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밭
사윤수
이 짐승은 온 몸이 초록 털로 뒤덮여 있다
머리털부터 발끝까지 남김없이 초록색이어서
눈과 코와 입은 어디에 붙어있는지 모르겠다
초록 짐승은 땅 위에 거대한 빨판을 붙인 채 배를 깔고
검은 밭담이 꽉 차도록 엎드려 있다
이 짐승의 크기는 백 평 이백 평 단위로 헤아린다
크지만 순해서 사납게 짓는 법이 없고
검은 밭담 우리를 넘어가는 일도 없다, 만약
밭담을 말(馬)처럼 만든다면 짐승은 초록말로 자라고
말은 초록 갈기를 휘날리며 꿈속을 달리겠지
바람이 짐승의 등줄기를 맨발로 미끄러져 다닌다
바람의 발바닥에 시퍼렇게 초록물이 들었다
굽이치는 초록 물결 초록 머리채
짐승은 바람의 안무에 초록 비단 춤을 춘다
이 짐승은 일생을 돌아눕지 않는다
한 여자만을 사랑했다는 걸 보여주는 건
꼿꼿하고도 무성한 황금빛 수염이다
이제 바람은 참빗을 들고 짐승의 수염을 곱게 빗어준다
짐승은 가끔씩 수염을 일제히 세우고
바람의 발바닥을 간질이며 논다
바람의 발바닥엔 그 짐승이 새긴 초록 문신이
아직 푸르게 남아있다
격월간 『현대시학』 2018년 1~2월호 발표
사윤수 시인
1964년 경북 청도에서 출생. 영남대학교 철학과 졸업. 201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파온(婆媼)』이 있음. 2009년 한국문화 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