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에서 마산까지 거의 천 리 길을 1년 동안 허리 치료를 다닌 적이 있다. 일전에 산청에 있는 도반 스님 절에 갔었는데, 아직도 허리 아파 고생하고 있는 내게 병원 하나를 소개시켜 줬다.
“스님, 딴 데 가지 말고 이 병원에 한번 가 보이소. 내 한번 보소. 스님보다 더 심했는데 완전 다 나았다 아닙니꺼.”
그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좋아져 지금의 아름다운 도량불사를 잘 마쳤다는 것이다. 많이 아파 본 사람들은 안다. 이런저런 치료를 다 해 본 후 포기하고 싶다가도 또 누가 좋다 하는 데를 소개해 주면 다시 귀가 솔깃해져 가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이고~ 아야!!”
“선생님, 주사 좀 살살 놔 주이소.”
병원에 간 첫날, 접수를 하고 기다리는데 치료실에서 할머니의 신음이 들려왔다. 약해진 척추인대를 강화하는 주사이니 당연히 아프기야 하겠지만, 비명을 들으니 왠지 더 긴장되었다.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주사가 시작되었다. 평소 자주 병원 신세를 지는 몸이라 웬만한 주사는 눈도 꿈쩍 안 하는데, 조금 아팠다. 그런데 두 번째 세 번째 주사를 맞을 땐, 나도 모르게 “으~!” 하는 신음이 나왔다. 그렇다고 명색이 스님인데 주사 맞으면서 할머니와 똑같이 비명을 지를 수도 없고, 참고 있자니 나도 인간인지라 터져 나오는 신음을 막을 수도 없었다. 어쩌다 주삿바늘이 신경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나도 몰래 “으악!” 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다섯 번째 주사를 맞을 때였다. 다리까지 이어지는 통증의 전율을 느끼는 순간, 이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작은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살아 있으니까 아프다”
그렇다. 산다는 것은 참으로 아픈 일이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 고통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픔이요, 싫어하는 것들과 원수 같은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아픔이다. 매일 쏟아지는 신상품 등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다. 이 몸뚱어리가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갈구하는, 오욕락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또한 고통의 연속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사바세계, 즉 ‘감인의 세계’라고 한다. ‘참고 견디면서 살아야 할 세상’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부터, 이러한 아픔과 고통은 기본 옵션으로 부여받고 태어난 것이다. 내가 받기 싫다고 하면 받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몇 년 전 젊은이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던,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이 있었다. 누가 이 책을 읽고는, “아프면 환자지 무슨 청춘이야?”라고 해서 웃은 적이 있다. 작가는 아마 삶의 무한경쟁 궤도에 올라 오직 앞만 보고 내달려야 하는, 이 시대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마음의 고통을 함께하고, 그것을 견뎌낼 수 있는 희망을 얘기한 것이리라. 그러니 어쩌겠는가? 사바세계에 이 몸 받아 태어난 이상, 몸이 아프든지 영혼에 생채기가 나든지, 초대하지 않아도 어느 날 문득 찾아오는 고통은 피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 삶은 오로지 고통만이 존재하는 힘겨운 세상뿐인가? 아무런 희망도 없이 그저 주어지는 대로 감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단 말인가?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그 해결 방법을 제시하셨다. 내게 주어진 조건과 환경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겪고 있는 ‘아픔’이란 삶은, 다생겁래 심혈을 기울여 만든 바로 나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더 나은 삶을 위한 노력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나의 능력이 가능한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결코 해내지 못할 일을 가지고 괴로워하거나 집착하진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한계는 바로 거기까지이기 때문이다.
“난 평생 결정적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하길 바랐다. 그러나 지금 돌아보니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이 말은 70여 년에 걸쳐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애썼던 사진작가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임종을 앞두고 한 말이다.
그는 때와 장소만 밝힌 채 제목 없는 사진 단 250 점만 남긴 작가로도 유명하다.
살다 보면 내 삶이 못마땅할 때가 있다. 내가 원한 삶은 이게 아니었는데, 의지와 상관없이 엉뚱한 데로 잘못 가고 있다고 투덜댈 때가 있다. 그러나 잠시 앉아 깊이 생각해 보라. 지금 이 모든 상황들은 결국 내가 그 ‘결정적인 순간’을 찾기 위해 헤매가 만든 결과물인 것이다. 다시 말해 아픔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지금의 내 인생은, 내가 그토록 행복하기 위해 아픔을 견디고 이겨낸 과정들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다.
계곡 옆에는 이름 모를 들꽃들이 지천이다. 금강송 숲엔 산새들의 합창 소리로 떠들썩하다. 하늘엔 흰 구름 몇 조각 흘러가고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순간이다. 허리 치료 차 자주 오가는 7번 국도는 내 출가할 때의 첫 마음을 챙겨보는 인생의 보너스이다. 내 인생에 결정적인 순간은 따로 없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우며 찬란한 결정적인 순간이다. 너무 앞만 보고 달리느라 ‘지금’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가? 아픔이 주는 통증으로 인해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순간’의 행복을 잊고 사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기다리는 행복한 삶이란 사실 항상 곁에 존재하고 있다. 다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다. 그러니 그 ‘알아차림’은 순순히 오지 않는다. 반드시 아픔을 동반한다. 응급실에 누워봐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되듯이,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아픔의 뒷면이 알고 보니 행복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픈 것이 고맙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한다. 살아 있으니까 아픈 것이다.
《눈먼 보리와 도둑고양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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