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를 내보내면, 영혼이 하는 일이 그대로 보여진다.
지나온 과거를 생각해 보면 필자가 항상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면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해서 그 사람은 그렇게 잘할까였다. 누구나 열심히 하겠지만 도저히 따라갈 수없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정신이 발달한 까닭이었다. 이것이 보이지 않아서 겉으로 보면 알수 없었기 때문에 더 궁금했던 듯하다. 그리고 드러나는 물질로 우리 모두가 노력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정신이 발달하지 않으면 잘하기는 쉽지가 않다. 즉 물질로 정신을 발달시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요행히 정신이 발달하기 좋은 환경을 만나서 발달되는 것도 뭔가 불공평하다는 생각이다. 요컨대 누구나 정신을 발달시킬 수있도록 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자신의 정신을 발달시킬까가 질문이다.
여담으로 음악을 들을때도 정신에 자극(?)을 주는 음악을 듣게 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감동을 받는 것이다. 슈타이너의 이론으로 말하면 정신과학적 요소가 움직이는 것, 필자의 챠크라를 빛이 나도록, 또는 회전하게 만드는 그런 음악이다. 되풀이 하지만 들으면서 항상 느끼는데 연주하는 사람의 정신이 발달했기 때문에 그렇다. 매일 듣는 음악은 베토벤의 교향곡 9개, 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짐머만'의 연주, 안나 토모와 신토우(불가리아 출신 성악가)의 노래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자신의 정신의 수준만큼 들린다는 것이다. 필자도 처음 들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 많이 있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누구라도 삶을 살면서 정신이 어려운 상황을 많이 겪는데,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으면 그런 어려움이 해소되는 느낌을 받는다. 베토벤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것을 음악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에 그렇지 않겠는가 한다. 예를 들어 속상했던 일, 짜증나는 일 등, 누구라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일들이 잠재의식에 찌꺼기로 남아있는데, 그런 찌꺼기가 제거되어서 빠져나가는 느낌, 그래서 홀가분한 상태가 되어서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베토벤이 그런 엄청난 고뇌를 겪지 않았다면, 그런 음악이 나왔을까. 이런 관점에서 어려움은 정신이 표현되는데 오히려 좋은 재료이다. 정신이 그런 것이므로 더욱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다. 어려움을 겪을 때 반짝하고 빛이 나는 것이 정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의 정신이 드러나는 것, 표현되는 것이 예술이기에 정신의 발달은 지금 내가 이루어야 할 이상이다.
짐머만의 연주는 필자의 영혼을 울린다. 특히 심장의 챠크라가 반응을 한다. 이것은 짐머만의 영혼이 음악에 반응을 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영혼이 반응을 하는 것이다. 또 짐머만이 영혼이 반응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반응하도록 연주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짐머만은 자신의 영혼이 반응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영혼의 반응을 알려면 자신의 내부에 굉장히 집중하고 침잠해야한다. 그래도 보이지도 않고 아무런 단서도 없는 자신의 내부에 집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의 짐작에 따르면, 짐머만은 5 세부터 음악을 접했다고 한다. 5세 무렵이면 우주에 자아가 연결된 상태, 자아가 흐릿하게나마 우주 천체음악을 기억하는 상태이다. 그 시기에 음악을 접해서 우주 천체음악을 기억하고, 그것이 영혼에 연결되어서 영혼이 반응하는 음악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짐머만은 연주 시 자신이 치는 피아노를 항공편으로 공수하고, 또 연주 시 핸드폰 소리가 울리면 연주를 하지 않고 나간다고도 한다. 자신의 영혼이 반응하는 것을 알려면 자신의 내면에 굉장히 집중해야 하기 때문인 듯하다. 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해서 피아노를 치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이 반응하도록 하기 때문에, 듣는 사람의 영혼을 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영혼이 현실에 매몰되어 있다면, 영혼을 깨우는 것이 순서이지, 연습은 그런 것이다. 만약 이런 상황을 모른다면 음악을 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성악가 안나 토모와 신토우 노래를 들으면 온 몸의 혈(기가 다니는 길)이 살아나는 듯하다. 마치 새싹이 돋는 힘이 전달된다고 할 수도 있다. 새싹이 돋는 힘은 에테르체이다. 성악가 안나 토모와 신토우의 에테르체가 그런 힘을 지녔기 때문에 그럴 수가 있는 것이다. 누구나 에테르체를 지니고 있지만, 이렇게 움직이는 것은 성악가 안나 토모와 신토우의 정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슈타이너의 주장에 따르면 자연의 요소(물, 흙, 빛, 공기)가 우리 몸을 구성하고 또 자연의 힘이 성장시키지만, 나아가 우리 몸은 예술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한다. 예컨대 척추(육체)가 에테르체, 아스트랄체에 감싸이고 그 안에 자아가 들어간다. 또 우리가 팔을 올린다면, 육체가 팔을 올린다고 해서 올려지지 않는다. 먼저 자아가 육체인 팔을 움직여야 한다. 이것이 정신이 물질육체를 지배한다고 하는 것이다. 성악가 안나 토모와 신토의 정신이 발달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정신을 발달시킬까? 먼저 인간의 세 가지 의식을 알아야 하고, 세 가지 의식 중에서 꿈꾸는 의식만이 잠자는 의식에 연결된다는 사실까지 파악해야 한다. 세 가지 의식은 깨어있는 의식, 꿈꾸는 의식, 잠자 의식이다. 깨어있는 의식은 현실의 삶에서 사고를 하는 의식이다. 자아가 상속에 들어있으므로 상을 벗은 자아를 만나지 못한다. 꿈꾸는 의식은 잠을 자는 동안 우리가 꿈을 꾸는 의식이나 반드시 체험을 해야하는 의식이다. 우리가 늘 겪는 감정이다. 하지만 체험해야 자아(잠자는 의식)를 만나므로 감정만으로는 어렵다. 간절하게 열망, 사랑해야 아주 조금 자아에 연결된다. 현실에서 우리가 정신의 힘을 쓰고자 할 때 하는 방법이다. 잠자는 의식은 무의식으로 현실의 삶에서 절대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나, 의지가 내재하므로 반드시 연결되어야 한다. 자아가 의지에 연결되어 있어서 자아를 만날려면, 우리가 현실에서 의지를 내어야 한다.
