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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암입니다. 최선을 다해 치료를 해보겠지만….”
출가 전 어느 날 나는, 길을 가다 현기증으로 쓰러져 근처 응급실에 실려 갔다. 가끔 코피가 나고 어지럽긴 했지만, 그냥 빈혈이 좀 심한가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며칠 입원하면서 정밀검진을 받았는데 담당의사가 말끝을 흐리며 던진 말이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뭐라고요? 혈액암이 도대체 뭔가요?”
천성인 탓도 있겠지만 난 마음이 여려 누구에게 죄지은 것도 없고, 그냥 열심히 공부하고 평범하게 사회생활을 하고 있던 그야말로 모범시민이었다. 그런 나에게 내려진 사형선고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끔 교회에 다니던 내게 내려진 신의 형벌은 가혹했다.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왜 내가 이런 병에 걸려야 한단 말입니까? 대답 좀 해주세요. 제발요….”
이렇게 통곡하는 내게 신은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다. 하늘에서는 마치 “신의 섭리니까 잔말 말고 그대로 따라. 뭔 불만이 그리 많아.” 하는 것만 같았다. 길 가는 사람들은 다 행복하게만 보이는데, 나만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 세상 밖으로 사정없이 내던져진 느낌이었다. 부모님껜 차마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했다. 억울했다.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나 억울해서 눈도 감지 못할 것 같았다. 따져야만 했다. 목사님을 찾아가기도 하고, 길 가는 사람들을 붙잡아 놓고 넋두리를 풀어놓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시원한 대답을 해주질 못했다. 당연했다. 억울한(?) 죽음을 앞두고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이 울분에 차 있는 청년한테, 어떤 성인군자의 말씀인들 귀에 들어오겠는가?
“거 안타깝긴 하지만 어쩌겠소. 그냥 받아들이시고 남은 인생이나 잘 마무리 하소.”
어느 시장통에서 만난 노점상이 막걸리 한 잔 건네며 한 말이 결국 정답인 것 같았다.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섭리’이든, 불교에서 말하는 ‘전생의 업’이든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었다.
“그래, 어차피 이리된 것 죽기 전에 도대체 그 운명이란 것이 뭔지, 업이란 뭔지 알고나 죽자. 그래야 덜 억울하지. 왜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가 인생을 프로그래밍해서 마음대로 죽였다 살렸다 하느냐 말이다.”
이렇게 마음이 정해지자 어지러운 생각을 정리하고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잘 갖추어진 산사를 찾게 되었다. 문득 학창시절 즐겨 읽던 『샘터』라는 잡지에 ‘산방한담’이란 글을 연재하던 법정스님이 생각났다. 스님께 출가할까 하고 알아 보니 법정스님은 상좌를 안 받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잠시 망설이다 집에서 제일 먼 강원도로 출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대산으로 향했다.
“강릉 가는 표 한 장 주세요.”
35년 전 부산 동부정류장. 아침에 출발한 버스는 동해안 바닷가 7번 국도를 하루 종일 달렸다. 저녁 무렵 강릉에 도착하니 오대산으로 가는 파쳔은 이미 끊긴 후였다. 출가 전에 이미 동가숙 서가식 하며 행각 경험을 톡톡히 한 나는 터미널 나무의자에서 신문지를 덮고 노숙을 했다. 다음 날 첫차를 타고 진부에 도착해서 다시 월정사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다. 한동안 털털거리며 다리던 버스는, 전나무 숲길을 지나 월정사 산문 앞에 나를 내려놓고 뽀얀 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오대산월정사. 현판을 올려 보니 비로소 내가 출가한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계곡 옆 전나무 숲속에 있는 그루터기에 잠시 앉았다. 무심히 흐르는 오대천의 물결을 멍하니 한참동안 바라봤다. 마치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여정이 오버랩 되어 춤을 추듯 흘러가는 듯했다.
드디어 산문을 들어섰다. 도량을 두루 둘러본 뒤 법당 뒤에 있는 산신각으로 들어갔다. 작고 조용한 공간이 그동안 지치고 긴장했던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받아주었다. 잠시 앉아 있는데 불전함에 ‘불교병원건립 모금함’이라고 쓴 명패가 보였다. 주머니를 뒤져 보니 딱 백 원이 나왔다. 나의 전 재산인 백 원에 온 마음을 담아 시주를 했다. 그리고 불보살님의 가피로 몸이 나으면 남은 생은 덤으로 알고, 아프고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삶을 회향하겠다는 발원을 했다. 한참을 엎드려 울면서도 기도를 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개운해졌다.
