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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문이라 짜증나시더라도 한번 읽어보세요..
이제 우리의 선택 대선이 다가옵니다.
밀어주고도 홀대 받는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말아야지요..
1. 교회의 정치참여: 주요 쟁점들
교회의 정치참여와 관련된 쟁점들은 다양하겠지만, 대략 다음 여섯 가지로 압축해볼 수 있을 듯하다. 많은 경우 이 쟁점들은 서로 연관되거나 중첩되어 있다.
첫째, 교회의 정치참여란 무엇인가?
이와 유사하게, 교회의 정치화 내지 정치세력화란 무엇인가?
이것은 교회 정치참여의 ‘정의’ 및 ‘범위’와 관련된 문제일 것이다.
둘째, 교회의 정치참여가 과연 필요한가. 그리고 바람직한가?
교회 정치참여의 ‘가치’와 ‘필요성’을 둘러싼 찬반논란이 있을 수 있고, 실제로 이런 논란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또 이런 논란의 연속선상에서, 교회 정치참여의 바람직한 ‘절차’와 ‘방법론’에 대해서도 많은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셋째, 현재 ‘교회의 정치적 힘과 영향력’은 어느 정도나 되는가?
결국 이 문제는 교회 정치참여에 대한 현실 진단과 관련되고, 그 핵심은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정치적 변수인가 하는 문제이다. 만약 교회의 정치적 힘과 영향력이 보잘것없는 것으로 판명된다면, 교회의 정치참여에 관한 논란 역시 긴장감과 흥미를 대부분 잃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교회의 정치참여는 현실적으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으며, 또 마땅히 지향해야 하는가?
교회 정치참여의 우선순위가 보편적인 시민적 가치 혹은 사회적 공동선에 두어지는가, 교회의 제도적·집단적 이익의 증진에 두어지는가?
교회의 정치참여는 우리 사회의 정치발전, 나아가 시민들의 인권과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기 위한 도구인가, 아니면, 정치권력을 이용한 교회 이념의 실현 혹은 개신교 정권의 탄생을 위한 것인가?
이것은 교회 정치참여의 ‘목표’와 ‘지향’에 관한 문제이다.
다섯째, 향후 ‘종교적 균열의 정치적 함의와 파급력’은 어느 정도로 나타날 것인가?
보다 구체적으로, 앞으로 계급적 균열이나 지역적 균열을 대신하여, 혹은 이런 전통적인 균열·대립들과 결합하여, ‘종교적 균열(들)’이 우리 사회의 중요한 정치적 갈등 요인으로 부상할 것인가?
또 다양한 종교 균열의 층위들 가운데 현재와 향후에 과연 어떤 균열 층위가 전면에 부각될 것인가? 따라서 종교 균열의 정치적 파급력은 (1) ‘종교 균열과 여타 균열들의 관계’, ‘다양한 균열들 가운데 종교 균열이 점하는 비중과 상대적 중요성’, 그리고 (2) ‘종교 균열들 사이의 우선순위 변동’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다.
여섯째, 교회의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이 대중적인 공감과 지지를 얻어내기 위한 어떤 조건들이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 교회의 정치참여가 성공적이기 위해서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최소한의 요건은 무엇인가? 또한, ‘교회의 성공적인 정치참여를 위한 전제조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과연 그 전제는 현재 충족되고 있는가?
이런 여섯 가지 쟁점들 가운데 어떤 것도 만만치 않으며, 학계와 교계의 폭넓은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 많은 토론과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특히 뒤의 세 가지 쟁점들은 아직도 토론이나 문제제기 자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래서 몇 가지 부연 내지 추가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먼저, 네 번째 쟁점(교회 정치참여의 ‘목표’와 ‘지향’)과 관련해서, 보편적인 시민적 가치(혹은 사회적 공동선)와 교회의 제도적·집단적 이익이 반드시 충돌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종교의 자유’는 보편적인 시민적 가치와 교회의 제도적 이익 모두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영역이다. 평화주의적 교리를 지닌 소수 그리스도교 교파들의 양심적 병역거부(conscientious objection) 행위에 대해, 주류 그리스도교 교파들이 종교의 자유 증진이라는 가치를 내세워 (정통-이단 논쟁과는 상관없이) 소수 교파 신자들의 대체복무 권리를 옹호하고 나서는 경우에도 양자 간의 충돌은 전혀 없다. 그러나 주류 그리스도교 교파가 이단 논쟁을 제기하면서 국가에 의한 종교자유의 차별적·선택적 적용을 사실상 옹호 내지 요구하는 경우에는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던 사립학교법 개정 문제도 보편적 가치와 교회의 제도적 이익 사이의 관계에 대한 격렬한 논쟁을 불러온 바 있다. 당시(그리고 현재도 역시) 대부분의 종립 사학재단들은 ‘종교의 자유’(특히 그 중에서도 종교교육의 자유)와 ‘사학의 자율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앞세워 개방형 이사제도 도입 등 사립학교법 개정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은 개방형 이사제도가 왜 종교교육의 자유와 사학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으며, 심지어 종립 사학재단들이 겉으로만 보편적 가치를 명분으로 내걸었을 뿐 실제적으로는 특정 종교의 ‘당파적이고 특수한 이익’을 보호하려 애쓰고 있다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나아가 일각에서는 이미 종립 사학에 막대한 국가재정이 투입되고 있는 현실에서 비신자(非信者) 학생들을 특정 종교의 신자들로 개종시키려는 목적을 지닌 ‘과도한’ 종교교육의 자유를 보호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한편 다섯 번째 쟁점은 (위에서 정리한 대로) ‘종교적 균열의 정치적 파급력’과 관련되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종교 균열과 여타 균열들의 관계’, ‘종교 균열의 상대적 비중’, ‘종교 균열들 사이의 우선순위 변동’의 문제들로 나타난다.
여기서 ‘종교 균열과 여타 균열들의 관계’는 종교 균열이 한국사회의 지배적인 대립·갈등 관계를 형성해온 계급 균열, 민족 균열, (영호남 갈등으로 대표되는) 지역 균열 등과 결합 내지 접합되는 방식을 가리킨다.
예컨대, ‘고소영’, ‘강부자’ 같은 신조어는 우리 사회의 주류 개신교가 기득권 계층에 의해 주도되거나, 기득권 계층의 이익과 세계관을 주로 반영하고 있다는 의심을 불러올 수 있다. 또 한국 주류 개신교의 강한 친미(親美)·반북한(反北韓) 입장으로 인해, 종교 균열이 민족 균열과 결합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종교 균열의 상대적 비중’은 우리 사회의 종교간 갈등이 계급 갈등이나 지역 갈등 못지않게, 혹은 (계급 갈등이나 지역 갈등의 중요성이 앞으로 감소할 경우) 종교 갈등이 다른 갈등을 제치고 우리 사회의 주요한 균열 요인으로 부각되지는 않을지 등의 문제이다.
한편 종교 균열 자체가 다양한 층위들로 구성되어 있을 수 있다. 이 층위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볼 수 있다.
(1) 먼저 이 균열은 ‘교회 대(對) 국가’의 층위를 포함하며, 대부분의 경우 국가의 힘의 우위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양자 간의 갈등은 교회 측의 ‘종교자유 수호투쟁’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2) 종교 균열이 ‘교회 대 시민사회’의 층위에서 주로 나타난다면, 심할 경우 시민사회 안에서 ‘반교회·반성직주의 운동’이 발전·확산될 것이다.
(3) 가장 전형적인 종교 균열은 ‘종교 대 종교’의 구도로 나타날 것인데, 갈등의 한 축이 독점적 종교(예컨대 국교)일 경우에는 소수종교 측의 ‘종교자유 수호투쟁’으로, 갈등의 당사자들이 비등할 경우에는 극단적으로 ‘종교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
(4) 종교 균열은 특정 종교 내의 ‘정통주의적 주류 세력 대 이단시되는 소수·비주류 세력’의 층위에서도 나타날 수 있으며, 양심적 병역거부, 통일교 등 그리스도교 계통 신종교들과 관련된 갈등이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5) 종교 균열은 역시 특정 종교 내의 ‘교권세력 대 개혁세력’의 층위에서 발생할 수 있고, 이 갈등은 종교권력 투쟁, 신자 대중을 둘러싼 종교적 헤게모니 투쟁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높다. 바로 여기서 ‘종교 균열들의 우선순위 변동’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과거 1970∼1980년대의 종교적 균열과 갈등이 주로 ‘권위주의국가 대 진보적 교회’의 구도 하에서 진행되었다면, 민주화 이행 이후에는 핵심적인 종교 균열이 ‘개신교 대 타종교(특히 불교)’, 개신교 내부의 ‘주류교회 대 비주류교회’, 개신교 내의 ‘교권세력 대 개혁세력’, ‘교회 대 시민사회’의 구도 등으로 대체됨과 동시에, 종교적 균열들이 이전에 비해 훨씬 다변화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종교 균열의 정치적 파급력과 관련하여, 필자는 우리가 ‘민주화의 종교적 효과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네 가지 변화가 중요하다.
(1) ‘종교적 차별의 쟁점화’로서, 민주화 이후 ‘차별의 양과 질’의 객관적인 변화와는 관계없이, 혹은 차별의 객관적 감소에도 불구하고, 종교 간에 불균등한 관계의 쟁점화, 종교적 차별의 정치-사회적 쟁점화가 더욱 도드라지는 경향이다.
1990년대를 두고 볼 때, 불교가 이런 움직임을 선도하고 있으며, 불교와 개신교의 상호적인 쟁점화 시도 또한 이따금씩 발견된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했으나 공론화가 억압되거나 쟁점화 되지 못했던 소수 종파들의 차별 실상을 사회적으로 노출시키고 공론화 하는 효과가 있었다.
(1)결국 민주화는 ‘개신교 대 타종교’ 그리고 ‘주류교회 대 비주류교회’의 두 층위에서 종교 균열을 증폭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 때문에 타종교와의 관계, 같은 종교 내의 다양한 교단․단체들과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조정해 가는 능력과 기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2) 민주화로 인해 선거정치가 활발해질수록, 이미 거대한 신자 규모를 자랑하는 대형 교단과 교회의 ‘정치적 가치와 효용성’이 증대되는 경향이 있다. 최근의 “종교 권력화” 담론 역시 대형 교단·교회의 정치적 힘의 확장을 중요한 배경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민주화 이후 주요 정당들과 국회에는 종교인들의 ‘표심(票心)’을 붙잡기 위한 신자 조직들이 부쩍 활성화되었다. 정치인들은 거대 종교들이 정치적 반대 세력으로 돌아설 수도 있는 정책이나 법률을 극구 회피하게 되었고, 선거철에는 거대 종교들의 숙원사업들을 선거공약으로 흡수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인다
( 2)역으로, 대형 교단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정치엘리트들을 활용하여 교단과 교회의 이익과 위신을 극대화하려 시도할 수 있다. 이런 행동이 거대 종교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시도될 경우 종교 균열이 증폭될 수 있으며, 특정 종교정당의 출현은 그럴 가능성을 더욱 증대시킬 것이다.
특히 교회 일각이 직접 제도정치권으로 진입할 경우, 시민사회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정치적으로 조정하는 능력을 키워야 할 뿐 아니라, 증대된 가시성(visibility)으로 인해 정치적 추문에 휩쓸려 도덕적 권위마저 도전받게 될 수도 있다는 부담, 제도정치권 내부에 만연한 ‘정치적 거래와 흥정이라는 관행’에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
(3) 민주화는 시민운동과 이익단체들을 활성화하며, 이는 거대 종교들에 대한 시민적 감시와 견제 압력이 강화될 가능성을 높인다. 민주화에 따라 ‘국가의 종교 개입’은 감소하는 반면, ‘시민사회의 종교 개입’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거대 종교를 포함하여 시민사회 내의 권력집단들에 대한 감시․견제가 강화된 것은 한국의 민주화 수준이 ‘정치’ 영역을 넘어 ‘사회’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권력을 두려워하는 국가기구를 대신하여 시민운동 단체들이 종교계 사회복지 시설 수용자들의 인권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는 것을 비롯하여, 1990년대 이후 사찰의 문화재 관람료 관련 소송, 종교기관 종사자들의 노사분규 개입, 언론에 의한 종교비리 고발, ‘안티기독교’ 등 반종교 사이트들의 확산, 종립학교의 종교교육과 관련된 문제제기, 성직자 납세운동, 종교단체에 의한 환경파괴에 대한 고발, 성직자의 성폭력에 대한 공동대응 등 종교 영역에 시민운동이 개입한 허다한 사례들을 열거할 수 있다.
