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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는 그 문학 전통을 공유하는 이들의 작품과 비평 활동을 평가하여 그 흐름을 평가하는 작업이다. 따라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그것을 바라보는가에 따라서 문학사의 내용이나 작품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누군가는 특정 작품을 걸작으로 평가하지만, 다른 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평가하기도 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이들을 누구로 내세울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평가하는 이의 문학관이나 작품을 보는 안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이 책에서 한국 현대소설을 대표하는 10명의 작가들을 선정한 저자의 의도를 일단 인정하기로 하자.
나로서는 저자의 글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접했다. 국문학을 전공하고 있어 대학 시절 이후 서양문학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다 보니, 서구 문학의 작품은 물론 외국문학 작품들도 즐겨 읽지 않게 되었다. 대학원에 다니면서 루카치나 바흐찐 등의 문학이론서를 읽기도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료와 씨름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내 전공이 한국문학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연구자로서 거대한 자료들과 씨름하다 보면 외국 문학 작품까지 섭렵하기 쉽지 않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외국문학 연구자가 보는 ‘한국 현대문학’이란 내용이 포함된 제목 때문에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물론 체제에 대해서도 나로서는 결코 공감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을 먼저 밝히고자 한다.
러시아문학 전공자로서 러시아와 프랑스 문학 작품과 문학사를 전제하면서, 바라보는 한국문학에 대해서 저자 나름의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객관적인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주관적인 ‘감상’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의 시각에 동의하는 이들도 있겠으나, 또 다른 누군가는 저자와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한국문학과 서양문학을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한국문학과 작가에 대한 일종의 ‘예단’을 일반화하여 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문학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하자. 그런데 한국의 소설가와 문학 작품을 평가하는데 왜 프랑스와 러시아의 문학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아마도 이에 대해서는 저자도 설득력이 있는 답변을 제시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문학(사)이기 때문이다.’라는 궁색한 답변이 전부가 아닐까?
일단 이 책의 제목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10명의 소설가들, 그리고 그들의 일부 작품만을 통해서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한국 현대문학’을 논한다는 것부터가 잘못된 시도라 할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문학사가 연구자의 지극히 주관적인 입장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때, 그 제목은 ‘한국 현대문학’이 아니라 ‘한국의 현대소설 작가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저자가 대상자로 선정한 소설가들 역시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있을 것이나, 한국문학사의 흐름을 고려할 때 ‘다른 소설가가 아닌 왜 이 작가가?’라는 의문점도 제기할 수가 있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작가들과 일부의 작품들이 그 시대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역시 저자의 주관적인 판단일 따름이다.
이 책의 서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모든 작품과 작가의 평가에 있어서, 프랑스와 러시아 문학의 기준을 들이대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세계문학사적으로 보자면 황석영의 차기 장편소설은 에밀 졸라의 장편들에 해당하는 작품이었어야 했다.’라든가, ‘이 부분은 이문열 뿐만 아니라 한국현대문학사의 공백이다’라는 언급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가 있다. 작가와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왜 황석영의 앞길에 에밀 졸라가 놓여야 하고 도대체 무엇인 ‘현대문학사의 공백’이라고 할 수 있는지 도저히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아마도 저자가 가장 자신있는 분야가 서양문학사이기에 그에 맞춰 그러한 '잣대'를 들이댔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저자의 관점으로 보는 한국소설사는 공백 투성이의 역사만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한국의 특정 소설가와 그의 작품에 대해서 문학적 성취의 면모에 있어서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것이 왜 서양문학사가 기준이 되어야 하는가. 한국문학은 고유한 문학 전통과 작가들의 작품 성과가 축적되어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그러한 문학 전통과 문학적 토양은 프랑스와도 다르고 러시아와도 다른 고유한 바탕 위에서 형성된 것이다. 때문에 서로 다른 토양에서 성장한 문학을 비교하는 작업은 조심스러워야 하며, 그 의미는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의 곳곳에서 마치 한국의 소설 작품들과 문학사가 서양문학사의 성취를 따라가지 못해, 곳곳에 ‘공백’이 생기고 문학적 성취가 미흡하다는 평가를 서슴없이 내리고 있다. 그러한 평가가 지닌 ‘폭력성’은 재삼 거론하지 않겠다.
아마도 책의 내용을 통해 유추하건대, 이 책에서 대상이 된 10명의 소설가들도 서양문학에서 주요 작품들로 거론되는 작품들에 맞춰 선정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예컨대 황석영은 에밀 졸라와 비교되고, <젊은 날의 초상>은 성장소설인 <데미안>과 비교되어 평가되고 있다. 그밖에 다른 작가들의 경우에도 유사한 범주의 작품들과 지속적으로 비교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러한 저자의 선정 기준이 그리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해방 이후 현대소설사의 주요 작가들이 너무도 많이 배제되어 있다. 차라리 ‘현대문학 수업’이 아닌, ‘주요 작가로 보는 현대소설 작가론’ 정도로 제목이라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모로 이 책의 기획과 내용은 ‘세계문학의 흐름으로 읽는’ 한국문학에 대한 논의가 얼마나 공허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하고 싶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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