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명 일족들이 알아야 할 입곤양(入昆陽) 이야기
2023년 11월 26일 애일당(愛日堂) 조부 시제날 거창 종손 창규가 참제했다.
몇 년째 계속해서 시제에 참석하고 있다.
곤명 종손 상희가 거창 시제에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으니 보답 차원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과거에는 거창 종손이 곤명 시제에 참석한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금년에는 우리 곤명 문중에서 밀양에서 지내는 강호선조 시제를 주관했다.
계획, 준비, 진행을 모두 곤명에서 맡았다.
제물의 차림이 격에 맞으면서도 넉넉했고 시제의 진행도 깔끔했다.
내가 집례(執禮)를 보았다.
홀기(笏記)의 절차에 따라 의식을 진행 했는데 홀기에 적힌 한자의 문구를 현대 감각에 맞게 설명을 깃들이며 진행했다. 젊은 제관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였다.
나는 진주향교에서 다년간 한문 공부를 했기에 이 분야에는 일기견이 있다고 자부한다.
족제(族弟) 동근이가 축문을 읽었는데 아주 잘 읽었다. 아마 제관들 모두 느낀 바가 컷을 것이다.
요즈음 한글세대 사람들은 한자를 평측(平仄)에 맞게 제대로 읽는 사람이 드물다. 그런데 동근이의 대축은 평측에 맞았다.
아무튼 이런 연유인지는 몰라도 거창 일족과 교분이 두터워 진 것은 사실이다.
또, 종손 상희가 강호파의 회장인 점과 상철이 형이 선산 김가의 대종회에 미치는 영향도 우리 곤명 일족에게는 천군만마(千軍萬馬)다.
이야기 하고 싶은 요점은 지금부터다.
2022년 시사를 지낸 후 종손이 나를 보고 애일당 할아버지 묘소가 어디 있는지 물었다.
나의 의도를 알아보려는 곡선이 깔려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즉답을 피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인 것처럼 처신을 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심중의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가 아니어서 신뢰가 생길 때 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아꼈다.
시간이 지날수록 종손 창규나 내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몇 년 전에 선산 김가 회보에 내가 강호할아버지에 대한 글을 써서 수록한 적이 있었는데 그것도 종손이 나를 인정하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본다.
이젠 우리 곤명에서 거창 일족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11월 26일 애일당 할아버지 시제를 마친 후에 ‘종손 내 좀 보자’ 하고 제각의 취규당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주위 사람들을 모두 나가게 했다.
종손 아들도 같이 왔는데 밖에 있으라고 하고 내 보냈다.
그리고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종손! 지난 해 나를 보고 애일당 할아버지 산소에 대해 물은 적이 있지?”
“ 예.”
“내가 다 이야기 하마. 일제 말기에 종손 할아버지께서 거창의 일족들과 알력(軋轢)이 있어서 종손의 대고모와 할아버지 두 분이 상당한 기간 동안 곤명에 와서 기거를 하신 적이 있었다.
그 때 대고모는 우리 할머니와 기거를 많이 하셨고, 할아버지께서는 본촌 종손 집과 우리 당숙 집에 기거를 하시면서 많이 가까워 지셨다.
제법 오랜 기간이 지났을 무렵 종손의 할아버지께서
‘숙부님, 당장 거창에 갑시다. 가시면 애일당 할아버지를 비롯한 선조의 묘소를 모두 가르쳐 주시겠다.’고 하시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 곤명 쪽에서 당장 응하지 못했다.
그때가 일제 말엽이라 정말 사람들이 살기 힘든 시기였다.
묘소를 6기쯤 찾으면 ‘위토답’도 마련해야 하고, 또 재실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그때 어른들의 생각이었는데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아서 따라나서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나의 부친으로부터 들었다.
그렇게 내가 말을 하니 종손이 말하기를 자기가 어릴 때 아버지와 함께 시사 지내려 가면 이 산소가 ‘곤명 성편 할아버지 모소다.’라고 말씀해 주시더라 하면서 무고인 생태로 놓여 있어서 그렇지 가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고 했다.
이어서 내가 또 이렇게 덧붙였다.