결국 이런 상황은 민주화와 함께 종교 균열 중 ‘교회 대 시민사회’의 층위가 활성화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화 시대에는 시민사회와의 원활한 상호 이해와 소통이 그만큼 중요해진다.
(4) 민주화는 종교조직 내부의 ‘개혁운동’(혹은 ‘예언자운동’)을 활성화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종교 내부의 개혁운동은 성직자들의 권력 독점과 권위주의적 종교조직 운영에 집중되어 있고, 이는 곧 종교권력의 민주화․분권화 요구로 나타나고 있다.
재정 운영의 불투명성이나 교회의 세습 시도에 대한 조직적인 반대운동은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3대 종교 모두에서 종교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남성에 비해 강한 종교적 열성을 보이는 여성들도 불균형적으로 낮은 종교권력 참여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갈등은 사형제도, 양심적 병역거부, 사립학교법과 사회복지사업법 개정 문제, 나아가 더욱 최근에는 대운하, 미국산 쇠고기 수입조건(건강권·생명권), 공공사업·공기업의 민영화 등 정치적·사회적 쟁점들로까지 확대되고 있다. 민주화는 ‘교권세력 대 개혁세력’의 층위에서도 종교 균열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위의 여섯 번째 쟁점은 교회의 ‘성공적인’ 정치참여를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에 관한 것이었다.
다양한 주장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이런 ‘최소 조건’으로서 특히 ‘교회 지도자의 도덕성에 대한 사회적 인정’, 그리고 ‘공적 언어와 종교적 언어의 수렴’이라는 두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1) 현대사회에서 교회의 정치참여가 성공을 거두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조건 중 하나는 지도자의 도덕성에 대한 사회적 인정과 존경일 것이다.
종교가 ‘선택’ 대상이 아니라 ‘강제’이자 ‘숙명’이었던 근대 이전 사회들에서는 대중적인 지지나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종교지도자의 정치적 영향력이 유지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대군주의 일방적인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현대사회에서 대중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종교지도자는 어떤 정치적 영향력도 행사하기 어렵다. 따라서 현대 시민사회는 당연히 종교인들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기대한다.
보다 근본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종교는 ‘상황의 도덕화(moralization of situation)’를 통해 공적인 영향력(public influence)을 행사한다.
상황의 도덕화는 ‘선과 악의 이분법’을 필수적으로 전제하며, 이것은 이 세상에서 선한 세력과 악한 세력의 판별, “사회적 악(social evil)의 화신으로 봉사할 아웃사이더”를 찾아내는 것을 포함한다.
한편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종교 교리로부터 연역된 도덕적 규범이나 가치들을 시민사회에 확대 적용하는, 한마디로 ‘도덕적·윤리적 쟁점들의 정치화’를 시도한다. 이런 이중적인 의미에서 모든 종교적 정치참여는 어느 정도는 ‘도덕정치(moral politics)’의 성격을 띠고 있으며, 종교지도자의 높은 도덕성은 도덕정치의 기초이자 전제가 된다. 따라서 종교지도자들이 대중으로부터 그런 높은 도덕성을 인정받고 있는가?
종교지도자의 정치적 발언이나 행동이 단순한 ‘이익정치’를 넘어서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해진다.
(2) 성공적인 정치참여의 또 다른 필수조건은 ‘공적 언어(public language)’와 ‘종교적 언어(religious language)’의 격차가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가 시민사회의 지배적 가치들에 무비판적으로 과잉 동조하는 현상도 문제일 것이지만, 교회의 환경이자 교회도 그 일부인 시민사회와의 원활한 ‘소통’과 ‘상호이해’는 교회의 정치적 발언이 시민사회의 대중에게 거부감을 불러일으킴 없이 경청되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인 것이다.
이때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근대 이후 비종교적 사회영역의 점진적 증가를 낳은 사회적 분화와 전문화 경향이 일정 정도 ‘언어와 문화의 분화’까지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신자들 사이에 통용되는 ‘종교적 언어’와 공중이 선호하는 ‘공적 언어’ 사이의 분화가 일어나며, 다음으로 종교 영역 내에서도 여러 가지 ‘종교적 언어들’의 분화가 진행된다.
이로 인해 종교다원주의 상황에서는 종교적 언어 사이의 소통도 쉽지 않게 되며, 따라서 ‘종교 간의 대화(interreligious dialogue)’가 종교 영역 내의 주요 과제 중 하나로 떠오르게 된다.
미국의 종교사회학자인 윌리엄스에 의하면, 종교다원주의적인 근대사회에서 특정 종교의 성직계층은 항상 ‘신자(believers)’ 그리고 무종교인 및 타종교 신자들로 구성되는 ‘공중(the public)’이라는 ‘두 청중(two audiences)’을 상대해야 한다.
이 경우 공중의 언어는 대개 종파적이라기보다 ‘포괄적’이고, 비관적이라기보다 ‘진보적․낙관적인’ 성격을 지니며, 관용․인권․공동선․사회정의․평등․책임․삶의 질 등 보다 ‘보편적인’ 가치들을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문제는 신자들이 선호하는 언어와 공중이 선호하는 언어가 달라서 종교인과 공중 사이에 소통의 어려움이 생겨날 수 있고, 심지어 두 언어가 대립․충돌을 일으키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종교적 언어’와 ‘공중의 언어’ 사이의 괴리가 더 커져 가는 상황인 것이다. 이럴 경우 역설적으로, 열성적인 신자들에게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게 보이고 그들을 가장 잘 동원할 수 있는 종교적 언어는 종종 광범위한 공중의 의심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은 언어가 되어 간다.
나아가 이런 상황에서 특정의 종교적 언어는 ‘종파적 언어(sectarian language)’로 간주되어 공중 혹은 시민 사이에 불편한 느낌을 자아내고 심지어 혐오감마저 불러일으킬 수 있으며, 지나친 종파적 언어는 해당 종교집단에 대해 ‘불관용’과 ‘근본주의(fundamentalism)’의 이미지를 시민들에게 각인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종교적 언어와 공적 언어라는 ‘두 언어’ 사이의 소통은 과연 원활한 편인가, 종교지도자들은 두 언어 간 원활한 소통의 필요성을 충분히 느끼며 의식하고 있는가, 그리고 종교지도자는 신자와 공중이라는 ‘두 청중’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가 등의 문제들에 직면하게 된다.
2. 개신교계 정치참여의 다양한 차원들
교회의 정치참여는 다양한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을 크게 네 차원으로 나눠볼 수 있을 것이다.
(1) 교회지도자들이 정당을 직접 조직하여 직접 상시적으로 정치사회 안에서 활동하는 것,
(2) 기성 정당 내의 신자 정치인들을 활용한 정치 행위, 즉 기존 정치사회 내 종교블록이나 정치인 개인들을 매개로 교회에 유리한 정책을 관철하거나 불리한 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로비나 제안 활동,
(3) 교회 입장에 부합하는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를 위한 투표를 독려하거나 공정선거 캠페인을 벌이는 것을 포함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선거에 참여하거나,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는 활동들,
(4) 주로 사회운동의 방식으로 정치사회에 영향을 미치거나, 특정 쟁점과 관련된 일시적인 정치적 활동을 조직하는 것.
이 가운데 (1)∼(3)의 방식이 ‘좁은 의미의 정치참여’에 해당한다면, (4)는 ‘넓은 의미의 정치참여’에 해당된다. 우리가 넓은 의미의 정치 개념을 채택한다면, 교회는 이미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적 발언과 행위를 행하고 있는 셈이다. 이 글에서 취하고 있는 입장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이 범주는 사회운동, 단일이슈정치(single-issue politics), 거리의 정치, 운동정치 등 다양한 형태들을 포괄하고 있으며, 성명서 발표, 시국 관련 집회, 행진 등 의사표현 방식 또한 다양하다. 윌리엄스에 의하면,(4)는 다시 두 가지 하위유형으로 구성된다.
그에 의하면, “사회변화를 낳을 수 있는 종교운동”은 ‘종교에 기초한 사회운동(religiously based social movement)’과 ‘개인주의적, 개종주의적 운동 유형(individualist, conversionist type of movement)’으로 구분된다. 전자가 집단적 수준에서 사회변화를 목표로 삼는다면, 후자는 일차적으로 개인들을 변화시키고자 하며, 이 개인들이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욕망을 가진 경우에 변화된 개인들의 행위를 통해서만 사회변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제 교회 정치참여의 네 차원들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1) 정당의 결성과 활동
이미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한국은 종교정당이 활성화된 나라가 아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종교정당이 재차 등장하고 있다. 해방 직후의 종교정당들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실정이므로 이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보고, 최근 재등장하고 있는 종교정당들에 가급적 소상하게 살펴볼 것이다. 특히 최근의 종교정당들은 다음에 다룰 이명박 정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정치(religious politics)의 전후 맥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한국 현대사에서 종교정당들은 해방 직후 출현했다가 짧은 기간 동안만 생명력을 유지하다 사라졌으며, 그것도 개신교와 천도교에 집중되었다. 개신교의 경우 미·소 군정으로 인한 임시적 분단 상황에서, 남한지역에서는 종교정당이 전혀 등장하지 않았으며, 북한의 중심부인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정당들이 존재했었다.
우선, 1945년 9월 초에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상 최초의 기독교정당인 ‘기독교사회민주당’이 평북 신의주의 윤하영·한경직 목사의 주도로 결성되었고, 이유필 장로가 당수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사회민주당은 같은 해 11월 16일의 용암포지부 결성대회, 11월 23일의 신의주 학생시위사건 등 사회주의자들과의 충돌을 거치면서 급속하게 와해되었다.
또 같은 해 11월 3일에 창당된 ‘조선민주당’은 기독교정당은 아니었지만, 당수인 조만식 장로와 부당수인 이윤영 목사를 비롯하여 개신교 지도자들이 창당을 주도했다.
1945년 말까지 북조선공산당의 당세를 압도했던 조선민주당 내에서, 개신교 지도자들의 주도권은 1946년 2월경까지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민주당은 강양욱 목사 등 사회주의자들의 주도 하에 당의 존재를 유지했으며, 1981년 1월의 제6차 당대회를 계기로 당명을 ‘조선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1945년 11월 초에는 김화식·이유택·김관주·황봉조·우경천 목사 등 장로교 지도자들이 평북 정주에 모여 ‘기독교자유당’ 결성을 추진했지만, 창당에는 이르지 못했다.
1946년에도 장로교 지도자들의 ‘기독교자유당’ 추진 움직임, 감리교 지도자들의 ‘기독교민주당’ 추진 움직임이 계속되었고, 1947년 2월부터는 두 움직임이 합류하여 같은 해 5월에는 창당 발기인대회까지 열렸다. 그러나 같은 해 6월부터 11월까지 북한당국의 탄압이 계속됨으로써 결국 기독교자유당의 창당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개신교 외에 이른바 ‘해방정국’에서 종교정당 활동이 활발했던 것은 천도교였다. 개신교의 종교정당 활동이 북한지역 중심이었던 데 비해, 천조교의 종교정당 활동은 남한에서 시작되었다.
해방 직후 천도교 지도자들은 각 지역에서 일제시대 말기 해산된 천도교청우당 조직을 복원하기 시작하여, 1945년 9월 14일 당을 정식으로 부활시켰으며, 같은 해 10월 31일 ‘천도교청우당 부활전당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복원’ 혹은 ‘부활’이라고는 하지만, 해방 후 등장한 천도교청우당은 정당정치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식민지 시대의 정치결사와는 질이 다른 정당조직이었다. 천도교청우당은 창당한 지 1년 만에 당원 50만 명을 자랑하는 거대 정당으로 성장했다.
