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나'를 그 다른 나의 창조물로 감지하는 상태로 인도한다(인간 자아인식으로 가는 길, 2018, 90)."
위 문장에서 평범한 '나'와 그 다른 나의 창조물은 같은 존재이지만 다른 존재이다. 여기에서 인도란 평범한 나가 그 다른 창조물과 연결,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랬을때 비로소 온전한 '나'가 된다. 그렇다면 평범한 나와 그 다른 창조물의 의미, 그리고 나, 완전한 나의 존재가 무엇인지가 질문이다.
필자가 정신의 길을 가면서 늘 느끼는 것인데 무엇인지 알수 없는 것이 항상 있는데 그것을 누구에게도 물어 볼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물어볼수 없는 이유 또한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신의 속성이기도 한데, 그래서 슈타이너의 책을 읽으면서 그 답을 찾은 듯, 그리고 언제나 답을 주었다.
마찬가지로 위 문장을 읽는 순간 강한 충격이 왔다. 그것은 아! 하는 깨달음이다. 물론 그동안 그래왔듯이 놓칠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고 오래 곰곰이 생각해봤다. 아하는 깨달음의 순간은 상속의 자아가 아니었다. 본래의 자아였고 그 자아가 얼굴을 내민 순간 답을 그냥 알게 되었다. 이것이 직관으로, 정신의 세계는 이렇게 통지가 온다. 그 이유가 우리들의 자아는 언제나 정신의 세계에서 유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아를 만나는 순간, 이렇게 정신세계의 통지를 받는 것이다. 그럴려면 항상 내가 궁금해 해야 한다. '왜 그럴까라고', 만약 내가 궁금하지 않았다면, 이번에도 그냥 스치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이 또한 정신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내가 그 수준에 이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3-4세 무렵 자아를 처음 만나는 순간도 그렇고, 모든 정신을 만나는 순간이 그렇다.
그리하여 필자 역시 이제 깨달음이 온 이유도 '그 다른 창조물'이 성숙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인 듯하다. 즉 그 '다른 창조물'과 '평범한 나'가 연결될 만큼 필자가 이제 성숙한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인간은 이렇게 정신의 길을 가고 있다. 다만 그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뿐. 그러므로 현재의 나는 정신의 길에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정신의 속성에 맞는 환경을 내가 만들어야 그렇게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위 문장에서 평범한 '나'란 상속의 자아이고, 상속의 자아가 본래의 자아로 인도되어야 한다. 누가 인도하느냐는 그 다른 창조물일 수도 있고, 나를 인도하는정신 존재일 수도 있다. 그 다른 창조물이 나를 인도하는 정신존재라는 의미는 나를 인도하는 정신 존재가 그 다른 창조물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자아가 있지만 상속에 존재한다. 그 이유를 말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이 정신세계에서 육체를 입는 순간 3년 동안은 정신존재들의 인도를 받아서 생명체계가 만들어진다. 두뇌, 언어, 직립하여 걷는 것이다. 이것이 완성되면 자아가 상속에 들어가고, 자아가 드러나는 것이 3세 즈음이다. 이때의 자아는 자신이 정신세계에서 온 존재라는 것도 정신세계와 연결된 존재라는 것도 잊고 상속에 있는 존재를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살게 된다.
이렇게 자아가 상속에 들어가는 이유가 뭔가 부족한 부분을 얻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자아가 상속에 있을 때만 이 부족한 부분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육체가 없는 존재가 무엇을 얻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정신은 체험해야 비로소 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정신은 곳곳에 널려있는데 내가 그것을 모르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상속의 자아가 그 다른 창조물과 연결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체험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으며 그래야 비로소 어떤 것, 정신을 얻는 다.
다음은 그 다른 창조물이 무엇인가이다. 그 다른 창조물은 내 안에 있는 내가 그동안 만든 것이다. 우리 영혼은 늘 생각을 하고 느끼며, 하는 행동이 육체를 통해서 드러난다. 그리고 이런 영혼활동이 오래 계속되었으므로, 어떤 것이 저절로 만들어져 있다. 이것이 내가 만든, 직조된 창조물, 사고체이다. 그 창조물은 보이지는 않지만, 그동안의 나이다. 이 창조물을 직시하면 자신의 그동안의 모습이 드러난다. 여러가지 형태가 있을 것이다. 이것을 올바르게 직시하면, 정신존재로서의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개조되어야 하는지도 드러난다. 누구나 이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동안 자신을 그대로 진실하게 직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의식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은 것이다.