다음은 정신을 발달시키는 방법이다. 에테르체가 우리 몸의 생명을 유지하고 남은 힘이 추상적 사고력으로 발달한다. 이 힘이 작용하도록 에테르체를 자유롭게 두어야 한다. 에테르체가 우리 몸의 생명 체계를 만드는 시기는 0-7세 사이이고, 이 작업이 끝나면 에테르체가 탄생하여 발달한다. 에테르체는 무언가 만드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림과 조각 그리고 음악을 접하면 도움이 된다. 에테르체가 그렇게 발달하면, 에테르체는 보고 듣는 것을 상으로 만드는 작업을 한다. 이 상이 이미지로, 에테르체가 보여주면, 아스트랄체를 통해서 영혼이 작업하게 된다. 예를 들어 삼각형을 공부한다면, 에테르체가 삼각형을 상으로 보여주고, 이 상을 영혼이 작업하여 파악하는 것이다. 이것이 추상적 사고로 나아가는 길이다.
여기에서 에테르체가 만든 이미지를 지우면, 영혼이 하는 작업이 드러나므로 영혼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비약하면 통상 우리 모두는 영혼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혼이 반응하도록 하지 못한다. 만약 파악하면 영혼이 반응하도록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럴려면 에테르체가 먼저 이미지를 만들어야 한다. 이 작업을 우주에 연결된 에테르체가 한다. 인간이 지닌 에테르체는 탄생 시 받아들인 에테르체이다. 우주 에테르체와 같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현실 삶을 사는 인간이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업을 할려면 자신의 에테르체와 우주 에테르체가 연결되어야 한다. 이는 명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가만히 자신에 집중하면 자신의 몸을 흐르는 기(생명의 힘)와 식물에 흐르는 기가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기를 우주로 확대하면, 우주 에테르의 존재가 파악된다. 그리고 자기 몸에 흐르는 에테르체를 우주 에테르에 연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갈려면 아스트랄체의 존재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영혼이 현실의 감정에서 벗어나야 햔다. 자신의 감정을 가만히 바라보면 아스트랄체의 존재, 자신의 몸을 구름처럼 감싸는 존재, 또 자신의 몸 안에서도 아스트랄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수가 있다. 아스트랄체의 존재가 파악되면, 마찬가지로 우주로 확대한다. 여기까지 되면 에테르체가 만든 상을 내보낼 수가 있다. 이미지를 내 보내면 영혼이 하는 작업이 파악된다.
이때 몸을 통해서 드러나는 영혼의 작업이 아닌, 영혼 본래의 작업을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영혼 본래의 작업은 자아가 원하는 것이다. 현실 삶에서 자아는 상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본래의 자아가 원하는 작업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슈타이너의 주장대로라면 인간이 물질 육체를 입기 전 정신의 나라에서 원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현실 삶에서 자아가 원하는 작업은 모르지만, 내가 원하는 작업을 하도록 할 수는 있다. 그것이 인류를 위한, 인류의 발걸음을 한 발짝이라도 앞서게 하는 일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이 작업 중에서 가장 무난한 작업이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짐작하건대 인류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현실 삶에서 여기까지 들어간 사람들이다. 그랬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감동시킬 수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일을 총괄하고 독려하는 존재가 자아이다. 자아가 육체, 에테르체, 아스트랄체가 제 기능을 하도록 격려하지만, 만약 자아가 잠을 잔다면 어려울 것이다. 자아가 잠에서 깨도록, 상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에 집중을 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자아도 부응해서 상을 벗어날려고 한다. 나의 내부 정신은 정신의 속성에 부합하기만 한다면 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것이 정신의 길이고, 내가 가야 하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