한편 천도교 ‘구파(舊派)’는 ‘신파’가 주도하는 천도교청우당이 급진적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참여하자, 1946년 5월 교단 분립과 동시에 ‘천도교보국당’을 독자적으로 결성했다.
1947년 8월부터 미군정으로부터 좌익으로 몰려 당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거나 천도교보국당 당원들로부터 폭력적인 공격을 당하면서, 천도교청우당은 빠르게 쇠퇴하였으며, 1949년 12월 26일 ‘정당에 관한 규칙’에 의거하여 정리·해체되었다.
천도교보국당 역시 1949년 1월 천도교 청년단체와 결합하여 ‘만화회’를 결성하면서 해산되었다.
한편 38선의 존재로 인해 남북한 간의 연락이 원활할 수 없었던 상태에서, 1946년 1월의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참가자 대다수가 “북한지역에 독립적인 당을 창설할 것을 요구”하였고, 이에 따라 1946년 2월 8일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이 창당되었고, 2월 23일에는 평양 천도교당에서 첫 번째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다.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은 창립 당시 약 5만 명이던 당원이 1948년 9월 현재 약 29만 명에 이르렀을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떨쳤다.
1949년 12월 남한에서 천도교청우당이 강제로 해산당한 이후 체포를 면한 일부 당 간부들이 월북하여 북조선천도교청우당과 합당하며, 당명도 ‘조선천도교청우당’으로 바뀐다. 이로써 조선천도교청우당은 남북한을 합친 천도교 유일의 정당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북한을 통틀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60년 이상의 연륜을 지닌 유일한 종교정당의 지위를 유지해왔다.
한편 3·1운동 이후 천도교 내의 ‘혁신세력’을 이끌었던 오지영이 해방 직후 오지영이 중심이 되어 또 다른 천도교 정당인 ‘동학당’이 결성되었고, 이 당은 1946년 2월에 있은 ‘민전 결성대회’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핵심 지도자인 오지영이 1948년경에 건강문제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고 1949년 12월 전북 익산으로 이주했다가 1950년 3월 사망하는 것으로 보아,동학당의 활동은 이미 1949년 이전에 중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남한)에서 반세기만에 종교정당 단절의 역사를 깨뜨린 것은 다름 아닌 통일교였다. 통일교 교단이 2003년 3월 10일 ‘천주평화통일가정당’(가정당)이라는 이름으로 정당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정당은 창당 후 치러진 2004년의 4월의 제17대 국회의원선거와 2006년 5월의 지방선거 모두에 참여하지 않았다.
가정당에 이어 등장한 것은 2004년 총선을 겨냥했던 ‘한국기독당’이었다. 그러나 주류 개신교 쪽에서는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기독교정당’ 혹은 ‘기독교정치’에 관한 논의가 이어져왔다.
예컨대 1996년 3월 초 ‘기독교한국문제연구회’가 “한국기독교정당 그 가능성과 현실성”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을 개최한 바 있다. 아마도 기독교정당 문제를 공론화한 최초의 움직임이었을 것이지만, 당시 심포지엄 참석자들의 다수 의견은 “기독교정당이 필요하긴 하나 실제 창당은 시기상조”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1998년 4월 중순에는 신한국당 소속의 황우여 의원을 중심으로 ‘한국기독교정치연구소’가 창립되었고, 이 연구소는 같은 해 6월 “21세기 기독교정치의 미래”에 관한 창립 심포지엄을 열었다.
여기서도 개신교인들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점은 인정되었지만, 기독교정당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는 없었다.
2002년이 되면서 정치에 대한 교계의 관심이 재차 고조되었다. 먼저 2002년 3월 하순에 한국기독교정치연구소가 “기독교와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국제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학술모임에서 한국 측 발표자들은 신자와 교회의 정치적 관심을 환기하는 수준에 그쳤지만, 유럽 측 발표자들은 네덜란드와 독일의 기독교정당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었다.
같은 해 5월 중순에는 한세대학교 대학원 원우회가 주최한 ‘기독정치 세미나’에서 기독교정치연구소 소장인 황우려 의원이 “기독정치의 기본원리”라는 제목의 특강을 하기도 했다.
이 해 10월에는 한국복음주의신학회 윤리분과학회와 한국개혁신학회가 각각 “한국교회와 정치윤리”, “한국의 정치문화와 기독교”라는 주제의 학술행사를 가졌다.
그러나 2002년까지 개신교계의 정치적 관심은 대부분 ‘학술적인’ 논의에 그쳤을 뿐 아니라, 기독교정당의 필요성을 공론화하는 내용도 아니었다. 그러던 것이 2003년 들어서는 분위기가 일변하여, 기독교정당을 노골적으로 추진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그런 맥락 속에서 2004년 봄에 이르러 한국기독당이 창당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변화는 17대 총선에서 ‘1인2표제’가 처음으로 도입됨으로써 소수정당의 원내진출 가능성이 커진 것이 중요한 유인(誘因) 중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다.
2003년 당시 「한겨레」의 곽병찬 기자는 “‘기독교정당’ 결성 추진”이라는 기사에서 2004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개신교계 일각에서 ‘기독교정당’ 결성이 추진되고 있으며, 이런 움직임은 같은 해 6~7월부터 시작되었고 10월경에 수면 위로 가시화되었다고 보도했다.
또 당시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회장이었던 김영진 전(前) 농수산부장관은 7월 말∼8월 초경에 교계 원로들이 기독교정당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자신에게 앞장서줄 것을 요청했다고 밝혔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2003년 6월 4일 한국기독교정치연구소, 기독문화학교, 명지대학교 독일․유럽연구센터가 공동주최한 학술대회가 주목된다.
“한국에서의 기독교정당의 모색”이라는 주제에서 보듯이, 기독교정당은 이제 매우 현실적인 과제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김영진 전 장관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정당 결성 움직임은 10월 29일의 심포지엄과 준비위원회 발족을 거쳐 2003년 11월 25일에 ‘한국기독교정치문화원’의 창립으로 이어졌으며, 정근모 전 과기처장관이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10월의 심포지엄에서 김영진 준비위원장은 “한국기독교정치문화원을 통해 초당적으로 기독정치인을 양성, 입법․행정․사법부를 복음화함으로써 한국정치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 발언에서 보듯이 한국기독교정치문화원은 이때까지도 독자적인 기독교정당 결성을 당면과제로 여기지 않고 있었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보수적인 교계 원로들로 구성된 ‘한국기독교시국대책협의회’가 기독교정당의 결성을 주도하고 나섰다.
2004년 2월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가칭)정치권복음화운동 발기인대회’에서 박영률 목사(8·15국가기도회 상임회장)가 행한 경과보고에 의하면, 한국기독교시국대책협의회는 2003년 9월 “제17대 총선에서 ‘믿음과 성령과 말씀이 충만하고 칭찬받는 사람들(행6:3)’을 자천타천으로 입후보하도록 하여 정치권복음화운동을 출범케 하는 데 산파역을 하기로 결의”했다.
또한 이를 준비하기 위해
(1) 2003년 10월 6일에 ‘한국새벽기도운동본부’의 주최로 “한국기독교가 나아갈 방향 모색”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을,
(2) 2003년 11월 24일에 “한국사회 변혁을 위한 교회의 역할”이하는 주제로 포럼을,
(3) 2004년 1월 19일에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의 주최로 “국가에 대한 교회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포럼을 각각 가졌다. 또 2004년 1월에는 여의도에 사무실을 개소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여, 같은 해 2월에 기독교정당 창당을 위한 발기인대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특히 2003년 10월 초에 열린 “한국기독교가 나아갈 방향 모색” 심포지엄에서 한국기독교시국대책협의회 회원이기도 한 신현균 목사(민족복음화운동본부 총재)는 발표문을 통해 “이미 가정당이라는 정당을 만든 통일교가 원내교섭단체가 되면 기독교를 탄압할 것”이라면서 “기독교정당 설립을 서둘러 정치적으로도 기독교 부흥의 기반을 닦아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한국기독교정치연구소 소장인 황우려 의원(한나라당) 등도 "기독교정당이 한국교회의 발전을 정치적으로 보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같은 해 10월 하순에 “한국사회 변혁을 위한 교회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열린 8․15국가기도회의 포럼에서, 기독교시국대책위원회 회장인 김준곤 목사는 주제발제를 통해 “정치개혁과 정치복음화, 그리고 하나님을 우리 민족의 구주로 삼는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 정치권 복음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황우려 의원도 “이름을 기독교정당이라고 칭하든지 아니면 기존의 정당을 하나님 말씀에 근거해서 완전히 변화시켜 기독교정당으로 만들든지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기독교 정치사상을 구현하는 정당을 반드시 육성,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4년 3월 22일 ‘한국정치권복음화운동’이 아닌 ‘한국기독당’(기독당)이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정당이 창당되었다. 창당대회에서는 최수환 장로가 상임대표로, 김준곤 목사가 대표상임고문으로, 창당준비위원장이었던 김기수 목사를 비롯하여 김동권·김소영·박영률·신신묵·조용기·최병두 목사가 상임고문으로 선출되었다.
기독당은 4월 15일로 예정된 총선거를 앞두고 목사 2명을 포함한 9명의 지역구 후보와 14명의 비례대표 후보를 출마시켰다.
그러나 기독당은 지역구에서 8,267표를 얻는 데 그쳤을 뿐 아니라, 정당투표에서도 득표율 1.1%(228,837표)에 그쳐 선거관리위원회 등록 취소를 면하기 위한 2% 득표에도 미달함으로써 국회의원 배출은커녕 정당 자체가 해산 당했다.
한편 17대 총선을 앞두고 2004년 3월 19일에는 개신교 계열의 사회복지 인사들을 중심으로 ‘국민복지당’이 창당되기도 했다.
“국내 유일의 ‘사회복지정당’을 표방한” 이 당의 대표는 의사인 강홍조였으며, 이명박 정부의 초대 보건복지부장관으로 발탁된 김성이 이화여대 교수도 참여하였다.
그러나 국민복지당은 17대 총선에 실제로 참여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17대 총선을 앞두고 등장한 기독교정당들은 선거에 참여하지 않거나, 참여했어도 초라한 결과 밖에 얻지 못했다. 그러나 18대 총선을 앞둔 2007년부터 기독교정당들이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2) 정치사회에 대한 영향력 행사
독자적인 종교정당을 결성하여 활동하는 것이 보다 ‘직접적인 정치참여’라고 한다면, 기성 정당 내의 신자 정치인들을 활용한 정치적 영향력 행사는 교회의 ‘간접적인 정치참여’에 해당할 것이다. 전자의 방식은 ‘높은 가시성’으로 특징지어지는 데 비해, 후자의 방식은 좀 더 ‘조용하고 은밀하게’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교회와 종교지도자들은 기존 정치사회 내 종교블록이나 정치인 개인들을 매개로 하여 교회에 유리한 정책을 관철하거나, 교회에 불리한 정책을 저지하기 위한 다양한 로비나 제안 활동을 전개할 수 있다.
특히 개신교야말로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 시절부터 이런 방식의 정치참여가 대단히 효과적이었으므로, 독자적인 정당의 필요성을 거의 느낄 수가 없었다. 해방 직후의 기독교정당 운동이 정부와 개신교 교회의 관계가 적대적이었던 북한지역에서만 나타났고, 남한지역에서는 전무했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정부 및 기성 정당 내의 신자 정치인들을 활용한 정치참여는 해방 직후부터 매우 활발했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면서 이른바 ‘통역정치(通譯政治)’가 위력을 발휘했던 미군정 시대에 정부 고위직은 미국유학 경력자 대부분을 차지했던 개신교인들에 의해 충원되었고, 해방 전 미국에서 목회 활동까지 했던 개신교 장로가 대통령직을 맡은 이승만 정부의 고위직에도 개신교인들이 다수 진출했다. 1946년 현재 미군정의 최고위직에 임명된 한국인 50명 중 35명(70.0%)이 개신교 신자였고,
이승만 정부(1952∼1960년의 경우)에서 장․차관, 고급공무원, 대사, 장성, 의회지도자 등 정치지도자의 39.2%가 개신교 신자였다는 통계도 있다.
