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들어오지 마–/그 안으로 들어간 누군가가 외쳤고/나는 잠에서 깨었다//이불을 걷고 거실로 나와/찬 물 한 컵과 마주하며 앉았다/창 바깥에는 이삿짐을 나르는 사다리차가/누군가의 세간살림을 분주하게 나르고 있었다//찬물이 식어가는 동안에/찬 물을 마시지 않았다//파란 박스가 네 개씩 포개어져 누군가의 거실로/차곡차곡 운반되는 것을 지켜보았다/누군가는 곧 이웃사람이 될 것이다//너는 들어오지 말라던/그 안을 나는 알지 못한다 아무리/생각해 보아도 알 길이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그 안으로 들어가 나에게 남긴 한 마디를//나는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그래서 찬 물이 식어가는 것 같다//세수를 했다/흰 비누거품으로 칠해진 얼굴을/거울을 통해 바라보았다//이 얼굴은 한번도 진심으로 미워해본 적이 없다/악몽이 보호하고 싶어하는/나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이사왔어요–/인터폰 화면 속에 누군가의 얼굴이 채워져 있다/현관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안으로 쏟아졌다
「월간 현대시 2020년 5월호」(2020, 한국문연) 전문
화자는 막 불쾌한 잠에서 깼다. 누군가 안으로 들어가며 “너는 들어오지 마–”하고 문을 닫는 꿈을 꾸었다. 면박에 가까운 거절이나 관계의 단절로 인한 마음의 상흔이 짐작되는 악몽이다. 흐릿하게 지워졌더라도 그런 기억이라면 다시 떠오를까 끔찍할 텐데, 놀랍게도 화자는 시의 후반부에서 “악몽이 보호하고 싶어하는/나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라고 고백한다. 반 친구들이 모두 초대받은 생일파티에 소외된 적이 있는 가난한 집 아이, 자신이 정성스럽게 건네준 선물이 포장지가 함부로 벗겨진 채 구석에 처박혀 있는 걸 목격한 어른, 남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치느니 차라리 자기 머리를 벽에 박고 마는 마음 약한 사람들이 찾는 자구책이라야 고작 저런 ‘악몽’이 아닐까?
상처가 두려운 이들은 관계를 맺지 않거나, 관계를 맺더라도 친밀함을 ‘너무’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며 마음에 선을 긋는다. “이제 아무도 안 믿어. 이제 아무도 사랑하지 않아. 내 인생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할 거야.” 영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 마츠코는 이렇게 다짐한다. 더 이상 아무에게서도 상처받지 않으려는 이 순간, 그녀는 가족이나 연인들로부터 버림받던 그 어떤 순간보다 외롭다.
문을 닫는 ‘너’와 문밖의 ‘나’라는 위치는 유동적이다. 어떤 관계든 어느 정도는 병적이다. 우리는 결핍을 가진 존재들이고, 아무도 완벽하지 않다. 화자는 “나는 모두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이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너’를 이해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 바람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 “들어오세요”하며 문을 여는 화자는 강한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나에게 내민 손을 잡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