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아니면 나는 없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린 시절, 나는 의식적으로 교회를 알고 주일학교를
다니던 아이였다. 기독교신앙을 갖지 않고 불교적인 분위기에 미신을
좋아하고 따르던 분위기에서 교회에 다닌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물론
형님도, 누님도 교회를 다녔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면 내가 젖먹이 갓난
아이때부터 세살때까지 우리 가족 전부가 교회를 다녔고 특히 할아버지는
내가 어린 시절 교회의 사택을 손수지어드렸다는 어머니의 증언이다.
크리스마스날이면 새벽송을 돌기전 당시 박종난 전도사님과 교인들이 모여
떡국을 드시고 출발하셨다고 한다. 6.25때, 할아버지가 갑자기 몸에 병이
나자 누군가의 인도로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짧은
3년동안 교회에 열과 성을 다하셨다. 고인이 되신 노정숙권사님(고향교회
의 권사님으로 저에게도 많은 신앙의 영향을 끼치신 분)은 당시 할아버지
의 교회생활로 인해 여러분들이 교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또 미신을
좋아하시던 할머니까지 교회에 다니셨다고 하셨다.
어머니와 형님은 늘 "할아버지는 무서운 분이셨고, 할아버지의 말씀에 이의
를 제기하거나 불순종이란 있을 수 없었다"고 하셨다. 그러한 할아버지가
교회에 발을 들여놓았으니 울며 겨자먹기로 온 가족이 교회에 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세살적에 할아버지는 별세하셨고, 그 이후 할머니와
아버지는 교회생활을 멈추고 이전처럼 살아가셨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나의
가정에 신앙의 끈을 놓지 않게 하셨는데, 당시 교회의 담임목사님이시던
김덕진 목사님의 큰 아들이 형님과 함께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가까이 지냈고 마침
형님이 청주고등학교 밴드부에 있다는 것을 목사님이 아시고 트럼펫연주를
하고 싶은데 주일 하루만 빌려 연주할 수 있느냐고 하셔서 형님이 학교에서
트럼펫을 가지고 와서 주일 날 교회에서 김덕진 목사님이 트럼펫을 연주
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게 그려지고 들려온다. "십자가 군병들아"
곡과 몇곡을 연주하셨다.
나의 십대시절, 집안의 종손이던 나는 신앙생활이 부모님과 여러 집안 친척
들의 부담이었다. 내가 종손이 된 것은 종손가정이 대가 끊겨 종중에서 나를
양자로 보내는 과정이 있었다. 그래도 집안에서 종손으로 정한 이상, 해야할
의무가 적지 않았다. 그중에 가장 큰 일이 제사였다. 그렇지만 나는 그걸 크게
생각해 본적도 없고 하지도 않았다. 중간에서 속을 끓이신 분은 아버지와
어머니였다. 종손이 제사도 집어던지고 하지 않고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집안의 여러 시제와 전국밀양박씨 중앙본부에 임원인 "이사"자리를 내던지고
하다보니 눈에 가시가 되고 말았다. 참 모진 핍박을 받았고, 집안의 어른들
과 심지어 지역의 사람들에게 까지 불손한 아들로 불편한 생활을 해야 했다.
결과론적으로 아버지와 어머니와 가족들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그 긴
싸움은 끝을 냈다. 나는 종손에 돌아오는 모든 것(재산과 그 외의 여러가지)을
포기했다.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작은 한 가문의 철문처럼 단단했던 종손의 문화도 변화
되는 세월속에 그 의미가 점점 사라졌다. 예전처럼 그것을 종교처럼 고집하고
주창했던 것들이 퇴색되고 이젠 관심을 가진 이들만이 거기에 집착하고 소위
이권이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몰두하는 것을 보았다. 해아래 헛된 것을 위해
쏟았던 지난 날의 어른들의 그 열정이 슬프게만 느껴졌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렇게 우쭐대고 큰 소리 치시던 어른들의 모습은 지금, 사라졌거나 계신들
전쟁패배자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할 수도 없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다.
그리고 늙어 늙어 눈물 한방울도 흘리지 못하시고 크게 호령하시던 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분노도 내지 못하시는 모습에 마음이 아프기만 하다."
헛된 인간의 욕망과 고집에다 종교적인(유교)정서가 들어가 제사하나로, 조상
섬기기 하나로 모든 것을 판단하던 시절이 하나같이 사라지고 이젠 너나
할 것없이 그 모든 의식들이 사라지고 파묻히는 것을 보면서 헛되고 헛된 해
아래의 것들이라는 다시 실감하게 된다.
그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고 그리고 가정이나 가문
에서도 목사라는 소위 하나님의 일을 위해 드려진 사람이라는 칭호가 붙어
모두가 그렇게 인정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시골에 있는
교회, 내 할아버지와 가족들이 잠깐 3년이었지만 발길을 들여놓았던 내가 사랑
하는 고향의 교회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 시절 "교회"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였다. 나는 집에 좀 떨어진 시골길, 때로는 빨리 가기 위해 밭을 헤쳐
가며 가던 내 고향교회가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나는 지금도 교회라는
말은 내 존재의 의미이고 교회라는 말은 항상 나를 들뜨게 하고 교회는 어디서나
내 마음과 영혼이 기뻐할 수 있는 공간이다. 나는 슬플 때면 교회에 와 있었다.