종무소로 찾아가 출가하러 왔다고 했다. 직원이 재무 스님께로 안내했다. 인사를 드리고 미리 준비해 간 출가 서류를 꺼내 놓았다. 내가 누구인가. 군대 있을 때 보직이 작전병 출신이라 출가에 필요한 서류는 미리 알아보고 모두 준비를 해 간 것이다. 사큰둥하게 쳐다보는 스님께 “ㅅ님, 전 돌아갈 차비도 없습니다. 행자로 받아 주시기만 하면 정말 열심히 수행 잘 하겠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면접시험에서 떨어지면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애원하다시피 매달렸다.
“일단 객실에 가서 며칠 지내보고 마음이 결정되면 이야기하세요. 그때 행자로 받아줄 테니까요.” 하셨다. 행자반장이 와서 객실로 안내했다. 정식으로 입산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며칠간 객실에 두고 보며 근기를 살펴보는 것이었다. 만행시절 주인 없는 암자에서 하룻밤 신세 진 적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절에 들어오긴 처음이었다. 낯선 산사에서의 하룻밤은 참으로 길었다. 어디서 그런 생각들이 일어나는지 참으로 오만가지 망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멈추질 않았다. 휘파람새는 또 왜 그리 울어쌌는지…. 며칠간의 속복 행자생활을 무사히 마치니 정식으로 행자실 입방 허가가 떨어졌다. 드디어 ‘조행자’가 된 것이다.
“아니 후원에 할 일이 태산 같은데 행자 주제에 어디서 이 시간에 기도를 하고 있어?”
자투리 시간에 짬을 내 기도하고 있던 내게 지나가던 원주 스님이 호통을 치셨다.
“네, 알겠습니다.”
하던 기도를 그만두고 바로 공양간으로 달려갔다. 월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라 할 일이 많았다. 당시 행자가 8명이었으나, 불사를 하는 인부들 공양 챙기느라 늘 바빴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언제 잠이 드는 줄도 모르고 곯아 떨어지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출가 화두인 바로 그 ‘왜?’란 한 가지 생각만큼은 절대 놓질 않았다. 뒤에서는 죽음이란 그림자가 무섭게 쫓아오고 있고, 앞에는 천길 낭떠러지가 입을 딱 벌린 채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데, 어찌 한 순간인들 맘 편히 있겠는가? 오직 운명과 숙명, 그리고 업의 존재를 화두삼아 틈만 나면 법당 뒤 삼성각에서 기도를 올렸다. 단 하나 ‘간절함’만이 존재하는 나날이었다.
“약왕보살, 약왕보살, 약왕보살, 약왕보살….”
나는 팔각구층석탑 앞에서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있는 약왕보살께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온몸에는 땀범벅이 되어 마치 비에 흠뻑 젖은 듯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해도 약왕보살님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냥 무심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기도를 해도 아직 정성이 부족하구나. 그러니까 약왕보살님께서 감응이 없으신 게지’ 이런 생각이 들자 ‘정말 간절한 기도란 바로 이런 거야’ 할 정도의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기도를 했다. 그런데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한쪽 무릎을 땅에 꿇은 채 무심히 계시던 약왕보살님께서 벌떡 일어났다. 한쪽 무릎을 땅에 꿇은 채 무심히 계시던 약왕보살님께서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걸어오시는 것이었다. 약왕보살님을 바라보니 온몸은 그대로 돌인데 눈만은 사람처럼 살아 움직이며 편안하게 미소를 짓고 계셨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깜짝 놀랐다. 내게 오신 약왕보살님은 마치 마정수기를 하듯 이마에 손을 얹으셨다. 그 순간 온몸이 고압선에 감전된 듯 충격과 함께 엄청난 전율이 흘렀다. 온몸이 붕 뜨는 듯하며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아아! 약왕보살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응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며 소리를 치며 눈을 떠 보니 캄캄한 행자실이었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너무나 생생하여 잠시 멍하니 앉아 정신을 가다듬었다. 온몸은 꿈에서와 같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행자실로 사용하는 동별당 문을 열고 마당을 내다 보니 팔각구층석탑은 달빛 아래 고요히 신비스러움을 더하고 있었다. 약왕보살님은 조금 전 내게 막 다녀가신 듯 알 수 없는 기운으로 나를 이끌고 있었다. 너무나 벅찬 마음에 그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니 약왕보살님을 향해 삼배를 올렸다. 잠시 후 도량석 목탁이 고요히 잠든 산사의 적막을 흔들어 깨웠다.
