
그리고 몇몇 그림을 자세히 보면
피해자들 뒤에 바다가 묘사되어
있는데 몇 명을 사살하면
시체들의 무게로 사람들이
줄줄이 바다로 빠졌다고 합니다.
2.28 사건의 희생자들의 추적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
장개석은 심지어
'2.28 사건 처리 위원회' 인사들의
체포를 명령, 위윈회의 구성원
상당수를 처형합니다.
그리고 결국 5월 16일
장개석이 공식적으로
계엄령을 종결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한동안 말하기만 해도
감옥에 가야했던 2.28은
1995년 리등후이 총통때
공식적으로 사과를 하였고.
현재 2월 28일은 대만에서
'평화기념일'이란 날로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대만이 자신들을
부르는 중화민국의
공휴일 중
'실질적 영토(=타이완 지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념하고 있는 날'은
이 날이 유일합니다.
이 날에는 조기(청천백일기)를
게양하게 되어 있는데, 이 사건이
이 깃발 아래에서 일어난
학살이란 점을 생각해보면
꽤나 아이러니하고 슬픕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4.3희생자 유족회와
대만 2.28유족회가 상호방문 정기교류
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제주4.3희생자유족회(회장 양윤경)와
대만 2.28 유족회(이사장 번신행)가
상호 방문 등 정기 교류를 진행키로
합의해 관심을 끌고 있다.
유족상호간 정기교류를 협의하기
위해 27일 대만 2.28 국가기념관을
방문한
제주4.3희생자유족회
오임종 상임부회장 현봉환 부회장 등
실무진들은 이날 국가기념관
회의실에서 대만측 2.28 유족회
대표들과 만나 정기 교류회를
갖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양측은 매년 1회씩 두 지역을
상호 방문키로 합의하고
상호 교류를 위한 협약을
추진키로 합의했다.
이날 오 상임부회장은
제주 4.3과 대만 2.28 사건은
부당하게 집행된 공권력에
희생된 비슷한 사건"이라면서
"유족 상호교류를 통해
'평화정신'을 고양하고
아픈 역사를 치유하는
계기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이에 번신행 대만 2.28 유족회
이사장은
"비슷한 아픔과 역사를
가진 제주 4.3희생자유족회와
정기적인
교류를 환영한다" 면서
"오는 제주 4.3 70주년 행사에도
여건이 되는 회원들과
함께 반드시 방문하겠다"고 말했다.
번 회장은
"아직 다른나라 유족회와는
정기 교류는 없다"면서
"제주 4.3희생자 유족회와의
교류가 첫 공식 정기해외
유족회와의 교류" 라고 강조했다.
이날 4.3희생자유족회 실무진들은
또 대만 2.28유족회의
배.보상 진행과정을 청취하고
추념일 공휴일지정 추진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한편 제주4.3 희생자유족회
실무진들은 28일 2.28
화평공원에서 열린 2.28사건
제 71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아. 대만 2.28학살을 불러온
천이는 그 벌을 받게 됩니다.
다만 2.28때문이 아닌
장개석에 의해서이죠.
△대만 행정장관 천이.(1883~1950)
학살원흉 중 하나인 대만 성
행정장관 천이는 사건이 끝나고
해임되었다가 1년 뒤인
1948년에 저장 성(절강 성)
정부 주석으로
다시 등용되었는데,
국공내전 도중에 중국 공산당에
투항하려했다가 발각되어서
1949년에 체포되었고,
1950년에 자신이 사고를
쳤던 바로 그 타이완 (대만)땅에서
처형되었습니다.
1950년 6월18일 타이베이
육군부대에서 총살형으로
집행됩니다.
공산당에게 같이 도망가자고 했던
탕언보가 장개석에 고자질했죠.
【탕언보는 1949년 1월, 난징-상하이-
항저우 경비사령관에
부임하여 공산군의 장강(양쯔강)
도하작전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옛 후견인이었던 천이(陳儀)가
장개석에 모반하고 함께
공산당에 투항하자고
탕언보에게 권유했으나,
탕언보는 이를 바로 장개석에 일러바친다.
일설에는 탕언보가 장개석이
천이를 죽이리라 생각하지 않고
가택연금 (장학량처럼)또는
타이르는 정도에 그칠거라 생각하고
일러바친거라고도 하지만 알수 없다.
그리하여 천이는 1950년 반역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설마 장개석이
처형까지는 하리라고는 생각 못했던
탕언보는 은인을 고발해서 죽게했다는
심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게 되었고.
일본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떠난후
1954년에 병으로 죽었다.】
첫댓글 오늘도 하나 배우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