나는 시간이 날때면 교회에 와 있었다. 나는 핍박이 있고 고난이 올 땐 여지없이
교회에 와 있었다. 가난했을 때도 신학을 하면서 고독했을 때도 늘 나는 교회에
와 앉아 있었다. 세상 어디를 가도 교회가 보이면 나는 교회로 발길을 옮겼다
어린 시절, 시골의 교회로 시작된 나의 신앙과 나의 인생은 지금 나이들고 어른
이 되었어도 그 교회에 대한 감격이나 교회에 대한 사모함, 교회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교회에 대한 사명은 조금도 흔들려 본 적이 없도 변한 적도 없다.
미국 유학시절에도 나는 교회를 좋아했다. 어느 교회를 가든지 내가 어릴적
다니던 시골, 그 길가의 교회, 내 어린 시절의 꿈과 희망을 가졌던 교회, 그리고
친구를 배우고 인생을 배우고 세상을 배우게 했던 내 어릴 적 고향교회는
마음의 고향이 되어 나는 나이들어가면서도 위로와 격려와 용기를 얻곤 한다.
목회자로 목사안수를 받고 올해 41년을 맞이했다. 지난 3월 23일 서울노회 청파
중앙교회에서 모두 고인이 되신 원효식 목사님, 양용주목사님, 조규용목사님,
여영남목사님등이 안수위원으로 나와 일곱명에게 안수해 주심으로 목사로 임직
을 했다. 그 때부터 일 순간도 나는 교회를 떠난적이 없고 교회와 함께 살았다.
미국 유학시절에도 나는 담임목사로 교육부목사로 교회와 함께 했으며 유학 전후
서울에서 대학교수를 하면서도 교회와 함께 했다. 지금 나는 서울모자이크교회
의 담임목사다. 아무 무거운 직을 14년간 하고 있다. 너무 감격스럽고 나같은
죄인이, 나같은 머저리가 어떻게 주님의 몸된 교회, 피로 값주고 사실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로 서 있는가? 그렇지만 여전히 아직도 내 마음에는 어릴 적
다니던 시골 길가, 도랑 옆의 그 교회처럼 지금도 교회는 조금도 변함없는 내 마음
의 안식처이고 치유하는 곳이고 위로와 격려가 쏟아지는 곳이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 천국을 사모하게 해주는 천국의 모형이다.
14주년 기념 예배를 마치고 우리는 성경책 세권, 마스크 세장씩을 손을 들고 전
교인이 사거리와 길가. 그리고 아파트 안팎을 돌며 작은 행사를 했다. 전도라기
보다는 우리 성도들이 2년 반동안 코로나로 움츠렸다가 터져나오는 함성의
한 일환으로 노방전도를 한 것이다. 우리교회의 성도들의 멋진 모습이 참 아름
답고 좋았다. 나도 교우들과 함께 사람을 만나고 두학생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교회를 소개하기도 했다. 내일(4.26)은 우리교회가 갈월동 쪽방촌에 14번째 방문을 한다.
독거노인들 200명에게 양식을 전달한다. 아직 코로나여파로 가가호호 방문은
어렵다. 그리고 사순절 40일 새벽기도회 "나눔연보"로 500만원이 채워졌다. 그건
우크라이나로 보내진다. 교회, 교회, 교회, 교회는 나다. 나의 목회철학과 나의
매일 새벽의 질문은 "교회란 무엇인가?"로 출발한다. 이젠 교회에 대한 사랑과
고민이 함께 어우러져 짔다. 그리고 오랜만에 예배당 건축(혹은 건물매임)을 위한
당회와 제직회가 결정하고 마침내 건축 소위원회를 위해 15명의 전체 위원들이
참여하고 어제 소위원회로 실행팀을 발족했다. 교회, 주님의 몸인 교회를 생각
하니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눌물이 왈칵 쏟아진다.
""어릴 때 다니던 길가의 교회 나 지금 기억합니다. 이 세상 어디를 가도 나 주님을
기억합니다. 힘들고 지쳤을 때도 교회를 생각했습니다. 시골의 작은 교회를 통해
주님은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그 때 시골교회는 양철지붕의 작은 교회였습니다.
거기서 나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나는 천국을 경험했습니다. 거기서 나는
내 인생의 비전과 미래를 보았습니다. 어릴 때 다니 던 길가 모퉁이의 교회에서
나는 내 인생의 사명을 보았습니다. 사방이 닫히고 길도 막힌 상황에서 나는 그
작은 시골교회에서 하늘에 구멍이 나고 하늘의 길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다시
그 교회를 생각하게 해주는 서울모자이크교회가 우리교회이고 우리 장로님, 우리
권사님, 우리 집사님, 우리 성도님 우리 교회학교 아이들이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