필자가 이승만 정부(1948∼1960년)의 19개 부처 장․차관 24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로도 개신교 신자의 비율은 38% 정도로 나타났는데, 이 중 각 부처의 장(長) 135명만을 대상으로 할 경우 개신교 신자는 64명으로 그 비율이 무려 47.4%에 달했다.
그러나 해방 방시 총인구 대비 개신교 신자의 비율은 0.5%에 불과했고, 이승만 정부 마지막 해인 1960년에도 그 비율은 5.8% 정도에 그쳤다. 또 <표 1>에서 보는 것처럼, 의회와 정당으로 구성되는 정치사회에서도 인구비율로 볼 때 개신교인은 크게 과대표 되고 있었다.
<표 1> 이승만 정부 시기의 국회의원 중 개신교 신자의 분포
회기* |
의원 총수** |
개신교 신자 의원 수 (비율) |
소속 정당․단체별 신자의원 숫자 |
1대 |
208명 |
44명 (21.2%) |
독촉국민회 12명, 한민당 9명, 대동청 5명, 한독당 1명, 교육협회 1명, 여자국민당 1명, 무소속 15명 |
2대 |
210명 |
54명 (25.7%) |
국민당 10명, 국민회 3명, 한청 3명, 노총 2명, 민국당 2명, 사회당 1명, 대한부인회 1명, 여자국민당 1명, 무소속 31명 |
3대 |
208명 |
38명 (18.7%) |
자유당 22명, 민국당 4명, 국민당 1명, 무소속 11명 |
4대 |
239명 |
47명 (19.7%) |
자유당 24명, 민주당 19명, 무소속 4명 |
* 임기는 각각 1948.5.31~1950.5.30(1대), 1950.5.31~1954.5.30(2대), 1954.5.31~1958.5.30(3대), 1958.05.31~1960.7.28(4대)임.
** 재선거나 보궐선거에 의해 당선된 의원까지 포함한 수치임.
<표 1>에서처럼, 이승만 정부 내내 개신교 신자인 국회의원은 의원 총수의 1/4∼1/5가량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대다수가 범여권에 속해 있었다.
정부 수립 직후부터 ‘중앙청기도회’, 이를 확대하여 상설화하려 했던 1952년 2월의 ‘정계 인사 특별기도회’, ‘원내교섭단체’로 활동할 것을 목표로 1952년 6월에 결성된 ‘국회의원 신우회’ 등 개신교인 정치지도자들의 조직화 작업도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아쉬워서 교회가 나서 기독교정당을 결성하겠는가?
4·19혁명에 의한 이승만 정부의 파국적인 붕괴와 뒤이은 군사쿠데타는 ‘정치엘리트 개신교인들을 통한 정치참여 전략’에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필자가 보기에, ‘군부(軍部)정권’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런 전략이 계속 효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준 결정적인 요인은 1951년 2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군종제도’였다. 군종장교 정원에서 각 종교가 차지하는 비율은 이 제도의 도입 시점은 물론이고 현재까지도 개신교의 압도적인 우위가 유지되고 있다.
더욱이 군사쿠데타로 군인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했던 것은 군종제도가 시행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었고, 초급 및 중견 장교들 사이에서 군종제도의 위력이 이미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1956년에 ‘한국기독장교회(OCU)’, 1960년 ‘기독장교회 공군연합회’, 1963년 ‘기독장교회 육군연합회’가 창립되는 것을 비롯하여, 시차를 두고 해군, 해병, 주월한국군사령부 등 각군(各軍) 연합회가 속속 발족되면서 개신교인 장교들의 조직화도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이런 가운데 1966년에는 국방장관, 육군·해군·공군 참모총장, 해병대사령관, 주월한국군사령관 등 군 수뇌부 전체가 개신교인에 의해 채워지는 일도 일어났다.
같은 해에 실시된 조사연구에 따르면, 3군 사관학교 생도의 29.9%가 개신교인이었으며, 육군사관학교 생도의 24.2%, 해군사관학교 생도의 39.7%, 공군사관학교 생도의 34.7%가 개신교인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국가가 앞장서서 ‘군대를 개신교화’하는 ‘전군신자화운동(全軍信者化運動)’이 1970년대 초반에 몇 년 동안에 걸쳐 전개되었으며, 이런 움직임이 경찰과 교소도로 확대되어 이른바 “전경(全警)신자화운동”과 “전국교도소(全國矯導所)신자화운동”까지 벌어졌다.
군종제도를 매개로 하여, ‘군부-정부-교회’의 협력적 네트워크는 공고하게 유지되었던 것이다. 이승만 정부 시기인 1950년대부터 추진되었지만 결국 성사되지 못했지만 박정희 정부 시기인 1966년부터 개신교만의 참여로 시행되었던 ‘경목(警牧)제도’도 교회-정부 협력 네트워크의 또 다른 축을 형성했다.
말하자면, 군종 및 경목 제도는 “교회 안에 침투한 국가”이자 “국가 안에 침투한 교회”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 미국을 모방하여 ‘조찬기도회(朝餐祈禱會)’라는 형식으로 대통령과 교회, 국회의원과 교회의 교류가 제도화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도입된 것일 뿐 아니라, 미국인 선교사들이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협조(cordial and cooperative)”로 요약했던이승만 정부 시기에도 성공하지 못했던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국가-정치사회-교회 간 교류·협력 기제가 마련된 셈이었다.
‘국회조찬기도회’는 1965년에 시작되었으며, 월 1회 모임을 가지면서 현재까지 개신교인 국회의원의 조직으로 역할하고 있다.
또 ‘대통령조찬기도회’는 이듬해인 1966년에 시작되었고, 1976년부터 ‘국가조찬기도회’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까지 매년 1회씩 개최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1970년대 들어 조찬기도회가 중앙 및 지방 정부의 각급 기관장을 초빙하는 행사로 유행처럼 확산되었다는 사실로서, 이런 현상을 주도한 것이 ‘기독실업인회’였다.
민주화 이후 신자 정치인들을 통한 정치참여는 대부분의 주요 종교들에서 더욱 활발해졌다. 15대 국회에 해당하는 1997년 7월 현재로는 전체 국회의원 299명 중 개신교 신자모임인 ‘국회조찬기도회’에 110명(전체 의원의 36.8%), 1981년에 결성된 불교 신자모임인 ‘정각회’에 49명(16.4%), 1988년에 결성된천주교 신자모임인 ‘가톨릭신도의원회’에 63명(21.1%)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 3대 종교의 국회의원 조직에 속한 이들이 전체 의원의 74.2%에 이르는 것이다. 1996년에는 당시 박세일 사회복지수석과 이각범 정책수석의 주도 하에 청와대 내의 불교 신자 모임인 ‘청불회’가 결성되었다.
2006년 9월에는 원불교 신자인 국회의원 4명과 정무직 이상 고위공무원 등 10여 명으로 구성된 ‘원정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표 2>에서 보듯이, (천주교 신자인 국회의원의 비율이 교세에 비해 높기는 하지만) 국회에서 개신교 신자의 비율은 여전히 다른 종교들에 비해 월등히 높다. 이 사실은 정치사회에 대한 개신교 교회의 영향력이 강력하며, 따라서 기성 정당에 속한 신자 의원을 통한 방식이 교회 정치참여 전략으로 계속 선호될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한다.
<표 2> 15∼18대 국회의원 당선자의 종교 분포 단위: 명(%)
회기 |
개신교 신자 의원 |
천주교 신자 의원 |
불교 신자 의원 |
국회의원 정원 |
15대 (1996∼2000) |
110(36.8) |
63(21.1) |
52(17.4) |
299(100.0) |
16대 (2000∼2004) |
112(41.0) |
66(24.2) |
43(15.8) |
273(100.0) |
17대 (2004∼2008) |
103(34.4) |
70(23.4) |
34(11.4) |
299(100.0) |
18대 (2008∼2012) |
118(39.5) |
75(25.1) |
58(19.4) |
299(100.0) |
유난히도 초대형 교회들이 밀집해 있는 한국 개신교의 독특한 양상은 개신교 전체뿐 아니라, 개별 초대형 교회들의 정치적 영향력 또한 매우 강력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이런 현상은 지역구 국회의원, 지방자체단체장, 지방의회 의원 등을 매개로 지역 수준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이다.
예컨대, 1996년 총선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소망교회는 소속 신자 중에서 무려 6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했다.
또 2004년 총선에서는 소망교회가 7명, 사랑의교회가 5명, 중앙침례교회가 3명의 국회의원 당선자를 낳았다.
서울 강남지역의 초대형교회인 충현교회와 소망교회의 경우 1992년과 2007년에 각각 소속 장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본인의 의사나 실제 행동과는 상관없이, 이런 초대형 교회의 담임목사 혹은 당회장에게 부여될 잠재적인 정치적 영향력이 어느 정도일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일 것이다.
(3) 선거 참여와 투표
해방 이후 선거 참여라는 방식의 교회 정치참여는 크게 세 국면을 거쳐 왔다고 말할 수 있다.
(1) 1948∼1960년의 경우,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선거 모두에서 거의 범교회적 차원에서 매우 활발한 선거운동이 전개되었다.
(2) 1960∼1987년의 경우, 교회의 과도한 선거개입에 대한 반성과 반작용으로, 그리고 1970년대 이후에는 선거정치 자체의 위축으로 인해 교회는 선거 방식의 정치참여에 소극적이었다.
(3) 1987년 이후 민주화 이행 과정이 개시되면서 선거정치가 재활성화 됨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교회의 선거 참여가 활성화되었다.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교회가 직접 선거운동에 조직적으로 나섰던 것이 특징이었다. 제헌의회 의원과 초대 대통령을 결정짓는 1948년의 5․10선거에서 교계는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이승만 세력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동시에 이 선거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기독교청년회, 기독교도연맹, 한국기독교연합회 등이 직접 후보를 출마시켜 8명을 당선시켰고, 1950년의 2대 총선거에서도 기독교청년회, 대한기독교침례회 대표 2명이 당선되었다.
1952년의 제2대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의 전신인 ‘한국기독교연합회’는 ‘기독교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도․군․개별 교회 단위까지 하위조직을 갖추고 선거 전 주일을 ‘선거기도일’로 지키는 등 조직적인 이승만 지지운동을 벌였다.
1954년 총선의 경우에도 한국기독교연합회 주최의 ‘선거대책위원회’가 열려 선거구별로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입후보자에 대한 ‘공인제(公認制)’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1956년의 제3대 정부통령선거 때에는 “교회가 어느 정당에 편승하거나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면서, 교회가 직접 나서 선거운동을 전개하는 일은 중단되었다.
그러나 비록 개인자격일지라도 한국기독교연합회 핵심 지도자들이 참여한 ‘정부통령 선거추진 기독교도중앙위원회’가 구성되어 이승만과 이기붕을 지원하는 선거운동에 나섰다.
1956년 정부통령선거는 부통령 자리를 놓고 천주교의 전적인 지지를 받는 장면과 감리교 권사인 이기붕 간에 경합이 벌어졌기에 개신교계의 선거참여는 오히려 더욱 열기를 띠었으며, 특히 감리교는 이승만과 이기붕이 모두 감리교 신자라는 사실까지 가세하여 더욱 열심이었다.
1958년(제4대 총선거) 이후의 선거에 대한 교회의 참여는 종전처럼 요란하지도 않고 교회가 직접 정치인을 내세우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이 거듭 강조되었지만, 개신교 신자 후보자를 교계 언론을 통해 소개하는 등 간접적인 선거운동은 계속되었으며, 누구에게 투표를 하건 간에 그 대상은 개신교 신자여야 한다는 점은 여전히 당연시되었다.
1960년의 제4대 정부통령선거에서도 그 해 2월에 있은 자유당 주최 ‘교계지도자초청모임’에 당시의 개신교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는가 하면, 이승만과 이기붕은 “전국교회 150만 신도들에게 드리는 말씀”을 발표하여 개신교 신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호소했다.
앞서 지적했듯이, 민주화 이행에 다른 선거정치의 재활성화에 따라 1980년대 말부터 교회의 선거 참여가 다시금 활발해졌다. 전체적으로 볼 때, 민주화 이후 전국 및 지방 차원에서 정당·정치엘리트가 평가하는 ‘종교의 정치적 가치와 효용’이 크게 증가되었다.