“스님, 여기 붙여 놓은 글이 너무 좋습니다. 스님께서 쓰신 글인가요?” 얼마 전 천은사에 템플스테이를 한 분들이 차 한잔 하러 방에 들ㄹ렸었다. 조용히 차를 마시던 한 분이 벽에 붙여 놓은 글귀를 보며 물었다. 붓으로 쓱쓱 써서 붙여 놓은 것은 바로 ‘그대 지금 간절한가?’라는 글이었다. “아, 그거요? 제가 가끔 보면서 경책으로 삼기 위해 쓴 글입니다.”라며 자연스럽게 간절함에 대한 주제로 얘기가 옮겨 갔다.
사실 세상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단어 하나를 고르라 한다면, 나는 이 ‘간절’이란 말을 선택하고 싶다. 이 말만 가슴에 품고 산다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 살아오면서 간절했던 순간들을 얘기하고, 나는 행자시절 간절했던 마음으로 기도했던 일과 몽중가피의 체험을 얘기했다. 모두 귀를 기울이며 경청하다가 한 분이 물었다.
“스님, 그럼 지금은 몸이 다 나은 건가요?”
“글쎄요, 아마 좋아졌으니까 지금 이런 자리도 있겠지요? 전 출가하면서 이미 죽었던 목숨이라 하루하루를 부처님께서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요즘도 면역계통 질환으로 시원찮은 데가 많긴 하지만 기도하며 수행하기에는 이 정도도 감사하며 행복하지만 합니다.”
가끔 주변에서 가피 이야기를 듣게 된다. 기도나 수행의 공덕으로 힘든 일이 절로 술술 풀리기도 하고 희귀난치병이 낫기도 한다. 내가 지은 공덕의 결실이 지금 현실에서 바로 나타나는 것을 현증가피라 한다. 나처럼 꿈속에서 불보살님이나 조상님으로부터 받는 가피를 몽중가피라 하며 일상이 평안한 그 자체를 복이라 여기는 명훈가피도 있다. 별일 없는 것이 무슨 가피냐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삶의 온갖 고난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무별사즉가피無別事卽加被’ 즉,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삶을 살아가다 보면 도대체 내 인생의 임계점臨界點은 언제쯤일까 하고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물을 끓이면 처음에는 미동도 하지 않다가 조금 지나면 거품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부글부글 끓으며 수증기가 피어난다. 하나의 상태가 다른 상태로 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임계점을 통과해야 한다. 사람의 임계점도 각기 다르다. 누구는 이 세상이 불공평하다 여길 정도로 쉽게 끓어올라 승승장구하고, 또 누구는 “도대체 끓기는 하는 거야?”라는 의문이 들 만큼 천천히 끓어오르기도 한다.
그런데 중요한 건 누구든 포기하지 않고 충분한 열을 가해 주면 언젠가는 끓어오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천천히 끓어오르는 사람이 오히려 끈기, 지구력, 인내심 같은 것을 배우게 되어 일찍 막 끓어오른 사람들보다 더 오랫동안 빛을 발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지금 당장 일이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고 너무 낙담하거나 좌절해서는 안 된다. 쉬지 않고 열을 가하다 보면 반드시 펄펄 끓는 순가닝 온다. 사람마다 업성業性이 달라 임계점이 다를 뿐이다. 다만 나를 끓게 해줄 만큼의 열정을 가지고 충분히 열을 가해 주고 있는지, 오직 그것에만 집중할 일이다.
‘생야전기현 사야전기현生也全機現 死也全機現, 살 때는 삶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 또한 죽음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죽어야 한다’
12세기 선승 원오 극근선사께서 후학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전기생 전기사全機生 全機死, 한마디로 철저히 살고 철저히 죽으라는 말이다. 인생의 ‘生’자를 파자해 보면 ‘소牛’자에 ‘한一’자이다 우리네 삶은 네발 달린 소가 외나무다리 위를 위태롭게 지나 가는 것과 같다. 조심스럽게 한 걸음 한 걸음, 오직 간절한 마음으로 집중해야만 그 다리를 무사히 지날 수가 있다.
그대 지금, 흔들리는 삶의 칼 날 위에서 고뇌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고통 속으로 온몸을 내던져 보라. 물은 절대 99도에선 끓지 않는다. 마지막 1도 차이다. 100도가 되어야 물은 비로소 춤을 추기 시작한다. 우리네 삶도 마찬가지다. 무슨 일을 이루려면 99%도 아닌 100% 순도의 영혼을 바쳐야 한다. 그러면 분명히 길이 보일 것이다. 간절한 곳에 반드시 가피가 있다. 운명도 비켜 간다. 기도의 공덕은 절대 헛되지 않는다.
- 동은스님 눈 먼 보리와 도둑 고양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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