결론은 자신의 사고체를 직시하면 정신존재로서 부족한 부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사고체를 스스로 개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 대한 시기, 질투가 내 안에 깊이 잠재해 있을 수가 있다. 자신도 모르게 깊숙이 잠재해 있을 경우에도, 이를 직시하면, 내가 깨달으면, 조금씩 서서히 빠져나간다. 이것이 깨달음의 속성인데, 물질세계에서의 배움은 여러 번 익히고 반복해야 하지만, 정신세계는 이해하고 파악하는 순간 그 에너지가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받아들이는 순간 정신작업이 내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사고체가 정화되어서 정신존재와 수준이 같아지면, 그 존재가 우주의 한 부분에 끈(?)으로 연결되어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때의 정화란 마음에서 앞에서 예를 들은 시기, 질투가 없어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물론 마음을 그렇게 가져야 하지만, 마음이 영혼활동이므로 영혼활동을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느낄 때 감사한 마음,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일이다. 생각도 그렇게 해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생각이므로 이 또한 시간이 흘러야 한다. 다음은 행동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보살행이다. 목마른 사람에게는 물을 주고,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등 법보시도 같다. 이렇게 하면 나의 사고체가 정화되어서 우주에 연결된 존재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자신의 정신존재가 우주에 연결되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가 있다.
여담으로 우연히 횡단보도를 지나가는데 그 앞에서 농산물을 다듬어서 파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여름 태양 빛에 노출된 아주머니가 많이 지쳐보였고, 물을 마시면 좋을 것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횡단보도 불이 초록색으로 바뀌기에도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아주머니에게 필자가 가지고 다니는 텀블러 물을 드리겠다고 하니, 아주머니가 '그러라'고 하셨다. 따라 드리고 그 앞에서 필자도 남은 텀블러 물을 마셨다. 세상이 하도 흉흉한지라 나도 모르게 한 행동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근래 이와 같은 행동들이 자주 일어났다. 쓰레기를 줍는 것도 그렇고, 꽃들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심정 등등이 나의 사고체를 정화하고 있는 중인 듯하다.
나의 사고체가 정화가 되면, 내 안의 우주에 연결된 존재가 저절로 드러난다. 느끼기에 내 안에 뭔가 다른 존재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이 존재를 상속에 있는 나의 자아와 연결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가 책을 읽는 순간 얻은 깨달음이다. 물론 오랜시간이 걸려야 우주 정신존재에 연결될 것이고, 또 온전히 드러나는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연결이 되면 상속의 자아가 상을 벗을 것이고, 따라서 상을 벗은 존재가 전면에 대두할 것이다. 이 존재가 전면에 대두하면, 나의 삶이 비로소 온전하게 살아가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온전하게 살아간다는 말은 상 속에서 삼라만상을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태어나서 3 세 전의 나는 우주에 연결된 존재, 정신존재로 삼라만상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상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나는 정신존재로서가 아니고 물질육체를 입은 존재로 삼라만상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 나가 이제 다시 정신존재로서의 '나'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그냥 살면 되지 꼭 그렇게 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을 할수도 있다. 거칠게 말하면 상속에 있는 자아는 물질의 본질(정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수준에 따라서 본질을 보므로, 필자가 본질을 본다는 의미는 아니다-.
즉문즉설을 하시는 법륜스님을 보면 어떻게 그렇게 할수가 있을까란 감탄을 하게 된다. 통상 말하면 거의 절대로 그렇게 할수가 없다. 그런데 우주에 연결된 자신의 존재가 전면에 대두하면, 우주에 연결된 존재가 대상을 보게 된다. 이는 대상의 존재의 본질을 본다는 의미이다. 상속에 있는 존재를 우주에 연결된 존재가 보면은 당연히 상속의 자아의 문제를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물론 우주에 연결된 정신존재가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영혼의 속성이 반감과 공감을 하므로 흔들릴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의 모든 정보 역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또 두 번째로 우주에 연결된 정신존재가 전면에 나서면 어떤 배움도익히는 것이 빠르다. 우주 에너지가 만물을 성장시키는 힘인데, 그 힘으로 내가 배우기 때문이다. 본질을 깨뚫음으로써 그렇다는 말이다. 이 모든 문제는 정신이 보이지도 않고 드러나지도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 그래서 스스로, 홀로 노력해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어떤 분야에서든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자아가 상을 벗은 정도, 그 정도에 노력이 더해진 결과이다. 요컨대 자아가 상을 벗지 않으면 노력을 해도 어렵다. 노력은 자아가 상을 벗기 위함이어야 하고, 상을 벗어야 물질부분에 대한 이해와 능력이 길러진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