개신교의 경우 다른 어떤 종교들에 비해서도 신자들이 잘 조직화되어 있는 편이어서 이런 정치적 가치·효용이 높은 것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대형 교단과 대형 교회들일수록 더욱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선거와 총선거, 지방선거 등 선거 시즌이 되면, 주요 정당들마다 종교별 전담조직을 만들고 해당 종교에 맞는 공약을 개발하여 대응하는 관행이 빠르게 자리 잡게 되었다.
이런 현실을 뒤집어 보면, 교회 측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선거에 대한 교계의 영향력이 그만큼 증대되었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1940∼1950년대에 개신교계의 선거 참여가 여당 쪽으로 일방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이었다면, 1980년대 말 이후의 선거 참여에서는 정치적·신학적 성향에 따라 정치적 선택과 선거 참여 방식이 첨예하게 엇갈리는 특징이 두드러졌다.
개신교의 진보나 중도 그룹의 경우, 공명선거운동이나 공정선거 감시운동, 부패 후보 낙선운동, 야당이나 진보적 후보 지지운동 등으로 비교적 다양한 선거 참여 방식이 나타났고, 후보의 종교적 성향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는 편이었다.
반면에 개신교 보수 그룹은 보수 정당 후보를 지지하면서도, 후보자의 종교적 성향을 보다 중시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개신교 장로가 보수 정당의 후보로 출마한 1992년과 2008년 대통령선거의 경우, 교계의 보수 인사들이 이른바 ‘장로대통령론’을 내세우며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에 나섰으며, 2004년부터는 직접 기독교정당을 결성하여 국회의원선거에 참여하는 새로운 선거 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2004년과 2008년의 총선거에서는 기독교정당에 대한 태도의 차이로 보수적 그룹 자체가 분열되면서 기대한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1992년과 2008년의 대통령선거에서는 두 차례 모두 ‘장로대통령’을 만들어내는 대성공을 거둠으로써 강한 정치적 자신감을 충전했다. 이런 정치적 자신감으로 인해, 앞으로도 교계의 보수 그룹은 더욱 적극적으로 선거에 참여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4) 사회운동
앞에서 지적했듯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사회운동, 단일이슈정치, 거리의 정치, 운동정치 등도 ‘광의(廣義)의 정치’에 해당한다.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교회가 선택한 이런 정치참여의 방식 또한 매우 효과적이고 강력했다.
해방공간에서의 좌우익 갈등에서 개신교인들의 활약, 한국전쟁 말기의 휴전반대운동, 1959년의 재일동포 북송(北送) 반대운동, 1965년의 한일협정 비준반대운동 등이 1960년대까지 개신교 사회운동의 대표적인 사례들로 거론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회운동들의 공통점은 교계의 심각한 분열 없이 비교적 일사분란한 동원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이후에는 정치적·신학적 지향에 따른 분화가 뚜렷해졌다.
사회운동 방식의 교회 정치참여가 보여준 효율성과 강력함은 1970∼1980년대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와 산하 기관들이 전개한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민중운동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드러났다. 필자가 보기에, 개신교의 진보 그룹은 “사회운동 발전의 한국 모델”이라고 부를 만큼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중대한 족적을 남겼다. 이 ‘한국 모델’을 좀 더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한반도에서는 장차 수립될 국가권력의 성격과 주체를 둘러싸고 격렬한 좌우익 갈등이 전개되었다.
이 갈등은 1948년 여름에 이르러 남한에서는 우파의 승리로 사실상 종결되었다.
그 뒤 3년간의 한국전쟁 그리고 근 1년간의 제2공화국 기간은 지하로 잠복했던 좌파 및 중도파 정치세력이 재등장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해주었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좌파와 중도파 정치세력의 “씨를 말리는” 계기 또한 제공했다.
일시적으로 지상에 나온 급진적 정치세력은 철저하게 색출되고 처벌되었으며, 그로 인해 계급적 사회운동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저항적 사회운동의 토양은 황폐화되었고, 강력한 국가에 의해 식민화된 시민사회는 극도로 위축된 채 긴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그런데 1960년대 말 이후 혹은 늦어도 1970년대부터 개신교 및 천주교 교회들은 대학과 함께 권위주의 국가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주도해 왔으며, 다른 저항적 사회운동들이 형성되고 성장하는 요람으로 기능해 왔다.
…또 이 시기에 그리스도교 교회들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정치적, 사회적 불만들을 표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개신교의 다수세력은 양적으로 급팽창되면서 권위주의적 국가와의 협력을 오히려 강화하였고, 불교와 천도교 등 한국의 주요한 토착 종교들 역시 국가에 대해 순응적이던 종래의 태도를 고수했다.
한국의 그리스도교 사회운동과 저항적 사회운동의 관계에서 발견되는 이런 ‘독특한’ 현상은 몇몇 정치학자와 사회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스도교 사회운동 발전의 ‘한국적인 모델’은 서구와 라틴아메리카에서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이 출현하고 발전한 맥락과도 상당히 다른 것이다.
서구와 라틴아메리카의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예컨대 기독교사회주의운동, 사회복음운동, 가톨릭액션 등)은 급진적 노동운동과 사회주의운동의 성장에 따른 신자들의 교회 이탈에 대한 방어적 대응이라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서구와 라틴아메리카의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이 이미 존재하는 강력한 사회운동에 ‘맞서’ ‘사후적으로’ 등장하고 발전되었다면, 한국의 그리스도교 사회운동은 저항적 사회운동의 폐허 위에서, 저항적 사회운동에 ‘선행하여’ 등장하였고, 자신의 발전 과정에서 저항적 사회운동의 ‘성장을 촉진’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개신교 보수 그룹도 성명서 발표, 시국기도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사회운동에 나섰는데, 대체로 이 활동들은 군부정권의 국가안보이데올로기와 반공주의를 지지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와 관련된 단체들도 다수 등장했는데, 대표적인 단체는 1975년에 등장한 ‘대한구국선교단’ 및 그 산하의 ‘구국십자군’이었다. 필자가 보기에는, 빌리 그레이엄 한국전도대회(1973년 5∼6월), 엑스플로74(1974년 8월), 77복음화대성회(1977년 8월), 80세계복음화대성회(1980년 8월) 등 유신체제 출범 직후부터 연이어 개최된 초대형 대중전도집회들이야말로 개신교계의 보수적 사회운동의 정점에 위치시킬 만하다고 생각된다.
민주화 이후 교회의 사회운동과 관련하여 보수 그룹 내에서 중대한 변화가 진행되었는데, 이는 두 가지 흐름을 포함한다. 그 하나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자각한 ‘복음주의’ 계열 인사들이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연합(기윤실), 공명선거를 위한 기독교대책위원회(공선기위), 기독교학문연구회(기학연) 등을 조직하여 사회운동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개신교 사회운동에서 ‘중도적’ 그룹으로 분화되면서, 일부는 급진적 ‘민중운동’과 구분되는 ‘시민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다른 한 흐름은 한층 보수적인 개신교 사회운동으로, 1989년 말에 창립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로 대표된다.
김대중 정부 등장 이후인 199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개신교 보수 그룹의 ‘정치적 행동주의(political activism)’는 1970∼1980년대 개신교 진보 그룹의 사회운동 이후 가장 주목받을 만한 현상으로 주목받고 있다.
한기총 중심의 보수 그룹은 ‘반공-반북한-친미’의 기조 아래, 햇볕정책, 국가보안법 개폐, 사립학교법 개정, 전시작전통제권 회수 등의 쟁점들에 대해 강력한 입장 표명을 계속해왔다. 특히 노무현 정권 출범 직전인 2003년 1월부터 단독으로 혹은 우익단체들과 연대하여 대규모 정치집회들을 연이어 개최함으로써, 이들은 단번에 한국 우익의 대표 세력 중 하나로 부상했다. 대표적인 시국집회를 나열하면 <표 3>과 같다.
<표 3> 개신교 보수 세력의 주요 시국집회들: 2003∼2007년
일시 |
집회 명칭 |
장소 | |
2003 |
1.11 |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 |
서울시청 광장 |
1.19 |
제2차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 |
서울시청 광장 | |
2.9 |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 |
부산역 광장 및 대구서문교회 | |
3.1 |
3․1절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 금식기도회 / 반핵반김(反核反金)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 |
여의도 한강시민공원 / 서울시청 광장 | |
6.21 |
나라와 민족을 위한 구국기도회 / 반핵반김 한미동맹 강화 6․25 국민대회 |
서울시청 광장 | |
2004 |
3.1 |
친북좌익척결 부패추방을 위한 3․1절 국민대회 / 구국기도회 |
서울시청 광장 |
4.3 |
대한민국을 위한 국민화합기도회 |
서울 대학로 | |
10.4 |
비상구국기도회 / 국가보안법 사수 국민대회 |
서울시청 광장 | |
11.1 |
민족 회개와 구원을 위한 한국교회 통곡기도회 |
장충체육관 | |
11.13 |
구국기도회 및 국보법 폐지 등 4대 악법저지 결의대회 |
여의도 KBS본관 앞 | |
2005 |
6.25 |
북핵(北核) 반대와 북한 인권을 위한 국민화합대회 |
서울 대학로 |
12.10 |
북한 동포의 인권과 자유를 위한 촛불기도회 |
서울시청 광장 | |
2006 |
1.19 |
기독교 사학 수호를 위한 한국교회 비상구국기도회 / 십자가 행진 |
영락교회 / 서울시청 |
9.2 |
대한민국을 위한 비상구국기도회 |
서울시청 광장 | |
2007 |
3.1 |
친북반미좌파 종식 3·1국민대회 |
서울시청 과장 |
6.6 |
북핵 폐기 자유민주통일 호국기도회 및 국민대회 |
서울시청 광장 | |
6.23 |
사립학교법 재개정 특별기도회 |
서울시청 광장 | |
10.3 |
흔들리는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기 위한 개천절 국민대회 |
서울역 광장 |
1990년대 이후 개신교의 사회운동은 진보, 중도, 보수 그룹으로 분화되었다. 다양한 색깔의 사회운동들이 동시에 표출되고 혼합됨으로써, 개신교에 대한 교회 바깥 대중의 ‘정치적 이미지’ 역시 이전에 비해 더욱 복합적인 것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전체로 보면 1990년대 이후 진보적 사회운동의 위축, 중도적 사회운동의 여전한 약세, 보수적 사회운동의 급격한 성장이 겹쳐짐으로써, 개신교의 정치적 이미지는 보수적인 색채가 훨씬 두드러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3. 이명박 정부와 종교정치
이명박 정부의 등장 과정과 출범 이후 ‘종교정치’가 활성화된다는 데 폭넓은 합의가 존재하는 것 같다. 2007년 12월의 제17대 대통령선거와 뒤이은 상황 전개는 한국에서 종교와 정치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개신교 보수 세력의 적극적인 지원, 정부 출범 후 내각 및 청와대 인사(人事)를 비롯한 각종 정책을 둘러싸고 갈수록 증폭되는 종교적 균열 등은 종교정치를 활성화하는 대표적인 요인들이다. 여기서는 최근의 종교정치를 선거 참여, 정당 결성과 활동, 정치사회에 대한 영향력 행사, 사회운동의 분야별로 간략히 분석해 볼 것이다.
구체적으로,
(1) 제17대 대통령선거,
(2) 제18대 국회의원선거와 기독교정당,
(3) 정부-여당과 교회(정치 및 종교 엘리트의 관계),
(4) 한반도대운하 및 미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사회운동의 순서로 서술할 것이다. 또한 이런 네 차원에서 다양한 층위의 종교적 균열들이 어떻게 전개되는가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일 것이다.
(1) 대통령선거와 교회
지난 대통령선거와 관련하여 가장 주목할 개신교 세력은 한기총 등의 보수 그룹이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그룹이 ‘범여권 후보 단일화’에 나서기도 했고, 중도적 그룹은 종교와 상관없이 유권자의 후보 선택을 돕기 위한 ‘대선후보 평가지표’ 작성 작업 등을 전개하기도 했지만,이들의 대선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보수 그룹은 특정 후보의 당선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선거에 개입했고, 한나라당 소속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는 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했다.
