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공간에 들어가면 마냥 기분이 좋아지고, 어떤 공간에는 오래도록 머무르고 싶다 빛, 공간 나눔, 컨셉, 비움 등 다양한 공간적 특징들을 익숙한 장소를 통해 설명하는 친절한 공간 에세이
언제부터인지 좋다는 곳은 발 벗고 찾아 나선다. 몇몇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성수에서 약속이 있다면 ‘어니언’에는 꼭 들러야 하고, 주말에는 편한 신발을 신고 ‘피크닉’에서 오후를 만끽한다. 맛집을 찾아 우르르 몰려다니는 현상과는 조금 다르다. 예쁜 곳, 멋진 곳, 내 기분이 좋아지는 곳을 구태여 찾아다니는 사람들. 그런데, 그 공간들, 왜 좋은 걸까? 처음에는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경쟁적으로 예쁜 카페를 찾아다니며 인스타에 그럴싸한 태그를 달아 업로드했다. 인스타에서 한 번 입소문이 나면 그 가게에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인파가 몰려들었다. “거기 알아?”, “거기 가봤어?” 마치 모르면 안 될 것 같은, 안 가봤으면 ‘인싸’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래서 거기가 어디라고? 왜 좋다고? 좋은 것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떤 공간에 들어가자마자 내가 편안함을 느꼈다면, 그 편안함을 주는 요소가 분명히 있을 텐데. 어떤 때는 높은 층고일 것이고, 어떤 때는 다락방처럼 조밀한 공간일 것이다. 공간마다 가진 특징은 천차만별로 다양해서 건축도 책처럼 읽을 수 있다면, 영화 평론가가 영화 속 숨겨진 의미를 설명해주듯이 누군가 건축을 설명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만다.
사진 찍는 건축가 선아키! 좋은 공간에 설명을 달다 좋은 공간을 보면 소개하고 싶고 설명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건축가가 있다. 건축 일이 너무 좋고, 좋은 공간을 찾아다니는 것이 인생의 낙인 사진 찍는 건축가 선아키다. 어느 날 대림창고에 방문해 여러 건축 요소를 보며 감탄하고 있던 그의 옆을 지나가며 누군가 말했다. “와! 여기 분위기 좋다!” 그 순간 이 공간의 요소들을 마구 설명해주고 싶은 충동이 그를 덮쳤다. “여기는 평소에 경험하기 쉽지 않은 대공간의 공간감이 느껴지고, 지붕 재료를 일부 바꿔 햇빛을 내부 깊숙이 들여왔고, 과감하게 땅을 파 나무를 심었고…”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좋아하고 즐겨 찾는 여러 공간들을 방문해 마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듯 공간 독후감을 써내려갔다. 그녀의 글에서는 공간과 건축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그것을 누구에게라도 알려주고 싶은 다정함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나만의 취향을 발견하는 순간, B의 순간 바야흐로 큐레이션의 시대다. 사람들은 많은 정보보다 내가 신뢰하는 누군가가 선별해낸 정보를 선호한다. 100개 중에 정말 좋은 1개를 직접 고르지 않고, 독보적 취향을 가진 누군가가 고른 10개만을 살펴서 고른다. 취향이 확고한 사람에게는 그만의 향기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하고 싶은 것, 내가 잘 하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는 자기 내면에 한 발짝 더 가깝게 다가간다. ‘B의 순간’에서는 독자들이 그런 발견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도록, 짙은 취향을 가진 이의 글을 소개한다. 'B의 순간‘의 첫 권인 <여기가 좋은 이유>는 공간을 사랑하는 건축가가 자신의 지식과 취향을 모두 그러모아 좋은 공간이 좋아 보이는 이유에 대해 말해준다. 책에 실리지 않은 공간에서도 책 내용의 어떤 설명을 떠올린다면, 그걸로 너무나 감사한 일이다.
* ‘B의 순간’은 미호의 취향 에세이 시리즈입니다. 설명할 순 없지만 나를 편안하게 한 것, 가슴 뛰게 한 것, 행복하게 한 것들에 설명을 다는 ‘B의 순간’은 나를 채우는 내밀한 취향을 발견하고 나를 완성시킬 거예요.