종손의 할아버지께서 말씀하기를 “우리 거창에서 시사 지낼 때 잔도 한 잔씩 드리고 벌초도 하고 있으니 걱정을 안 해도 되는 거처럼 이야기를 하면서 ”역장“이야기를 하시더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거창의 유력한 집안 조상의 묘를...”
그랬더니 나의 이야기와 묘소의 위치가 거의 일치하는지 할아버지 묘소가 아래쪽이고 벌 안인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다시 나는 우리 천징, 천일 할아버지께서 급히 거창을 떠난 계기인 무신의 난 이야기를 했다.
1728년 인좌 난(일명 무신의 난) 때 안음(지금의 안의) 사람 정희량이라는 사람이 이인좌 난(일명 무신의 난)에 동참하기 위해 5,000명의 반란군을 모았다. 그때 안음, 거창, 산음 젊은이가 거의 다 동원되어야 5000명 정도 되었을 것이다. 이때 천징 조부는 39세, 천일 조부는 36세이고, 아들인 우갑 조부는 22세, 인갑 조부는 18세, 우갑 조부는 8세이셨다.
정희량이 이끈 병사들은 진주, 합천, 고령을 거쳐 진격을 계속 하다가 상주전투에서 패해 후퇴를 한 후 전라도로 우회하여 진격하다가 팔량령 전투에서 또 패한다. 그뒤 정희량이 체포됨으로서 난이 평정되었다.
난을 일으킨 명분은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남인에 속했던 우리 할아버지는 사색당파의 특성상 운명적으로 동조해야 했을 것이다.
난을 평정한 영조는 대구에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영남을 반역의 땅으로 규정하고 반역의 한 축이었던 안의 현을 없애고 거창과 함양에 예속 시켜 버린다. 그리고 그 후 50년 동안 영남 사람들은 과거를 볼 수 없도록 과거 정지 명령을 내렸다. 그 여파는 조선이 망할 때까지 지속되는데 무려 135년 동안 영남에서는 정,종 3품 이상인 당상관을 배출하지 못하는 홀대를 받았다.
난에 동조했다가 실패하면 역적이 된다. 살아남기 위해 다급히 부모와 조부모 묘소만 모시고 피난을 오게 됨으로써 윗대 3대 묘를 실묘하게 된 것이다.
처음 피난 왔던 곳이 하동 갈티인데 오늘날 지명으로 하동 위태다. 그 후 하동 북평 안산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집 아래쪽에 고방을 짓고 그 고방 안에 묘를 써서 위장을 하고 살았다. 그런데 그것이 동네 사람들에게 발각이 되어 그곳에 살지 못하고 재를 넘어 세동(가는골)이라는 곳으로 옮겨 살다가 후에 곤명으로 오게 되었다.
우리 덕천재의 기문을 쓴 사람이 중재 김황이라는 분이다. 당시 우리나라 최고의 석학이시다. 그분이 우리 할아버지께서 난에 동참하였음을 은유적으로 표현 해 두었다.
덕천재(德天齋) 현판에 '개기유위어세이사욕잠광회적야(蓋其有違於世而思欲潛光晦迹也)'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 의미는 ‘대개 세상을 어김이 있어 세월을 숨겨 어둠속에 자취를 감추고자 했다’는 뜻이다.
우리 주위에 그러한 집안이 많이 있다.
럭키그룹 창업주도 난에 참여하여 쫓겨 진양으로 피난 왔던 사람들의 후손이다.
우리 곤면 쪽에서 몇 년 전에 실묘(失墓)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제단(祭壇)을 모아 그곳을 묘소로 대신하고 있다.
예전에 전쟁으로 인해 실묘를 하면 대안으로 어느 집안이든지 그러한 편법을 썼다.
과거에는 곤명에서 실묘한 묘를 찾으려고 애쓴 적도 있지만 이젠 생각을 접었다.
제단을 모았는데 또 산소를 찾았다고 모시면 그것도 어색하다.
대략 이러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후 이 이야기를 종손 상희와 병규형님, 상철형님께 소상히 전했다.
그러면서 종손보고 언제 날을 잡아 거창에 가서 잔이라도 한잔 올리고 오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하기도 했다.
그 후의 일은 차츰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