그런 면에서 지난 대선은 (적어도 개신교 신자에 관한 한) 이승만 정부와 장면 정부 이후 종교가 투표 성향과 행태에 큰 영향을 미친 선거였을 것이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은 초대 이승만 대통령과 제14대 김영삼 대통령에 이어 세 번째로 개신교 장로인 대통령이며, 서울시장과 대통령 후보 시절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신앙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편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비교될 만하다.
무엇보다, 63개 회원교단과 22개 회원단체를 거느린 한국 개신교 최대의 조직인 한기총이 이명박 후보에 대한 지지태도를 명확히 했던 것이 중요했다. 한기총의 대선 개입 움직임은 2006년 12월의 대표회장 선거 때부터 일찌감치 나타나기 시작했다.
후보로 나선 김동권 목사는 다음 대선에서 “친북 반미 경향의 현 정부는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고, 이용규 목사는 “한기총이 대선 후보들의 정책을 기독교적 기준에 따라 검증해야 한다.
대선 후보들의 애국관과 윤리·도덕적인 면, 사상과 능력을 평가할 것이다.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도 따져볼 것”이라고 말했다.
12월 28일의 선거에서 당선된 이용규 목사는 그 직후 “과거엔 기독교인들이 '좋은 사람 주십시오'라고 기도만 했지만, 내년 대선에선 기독교계가 원하는 정책을 집대성해 후보들에게 제시하는 등 구체적으로 활동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김영삼 장로가 당선된 1992년 대선 때만 중립을 표방했던 한기총의 이런 변화에 주목하여, 이미 2007년 초두에 “교계 120년사에 전례 없는 대선 개입”이 예상된다는 언론보도가 나왔다.
한기총은 2007년 3월 말 ‘긴급 임원회’를 열어 5월 중순에 “2007대선과 한국교회의 역할”이라는 주제의 ‘대선 정책 포럼’을 열어 “기독교 정책과 관련한 각 분야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이에 맞춰 “대통령 후보자들에게 기독교 관련 정책을 질의해 후보자를 검증하는 시스템을 만들 것”을 결정했다.
실제로 5월 17일 ‘대선 정책협의회’라는 이름으로 열린 모임에서는 “가이드라인”을 제시되지는 않은 대신, “현 정권(노무현 정부―인용자)에 대한 비난이 주를 이뤘다.
한기총은 2007년 6월 17일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위한 낙선운동본부’를 조직하고, 같은 달 27일 13명의 국회의원 낙선운동 대상자 중 5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13명 중 한나라당 의원은 없었다.
명목상으로는 국회의원선거와 사립학교법을 내세웠지만, 대선 정국에서 사실상 여당(열린우리당)에 대한 반대 입장,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 입장을 명료히 밝힌 셈이었다. 같은 해 8월 21일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된 이명박 후보가 처음으로 찾아가 당선 인사를 한 곳은 다름 아닌 한기총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용규 대표회장은 “그동안 어렵고 힘들었지만 하나님께서 힘주고, 능력 주고, 도와 줘서 경선에서 승리했다”면서 “앞으로도 하나님이 함께 해서 대선에서도 승리를 주실 것”이며, “(대선에서도) 위대한 승리가 이뤄져서 이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훌륭한 지도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고 말했다.
또 이명박 대통령후보는 이어진 비공개 면담에서 이 후보는 이어진 비공개 면담에서 “본선이 경선보다 더 어려울 것이다.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
기독교도 적극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과 한기총의 연대가 공개적으로 찬명되는 자리였다. 대선이 끝난 직후인 2008년 1월 9일 한기총은 이명박 당선인 축하를 겸한 ‘국민대화합과 경제발전을 위한 특별기도회’를 열어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축하함과 동시에 새로운 정부를 축복했고, 이명박 당선인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 참석하여 감사의 뜻을 표명했다.
2008년 4월 29일에는 강재섭 한나라당 대표가 한기총을 방문하여, “지난 대선 때 한기총이 많은 힘이 되어 고맙다. 대선 끝나고 와서 인사를 왔어야 했는데 총선 때문에 인사가 늦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기총 소속인 22개 개신교 단체들 외에, 보수 성향의 많은 개신교 단체들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되는 데 기여했다. 인터넷언론인 「오마이뉴스」는 2008년 1월 4일자 기사(“보수 대해부”)에서 개신교 보수 진영에 속하는 주요 단체들로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기독교사회책임, 기독교뉴라이트, 기독교개혁운동, 기독교애국운동, 한국기독교신앙실천운동협의회, 한국교회지도자협의회, 한미기독교목회자협의회, 한국기독교원로목사회, 서울기독교총연합회, 한국교회언론회 등을 꼽았는데, 이들 대부분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도왔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가운데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는 2007년 2월 15일에 연 ‘정치와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관계와 방향’ 주제의 세미나를 통해 사실상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고, ‘한국기독교개혁운동’은 같은 해 6월 21일 이명박 후보 지지를 공식 선언했고, ‘뉴라이트기독교연합’은 대선 직전인 2008년 12월 10일 ‘대선을 위한 특별기도회’를 열어 노골적으로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기원했다.
한국미래포럼이 2007년 3월 19일 개최한 ‘국가와 민족을 위한 조찬기도회’ 역시 사실상 이명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모임이었다.
기독교정당도 마찬가지였다. 2007년 2월의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세미나에 참석한 최수한 기독민주복지당 대표는 “역사적으로 최종 대선 후보 두 사람 중 일반적으로 크리스천 후보가 대통령으로 뽑혔다. 국회의원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기독교인이며 국민 넷 중 한 사람도 역시 크리스천이다.…전반적으로 한국 정치 상황을 살펴볼 때 지도자는 기독인이 되는 게 맞다”고 주장했다. 기독교민주복지당은 대선 직전 이명박 후보 지지를 공식 결의했다. ‘정치권복음화운동’의 이강욱 상임회장도 “개인 자격으로 이명박 후보를 돕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개인이나 개별 교회 차원에서 이명박 후보를 지원한 경우도 허다하다. 대선 직후 ������주간한국������은 이명박 후보의 당선에 크게 기여한 종교계 인사들로, 뉴라이트전국연합 상임의장의자 한국미래포럼 상임회장인 김진홍 목사(두레교회),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 구본홍 전(前) CTS TV 부사장, 한성진 한국기독교개혁운동 대표, 전광훈 청교도영성훈련원 원장(사랑제일교회), 김장환 극동방송 사장, 소망교회 설립자인 곽선희 목사 등을 열거한 바 있다.
아마도 이 기사에서 곽선희 목사 외에 소망교회 현직 담임목사인 김지철 목사가 추가되어야 할 것이다. 이 가운데 김홍도 목사와 전광훈 목사는 노골적인 이명박 후보 지지 활동으로 인해 여러 차례 선거관리위원회의 제재를 받았고, 김진홍 목사도 선관위에 고발당한 전력이 있다. 이명박 후보가 출석하고 있는 소망교회는 주일 예배시간에 이 후보가 당선되도록 해달라고 공개적으로 기도했다가 선관위의 경고를 받았다.
그런데 이들만이 아니었다. 언론에 알려진 것만으로도, 영락교회의 이철신 목사,71) 새문안교회의 이수영 목사,사랑의교회 오정현 목사등 대형교회 목사들 역시 주로 설교를 통해 이명박 후보를 지원하는 발언을 행한 바 있다.
실제 대선 투표에서 개신교 보수 그룹이 어느 정도나 이명박 후보의 득표에 기여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KBS ‘시사기획 쌈’의 보도에 의하면,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기독사랑실천당의 전광훈 대표는 개신교인 유권자를 약 700만 명으로 추산했다. 중앙선관위에 따르면, 17대 대선 당시 총인구는 49,219,516명, 유권자수 37,653,518명이었다.
따라서 총인구 대비 유권자의 비율은 76.5%이었다. 2005년 11월에 실시된 인구총조사 당시 개신교인구(8,616,438명)에 같은 비율을 적용하면, 개신교인 유권자 수는 약 659만 명(659,157,507명)이 된다. 한편 필자는 교단별 신자통계를 이용하여, 개신교 신자 중 약 89.0%를 ‘보수’ 성향으로, 8.5%를 ‘중도보수 성향’으로 추산한다. 따라서 ‘보수’ 성향의 개신교 유권자 수는 약 587만 명으로, ‘중도 보수’ 성향의 유권자는 약 56만 명으로, ‘진보 성향의 유권자는 약 16만 명으로 추산된다.
한편 2007년 2월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와 국민일보가 전국의 20세 이상 1,097명의 개신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4.7%가 17대 대선에서 “후보가 기독교인인지 여부가 판단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응답했다.다음은 이 조사 결과를 담은 보고서의 결론 중 일부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입후보자들의 종교가 투표를 함에 있어서 중요한 선택의 요인이 될 것이며, 그에 따른 기대치가 높은 것으로 보인다. 이제까지 각종 국가선거에 임하면서 같은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후보를 선택하여 투표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50.2%에 달했으며, 응답자의 61.5%가 앞으로도 선거 입후보자들의 종교가 개인적으로 후보선택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했다. 더욱이 대통령선거의 경우에는 64.7%의 응답자가 대통령 후보의 종교가 중요한 판단요인이 된다고 밝혀 입후보자들의 종교가 향후 선거에서도 중요한 선택의 요인이 될 것이다.
또한 월간 ������목회와신학������이 목회자 500명을 대상으로 2006년 2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64.8%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차기 대통령으로 생각한다고 밝혔고, 대선이 끝난 후 다시 ������목회와신학������이 목회자 509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63%가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투표했다고 밝혔다.
또 「중앙일보」가 대선 직전인 2007년 11월 28일에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당시 이른바 ‘BBK 주가조작사건’ 수사로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이 41.2%로 떨어졌지만, 개신교 신자는 여전히 과반수(52.6%)가 이 후보를 지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 바 있다.
표 4>에서 보듯이 이명박 후보의 최종 득표율이 48.7%였으므로, 위의 설문조사 결과들로 미루어 개신교 신자들(평신도)의 이명박 후보 지지율도 60%에 가까웠을 것으로 판단된다.
개신교인 유권자 수 659만 명에 17대 대선 투표율(63.0%)과 이 후보에 대한 개신교인의 추계 지지율(60.1%)을 함께 고려하면, 개신교인들이 이명박 후보에게 보낸 지지는 약 250만 표 정도가 된다. 이 수치는 이명박 후보의 전체 득표(11,492,389표)의 21.7% 정도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최소치’에 해당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개신교 신자들의 압도적인 보수 성향, 이명박 후보가 현직 장로라는 점,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상대적으로 높은 투표율 등을 감안하면, 개신교 신자들의 투표율은 평균치를 크게 상회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이명박 후보가 개신교에서 얻은 표는 적어도 300만 표 이상이고,
전체 득표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25%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17대 대선에서 1위와 2위의 표 격차가 532만 표에 달했지만, 투표율이 역대 대선 중 최저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개신교로부터 나온 300∼400만 표가 사실상 당락을 가르는 변수로 작용했을 것이다.