01 빛으로 가득찬 책의 광장, 별마당 도서관 02 시간에 새로움을 더하는, 어니언 성수 & 미아 03 컨셉의 정석, 네스트 호텔 04 시간을 내려 마시는 다방, 커피 한약방 05 요리하는 도서관, 현대카드 쿠킹 라이브러리 06 디자인과 시공산 사이로 소풍을, 피크닉 07 성수를 담은 디테일의 정수, 오르에르 08 비워서 만든 공간, 뮤지엄 산 09 푸른 컨테이너의 숲, 커먼그라운드 10 아이들이 뛰어노는 정원, 카페진정성 11 박공과 박스가 만났을 때, 퀸마마마켓 12 시간의 흔적이 새겨진 곳, 선농단 13 대학로의 붉은 배경, 아르코 예술극장·미술관 14 솟아오른 땅, 옹느세자메 15 서울이 가진 시간의 단면, 눅서울 16 시장 골목 안 공간의 내피, 오랑오랑 17 문화를 담는 그릇, 문화비축기지 18 유쾌한 브랜딩, 호텔 카푸치노 19 마당을 품은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20 서울을 잇는 또 하나의 길, 서울로
건축이란 설계부터 시공이 끝나기까지의 기간도 오래 걸리거니와, 얽혀 있는 사람도 많고 각자 원하고 기대하는 바도 모두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컨셉으로 건물이 지어지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건축가는 아름답게 짓고 싶고, 시공자는 어렵지 않게 짓고 싶고, 건축주는 저렴한 비용만 투자해서 큰 수익을 얻고 싶어 하기 마련이다. 다른 목표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 오랜 기간 하나의 방향을 설정하고 함께 그 방향으로 걸어가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 p.42)
우리가 지금은 거의 사라져 버린 골목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 폭이 사람에게서 나온 너비이기 때문이다. 왕복 10차선에서 놀기는 힘들어도, 두세 사람 겨우 지나다닐 폭의 골목에서는 쉽게 많은 행위들이 일어난다. 좁은 폭의 길에서는 길이 오로지 통행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마당과 같이 쓰인다. 할아버지들은 골목에서 바둑을 두고 할머니들은 의자를 내어다가 야외 벤치를 만들곤 했다. 아이들은 골목 안에서 수많은 놀이들을 만들었다. (/ p.56)
솔직히 말하면 내가 선호하는 스타일이라곤 말할 순 없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은 이것보다 더 단순하고, 치밀하게 나누어지고 강렬한 대비가 있는 공간이다. 그에 비하면 오르에르는 조금 여성스럽고, 유연한 느낌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의 취향은 어느 정도를 넘는 퀄리티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어떤 스타일이 되었든 정도 이상으로 잘해버리면, 개인의 취향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감탄사부터 나오는 것이다. “아, 잘했다!”라고. (/ p.93)
오래 보는 것이 정답이다. 공간이 눈 감아도 훤히 보이도록 익숙한 사람만이 가장 훌륭하게 다시 쓸 수 있을 테다. 한 번에 모든 것을 바꿔 버리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계절이 지나가면 가지치기를 하듯 공간의 요소를 더하거나 빼면서 바꾼다면 꾸준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르에르는 그렇게 탄생했다. (/ p.103)
눅서울은 거듭해서 말한다. 그대로 놔두어도 괜찮다고. 오래된 많은 것들을 조심스레 만지고, 정리했다. 그것은 방치와는 조금 다른 태도일 것이다. 생긴 모양새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로 다가간다. 있던 것을 존중하고 시간을 이해하려고 한다. 어쩌면 그것은 공간에만 적용되는 삶의 태도는 아닐 것이다. 나 외의 다른 사람과 맺는 모든 관계에서 필요한 태도는 아닐는지. (/ p.206)
석유 비축기지가 문화 비축기지가 되어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되기 전까지, 무려 41년 동안 일반인들의 접근이 차단됐다.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딱 하나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다는 뜻. 심지어 비밀리에 존재해 왔으니, 주변엔 아무것도 없다. 주변 환경이라곤 탱크를 감싸고 있는 언덕뿐이다. 건축가에게 이런 프로젝트가 다가왔을 때엔, 딱 한 가지에 집중해야 한다. 몇 십 년 간 존재했던 그 땅의 기억을 읽어내는 것. 고고학자들이 유물을 발견하듯이 조심스럽게. 제대로 읽어낼 수 있으면, 반절 이상은 성공이다. 나머지는 땅의 기억에서 중요한 것들을 골라 선택적으로 지켜나가는 것이 건축가의 의무다. (/ p.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