<표 4> 14대와 17대 대통령선거 비교
구분 |
14대 대통령선거 |
17대 대통령선거 | |
투표일 |
1992.12.18 |
2007.12.19 | |
투표율 |
84.0% |
63.0% | |
1위 |
후보명 |
김영삼 |
이명박 |
득표수 |
9,977,332 |
11,492,389 | |
득표율 |
42.0% |
48.7% | |
2위 |
후보명 |
김대중 |
정동영 |
득표수 |
8,041,284 |
6,174,681 | |
득표율 |
33.8% |
26.1% | |
1-2위 득표 차이 |
1,936,038 |
5,317,708 |
(2) 국회의원선거와 기독교정당
대선으로부터 불과 4개월 후에 치러진 총선에서도 한기총을 중심으로 한 보수적 개신교인 대다수가 한나라당을 지지했을 것이다. 또 소수의 진보 및 중도 보수 성향 유권자들의 표는 여당이나 진보정당을 향했을 것이다. 그러나 개신교 보수 그룹의 일부는 다시금 기독교정당을 내세워 총선에 참여했다. 또 2004년 총선에 참여하지 않았던 가정당이 2008년에는 본격적인으로 선거에 참여했다. 따라서 2008년 총선은 최초로 두 개의 종교정당이 참여하는, 그리고 둘 모두가 개신교적 성향의 종교정당인 특징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선거일이 임박해오고 통일교의 가정당이 전체 선거구에 후보를 내는 등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전개하면서 기독당에 냉담하던 보수 교계의 분위기가 상당히 바뀐 것으로 보인다. 「뉴스앤조이」의 이승규 기자는 “종교정당, 호들갑스런 ‘찻잔 속 태풍’”이라는 기사에서 그 내막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2008년 현재 김홍도 목사가 총재인 ‘한국미래포럼’ 소속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2007년 9월 선관위에 신고한 ‘기독시민사회당 창당준비위원회’가 창당 작업을 계속했더라면, 무려 3개의 개신교 계통 종교정당들이 선거에 참여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기독시민사회당 창당준비위원회’는 선관위가 규정한 활동 만료일인 2008년 3월 18일까지 창당 작업을 진행하지 않음으로써 법적인 효력을 상실했다.
2007년 대선에 참여했던 ‘참주인연합’도 흥미로운 사례이다. “정치권복음화운동을 비롯한 기독교계 NGO, 학술단체 등이 주축”을 이루고 한때 ‘한국기독민주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선관위에 정당등록을 하기도 했던 참주인연합은 2007년 9월 27일 창당대회를 열고, 명지대 총장인 정근모 장로를 대선 후보로 추대했다.
그러나 정 후보는 투표일 하루 전인 같은 해 12월 18일 무소속 이회창 후보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고 선거운동을 사실상 포기했으며, 선거 결과 유효 투표수의 0.1%인 15,380표를 얻었다.참주인연합은 2008년 3월 한나라당 공천 탈락자들이 대거 입당하면서 당명을 ‘미래한국당’, ‘친박연대’로 두 차례 개명하여 총선에 참여했다.
출발 당시에는 기독교적 색채가 강했던 정당이 ‘탈(脫)기독교화’ 되는 과정을 거친 것이다.
2004년에 총선에 참여했던 ‘한국기독당’ 이후 기독교정당은 약간 복잡한 과정을 거쳐왔다. 우선, 2004년 총선 당시 개신교계 사회복지 인사들을 중심으로 창당되었지만 실제로 선거에 참여하지는 않았던 ‘국민복지당’이 2004년 총선에서 정당 득표율이 2%에 미달하여 해산당한 ‘한국기독당’과 합당하여 ‘기독민주복지당’이 되었다.
2008년 1월 24일에는 전광훈 목사의 주도로 ‘사랑실천당’의 창당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한 달이 지난 뒤 사랑실천당은 최수한 장로가 대표로 있던 ‘기독민주복지당’과 합당하며 당의 명칭을 ‘기독사랑실천당’으로 하기로 결정했고, 두 당은 2월 29일 합당을 공식 선언했다.
전광훈 목사와 최수환 장로가 기독사랑실천당의 공동대표로 추대되었다. 결국 기독사랑실천당(기독당)은 한국기독당, 국민복지당, 사랑실천당 등 이전의 기독교정당 모두가 결합한 정당이 된 것이다.
한나라당에 대한 확고한 지지 입장을 견지한 개신교 보수 그룹은 기독당 창당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한기총과 한국교회언론회 등은 “목회자의 현실 정치 참여 반대”를 내세워 창당을 만류했고, 김홍도 목사는 신문광고까지 내서 기독교정당 창당을 비판했다. 아마도 이런 형식상의 명분 외에도, 당면한 총선에서 한나라당에게 압승을 안겨줌으로써 이명박 정부에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위해 진력했던 전광훈 목사 역시 기독당이 한나라당의 ‘우당(友黨)’ 내지 ‘외곽정당’의 성격을 가짐을 강조한 바 있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공개 지지한 바 있는 전광훈 목사가 한나라당을 돕지 않고 새 정당을 창당한 이유에 대해서는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한나라당이 뒷받침을 해야 한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200석 이상 차지해서 거대 여당이 되면 국민들로부터 견제를 받을 것이고, 야당의 협조도 중요하기 때문에 건너편에 미리 가 있으려는 것”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가정당이 전 지역구에 후보를 내는 등 기세가 만만치 않자, 기독당에 대해 처음에는 냉랭한 눈빛을 보냈던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대표회장 엄신형 목사)와 각 교단 등이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통일교의 국회 진출을 막아달라고 호소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기독당의 구호도 바뀌었다. 가정당을 통해 통일교가 국회에 진출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옛날 통일교가 <세계일보>를 만들자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이에 대응한다는 명목으로 <국민일보>을 만들던 논리와 똑같다.…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교회)와 김준곤 목사(한국CCC 명예총재) 등이 기독당 지지를 선언했다. 최성규 목사(순복음인천교회)도 명예총재로 당에 합류했다.
4월 9일 치러진 18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기독당은 지역구 후보를 3명밖에 출마시키지 못했고, 이들은 모두 낙선했다. 정당 득표율은 2.59%(443,705표)로서, 2004년 한국기독당이 얻은 1.08%(228,837표)에 비해 크게 증가되었지만, 비례대표 의원을 얻기 위한 3% 관문은 넘지 못했다. 그나마 득표율 2%선을 넘김으로써 (2004년과 달리) 정당 해산만은 면했다. 반면에 245개 전체 지역구에 후보를 냈던 가정당은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정당 득표율도 1.05%(180,785표)에 그쳐 정당 자체가 해산되었다.
기독당은 제도정치권으로 들어가서 어떤 일을 하고자 했는가? 바로 위의 인용문이 보여주듯이, “통일교의 국회진출 저지”가 가장 중요한 목표였을 것이다. 또한 다음의 기사가 기독당의 의도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기독사랑실천당 취지문에는 동성연애법, 체세포 복사법, 사립학교법 등에 영향력을 행사할 뜻을 밝히고 있다. 또 목회자 세금부과와 교회건축기반시설분담금 문제 등을 거론하며 “어느 정당도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 국가 정체성 혼란과 사회적 병리 문제에 대해 강력하게 대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동성연애법’은 ‘차별금지법’을, ‘체세포 복사법’은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기독당 대표인 전광훈 목사는 2008년 3월 6일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 총회 주최로 열린 “교회와 정치참여에 관한 심포지엄”에서 ‘교회건축기반시설분담금’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기독당의 목표인지를 역설한 바 있다.
기독사랑실천당을 이끄는 전광훈 목사가 “기독정당 대표를 오늘 이 시간 그만둬도 한국교회가 효과를 봤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자신이 기반시설부담금 폐지를 기독사랑실천당 창당의 명분으로 내세웠는데, 2월 26일 국회가 ‘기반시설부담금 법률 폐지안’을 의결했기 때문이다. 전 목사는…“이제 교회건축시설분담금이 폐지됐으니 앞으로 기독정당을 반대하는 목사들은 교회건축시설분담금을 국가에 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 목사가 ‘교회건축시설분담금’이라고 하는 ‘기반시설부담금’은 법률에 따라 200제곱미터 이상의 건물을 지을 때 건축비의 20%를 부담하는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교회건축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자 전광훈 목사가 그 법의 폐지를 기독정당 창당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로부터 나흘 후인 2008년 3월 10일 기독당의 지구당위원장을 위촉하고 후보를 공천하는 자리에서 전광훈 대표는 ‘교회의 은행대출 이자율 인하’를 기독당의 중요한 목표로 내세웠다.
이날 전광훈 목사는 기반시설부담금 폐지를 자신의 성과로 꼽으며 “교회가 대출할 때 내는 은행 이자율을 2.5%로 내리면 (기독교정당을 그만두는 것을) 기도해보겠다”고 말했다. 전 목사는 “교회는 국민의 평생교육기관 중 하나”라고 주장하며, 기독당이 국회에 진출하면 교회가 대출할 때 지불하는 현재 7% 이상의 은행이자를 복지단체 수준으로 낮추겠다고 장담했다.
통일교의 국회 진출 막기, 기반시설부담금제 폐지, 교회대출 이자율 인하, 목회자에 대한 세금(소득세) 부과 저지, 사립학교법 등은 모두 협소한 보수 교회의 제도적 이익을 증진시키려는 것이 명백하다.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한 법률을 고치겠다는 것도 얼마나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질지 의문스럽다.
비록 기독당은 원내 진출에 실패했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18대 국회에도 신자 국회의원은 다수 당선되었다. 그리고 기독당 역시 아마도 2010년 지방선거에서는 당선자 배출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라 정치사회를 매개로 교회와 시민사회의 균열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판단된다.
(3) 정치-종교 엘리트의 관계
여기서는 정부-여당과 교회의 관계, 정치엘리트와 종교엘리트의 관계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이명박 정부의 탄생에 기대한 공헌을 한 만큼 개신교 보수 그룹의 리더들은 정부-여당에 대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입지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부 네티즌 사이에서는 “권목(權牧)”이라는 용어도 사용되고, 대중 사이에서도 이른바 “대형교회 목사들”이 정치권력의 한 축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같다.
반면에 심각한 종교편향 시비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정치권력의 핵심부에도 개신교인들이 속속 포진하고 있다. 여기에는 추부길(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 강명순(18대 총선 한나라당 비례대표 1번) 등 현직 목사도 포함되어 있다. 이미 서울시장 때부터 “서울을 하나님께 봉헌하겠다”, “청계천 복원은 무릎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등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왔던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 당시 선거대책위원회 최고의사결정기구였던 ‘6인회의’ 멤버 중 4명을 개신교인으로 채우고, 당선 후 인수위원회 역시 절반 정도를 개신교․천주교 신자로 구성함으로써, 정부 출범 이전부터 ‘기독교 코드 인사’ 논란을 불러왔다.
또한 이명박 정부가 임기 초부터 거센 저항에 직면하고 지지율이 추락할 때 정부를 엄호하는 시국기도회를 가장 먼저 개최하는 등 개신교 보수 세력의 지지도 여전하다. 최근에도 촛불시위로 이명박 정부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한승수 총리가 한기총을 방문했을 때, 엄신형 대표회장은 “정부는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다”, “정치가 없어지고 길거리 무법천지가 계속돼서는 안 된다”, “국회의원은 국회로, 학생은 학교로, 주부는 가정으로, 직장인은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정부를 옹호했다.
김진홍 목사, 김홍도 목사, 조용기 목사, 이수영 목사 등의 촛불시위 비판 발언에 이어, 급기야 지난 7월 10일에는 무려 9천 명이 넘는 목사들이 ‘촛불중단 호소문’을 발표하는 전무후무한 일도 일어났다. 개신교 신자들의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지도 역시 평균보다 훨씬 높게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더해 몇 가지 추가적인 쟁점들을 검토해 보자.
1) ‘고소영’ 정부
이명박 대통령의 초대 내각 및 비서진 인선은 ‘고소영’이라는 유행어를 낳았다. 잘 알려진 대로, 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출신이 이명박 정부의 실세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소영’이라는 용어가 ‘이명박 정부와 교회의 유착’, ‘개신교와 특권층의 수렴’의 상징으로 대중에게 각인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우선, 소망교회 인맥의 득세 자체가 ‘개신교와 특권층의 수렴’의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다. 「조선일보」의 한 기사에 의하면,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를 배출한 소망교회는 여러 수식어를 달고 있다. 시대가 낳은 선물, 성장한 부르주아들이 모인 교회, 가난한 사람이 다니기 어려운 교회, 지적인 교회 등. 인근에 대형 교회가 몇 군데 있지만 소망교회만 유독 부자들이 다니는 교회라는 인식이 박혀있다. 한국 엘리트의 3대 조건이 ‘압구정동에 있는, 현대아파트에 살면서, 소망교회에 다니는 것’이라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다.
” 소재지가 ‘강남’이라는 점으로 인해 소망교회는 이명박 정부의 또 다른 별칭인 ‘강부자 정권’ 이미지와 연결되면서, 연상 작용을 통해 ‘부동산투기라는 부패’의 이미지와도 맞닿아 있다. 소망교회 구성원들의 실상과는 상관없이, 대중이 그렇게 주관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적 균열이 심해진다면, 종교 균열이 ‘고소영’을 통해 계급 균열과 연결되기 쉬운 구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소망교회 출신의 권력 핵심부 진출은 ‘이명박 정부와 교회의 유착’의 상징이기도 하다. 대통령은 소망교회 장로이고, 대통령 부인은 소망교회 권사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작가인 김갑수는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국민의 ‘소망’을 저버리는 ‘소망교회’ 사람들”이라는 글에서 이경숙 대통령직 인수위원장, 정덕구 전 의원, 박미석 사회정책수석비서관,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그리고 ‘만사형통(萬事兄通)’ 논란을 불러일으킨 이상득 의원까지 소망교회 신자인 권력 실세들과 관련된 논란과 추문들이 소망교회를 ‘원망교회’로 전락시키고 있다고 비판했다. 최근 한나라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했던 정몽준 의원이 만약 당선되었더라면 고소영 논란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2) 개신교-불교 균열의 확대
17대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그리고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불교와 개신교 사이의 균열이 급속하게 심화되었다. 정부 출범 이전 개신교-불교 균열의 도화선이 된 것은 이른바 ‘신정아-변양균 게이트’와 ‘종교시설 내 투표소 설치’ 문제였다.
동국대 신정아 교수의 학력 위조에 의한 교수임용 시비가 시작된 것은 2007년 6월 말이었다. 신정아 교수의 파렴치한 개인 비리, 동국대 재단을 중심으로 한 불교계의 파벌 갈등 정도로 보도되던 이 사건은 8월 하순부터 청와대 불자모임인 청불회 회장이기도 한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의 연루설이 제기되면서
한나라당과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사들에 의해 노무현 정부와 여당의 ‘권력형 비리사건’으로 증폭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대선 정국과 맞물리면서, 보수언론사들은 불교계가 신정아-변양균의 부적절한 관계를 이용해 권력으로부터 온갖 혜택을 받은 것처럼 보도했고, 한나라당은 선거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이를 최대한 활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9월 하순 「조선일보」(2007년 9월 21일자)가 신정아의 동국대 교수 임용 무렵부터 월정사가 수십억 원의 국고를 부당하게 지원받았다고 폭로하고 이것이 허위임이 드러나면서 불교계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한나라당이 10월 1일 “개발제한구역의 지정 및 관리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과 “문화재보호기금 법안” 통과를 통해 불교시설의 신·증축을 쉽게 하고 불교계에 대한 재정지원을 확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조계종은 그 직후 조계종 본사 주지회의에서 ‘조선일보 구독거부’를 결의하고(10월 5일), ‘수행종풍 진작을 위한 대법회’(10월 19일, 봉암사)와 ‘제8회 팔관회 및 불자단결을 위한 불교수호대법회’(11월 6일, 부산KBS홀) 등 대규모 법회를 예고하면서 한나라당-조선일보와 전면전을 불사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런 와중에 「법보신문」이 10월 22일부터 25일까지 조계종 중진 승려와 불교단체 지도자 20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대선 후보 선호도 조사에서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8.4%, 특히 승려의 이 후보 지지율은 2.5%에 불과했다.
이명박 정부와 불교의 대립은 이미 대선 이전부터 심각한 양상을 보였던 것이다.
대선을 위한 투표소가 개신교 시설에 편향적으로 설치되었던 것도 개신교-불교 균열을 키웠다. 대선 당시 전국 13,178개 투표소 가운데 1,172개가 종교시설에 설치되었고, 이 가운데 1,059개가 개신교 교회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전체 투표소 중 8.0%, 종교시설 투표소 중 89.6%가 개신교 교회에 설치되었던 셈이었다.
반면에 종교시설 내 투표소 중 천주교는 8.7%, 불교는 0.3% 정도에 불과했다. 종교시설 투표소의 개신교 집중 현상은 서울 등 대도시에서 더욱 심했다. 이에 대해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는 “선거 때 대도시일수록 종교시설에 투표소가 많이 설치되고 종교시설 중에서도 개신교 교회가 압도적으로 많아 특정 종교에 편향된 종교 차별로 간주한다”고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18대 총선에서도 비록 종교시설 투표소 전체가 줄기는 했지만 여전히 개신교 교회 편향적이어서 불교계의 반발이 계속되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개신교-불교 균열은 더욱 확대되었는데, 이명박 대통령의 내각 및 청와대 비서관 인사가 중요한 계기였다. 인사 직후 「불교신문」은 즉각 내각 및 청와대 비서관의 종교별 분포를 밝히면서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나섰다. 이에 따르면, 2005년 11월 실시된 인구총조사에서 개신교인구의 비율은 18.3%였지만, 최종 확정된 이명박 정부 초대 내각(국무총리와 장관) 구성원 16명 중 10명(62.5%), 청와대(대통령실) 수석비서관 8명 중 4명(50.0%), (수석비서관을 제외한) 비서관 41명 중 16명(39.0%)이 개신교 신자였다. 반면에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 당시 한국 최대 종교인 불교의 신자 수는 총인구의 22.8%를 점했으나, 이명박 정부 청와대 수석비서관 중 불교 신자는 한 명도 없고, 불교 신자인 장관은 1명(6.3%), 비서관은 2명(4.9%)이었다
(불교신문, 2008.2.16; 뉴스앤조이, 2008.3.11). 이것이 정확하다면, 이승만․김영삼 정부를 포함한 역대 어느 정부와 비교하더라도 이명박 정부 내각 및 청와대 비서관 중 개신교 신자의 비율이 현저히 높은 것이다. 조계종의 종교평화위원회는 즉각 이명박 정부 인사의 종교편향을 우려하는 입장을 밝혔다(프레시안, 2008.3.21).
「불교신문」은 2008년 7월 초 어현경 기자가 작성한 “MB정부, 종교편향도 ‘불도저’식”이라는 기사를 통해, “2003년부터 최근까지 본지 및 ‘이명박 정부 종교편향 종식 불교연석회의’가 발표한 종교편향 사례를 중심으로 출범 130여 일이 된 현 정부와 지난 노무현 정부의 종교편향 사례를 비교분석”한 자료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의 경우 종교편향 사례가 5년 간 19건이었지만, 이명박 정부는 불과 130일간 16건이나 되었으며,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중앙정부가 아니라 이명박 서울시장을 비롯하여 주로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종교편향적 발언과 행동을 주도했던 반면, 이명박 정부의 경우에는 대부분의 종교편향 사건이 중앙정부 주도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표 5>는 이 기사에서 제시된 이명박 정부의 종교편향 사례를 모은 것이다.
<표 5> 불교측이 주장하는 이명박 정부 초기의 종교편향 사례들
시기 |
내용 |
2008.2.22 |
장관, 수석, 비서관 개신교 편중 인사. 불자 7.7%, 12.5%, 4.8%에 그쳐. |
2008.3 |
김성이 장관 후보, 2007년 5월31일 양극화는 신앙심이 부족한 탓이라는 기고로 논란. |
2008.3.16 |
이명박 대통령, 뉴라이트 김진홍 목사와 청와대에서 예배. |
2008.4.1 |
경남일보, 개신교 방송인 극동방송 중계소 설치 서명운동 실시. |
2008.4.15 |
교육과학기술부, 학교자율화 추진계획 발표. 종교사학의 학내 선교 사실상 용인. |
2008.4.30 |
청와대, 정무직 공무원 종교조사 실시로 물의. |
2008.5.1 |
주대준 청와대 경호처 차장, 모든 정부부처의 복음화가 나의 꿈이라고 발언. |
2008.6.7 |
추부길 청와대 홍보수석, 촛불집회 참가자 사탄 발언 물의. |
2008.6.15 |
소망교회 김지철 목사, 이명박 대통령은 주님의 아들 발언. |
2008.6.20 |
김황식 대법관, 조찬기도회 참석 강연 후 감사원장에 임명. |
2008.6.20 |
국토해양부, ‘알고가’ 교통정보에 교회·성당만 표시. 사찰 전부 누락. |
2008.6.23 |
추부길 청와대 홍보수석, 이명박 대통령 대운하 포기 발언 직후 대운하 관련 발언. |
2008.6.23 |
경기여고, 학내 불교 관련 문화재 훼손 논란. |
2008.6.24 |
어청수 경찰청장, ‘제4회 전국경찰복음화 금식대성회’ 광고 포스터에 사진 게재. |
2008.6.28 |
송파구청, 개신교 일색으로 대학생 멘토링 사업 추진 논란. |
2008.6.30 |
경주초등학교 교사, 특정 종교 강요 논란. |
위의 「불교신문」 기사가 보도되기 이틀 전인 7월 3일 불교방송 노조가 한나라당 추천으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위원에 임명된 김규칠 전 불교방송 사장이 친여당 인물을 불교방송 사장으로 선임하기 위해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만약 이것까지 포함되었으면, <표 5>의 이명박 정부의 종교편향 사례는 17건으로 늘어났을 것이다.(본문은 네이버펌)
정경유착/정교유착/ 해서는 않된다고 하지만 이렇게 기독교 .개신교도들의 정치 참여는
나라발전에 도움이 되지않을듯합니다..
갈등을 만들어서는 않되겠지요?
(무심정사 신도님들의 착하신 마음 늘변하지 마시고 욕심부리지 마세요 꼭 이루는바 소원이
이루어 지실겁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형님 대단하십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장강력한것은 결국 그로인해 균열을 일으키고 스스로 자멸의 길을갑니다
공룡이사라지고 쇠가 스스로의 녹으로 사라지듯이 역사속엔 영원해보이던 무수한 세력들도 결국엔 역사속으로
사라졌읍니다 변화에 적응했던 소수세력은 다시 큰세력으로 부활했고 이역시 전철을 벗어나지 못했읍니다
중요한것은 현재 나의 존재입니다 내가있으므로 모든것의 인식이 되는것 아니겠읍니까
오늘 내가 세력을갖는다하여 행복한것은 아닐것입니다 이세력을 지키고자 어떻해야 하겠읍니까
결국 세력집단내의 분열을초래하고 말것입니다
세상의 모든것은 온곳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온곳으로 돌아가기전 생면있는 모든것들은 행복을 누리다 가아합니다
이것이 바로 헌법초항의 생존권 아닙니까
차라리 생존권을 외면당한 뭇생명들의 사무친 시선속에 스스로 보안의 감옥속보다는 그들과더불어 살아가려노력한다면
존경속에서 그들은 후손을위해 자신의 생명마저 바치려들것입니다
이것은 사고하는 인간만이 추구할수있는 뭇생명의 영장으로 마땅히 해야할사명입니다
자신의 장기를살리면 순탄하지만 그렇지않은경우 몇배의 노력도 필요하지만 문제는 그고통으로 인해 주변에
파급되는 고통의 전이입니다 그러니 영장인 우리인간은 자신만이 아니라 더불어살아가도록 노력해야합니다
그길은 넘치면 덜어내고 모자라는곳은 채워줘야하합니다
산골 돌하나 바다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모난부분을 스스로 아픔을견디며 깍아냈기에 둥굴둥굴 바다까지
도달할수 있듯이 말입니다
존경하는 형님 이렇게 글로써 형님의 진면목을뵈니 감개무량합니다
진심으로 애정어린 관심에 고개숙여 감사드립니다
술좀 즐겁게드시고 이와같은 진심어린 말씀만 하셔도 형님께 술병사들고 찾아뵐사람
줄을 설것같습니다
형님같은분은 오래오래 건강하셔야합니다
멍텅이님은 개신교와 불교의 장단점을 철저하게 비교분석
늘 생각하시는 분이시로군요..
긴 장문의 글~ 감사드립니다..
댓글을 주신 광명스님 그리고 일미님..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커다란 고민거리가 생기셨다니 뭐라고~~~
풀어갈수있는 문제라면 우리 머리를 맟대고 풀어나가야지요?
미천한 힘이나마 보탬이된다면 도와야겠지요..
일미--이런 --개같은 경우가 무슨경우-냐?
무소유 없는절 좀 너그럽게 도와주면 00이 덧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